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冬至 : 12.22 (음11.20)동지는 하지와 함께 지일至日의 하나로 겨울이 이른다는 뜻의 절기이다. 일 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양력 12월 22~23일 무렵에 드는데, 올해는 11월 20일이 동짓날이다. 양력으로 동지가 음력 동짓달 초순에 들면 애동지라 하고, 중순에 들면 중동지中冬至, 그믐 무렵에 들면 노동지老冬至라 한다.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또는 작은설이라 한다. 이는 옛 역법상 동지를 설로 지냈던 풍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은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라는 말에 잘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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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억영 [동지풍경] | 동지차례_예천 |
동지에는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는 말처럼 달력을 만들어 나눠주었다. 이는 단오에는 부채를, 동지에는 달력을 주고받는 풍속에서 비롯된 말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궁에 바친다. 나라에서는 이 책에 동문지보(同文之寶)라는 어새를 찍어 백관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오늘날 동지 무렵이 되면 연말연시의 선물로 새해 달력을 주고받는 풍속도 이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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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뿌리기_예천 | |
동짓날의 대표적인 시절 음식은 팥죽이다. 이날 팥죽을 쑤어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려 악귀를 쫓기도 한다. 그러나 동짓날이 음력 11월 10일 안에 드는 애동지라면 아이들에게 나쁘다고 생각하여 팥죽을 쑤지 않는다.
정의=24절후의 스물두 번째 절기. 일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개관=동지(冬至)는 태양이 적도 이남 23.5도의 동지선(남회귀선) 곧 황경(黃經) 270도의 위치에 있을 때이다. 그래서 양력 12월 22일이나 23일 무렵에 든다. 양력으로 동지가 음력 동짓달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中冬至), 그믐 무렵에 들면 노동지(老冬至)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태양력인 동지에다가 태음력을 잇대어 태음태양력으로 세시풍속을 형성시켜 의미를 부여하였다.
민간에서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또는 작은설이라 하였다. 태양의 부활이라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가는 작은설로 대접 하는 것이다. 이 관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해서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라는 말처럼 동지첨치(冬至添齒)의 풍속으로 전하고 있다. 또 동지는 날씨가 춥고 밤이 길어 호랑이가 교미한다고 하여 ‘호랑이장가가는날’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주나라에서는 이날 생명력과 광명이 부활한다고 생각하여 동지를 설로 삼았다. 당나라 역법서(曆法書)인 선명력(宣明曆)에도 동지를 역(曆)의 시작으로 보았다. 『역경(易經)』에도 복괘(復卦)에 해당하는 11월을 자월(子月)이라 해서 동짓달을 일년의 시작으로 삼았다. 동지와 부활이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신라에 이어 고려시대에도 당(唐)의 선명력을 그대로 썼으며, 충선왕 원년(1309)에 와서 원(元)의 수시력(授時曆)으로 바뀔 때까지 선명력을 사용하였다. 이로 보아 충선왕 이전까지는 동지를 설로 지낸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구미(歐美) 각국의 성탄절(크리스마스)도 초기 기독교가 페르시아의 미트라교(Mithraism)의 동지 축제일이나 태양 숭배의 풍속을 이용해서 예수 탄생을 기념하게 한 것이다. 신약성서에도 예수의 탄생 날짜 기록은 없다. 농경민족인 로마인의 농업신인 새턴(Saturn)의 새턴네리아 축제가 12월 21일부터 31일까지 성했고, 그 중 25일이 특히 동지 뒤 태양 부활일로 기념된 날이었다.
궁중풍속=궁중에서는 원단(元旦)과 동지를 가장 으뜸 되는 축일로 생각하여 동짓날 군신(君臣)과 왕세자(王世子)가 모여 잔치를 하는 회례연(會禮宴)을 베풀었다. 해마다 중국에 예물을 갖추어 동지사(冬至使)를 파견하여 이날을 축하하였고, 지방의 관원(官員)들은 임금에게 전문(箋文)을 올려 진하(陳賀)하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궁에 바친다. 나라에서는 이 책에 동문지보(同文之寶)라는 어새를 찍어 백관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달력은 황장력(黃粧曆), 청장력(靑粧曆), 백장력(白粧曆)의 구분이 있고, 관원들은 이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것을 단오에 부채를 주고받는 풍속과 아울러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하였다. 이조(吏曹)에서는 지방 수령들에게 표지가 파란 청장력을 선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달력은 내용이나 효용도에 따라서 많이 다르다. 특히 옛날에는 농경 본위의 사회였던 만큼 24절기 등 때에 맞추어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달력이 요긴하였고, 기재 내용도 그에 맞게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요즈음에도 동지 무렵의 연말연시가 되면 새해 달력을 주고받는 풍속은 여전하다.
황감제(黃柑製)라는 임시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기도 하였는데,『동국세시기』11월조에 제주목에서 귤, 유자, 귤감을 진상하는 일을 적고 있다. 이 귤들을 종묘에 진상하고 신하들에게도 나누어준다. 옛날 탐라의 성주가 이를 바칠 때 치하하는 의미에서 과거를 설치했다. 조선시대에도 이를 답습하여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이고 귤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과거의 이름을 감제(柑製)라 했다. 내의원에서는 소의 다리를 고고 여기에 백강(白薑), 정향(丁香), 계심(桂心), 청밀(淸密) 등을 넣어서 전약(煎藥)을 만들어 진상하였는데, 각 관청에 이를 나누어 주었다. 이 약은 악귀를 물리치고 추위에 몸을 보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동지가 되면 동지하례(冬至賀禮)를 행하며 버선을 선물하는데 이를 동지헌말(冬至獻襪)이라고 한다. 또 종묘에 청어(靑魚)를 천신하는데 경사대부(卿士大夫)의 집에서도 이를 행하였다고 한다.
민간풍속=동짓날이 되어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연못의 수면이 얼어붙어 얼음의 모양이 쟁기로 밭을 갈아놓은 것처럼 된다. 이것을 용갈이[龍耕]이라고 한다. 『동국세시기』 11월 월내조에는 “충청도 홍주 합덕지에 매년 겨울이 되면 얼음의 모양이 용이 땅을 간 것 같이 되는 이상한 변이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언덕 가까운 쪽으로 세로 갈아나간 자취가 있으면 이듬해는 풍년이 들고,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복판을 횡단하여 갈아나가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혹 갈아나간 흔적이 동서남북 아무 데로나 종횡으로 가지런하지 않으면 평년작이 된다고 한다. 농사꾼들은 이것으로 이듬해의 농사일을 징험한다. 경남 밀양 남지에서도 용이 땅을 갈아 이듬해의 농사일을 징험한다고 한다(湖西洪州合德池 每年冬 有龍耕之異 自南而北 縱而薄岸則歲穰 自西而東 徑斷其腹則荒 或西或東或南或北 橫縱不整則荒穰半 農人推之來歲輒驗 嶺南密陽南池 亦有龍耕 以驗年事).”는 내용이 있다.
또 이날은 동지부적(冬至符籍)이라 하여 뱀 ‘사(蛇)’자를 써서 거꾸로 붙여 잡귀를 막는 속신(俗信)이 있으며, 팥죽을 쑤어먹지 않으면 쉬이 늙고 잔병이 생기며 잡귀가 성행한다는 속신이 있다. 동짓날 일기(日氣)가 온화하면 이듬해에 질병이 많아 사람이 많이 죽는다고 하며,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 여긴다. 또 동짓날이 추우면 해충이 적으며 호랑이가 많다는 믿음이 있다.
예부터 동짓날이 되면 백성들은 모든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즐겼다. 또 일가친척이나 이웃간에는 서로 화합하고 어려운 일은 서로 마음을 열고 풀어 해결하였다. 오늘날 연말이면 불우이웃 돕기를 펼치는 것도 동짓날의 전통이 이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동지팥죽=동지에는 동지팥죽을 먹는다. 팥을 고아 죽을 만들고 여기에 찹쌀로 단자를 만들어 넣어 끓이는데, 단자는 새알만한 크기로 하기 때문에 새알심이라 부른다.
팥죽을 다 만들면 먼저 사당에 올려 동지고사(冬至告祀)를 지내고, 각 방과 장독, 헛간 같은 집안의 여러 곳에 놓아두었다가 식은 다음에 식구들이 모여서 먹는다. 사당에 놓는 것은 천신의 뜻이고 집안 곳곳에 놓는 것은 축귀의 뜻이어서 이로써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조리 쫓아낸다고 믿었다. 이것은 팥의 붉은색이 양색(陽色)이므로 음귀를 쫓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붉은 팥은 옛날부터 벽사(辟邪)의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 모든 잡귀를 쫓는 데 사용되었다. 『동국세시기』에는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에게 바보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동짓날에 죽어서 역질 귀신이 되어 붉은 팥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서 그를 물리친다.”라고 적혀 있다.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리는 것 역시 악귀를 쫓는 주술 행위의 일종이다. 그러나 동짓날이라도 동지가 음력 11월 10일 안에 들면 애동지라 하여 아이들에게 나쁘다고 해서 팥죽을 쑤지 않는다. 또 그 집안에 괴질로 죽은 사람이 있어도 팥죽을 쑤어먹지 않는다고 한다.
경기도에서는 사당에 팥죽으로 차례를 지낸 다음 방, 마루, 장광 등에 한 그릇씩 놓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먹는다. 경상도에서는 동지에 팥죽을 쑤어 솔가지에 적셔 집안 대문을 비롯하여 담벼락이나 마당에도 뿌리며 마을 입구에 큰 고목에도 뿌려 잡귀들의 동네 침입을 막는다. 강원도에서는 팥죽의 새알심으로 찹쌀이나 수수쌀로 만든 ‘옹심’을 넣어 나이 수대로 먹는다. 일꾼들은 이날 팥죽 아홉 그릇을 먹고 나무 아홉 짐을 져야 한다고 한다. 날씨가 더워서 팥죽이 쉬면 이듬해 농사가 풍년이라고 여긴다. 충남 연기에서는 동짓날 동지불공(冬至佛供)을 드리러 절에 다녀오며, 집에서 팥죽을 쑤어먹는다고 한다. 또 애기동지에는 팥시루떡을 해먹고 노동지에는 팥죽을 쑤어먹는다. 그리고 중동지는 떡이나 팥죽 중 하나를 해서 먹는다.
전염병이 유행할 때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하며, 사람이 죽으면 팥죽을 쑤어 상가(喪家)에 보내는 관습이 있다. 이것은 상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한 것이다. 팥죽은 동지에만 쑤어먹는 것이 아니고 이웃이 상(喪)을 당하였을 때 쑤어 부조하기도 한다.
우리 조상들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나 재앙이 있을 때에는 팥죽, 팥밥, 팥떡을 해서 먹는 풍습이 있었다. 요즈음도 이러한 풍습이 이어져 고사를 지낼 때에는 팥떡을 해서 고사를 지내고 있다. 고사의 목적은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이 번성하기를 기원하고, 공사를 하는 사람은 공사가 아무런 사고 없이 완공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팥이 들어가는 음식은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믿었지만, 그 사실 여부를 떠나 팥이 지닌 여러 가지 효능으로 보아 건강식품임에는 틀림없다. 팥은 피부가 붉게 붓고 열이 나고 쑤시고 아픈 단독에 특효가 있으며, 젖을 잘 나오게 하고 설사, 해열, 유종, 각기, 종기, 임질, 산전산후통, 수종, 진통에도 효과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양의 "
황경(黃經) "이 270도에 달하는 때를 " 동지 "라고 합니다.
동지는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 애 동지 ", 중순에 들면 " 중
동지 ", 그믐께 들면 " 노 동지 "라고 하는데, 이는 동지가 드는 시기에 따라 달리 부르는 말입니다.
< 황경 : 황도( 黃道
)의 극으로부터 어떤 천체를 지나는 대원( 大圓 )이 황도와 교차하는 점과 춘분점( 春分點 ) 사이의 각거리( 角距離 ) → 황위( 黃緯
)> 동지는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어 음( 陰 )이 극에 이르지만, 이 날을 계기로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여 양( 陽 )의 기운이 싹트는, 사실상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중국의 " 역경( 易經 ) " 에는 태양의 시작을 동지로 보고 복괘( 復卦 )로 11월에 배치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의 주 ( 周 )나라에서는 11월을 정월로 삼고 동지를 설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책력과 풍속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옛 사람들은 이 날을 "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 " 로 생각하고 경사스럽게 여겨 속절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동지를 신년으로 생각하는 고대의 유풍에서 비롯된 것으로써, 전통사회에서는 동지를 " 작은 설 "이라하여 설 다음 가는 경사스러운 날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 또는 " 동지 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라는 말이 전하기도 합니다.
중국의 " 형초세시기( 荊楚歲時記 ) "에
의하면 공공씨( 共工氏 )의 재주 없는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역질( 疫疾 ) 귀신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두려워하여 팥죽을 쑤어
물리친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로 팥죽의 축귀(逐鬼) 기능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지팥죽은 절식이면서 동시에 벽사축귀( 僻邪逐鬼 )의 기능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팥은 붉은 색깔을 띠고 있 어서 축사 ( 逐邪 )의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 역귀( 疫鬼 ) 뿐만 아니라 집 안의 모든 잡귀를 물리치는 데 이용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점은 음양사상( 陰 陽思想 )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즉 팥은 붉은색으로 " 양( 陽 )"을 상징함으로써 "
음( 陰 )"의 속성을 가지는 역귀나 잡귀를 물리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상도 지방에서는 팥죽을 쑤어 삼신 . 성주께 빌고, 모든 병을 막는다고 하여 솔잎으로 팥죽을 사방에 뿌립니다.
또 경기도 지방에서는 팥죽으로 사당에 차례를 지낸 후, 방을 비롯한 집안 여러 곳에 팥죽 한 그릇씩 떠놓기도 합니다.
한편 지방에 따라서는 전염병이 유행할 때,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동지에는 동지팥죽과 더불어 책력( 冊曆 )을 선물하던 풍속이 전합니다.
동지에는 절식( 節食 )으로 " 동지 팥죽 " 또는" 동지두죽( 冬至豆粥 )"이라 하여 팥죽을 쑤어 먹는 오랜 풍속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 ) " 11 월 조에 의하면 " 동짓날을 아세( 亞歲 )라 하여 팥죽을 쑤어 먹는데, 팥죽을 쑬 때 찹쌀로 새알 모양으로 빚은 속에 꿀을 타서 시절 음식으로 먹습니다.
또한 팥죽은 젯상에도 오르며, 팥죽을 문짝에 뿌려 액운을 제거하기도 한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짓날에는 어느 가정에서나 팥죽을 쑤어 먹는데, 팥을 삶아 으깨거나 체에 걸러서 그 물에다 찹쌀로 단자를 새알 만큼씩 만들어서 죽을 쑵니다. 이 단자를 " 새알심 " 이라고 합니다.
팥죽을 끓여서 먼저 사당에 올리고, 그 다음에 집안 곳곳에 팥죽 한 그릇씩 떠놓은 후에 집안 식구들이 모여 팥죽을 먹습니다.
이 때 새알심을 수대로 먹는데, 여기서 " 동지 팥죽을 먹어야 한살 더 먹는다." 라는 옛말이 비롯되었습니다.
즉, 팥죽에는
축귀(逐鬼)하는 기능이 있다고 보았으니, 집안의 여러 곳에 놓는 것은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조리 쫓아내기 위한 것이고, 사당에 놓는 것은 천신(薦新)의 뜻이 있습니다.
팥은 색이 붉어 양색(陽色)이므로 음귀(陰鬼)를 쫓는 데에 효과가 있다고 믿었으며 민속적으로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하며 사람이 죽으면 팥죽을 쑤어 상가에 보내는 관습이 있는데 이는 상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한 것이며,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리는 것 역시 악귀를 쫓는 주술행위의 일종입니다.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나 재앙이 있을 때에도 팥죽, 팥떡, 팥밥을 하는 것은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동짓날에도 애동지에는 팥죽을 쑤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지팥죽은 이웃에 돌려가며 서로 나누어 먹기도 합니다.
동짓날 팥죽을 쑤게 된 유래는, 중국의 《형초세시기 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의 망나니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역신(疫神)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아들이 평상시에 팥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역신을 쫓기 위하여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았다는 것입니다.
동짓날에 궁 안에 있는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소의 다리를 고아, 여기에 백강, 정향(丁香), 계심(桂心), 청밀(淸蜜) 등을 넣어서 약을
만들어 올렸습니다.
이 약은 악귀를 물리치고 추위에 몸을 보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또, 동짓날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궁에 바치면 나라에서는 ‘동문지보’라는 어새(御璽: 옥새)를 찍어 백관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각사(各司)의 관리들은 서로 달력을 선물하였으며, 이조(吏曹)에서는 지방 수령들에게 표지가 파란 달력을 선사하였습니다.
동짓날이 부흥을 뜻하고 이날부터 태양이 점점 오래 머물게 되어 날이 길어지므로 한 해의 시작으로 보고 새 달력을 만들어 가졌던 것입니다.
매년 동지 무렵이 되면 제주목사는 특산물로서 귤을 상감에게 진상하였습니다.
궁에서는 진상 받은 귤을 대묘(大廟)에 올린 다음에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주었고,
멀리에서 바다를 건너 귤을 가지고 상경한 섬사람에게는 그 공로를 위로하는 사찬(賜餐)이 있었으며, 또 포백(布帛) 등을 하사하였습니다.
멀리에서 왕은에 감화되어 진기한 과일을 가져온 것을 기쁘게 여겨 임시로 과거를 실시해서
사람을 등용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황감제(黃柑製)라 하였습니다.
동짓날 부적으로 뱀 ‘사(蛇)’자를 써서 벽이나 기둥에 거꾸로 붙이면 악귀가 들어오지 못한다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또 동짓날 일기가 온화하면 다음해에 질병이 많아 사람이 죽는다고 하며,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 전합니다.
동지 지나면 새로운 태양이 충분한 양광을 더할것입니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입니다.
태양의 " 황경(黃經) "이 270도에 달하는 때를 " 동지 "라고 합니다.
동지는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 애 동지 ", 중순에 들면 " 중 동지 ", 그믐께 들면 " 노 동지 "라고 하는데, 이는 동지가
드는 시기에 따라 달리 부르는 말입니다.
< 황경 : 황도( 黃道 )의 극으로부터 어떤 천체를 지나는 대원( 大圓 )이 황도와
교차하는 점과 춘분점( 春分點 ) 사이의 각거리( 角距離 ) → 황위( 黃緯 )>
동지는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어 음( 陰 )이 극에 이르지만, 이 날을 계기로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여 양( 陽 )의 기운이 싹트는, 사실상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중국의 " 역경( 易經 ) " 에는 태양의 시작을 동지로 보고 복괘( 復卦 )로 11월에 배치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의 주 ( 周 )나라에서는 11월을 정월로 삼 고 동지를 설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책력과 풍속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옛 사람들은 이 날을 "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 " 로 생각하고 경 사스럽게 여겨 속절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동지를 신년으로 생각하는 고대의 유풍에서 비롯된 것으로써, 전통사회에서는 흔히 동지를 " 작은 설 "이라
하여 설 다음 가는
경사스러운 날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 또는 " 동지 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라는 말이 전하기도 합니다.
중국의 " 형초세시기( 荊楚歲時記 ) "에
의하면 공공씨( 共工氏 )의 재주 없는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역질( 疫疾 ) 귀신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생 전에 팥을 두려워하여 팥죽을 쑤어
물리친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로 팥죽의 축귀(逐鬼) 기능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지팥죽은 절식이면서 동시에 벽사 축귀( 僻邪逐鬼 )의 기능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팥은 붉은 색깔을 띠고 있 어서 축사 ( 逐邪 )의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 역귀( 疫鬼 ) 뿐만 아니라 집 안의 모든 잡귀를 물리치는 데
이용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점은 음양사상( 陰 陽思想 )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즉 팥은 붉은 색으로 " 양( 陽 )"을 상징함으로써 " 음( 陰 )"의 속성을 가지 는 역귀나 잡귀를 물리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상도 지방에 서는 팥죽을 쑤어 삼신 . 성주께 빌고, 모든 병을 막는다고 하여 솔잎으로 팥죽을 사방에 뿌립니다.
또 경기도 지방에서는 팥죽으로 사당에 차례를 지낸 후, 방을 비롯한 집안 여러 곳에 팥죽 한 그릇씩 떠놓기도 합니다.
한편 지방에 따라서는 전염병이 유행할 때,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적 광양에서도
팥죽을 뿌렷습니다. 한편으로 동지에는 동지팥죽과 더불어 책력( 冊曆 )을 선물하던 풍속이 전합니다.
동지에는 절식( 節食 )으로
" 동지 팥죽 " 또는" 동지두죽( 冬至豆粥 )"이라 하여 팥죽을 쑤어 먹는 오랜 풍속 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 )" 11 월 조에 의하면 " 동짓날을 아세( 亞歲 )라 하여 팥죽을 쑤어 먹는데,
팥죽을 쑬 때 찹쌀로 새알 모양으로 빚은 속에 꿀을 타서 시절 음식으로 먹습니다.
또한 팥죽은 젯상에도 오르며, 팥죽을 문짝에 뿌려 액운을 제거하기도 한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짓날에는 어느 가정에서나 팥죽을 쑤어 먹는데, 팥 을 삶아 으깨거나 체에 걸러서 그 물에다 찹쌀로 단자를 새 알 만큼씩 만들어서 죽을 쑵니다. 이 단자를 " 새알심 "이라고 합니다.
팥죽을 끓여서 먼저 사당에 올리고, 그 다음에 집안 곳곳에 팥죽 한 그릇씩 떠놓은 후에 집안 식구들이 모여 팥죽 을 먹습니다.
이 때 새알심을 수대로 먹는데, 여기서 " 동지 팥 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라는 옛말이 비롯되었습니다.
즉,
팥죽에는 축귀(逐鬼)하는 기능이 있다고 보았으니, 집안의 여러 곳에 놓는 것은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조리 쫓아내기 위한 것이고, 사당에 놓는
것은 천신(薦新)의 뜻이 있습니다. 팥은 색이 붉어 양색(陽色)이므로 음귀(陰鬼)를 쫓는 데에 효과가 있다고 믿었으며 민속적으로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하며 사람이 죽으면 팥죽을 쑤어 상가에
보내는 관습이 있는데 이는 상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한 것이며,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리는 것 역시
악귀를 쫓는 주술행위의 일종입니다.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나 재앙이 있을 때에도 팥죽, 팥떡, 팥밥을 하는 것은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동짓날에도 애동지에는 팥죽을 쑤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지팥죽은 이웃에 돌려가며 서로 나누어
먹기도 합니다. 동짓날 팥죽을 쑤게 된 유래는, 중국의 《형초세시기 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의 망나니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역신(疫神)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아들이 평상시에 팥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역신을 쫓기 위하여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았다는
것입니다. 동짓날에 궁 안에 있는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소의 다리를 고아, 여기에 백강, 정향(丁香), 계심(桂心), 청밀(淸蜜) 등을 넣어서
약을 만들어 올렸습니다.
이 약은 악귀를 물리치고 추위에 몸을 보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또, 동짓날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궁에 바치면 나라에서는 ‘동문지보’라는 어새(御璽: 옥새)를 찍어 백관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각사(各司)의 관리들은 서로 달력을 선물하였으며, 이조(吏曹)에서는 지방 수령들에게 표지가 파란 달력을 선사하였습니다. 동짓날이 부흥을 뜻하고
이날부터 태양이 점점 오래 머물게 되어 날이 길어지므로 한 해의 시작으로 보고 새 달력을 만들어 가졌던 것입니다.
매년 동지
무렵이 되면 제주목사는 특산물로서 귤을 상감에게 진상하였습니다. 궁에서는 진상 받은 귤을 대묘(大廟)에 올린 다음에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주었고,
멀리에서 바다를 건너 귤을 가지고 상경한 섬사람에게는 그 공로를 위로하는 사찬(賜餐)이 있었으며, 또 포백(布帛) 등을 하사하였습니다.
멀리에서 왕은에 감화되어 진기한 과일을 가져온 것을 기쁘게 여겨 임시로 과거를 실시해서 사람을 등용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황감제(黃柑製)라 하였습니다. 동짓날 부적으로 뱀 ‘사(蛇)’자를 써서 벽이나 기둥에 거꾸로 붙이면 악귀가 들어오지 못한다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또 동짓날 일기가 온화하면 다음해에 질병이 많아 사람이 죽는다고 하며,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 전합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원은 동지(冬至) 축제 즉 크리스마스(12월 25일)는 예수의 탄생일이 아닙니다
전세계적인 축제로 화한
크리스마스가 동지(冬至) 축제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12월 25일에 탄생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예수 탄생에 대해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월 일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은 예수의 탄생일이 아니며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만들어낸 일종의 신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역사의 근원을 따라 올라가보면,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의식은 3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행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초기에는 그 날짜가 일정치 않아 1월 6일, 3월 21일(춘분), 12월 25일(동지 축제) 가운데 어느
하루가 선택되었습니다.
로마 교회(서방교회)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정한 것은 서기 354년부터로 보여지며, 379년부터는 그리스
교회(동방교회)가 이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농경(農耕)을 주로하던 로마인들은 12월 21일부터 31일까지를 농경신
새턴(Saturn: 이탈리아의 고대 곡물신. 로마인에 의해 그리스의 크로노스와 동일시 됨)의 제사일(祭日)로 삼아 성대한 잔치를 벌였는데, 이
제사일 기간을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라 불렀습니다.('토요일'을 뜻하는 영어 Saturday의 어원이 Saturn)
이 사투르날리아 기간 동안에는 일반적으로 연령, 성별, 계급의 구별 없이 각종 연회, 경기, 행렬 등이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중에서 12월 25일은 동지가 지난 다음으로 '태양이 소생하는 날'이라고 하여 특별히 기념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다름아닌 이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변형되어 전래된 풍속입니다.
그리고 또 미트라(Mitra)신의 축일도 이 날이었습니다.
미트라는 태양이 떠오를 때 태양에 앞서는 빛으로서, 어둠을 몰아내는 광명의 신입니다. 본래 페르시아인의 신이었는데 전래되어 유럽 민족의
옛 신성(神聖)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켈트 민족의 제사계급들도 태양의 기운이 소생하는 이 기쁜 날을 축하하였고 게르만인도 이날을 유쾌하게
축하하였습니다.
이런 문화적 전통위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농경력(農耕曆)상의 성대한 제사일(祭日) 곧, 동지 축제를
정책적으로 예수의 생일과 결합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의 문화적 전통은 사실상 그리스도교와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란 중세기에 사용되던 '크리스뚜스 미사(Christus Missa)'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리스도’와 ‘미사’의 합성어입니다. 크리스마스의 또 다른 이름인 'X-mas'의 'X'는 희랍어의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 글자입니다.
중세의 크리스마스 행사는 교회 의식(儀式)과 더불어 농신제(農神祭)에 따르는 가장(假裝)행렬 행사 등이 뒤섞여 행하여졌습니다.
그것이 근세에 이르러서 어린이들이나 가족 중심의 축일로 변모되었습니다.
또 크리스마스와 결부하여 산타클로스의 설화와 전승이
있습니다.
이것은 3세기 말, 어린이를 보호하는 소아시아의 '성 니콜라스'의 이름이 네덜란드어로 '성 클라우스'로 발음되었는데,
네덜란드인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잘못 불러서 성녀(聖女, 산타)를 뜻하는 것 같은 '산타클로스'라는 애칭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가 썰매를 타고 와서 착한 어린이에게 선물을 준다는 이야기와 그에 관련된 행사는 오래된 기원이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일로 보여집니다.
결론적으로 크리스마스는 서양의 동지축제입니다.
오늘 12월 22일의 동지절과 뒤이은 크리스마스,
이젠 우리 모두가 그 의미를 알고 보내면 좋겟습니다.
생강나무꽃이 꽃망울을 올리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생강나무꽃차를 마실수 있겠습니다.
동지 지나면 새로운 태양이 충분한 양광을 더할것입니다.
그 양기를 머금은 생강나무꽃차를 기다립니다.
오늘은 한잔의 차보다는 새알죽이 좋을듯 합니다.
저는 어렷을적에 그냥 새알죽, 혹은 동짓퐅죽 이라 불럿습니다.
새알죽 드시고 새로운 기운으로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