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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차한잔의 철학

작성자김재원|작성시간20.02.04|조회수461 목록 댓글 0


차 한잔의 철학

박문현(동의대명예교수)

 

프롤로그

 

직장에서 정년퇴직 후 그동안 미뤄뒀던 숙제를 해결할 요량으로 중국에 간 적이 있다. 항주(杭州)에 있는 절강(浙江)대학에 객좌(客座)교수로 자리를 잡고 연구를 시작했으나 일은 별 진척이 없었다. 마침 캠퍼스가 서호(西湖) 부근에 있어 날마다호수 주위를 산책하며 를 즐겨 마셨다. 절강대학은 차에 대한 연구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어 우리나라 유학생도 꽤 많다. 항주는 용정차나 황산모봉차 등 가까운 지역에서 유명한 차가 많이 생산되기에 차에 대한 엑스포나 학회가 자주 열린다. 내가 항주에 있는 동안 중국국제차문화연구회에서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는데 여기에 나는 차문화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을 몇 꼭지로 나누어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서 써본다.

1.차문화와 주역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불교인이나 일부 매니아들 중심으로 기호품의 하나로 차문화가 형성 되어 있으나 일본이나 중국은 다반사(茶飯事)라는 말과 같이 온 국민들의 음식문화의 하나로 정착되어 있다. 나는 술보다 차마시기를 즐긴다. 오랜 시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하노라면 머리가 멍해지고 입이 마르며 온몸이 뒤틀리기도 한다. 이럴 때는 차를 마신다. 이러다 보니 나의 생활 가운데 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전공분야는 동아시아 사상인데 그 중에서도 양생사상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 터라 재직하던 학교의 철학과 대학원에 국내에선 처음으로 사상전공 석박사과정을 마련했다. 이 안에는 다도와 고전’, ‘다도와 예술’, ‘다도와 문화같은 과목도 넣었다.

동아시아 사상의 주요 분야는 유가와 불가와 도가이다. 이 삼가(三家)는 차문화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차문화에도 여러 갈래가 있지만 어떠한 유파도 이 세 사상과 관련을 맺고 있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유파가 어느 사상에 속한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먼저 유가는 차로써 도를 행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유가의 차인들은 차의 본성에서 영감을 얻고, 차를 마시면서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기를 바로세움으로써 남을 배려할 수 있고 나아가서 치국 평천하의 길에 나설 수 있다고 한다.

도가는 인간들이 자연의 이치에 따라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 ()가 나오는 곳은 느리고 비어있으며 고요한 곳이라고 하는 노자의 사상에서 차의 자연성과 상통함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차문화의 허정염담(虛靜恬淡)의 정신이 확립되었다. 도가의 은일(隱逸)의 정신 역시 차문화의 정신세계를 넓혀 주었다.

불가의 선종은 차문화의 흥성과 발전에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선불교는 차의 재배, 차 마시는 형식 및 차문화의 미학적 경지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특히 중국의 차문화가 한국과 일본에 전파되는데 그 공이 크다. 품명(品茗)의 중요성에 대해 선불교는 유가와 도가에 비길 수 없는 역할을 했다. ‘끽다거(喫茶去)’, 이 한 마디의 선어(禪語)는 다선일미(茶禪一味)의 다도의 정신세계를 개괄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근본사상인 유도는 차문화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해왔고 그 중에서도 주역의 사상이 차문화의 정신적 지주가 됨을 말할 수 있다. 특히 국이 여러 식재료가 어울려 맛을 내듯 주역의 화해(和諧)정신이 차문화에 내재되어 차를 도()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는 것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주역은 우주의 끝없는 변화를 태극으로 부호화해서 나타내고 이것을 다시 음양의 양의(兩儀)와 사상(四象)과 팔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팔괘를 중첩해서 64괘를 이루고, 이것으로써 천지 만물과 인간의 모든 일을 연계해서 설명하고 있다.

다경(茶經)’을 써서 다성(茶聖)으로 불리우는 당나라의 육우(陸羽)는 그의 성명을 주역에서 따왔다. 육우는 어릴 때 어떤 승려가 강가에서 데려와 길렀기에 그의 정확한 성도 이름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주역을 좋아하였기에 주역으로 점을 쳐서 성명을 찾기로 했다. 점괘는 수산건(水山蹇) 이 나왔으나 건괘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수산건괘의 상육효를 변효로 하여 지괘(之卦)인 풍산점(風山漸) 를 택했다.

()괘는 바람 혹은 나무를 상징하는 손()괘가 위에 있고 산을 상징하는 간()괘가 아래에 있는 괘로 천천히 날아 올라가는 점진의 괘이다. 그는 기러기들이 공중으로 높이 날아가도다. 그 깃털이 의전(儀典)을 위해 쓸 만하도다. 길하다.[鴻漸于陸, 其羽可用爲儀, ]”는 상구효에서 그의 이름을 찾았다. 육우는 ()’을 성으로 하고 ()’를 이름으로 뽑았다. 그리고 큰 기러기가 나아가는 홍점(鴻漸)’을 그의 자()로 정했다. 상효는 흩어졌던 기러기들이 모여 대열을 짓고 날아올라 하늘 높이 비상하여 태양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상으로서 점괘 여섯 효 가운데 가장 길하고 또 다른 괘의 평범한 길효 보다 훨씬 더 길하다. 빌헬름이 이 효를 완벽한 모범적 인간의 삶은 그를 전범(典範)으로 우러러보는 지상의 인간들에게 밝은 빛이다라고 주석한 것은 오늘날까지도 동아시아 차문화의 밝은 빛으로 존재하는 육우를 가리켜 한 말로 들리기도 한다.

2. 숨쉬기를 고르게 하듯

금요일까지 책과 컴퓨터에 묻혀 있다 토요일이 되면 즐겁다. 학회 일이나 다른 행사가 있을 때를 빼곤 거의 매주 산사에 간다. 주례를 담당할 경우를 제외하곤 친지의 결혼식도 인편에 축의금만 전달한다. 통도사 산문을 들어설 때의 그 후련함. 내세의 천상으로 오르는 그 해방감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하며 영축산 자락의 암자로 뱀이 그 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 쑥 들어온다.

나의 소실이 방을 비워놓고 반가이 맞이한다. 먼저 소실과의 워밍업. 아궁이의 그 큰 입에 가득 불을 물린다. 그리고는 물 한통 받아와 전기포트에 넣고 끓인다. 차탁을 끌어 방 가운데 놓고 차를 꺼내 다관에 넣는 그 짧은 시간에 물은 성급하게 끓는다. 이 때의 차 한 잔은 12일 동안 나와 동거할 또 하나의 소실이 된다. 물론 우리가 조선조의 풍속화에서 흔히 보는 차동이 풍로에 돌솥을 올려놓고 부채질하는 정취가 전기기구의 편리함에 묻혀 버린게 아쉽기는 하다.

자연의 원리를 통해 인간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주역의 철학을 인생의 지침으로 여긴 육우는 다경차의 그릇에서 주역을 인용하여 화해(和諧)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다구 중의 하나인 풍로의 다리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새겼다.

풍로는 보통 세 개의 다리가 있는데 거기에 옛 글자 21자를 적는다. 한쪽 다리에는 물은 위, 바람은 아래, 불은 중간[坎上巽下離於中]이라고 적고, 또 한쪽 다리에는 몸은 오행을 고르게 하여 모든 병을 물리친다[體均五行去百疾]고 쓰며, 나머지 한 다리에는 거룩한 당나라가 오랑캐를 물리친 다음 해에 만들었다[聖唐滅胡明年鑄]라고 쓴다.”

육우는 위와 같이 적고는 물과 바람과 불에 대해서 주역의 괘로 설명한다. 풍로 안에는 둔덕을 만들어 세 개의 칸막이를 설치한다. 그 한 칸막이에는 꿩을 그린다. 꿩은 불을 상징하는 새이기 때문에 불의 괘인 이괘(離卦, )를 그린다. 또 한 칸막이에는 표범을 그린다. 표범은 바람을 일으키는 짐승이기에 바람을 상징하는 손괘(巽卦, )를 그린다. 또 다른 칸막이에는 물고기를 그린다. 물고기는 물속에 사는 동물이기에 감괘(坎卦, )를 그린다. 손괘는 바람을, 이괘는 불을, 감괘는 물을 각각 주재한다. 바람은 불을 일으킬 수 있고 불은 물을 끓일 수 있으므로 이와 같이 세 개의 괘를 갖추는 것이다.

이것은 물과 불과 바람이 화해(和諧)의 상태에 이를 때 간이 맞는 차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차는 다만 물을 끓여 간맞게 하여 마시면 되기 때문이다. 물을 끓인다는 것은 물과 불이 만나게 하는 것이다. 물과 불이 조화롭게 만나기 위해서는 불의 조절 곧 화후(火候)가 중요하다. 바람은 불을 조절하는 화후를 상징한다. 화후는 원래 도교의 금단(金丹)을 제조할 때 쓰는 용어이다. 위백양(魏伯陽)이 쓴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에서는 금단을 만들기 위한 솥은 건괘(乾卦)로 하고 아래에 있는 화로는 곤괘(坤卦)로 한다. 그리고 솥에 넣는 약재는 감()과 리()로 한다. 불을 때는 것을 화후라 하여 64괘 중 건곤감리네 괘를 뺀 60괘로 한다. 화후의 비중은 이렇게 큰 것이다. 화후를 잘 해야 약탕기[]속의 물[]과 불[] 두 기()가 잘 조화되어서 중()을 얻게 된다.

위백양은 이러한 우주관을 바탕으로 하여 종래의 내단(內丹)과 외단(外丹)의 이론을 종합했다. 이것을 기공(氣功)의 이론으로 말한다면 솥은 인체에, 약물은 음양의 기(), 화후는 호흡과 의념(意念)의 조절에 비길 수 있다. 우리나라 차문화의 중흥조라 할 수 있는 다솔사의 효당 최범술(崔凡述)도 화후를 중시하여 그의 저서인 한국의 다도에서 이렇게 말한다.

물을 끓일 때는 화력이 센 불을 필요로 할 때도 있고 또 화력을 미미하게 잘 보존해야 될 경우도 있다. 이런 점에서 그 화롯불을 보는 것을 화후(火候)라고 하고, 그 화후의 용심(用心)은 차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차를 간수하는 용심이나 법제하는 용심이나, 화후하는 용심은 내면적으로 상호 연결되는 엄격한 형식이다.”

이렇게 보면 육우가 풍로에 물과 불과 바람을 주역의 괘로 그린 것은 단순히 물, , 바람이 차를 끓이는데 중요한 세 가지 요소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불과 바람이 잘 만나야 화후의 조절이 되는 것이므로 불과 바람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주역에서 불과 바람의 관계를 말하는 괘에 화풍정(火風鼎) 가 있는데, 이것은 마침 솥을 말하는 괘이다. 이 괘의 상괘는 리()괘이고 하괘는 손()괘이다. 리는 불을 상징하고 손은 바람 또는 나무를 나타낸다. 불이 나무 위에서 타고, 바람이 이것을 부채질하고 있는 상태로 볼 수 있다. 불은 나무가 있어야 타오를 수 있고, 타오르는 불은 바람을 얻으면 더욱 그 기세를 펼 수 있다.

또 이 괘를 다른 각도로 풀이하면 상괘 리는 불, 불은 광명이니 현명함을 의미하고, 하괘 손은 바람, 바람은 좇는 습성이 있어서 순종과 겸손을 의미한다. 윗 사람의 현명함에 아랫 사람들은 겸손한 태도로 순종하는 모습이다. 상하의 마음이 서로 호응하고 협력하는 화해의 상태를 보인다. 이러한 일련의 호응하고 협력하는 화해의 상태를 솥[]으로 표현한 것은 다사(茶事)와 관련 지워 생각해 볼 때 의미 있는 것이다.

3. 물과 불이 만나 천국이 되고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요즘 부쩍 커피전문점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나는 바닷가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것도 즐긴다. 그런데 녹차를 마실 수 있는 찻집은 찾기 힘든다. 찻집이 있다 하더라도 우중충한 인테리어에다 고풍이 나는 온갖 잡동사니를 늘어놓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대부분이다. 서울의 명동이나 인사동 등에 녹차를 생산하는 대기업이 차린 찻집같이 현대적 감각으로 꾸민 티 하우스가 여러 곳에 생겼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포은 정몽주는 성리학자로 주역을 탐독하면서 차를 애용했다. 그가 쓴 시 가운데 주역을 읽으며[讀易]’라는 시가 있는데 이것은 그가 차를 끓이면서 쓴 시이다.

 

돌솥에 차가 끓기 시작하니 / 풍로에는 불이 빨갛구나. / ()과 리()는 천지의 작용이니 / 이것의 의미는 무궁하도다. / 내 마음에 건곤(乾坤)의 이치를 품고서 학문을 한지 36. / 눈앞에 있는 주역이전의 자연을 인식하고서 / 복희씨를 생각하니 그의 자취가 이미 나열되어 있네.”

포은은 차를 끓이면서 불에 의해 돌솥이 데워지면서 물이 끓는 걸 본다. 풍로의 불에 의해 물이 끓는 걸 보고 그는 주역’ 64괘의 하이라이트인 수화기제(水火旣濟) 를 보았다. 머릿속에만 맴돌던 수화기제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8괘의 물상에 대하여 현대 중국의 저명한 철학자 풍우란(馮友蘭)우주 안에 있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천지(天地)이고, 하늘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일()이며, 지상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것은 산()이고, 인생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수()이다. 옛사람이 이 여덟 가지로 우주의 근원을 삼았다. 그래서 이를 8괘로 배치하였다고 했다.

포은은 8괘의 수화를 돌솥의 물과 풍로의 불에서 보고 주역설괘전(說卦傳)에서 물과 불이 서로 해치지 않는다[水火不相射]’고 한 말을 머리에 떠올린 것이다. 물과 불은 오행에서는 수극화(水克火)’로 상극으로 보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서로 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돕는 관계로 본다.

주역에서는 물이 위에 있고 불이 아래에 있는 괘를 수화기제라 하여 완결과 완성을 상징한다. 물이 위에 있으므로 그 기운은 아래로 향하고 있고 불이 밑에 있으므로 그 기운은 위를 지향하고 있다. 이것이 한의학에서도 우리 몸의 이상적 상태로 보는 수승화강(水昇火降)’이다. 물과 불은 서로 만나게 되고 이 속의 모든 것은 익게 된다. 밥이 되기도 한다. ‘기제괘의 형태는 모든 효가 하나하나 정당한 위치에 있다. 모든 효가 바른 위치에서 상,하괘가 서로 호응하는 상태를 가진 것은 주역’ 64괘 가운데 이 기제괘밖에 없다. 나는 이 기제괘를 설명할 때 불교의 바라밀(paramita)에 비유한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갔을 때, 곧 수행의 완결이 바라밀이 아닌가. 극락이요 천국인 것이다.

포은은 풍로의 붉은 불과 돌솥의 물이 끓는 것을 보고 주역의 원리를 터득한 것이다. 그런데 주역을 만든 복희씨는 이 완성의 괘를 64괘의 마지막 64번째에 배치하지 않고 그 앞인 63번째에 배치했다. 완성은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64번째에 화수미제(火水未濟) 를 두었다. 물과 불은 또 다른 만남을 기다리는 것이다.

포은은 즐겨 듣는 것은 돌솥에 찻물 끓는 소리[愛聽石鼎松風聲]”라고 읊었다. 이 물 끓는 소리는 차인들이 매우 흥미 있고 운치 있게 느끼는 것으로 이를 송풍(松風)이라고도 쓰고 회우(檜雨)라고도 한다.

적당한 화력을 받은 솥 안의 물 끓는 소리는 매우 고요하면서도 맑고 그 무엇인가 우리 정신 자체 내의 갖가지 음악적인 천뢰(天籟)의 주악을 듣는 경지라고 최범술은 표현한다. 천뢰는 자연이 내는 피리소리이다. ‘장자(莊子)’에는 너는 인뢰(人籟)는 들으나 지뢰(地籟)는 듣지 못하였고, 너는 지뢰는 들으나 천뢰는 듣지 못하였으리라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천뢰는 장자가 우리에게 제시한 최고의 정신 경지 혹은 도()의 메타포이다.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않은 사람은 하늘의 피리 소리를 이해하기 힘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감각을 넘어서 있으며 언어를 통해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천뢰는 우주의 율동과 생명의 다양한 표현과 소리 그대로를 긍정하고 향유하는 심미적인 최고 정신 경계의 은유이다.

육우 역시 찻솥에 물을 붓고 끓이는 것에 대해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그는 다경에서 물 끓는 모양이 마치 물고기의 눈알 같은 기포가 생기고 작은 소리가 나는 상태를 첫 번째 끓음이라 한다. 솥의 가장자리에 샘물이 솟구치듯 하고 구슬같이 물방울이 올라올 때를 두 번째 끓음이라 한다. 물기포가 성난 파도처럼 요동치고 북치는 듯한 소리가 나는 상태를 세 번째 끓음이라 한다고 말한다. 단순하게 생각되는 찻물 끓이는 일을 육우 역시 자연의 조화로운 연단(鍊丹)으로 본다.

효당은 물 끓는 기운이 가장 알맞게 들어맞았을 경우를 경숙(經熟)이라 한다. 경숙은 끓여진 물이 뜸이 잘 돌았다또는 끓는데 있어서 물이 익게 끓여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맹물의 분을 넘은 순숙(純熟)을 거쳐 순숙된 탕물을 더욱 끓인 결숙(結熟) 이후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찻물을 끓이는 데 있어 결숙까지가 음양이 동탕하는 수화기제괘에 해당한다면 뜸이 잘 돌아 정()의 상태에 들어간 경숙은 물과 불이 위치를 바꿔 새로운 출발을 기다리는 화수미제(火水未濟)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 미제괘주역64괘를 일단 끝낸다.

 

4.다시 일어서는 생명력

죽음은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것이다. 혼자가 되고자 늘 산사에 간다. 죽음이 두려워 죽음과 친하고자 혼자되는 연습을 한다. 종교는 그리고 불교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우리를 애써 설득한다. 나는 철학도로서 환생의 믿음을 실증하려고 노력해 왔다.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환생 혹은 윤회를 확신하느냐고. ‘객관화, 일반화, 합리화라는 학문적인 진리의 엄밀성으로 말하기에는 아직도 자신이 없다. 그러면서도 차에서 환생을 보며 죽음의 두려움을 걷어내려 애쓴다.

발효차가 아닌 덖음차를 다관에 넣고 알맞게 식힌 물을 부어 2-3분 후 다관을 들여다보면 작설(雀舌) 같은 찻잎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흑갈색으로 말라 비틀어져 있던 찻잎이 연두색으로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곧 중생(重生)이요 부활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봄에 따서 만든 차가 죽었는가 싶었는데 해를 넘기고도 처음 봄에 땄을 때의 그 모습 그 빛깔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이것은 보이차나 우롱차가 아닌 우리나라 덖음차나 용정차와 같은 녹차계열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이 아니면 종교로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며, 불교는 환생이 있기에 인과응보의 고리가 믿음을 갖게 한다. ‘주역은 생명의 끊임없는 창달(創達)과 창화(創化)를 나타낸다. 그 대표적인 괘에 지뢰복(地雷復) 이 있다. ‘복괘는 위에는 곤(), 아래에는 진()괘로 되어 있다. 즉 땅 밑에 우레가 있는 상이니 다섯 음 밑에 하나의 양이 있는 것이다. ‘복괘12개월을 나타내는 소식괘(消息卦)에서는 10월의 곤괘 다음에 위치하며 동지를 나타낸다. 동지는 하나의 양이 처음으로 움직이는 때이다. 소식괘에서 초효에 양이 돌아오는 것은 건괘 4월에서 복괘 11월까지의 7개월 후이다. 이것을 양이 그 길로 되돌아가서 7일 만에 여기에 다시 온다고 하고 복()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차를 우린다는 것은 지뢰복(地雷復) 의 초효 일양(一陽)의 밝은 빛이 다관 속에서 부활하는 것과 같다. 산지박(山地剝) 의 상효의 일양(一陽)이 어둠 속의 중지곤(重地坤) 의 땅속에 묻혔다가 지뢰복으로 다시 나타나듯 녹차가 검은 어둠의 침잠을 거쳐 다시 연두색, 녹색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보면 자연의 신비스러움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을 보면 왜 주역에서 자연의 큰 덕을 생명력[天地之大德曰生]이라고 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일 뿐 만 아니라 끊임없이 그리고 광대한 영역에 걸쳐 만물을 형성한다. 그래서 주역에서는 또 낳고 또 낳음을 일러 역이라 한다[生生之謂易]”고 한 것이다.

당나라 문장가 이태백이 말하기를 옥천사(玉泉寺) ()스님은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얼굴빛이 복숭아꽃 색깔 같다. 이것은 맑은 차향기가 다른 무엇보다 특이하므로 늙어 말라빠진 것을 떨쳐버리고 어린아이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차는 사람을 장수케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차에는 죽어가는 것들을 살려내는 생명력이 충만해 있다. 80노인을 어린 아이같이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만드는 차의 신기(神氣)를 보고 이태백이 감탄한 것이다. ‘주역에서 천지의 큰 덕을 생명력이라고 한 것을 차는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진정한 차인(茶人)의 한 사람으로 뛰어난 서예가였던 추사 김정희는 차를 끓여 한잔하는 순간에 시상(詩想)을 떠올리곤 했다. 그는 초의(草衣)가 보내준 차를 마시며 습기(習氣)를 떨쳐버리고 붓을 들어 대필로 茗禪두 자를 써서 초의에게 보내기도 했다. 추사는 차승 천일(天一)스님에게 그의 차 생활을 기리며 다음과 같은 차시를 써서 보냈다.

 

남산의 선인(仙人)/ 무엇을 먹는가? / 밤마다 산중에서 / 백석차(白石茶)를 끓여 먹으니 / 세인은 그를 일러 / 백석선(白石仙)이라 일컫네. / 한평생 나이는 먹었으나 / 돈은 쓸데 없었네. / 다선(茶仙)의 식후 뱃속은 / 편안하기 한량없어 / 72세 노봉(老峰)/ 폐와 간이 생생하네. / 진정한 조사(祖師)/ 이 곳 남산 남쪽에 있으니 / 나는 길이 멀다 탓하지 않고 / 그를 쫓으리.”

 

추사는 차를 즐겨 마시는 천일스님을 신선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찬양하고 있다. 늙지 않고 오히려 어린 아이의 몸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도교의 수행자들뿐만 아니라 불가의 스님들도 차를 통해 생명의 기운을 기르려 했던 것이다.

북송의 휘종이 쓴 대관다론(大觀茶論)’에서는 차의 순은 작설이나 쌀 알갱이 같이 된 것을 가장 좋은 투품(鬪品)이라 한다. 이것은 이제 막 생겨난 어린 양기이다. ‘복괘에서의 일양(一陽)의 기운과 같다. 또 차를 따는 것은 밤이 어두워져 밝게 되는 새벽 아침으로서 이 시간은 동지의 절기와 같이 하루 중 양의 기운이 막 생성되는 시간, 곧 하나의 빛이 막 움직이는 때이다. 이 때 물의 맛도 담백하고 생기가 충만한 것이다. 이제 막 생겨난 양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동지에는 모든 관문을 닫아걸고 상인이나 여행자들의 통행을 금하여 제후도 나라 안을 순수(巡狩)하지 않는다고 했다. 차를 딸 때도 손톱으로 차순을 끊는다든가 손가락으로 비벼서는 안 되며, 냄새가 배이지 않도록 하고 땀기운이 배이지 않도록 해야 된다고 대관다론에서는 말한다. 이것은 차가 가진 신선하고 맑은 기운, 즉 여린 양기를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5. 찻잔에 매화 한 송이 배 띄우듯

통도사 큰 절의 160년된 홍매가 좋다지만 나는 창건 20년 밖에 안된 작은 암자의 청매를 더 좋아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 내내 그들 매화나무와 같이 살아 정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엔 내가 몇 년 전 언양장에서 사다 심은 것도 있다. 3월 이제 막 산사의 매화들이 피고 있다. 매화가 필 때면 친구와 제자들을 불러 차를 즐긴다. 매화 봉오리를 따서 찻잔에 띄우면 매화는 기지개를 켜듯 팔을 벌리며 향기를 뿜는다.

뜸이 잘 들어 경숙된 찻물을 차를 넣은 다관에 부어 2 · 3분을 기다린다. 그러면 차체(茶體)가 되는 탕수에 차라는 풍미스러운 신기(神氣)가 우러나며 그 물 전체에 퍼지게 되는 데 이것을 차신(茶神)이라 한다. 이 차신과 차체가 잘 인온(氤氳)이 되어야 간이 맞게 된다. 이 간 맞게 된 차야말로 우리의 입안을 상쾌하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차신이란 노자에서 곡신불사(谷神不死)’라 할 때의 골짜기의 신비스러움과 같이 차의 신비스러움을 의미한다. ‘주역에서는 음양작용의 헤아릴 수 없음을 일러 신이라 한다(陰陽不測之謂神)”고 했다. 이 때의 신은 만물을 오묘하게 하는 작용이다. 주자(朱子)는 이것을 오묘하게 헤아리거나 인식할 수 없는 것을 형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물의 기운과 차의 기운이 다관에서 만나 만들어내는 오묘함이 차신이다. 이것은 음기와 양기의 만남이기도 하다. 음기와 양기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그 변화는 헤아릴 수 없으므로 신()이라고 한다. 노자는 도가 나올 때는 그냥 담담할 뿐 그 맛이 없다. (道之出口 淡乎其無味)”고 했다. 도는 곧 무미(無味)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미는 맛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차의 맛은 무미. 그 맛을 헤아릴 수 없는 신()이기 때문이다. 달지도 떫지도 쓰지도 않지만, 달기도 하고 떫기도 하고 쓰기도 하다. 그러므로 처음 녹차를 마시면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한다. 또 차는 현묘하다고 한다. 이것 역시 차의 맛을 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는 도()인 것이다.

찻물과 차의 만남을 주역의 괘로 풀어보자. 차는 오행 가운데 목()에 해당하고 탕()은 수()이다. 그러므로 차는 손()괘이고 물은 감()괘로 풍수환(風水渙) 가 된다. ‘환괘는 바람과 물로 구성된 괘이다. 바람이 물 위에 불면 물결이 흩어지기 때문에 환괘는 흩어지는 이미지이다.

환괘()’이 눈 녹듯이 서서히 녹아 흩어지는 것을 의미하듯 엉킨 문제가 눈 녹듯이 풀리므로 서둘지 말 것을 말한다. 특히 상괘 손()은 바람과 함께 나무도 뜻하므로 환괘는 나무가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이다. 따라서 나무를 타서 공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나무배를 타고 큰 내를 건너는 공을 세운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차가 물과 어우러져 신묘한 작용을 하는 걸 유추할 수 있다. ‘환괘는 바람이 불어 물위를 덮고 있는, 티끌과 여러 가지 어지럽고 지저분한 물건들을 말끔히 쓸어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더러운 것들을 걷어 버리면 물은 다시 맑고 깨끗해지고, 물결을 불러일으키면 정체해서 부패하고 있던 수면에는 다시 생기가 돌게 된다. 이것이 풍수환괘의 모습이다. ‘()’은 날이 새면 어둠이 흩어지고, 봄이 오면 얼음이 풀리는 그러한 상태를 의미한다.

주역’ 64괘중에 이 환괘처럼 속 시원한 해방감에 후우 큰 숨을 내뿜게 하고 밝은 희망에의 의욕으로 가슴 설레게 하는 괘는 없다. ‘환괘는 지루하던 긴 장맛비가 씻은 듯이 개고 먹구름은 사라져 하늘은 다시 바다처럼 푸른데 둥근 보름달이 둥실 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 순간의 심경을 상징한 것이다. 비좁고 답답한 새장 속에 갇혀 있던 학이 그 괴롭던 구속을 벗어나 막 무한대의 창공을 향해 훨훨 날아오르는 순간의 상태를 상징한 것이기도 하다.

차의 신기(神氣)와 참된 수성(水性)이 서로 잘 어울리고 융화된 화해(和諧)의 상태에서 초의는 신령스럽다고 말했다. 무한 절묘함을 말한 것이다. 어떤 스님이 몸소 딴 햇차를 보내준 데 대하여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이 감사하며 쓴 다음 시를 보자.

 

향기로운 차는 오죽(烏竹) 사이에 우거지고 / 잎사귀는 이슬에 젖어있네. / 눈 덮인 산의 나그네 되어 / 이른 아침에 신비로운 차싹을 따네. / 화덕을 돌 여울 위쪽에 차려 놓으니 / 바로 옆에는 붉은 암벽이라네. / 둥글고 네모난 예쁜 모양 / ()처럼 흠도 하나 없네. / 아이 불러 세발솥에 불 지피니 / 차 향기 멀리 퍼지네. / 근심을 씻어 주니 본 모습 드러나고 / 혼미함 가셔 내니 내 자신으로 돌아가네. / 오직 감로수와 같이 / 향기로운 차는 참선하기에 좋은데 / 아 신선(神仙)을 동경하는 친구들이여 / 어찌하여 신선주만 구하려 하는가.”

 

여기서 유종원은 차와 물이 만나 이루어지는 신묘한 작용은 근심을 씻어주고 혼미함을 가셔내기에 신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환괘에서 바람이 불어 더럽고 지저분한 것을 말끔히 씻어내고 학이 창공으로 날아가는 듯한 선경을 상징한다는 것과 다름이 있겠는가?

이제 매화는 찻잔을 건너 저 언덕으로 가고 있다. 내 가슴의 번뇌를 가르고 차는 매화로 피어난다.

6. 자연과 더불어 가 있다면

하루에 몇 번씩 나서는 경내의 산책길에 배꽃이 활짝 핀 것을 앉아서 한참 보다가 처소에 돌아오니 누군가 햇차 한통을 가져다 놨다. ‘우전(雨前)’이라 옅은 연둣빛이 유리다관에서 우러난다. 차 마시는 것도 잊고 겨우 눈을 뜨는 여린잎을 보면서 생명의 신비에 감탄한다. 이것이 앞에서도 말한 지뢰복(地雷復)괘이다. 몇 년 살아 보지도 않은 10대의 소년으로 노자주역을 주석한 왕필(王弼)은 우리 모두 이 여린잎과 같은 영아(嬰兒)의 순수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주역의 변화의 원리 가운데는 본괘의 겉을 벗겨내고 속을 보는 방법이 있다. 이것을 호괘(互卦)라고 한다. 곧 본괘의 두 번째 효, 세 번째 효, 네 번째 효를 하나의 그룹으로 보아 하괘를 만들고 세 번째 효, 네 번째 효, 다섯 번째 효를 다른 그룹으로 보고 상괘를 만든다. 상괘와 하괘가 생기면 호괘 하나가 구성된다. 따라서 차와 찻물이 만나는 풍수환괘 산뢰이(山雷頤) 로 변한다.

이괘(頤卦)’의 괘상은 마치 벌린 입과 같다. 위아래 양효 두 개는 위턱과 아래턱을 상징하고 가운데 있는 음효 네 개는 마치 윗니와 아랫니 같다. 음식은 입 가운데로 들어오기 때문에 입은 기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노력에 따라 입속의 음식을 얻어 자기를 먹여 살리기도 하고, 자신이 잘 먹고 잘 살려면 음식을 절제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 괘를 다도에 비겨서 보면 우리가 차를 입으로 마시는 행위와 차를 마심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효능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음식을 먹어 육체를 기르고 수양을 쌓아 정신을 기른다. 따라서 상전(象傳)에서는 산 아래 우레가 치는 것이 이()니 군자는 언어에 신중하고 음식을 절제한다(象曰 山下有雷 頤 君子以愼言語 節欲食)”고 풀이한다.

물과 찻잎이 만나서 이루어진 차는 군자와 같아 그 성질에는 사기(邪氣)가 없다. 그러므로 차는 우리의 두뇌를 맑게 해주고 우리의 몸을 상쾌하게 해준다. ‘동의보감에도 머리와 눈을 밝히고 이변(利便)하게 하며, 갈증을 덜어주고 잠을 적게 하며 모진 독을 풀어준다고 했다. ‘풍수환(風水渙)’으로 사기가 말끔히 없어진 차는 산뢰이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길러주는 것이다. 다산(茶山)은 그의 차시 약천(藥泉)’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옥우물 뻘은 없고 다만 모래 깔려 있어 / 한 바가지 떠 마시면 찬하(餐霞)인 듯 상쾌하다. / 처음에 돌 틈에서 승장혈(勝漿穴)을 찾았더니 / 마침내 산속의 약 달이는 집 되었네. / 여린 버들 길을 덮어 빗긴 잎이 물에 뜨고 / 이마 닿는 어린 도화 거꾸로 꽃이 폈다. / 담 삭이고 고질 나음 그 공 기록할 만하니 / 틈날 때 벽간차(碧磵茶) 끓이기에 알맞다오.”

 

다산은 체증을 뚫어주는 약효 때문에 늘 차를 마시기도 했는데 이 시에서는 차가 가래를 삭여주고 고질을 낫게함을 말하고 있다. 또 다도가 지향하는 바는 병을 낫게 하고 생명의 기운을 기르는 양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고양하고 덕을 닦는 수양에도 있다. 다사 전반에 걸친 행위는 자신에 대한 반성을 가능하게 하고 나아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예를 표현하는 것이다. 차생활은 의식이나 행위를 통해 인격함양에 도움이 되므로 수신을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차는 마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으나 음차생활 속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더 뜻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차를 달이고 차를 내는 모든 작법 속에는 예()가 있어야 하며 그 예의 속에는 공경의 마음을 갖추어야 한다.

산뢰이괘는 바른 것을 기르는 양정(養正)이 키워드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물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이 바른 것이어야 한다. 몸을 바르게 기르고 정신을 바르게 가다듬는 양형(養形)과 양신(養神)의 차문화는 이렇게 이괘(頤卦)’로 해석될 수 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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