오늘은 서울지역탐방 입니다
거리가 먼 관계로 평소 보다 30분 일찍 7시 정시로 대구 법원을 출발합니다.
반갑습니다 흑표곽순태 입니다 ^^
흑표는 집에서 4시 30분에 기상하여
대구 법원을 향해 열심히 구마고속도로 를 달려 도착하니까 6시 28분 입니다
서라벌고속관광 김동기 기사님께서 오늘
도 변함없이 회원님들께서 쾌적하고 편안한 답사여행이 될수있도록
해주실것입니다
45분의 소중한. 회원님들을 모시고 서라벌관광차는 부드러운 소리를 내면서 출발합니다
박병선회장님의 인사말씀
김재원 원장님께서 오늘 일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진종우(호는약초)선생님께서 이은하셈소개로 첫방문하였습니다
안자숙님께서도 첫방문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임삼조님의 첫방문에 감사드립니다
수나선생님 첫답사 참석에 감사드립니다
구정숙선생님 답사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변기수님 오래간만에 잊지않고 참석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 회원님 들을 챙겨주실 박경훈 부회장겸 총무님 이십니다
박원숙선생님 답사에 참석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강보경님 서울답사 참석해 주셔서 감사 말씀드립니다
추풍령휴게소 에서 15분간 휴식
*비구니가 돼야 했던 비운의 단종비*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 (定順王后 宋氏, 1440년 ~ 1521년)
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애절하고도 강인한 삶을 살았던 왕비 중 한 명입니다.
조선(朝鮮)영조 35년 왕후(王侯)가
세상(世上)을 뜬지 3년이 되어
새로 왕후(王侯)를 뽑고자 하였다.
온 나라에서 맵시있고 총명하고
지혜로운 처녀 20명이 뽑혀
간택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이 중에 서울 남산골 김한구의
열다섯살된 딸도 있었다.
드디어 간택시험이 시작되었다.
자리에 앉으라는 임금의 분부에 따라
처녀들은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방석을 찾아 앉았다.
그런데 김씨 처녀만은 방석을 살짝 밀어놓고 그 옆에 살포시 앉는 것이었다.
임금이 하도 이상하여 그 이유를 물었더니"자식이 어찌 가친 존함이
씌여 있는 방석을 깔고 앉을 수
있으오리까?"라고 대답을 했다.
임금이 문제를 내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깊은 것은 무엇인가?
동해바다 이옵니다.
서해바다 이옵니다.
남해바다 이옵니다. 하는데...!!!
김씨 처녀만은 "사람의 마음 속이
제일 깊은 줄로 아옵니다."
어찌하여 그러는고?
"네, 아무리 바다가 깊다 해도
그 깊이를 잴 수가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 무엇 보다도 깊어
그 깊이를 잴 수가 없사옵니다."
이어 다른 문제를 또 내었는데,
이 세상에서 무슨 꽃이 제일 좋은고?
네, 복사 꽃이옵니다.
모란 꽃이옵니다.
양귀비 꽃이옵니다.
그런데 또 김씨 처녀만은
"네, 목화 꽃이 제일 좋은 줄로 아뢰옵니다."
그건 어이하여 그런 것인고?
"다른 꽃들은 잠깐 피었을 때는
보기가 좋사오나,
목화꽃은 나중에 솜과 천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니
그 어찌 제일 좋은 꽃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어서 세번째 질문을 하였다.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개는
무슨 고개인고?
묘향산 고개지요.
한라산 고개이옵니다.
백두산 고개가 제일 높지요.
이번에도 김씨 처녀만은
또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보리고개가
제일 높은 고개이옵니다.
보리고개는 산의 고개도 아닌데
어이하여 제일 높다 하는고?
농사 짓는 농부들은
보리 이삭이 여물기도 전에
묵은 해 식량이 다 떨어지는 때가
살기에 가장 어려운 때입니다.
그래서 보리고개는 세상에서
가장 넘기 어려운 고개라고
할 수 있지요.
이에 임금은 매우 감탄하였다.
이리하여 김씨 처녀는 그날 간택시험에서 장원으로 뽑혀
15세 나이에 왕후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정순왕후''이다.
이렇게 하여 "보리고개가
제일 높다"라는 속담이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1440년(세종22년)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태어난 송씨는 수양대군(세조)의 계유정난으로 인해 남편을 잃고
왕비에서 노비로, 다시 평민으로 강등당하며 82세라는 천수를 누릴 때까지,
그녀의 삶은 조선 왕조의 잔혹한 정치사와 궤를 같이합니다.
어린 나이 15세(1454년 단종2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상왕비(의덕대비)가 되었습니다.
이후 1457년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하면서 단종은 영월로 유배되었고, 정순왕후 역시 관비(노비)로 신분이 급강하했습니다.
세조는 그녀를 신수근(신숙주의 동생) 에게 노비로 주려 했으나, 정순왕후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세조도 감히 아무도 그녀를 노비로 부리지 못하도록 지시했고,
동대문 밖 정업원(淨業院) 근처 초가집에서 시녀들이 동냥해 온 곡식과 염색 일(자줏빛 염색)을 하며 평생을 청초하게 버텨냈습니다.
그녀는 꽃다운 나이에 왕비가 되었으나, 수양대군(세조)의 찬탈로 인해 하루아침에 노비의 신분으로 추락했고,
이후 60여 년을 홀로 슬픔을 삼키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여산 송씨 가문의 규수로, 단종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받았으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혼인한 지 불과 1년 만인 1455년, 수양대군이 압박을 가해 단종이 왕위를 물려주게 되면서 송씨 역시 왕비에서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물러앉게 됩니다.
1457년,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이때 정순왕후 역시 부인(夫人)으로 강등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한양의 청계천 영도교 에서 나눈 이별은 두 사람의 영원한 마지막 만남이 되었습니다.
홀로 남겨진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정업원(현재의 청룡사 자리)에 머물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단종이 있는 동쪽(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했다고 하여 이 봉우리를 '동망봉'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해 10월, 단종은 영월에서 17세의 나이로 끝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단종이 사사된 후, 정순왕후는 신분이 신하들의 가노(노비)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세조는 그녀에게 공신들의 노비로 가라는 명을 내렸으나, 차마 왕비였던 이를 사노비로 부릴 수 없었던 신하들은 아무도 그녀를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세조는 그녀를 신분만 노비로 하되, 아무도 부릴 수 없도록 '정업원'에서 지내게 조치했습니다.
세조가 내리는 곡식과 대궐의 보조를 "원수의 양식을 먹을 수 없다"며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대신 정업원 근처 샘물(紫지동 샘)에서 옷감을 자주색으로 염색하는 일을 하며 스스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주변의 여인들이 그녀의 가련한 처지를 보고 몰래 음식을 가져다주며 도왔다고 전해집니다.
그녀는 단종이 세상을 떠난 후 무려 64년이라는 긴 세월을 홀로 버텨냈습니다.
단종을 죽인 세조, 그의 아들 예종, 손자 성종, 그리고 연산군을 거쳐 중종에 이르기까지 다섯 명의 왕이 바뀌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장수인 82세(1521년, 중종 16년)까지 눈물로 삶을 이어가다 마침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녀의 유언은 단종 임금의 곁에 묻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처지가 처지였던 만큼, 대군의 부인 예우로 성종의 누이인 명숙공주 묘역(현재의 남양주) 근처에 소박하게 묻혔습니다.
그로부터 약 180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년),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면서 그녀 역시 정순왕후(定順王后)'라는 시호를 받고 왕비로 복위되었습니다.
그녀의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사릉입니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고 그리워했다는 의미에서 '생각할 사(思)' 자를 썼습니다.
사릉에 있는 소나무들이 신기하게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능(장릉)이 있는 동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자란다는 애틋한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고결하면서도 꼿꼿하게 자존심을 지켰던 정순왕후의 삶은 조선 왕실 역사상 가장 애절한 이야기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망산길 65 (숭인동)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청룡사 입니다.
고려 태조 5년(922년) 도선국사의 유언에 따라 태조 왕건의 명으로 창건되었습니다.
풍수지리상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하는 낙산 동쪽 산등성이에 자리 잡았다고 하여 '청룡사'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영월로 유배되자,
그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평생 머무르며 단종의 안녕을 빌고 평생을 보낸 정업원(淨業院) 터 이기도 합니다.
사찰 인근에는 정순왕후가 단종을 그리워하며 매일 올랐다는 '동망봉(東望山)'이 있으며,
경내에는 영조가 정순왕후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친필을 내려 세운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비석과 비각이 남아 있습니다.
이대목에서
정업원구기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이자 역사 유적지(유형문화재 제5호)입니다.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애달픈 삶과 슬픈 역사가 깃든 곳으로, '정업원의 옛 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순왕후의 유배와 정업원: 수양대군(세조)이 왕위를 찬탈하면서 단종은 영월로 유배되었고,
정순왕후는 궁에서 쫓겨나 동대문 밖 동망봉 근처에 있는 비구니 여승방인
정업원에 머물렀습니다.
정순왕후는 이곳에 거처하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단종이 유배된 영월 쪽을 바라보며 그의 안녕을 빌고 통곡했다고 전해집니다.
단종이 승하한 후에도 이곳에서 평생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영조(英祖)는 이 비극적인 역사와 정순왕후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섰습니다.
영조 47년에 영조는 정업원 터를 찾아 친필로 글씨를 써서 비석을 (비석의 건립 (1771년)세우게 했습니다.
비석에 새겨진 글귀 앞면
정업원구기 정업원의 옛 터
뒷면(음기)
황조 정미년(단종 5년, 1457년)에 신비(정순왕후)의 나이 26세였는데, 지금 345년이 지나 내 나이 또한 눈물이 내린다. 그 옛 터에 글을 쓴다.
(영조가 과거를 회상하며 깊은 슬픔과 추모의 감정을 담아 적은 것입니다.)
현재 정업원구기는 종로구 창신동의 청룡사(靑龍사) 경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며,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작은비각 (정업원구기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현판 비각에는 영조가 직접 쓴
(전봉후암 매의심한)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내용은
"앞 봉우리(동망봉)와 뒤 바위(낙산)를 보니 매번 마음이 서늘해진다"
라는 뜻으로 정순왕후의 슬픈 처지를 애도한 글입니다.
조선 왕실의 비극적인 역사와 영조의 효심·추모 성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지입니다.
*동관왕묘(東關王廟)*
조선 시대의 사당으로, 흔히 '동묘(東廟)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 삼국시대의 촉나라 장수인 관우(關羽)를 신격화하여 그의 위패를 모신 관왕묘 중 하나입니다.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군대 사이에 관우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명나라의 왕들은 관우의 신령이 자신들을 도왔다고 믿었고,
명나라 신종(만력제)이 친필 현판과 건립 비용을 보내오면서 조선 조정에 건립을 요청했습니다.
선조 32년(1599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선조 34년(1601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에는 사방에 관왕묘가 세워졌으나(동묘, 서묘, 남묘, 북묘), 현재는 동묘가 가장 규모가 크고 잘 보존되어 있어 보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동관왕묘는 일반적인 조선의 전통 건축물과 달리 중국식 건축 양식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조선식 목조 건축과 달리 외벽을 두꺼운 벽돌(전돌)로 쌓아 올렸습니다.
앞뒤로 방을 배치한 구조로, 지붕이 정(丁)자 모양을 띄거나 측면 벽면까지 기와가 내려오는 등 중국 사당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내부에는 관우의 목조 상과 그의 부하 장수들의 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동묘 벼룩시장: 오늘날 동묘 주변은 구제 옷, 골동품, 중고 물품을 판매하는 대규모 '동묘 벼룩시장(황학동 풍물시장 연계)'으로 변모하여, 젊은 세대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 영도교 *
영도교(永渡橋)는 서울 청계천의 17번째 다리로, 서울 종로구 숭인동·창신동과 중구 황학동 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조선 시대부터 존재했던 유서 깊은 다리이며,
특히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달픈 이별 이야기가 깃든 곳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초기의 원래 이름은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였습니다. 흥인지문(동대문)을 나와 왕십리, 뚝섬, 광나루 등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양녕대군이 폐세자되어 귀양을 갈 때도 이 다리를 건넜다고 전해집니다.
성종 때 주변 사찰의 승려들을 동원해 다리를 튼튼한 돌다리로 고쳐 지었고, 성종이 직접 '영도교(永渡橋)' 라는 글자를 써서 내렸습니다.
1457년,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던 단종이 부인인 정순왕후와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나눈 곳이 바로 이다리 입니다.
두 사람이 이곳에서 헤어진 후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영영 이별하였다고 하여, 백성들 사이에서 '
영이별다리', 영영건넌다리 로 불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를 한자화하여 '영도교(永渡橋)'가 되었다는 전설도 함께 전해집니다.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개 공사로 인해 완전히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었습니다.
현재의 다리는 2005년 청계천 복원 사업을 통해 현대적인 콘크리트 구조물로 재건된 것입니다.
옛 돌다리의 원형은 아니지만 그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해 같은 자리에 같은 이름으로 세워졌습니다.
영도교가 있는 종로·황학동 일대는 풍물시장과 동묘 벼룩시장, 주방거리 등이 인접해 있어 유동인구가 많고 활기찬 분위기를 띱니다.
조선 시대 영도교 인근에는 여인들만 출입하여 채소를 사고팔던 '여인시장'이 있었는데, 이곳의 여인들이 궁에서 쫓겨나 어렵게 생계를 잇던 정순왕후를 몰래 도왔다는 따뜻한 일화도 전해 내려옵니다.
매년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사랑을 기리는 다양한 문화 행사가 영도교 주변에서 개최되기도 합니다.
즐거운 식사시간 입니다^^
*비우당(庇雨堂)*
비우당은 겨우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 였던 외재 이직과 그의 외손자인 지봉 이수광이 살았던 유서 깊은 생가터 입니다.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낙산공원 인근)에 복원되어 있으며, 소박함과 청렴함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입니다.
비우당 이직의 집
원래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청백리였던 우의정 이직(李稷)이 지은 집이었습니다.
이직의 뒤를 이어 이 집에는 조선 초의 또 다른 전설적인 청백리, 아명 유관(柳寬) 정승이 살게 되었습니다.
유관은 정승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집이 너무 가난하고 허름하여, 비가 오면 방 안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비를 피해야 했습니다.
이때 유관 정승이 아내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이 비를 어떻게 견디겠소?
라고 농담을 던졌고, 아내는 우산 없는 사람은 다른 대책이 있겠지요 라고 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비우당'의 명명 (이수광): 훗날 유관의 외손자 계열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식 저서인 《지봉유설》을 지은 지봉 이수광(李粹光)이 이 집을 중건하면서, 조상들의 청렴한 뜻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공식적으로 비우당(비를 가리는 집)이라 지었습니다.
이수광은 이곳에서 《지봉유설》을 저술하였습니다.
자지동샘 (紫朱洞泉): 비우당 바로 옆에는 바위 틈에서 물이 나오는 샘이 있습니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떠난 후, 남겨진 정순왕후 송씨가 동대문 밖 정업원에 머물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염색 일을 했는데, 이때 이 샘물에 천을 헹구면 신기하게도 저절로 자줏빛 물이 들었다고 하여 '자지동샘'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자지동샘
*청룡사*
낙산 청룡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서울 도심 속 낙산(동망산) 자락에 위치한 비구니 사찰로, 조선 왕실의 애달픈 역사가 깃든 곳입니다.
922년(고려 태조 5년) 도선국사의 유언에 따라 태조 왕건의 어명으로 창건되었습니다.
풍수지리상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하는 산등성이에 지어졌다 하여 청룡사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정순왕후와 정업원(淨業院):
조선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단종과 이별한 후, 평생 머무르며 군부인들과 함께 옷을 염색하는 일(자줏동샘)을 하며 삶을 보낸 역사적 공간입니다.
한때 왕실 여인들이 출가해 머무는 '정업원'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영조의 친필 비석: 영조는 정순왕후의 애달픈 삶을 위로하기 위해 이곳에 '정업원구기(淨業원舊基)'라는 친필 글씨를 내렸으며,
당시 세워진 비석과 비각이 현재도 사찰 경내에 남아 있습니다.
순조 때 다시 원래 이름인 청룡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청룡사 에서 82세 까지 정순황후가 주지로 비구니 사찰인 정업원(현 청룡사) 에 머물며 출가했을 때 받은 법명은 허경(虛鏡)입니다.
'비어 있는 거울'이라는 뜻의 법명처럼, 정순왕후는 평생을 정업원 뒷산(지금의 동망봉)에 올라 단종이 유배된 영월 쪽을 바라보며 그의 명복을 빌고 슬픔을 달랬다고 전해집니다.
영조의친필
노승석원장님께서. 수박찬조 해주셔서
시원하게 잘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