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마지막 선물
살다보면 제일 받아 들이기 힘든 일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아닐까 싶다.그것도 죽음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에게 찾아오는 죽음의 경우에는 특히 그러한 것 같다.그렇 게 갑자기 들이닥치는 죽음은 유유히 길을 가다 갑자기 누군가 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억울한 느낌을 갖게 하기도 하 고 애써서 만들어놓은 분홍빛 인생계획을 한 순간 비웃음의 대 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찾아온 허무함이 또한차 례 승화된 사랑의 이름으로 극복될 수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세월 흘러 나이 들면 죽는 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연스 럽기까지 했다.하지만 나의 어머니는 그런 명백한 자연의 법칙 에서 예외였다.언제까지나 딸들 곁에서 지켜봐 주실 분 같았다. 학창시절 방과 후면 책가방 집어던질 틈도 없이 부엌으로 쪼르 르 달려가 하루일과를 미주알고주알 보고하면 친구처럼 응수해 주시던 어머니, 자신이 먹기싫은 음식은 절대로 남 주지 말라고 생활 속에서 역지사지를 가르치시던 어머니였다.자식들이 잘하 면 칭찬을아끼지않고 잘못하면 꾸짖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언제 까지나 우리를 지켜주실 것 같았다.어머니가 키워주신 내 딸아 이가 유치원갈 나이가 되고 공부가 늦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으로 늦게 안정된 우리 부부가 한숨 돌리며 이제 어머니를 편히 해드려야겠다고 마음 먹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 나이 38세, 나는 전혀 준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것은 남의 일이었다. 어 머니는 담관암이었다. 수술 시기를 놓쳤으며 이미 알려진 의학 지식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했다.어머니의 숨이 하루하루 가빠지며 턱까지 차 올라도, 나는 평생의 친구이자 스승이셨던 어머니에게 하루 세끼 차려드리는 일 외에는 해드릴 수있는 일 이 아무것도 없었다. 죽음을 가까이 예감하셨는지 주변 정리를 하기 시작하셨다. 다음 번 해외여행에서 쓰시려고 핸드백 깊숙 이 숨겨두셨던 달러를 꺼내 주시며 ‘이거 너 써라’ 하셨다. 나는 애써 모른척하며, ‘이렇게 다 주면 엄마 여행갈 때는 어떻게 하 려고 그래?’했지만 내 말은 나 자신에게 조차도 설득력이 없이 힘없이 들렸다. 하루빨리 의식이라도 잃어 버렸으면 하는 바램 이 들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쪼그라드는 어머니의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고통을 지켜볼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그렇게 어머니 는 떠나셨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의 텅 빈 가슴을 차 지한 것은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이었다. 숨이 턱에 차 오르는 고 통의 순간에 어머니를 도울 수없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마지막 순간의 어머니의 모습 때문에 견 딜 수가 없었다. 내 생각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몇 주 간 계속되던 중 어느 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어머니가 큰 성 전을 지었으니 그곳에 가보라고 사람들이 내게 알려주었다.성 전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이미 1층의 커다란 방에 와 계셨다.내 가 ‘엄마’하고 부르며 ‘내 방은 어디야?’하고 물어도 전혀 응답 이 없으셨다. 그냥 그 커다란 방을,생전 처음 자신의 공부방을 얻은 아이 처럼 신나서, 끊임없이 왔다갔다하며 중얼거리셨다, ‘ 나는 여기가 너무 좋다, 너무 좋아, 어쩌면 이렇게 좋니!’.어머 니의 얼굴은 실제로 평화로워 보였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나를 짓누르던 고통에서 거짓말 처럼 풀려나 아늑한 평온함이 찾아오는 느낌을 생생히 경험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식 사준비를 하면서도 나를 고문하던 죄의식을 느낄 수 없었다. 새들의 지저귐이 귀에 들려왔다.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였다. 내 귀에 거친 숨소리 외의 소리가 들려온 것은 실로 오랜만이 었다. 내가 꿈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다양하게 반응한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 네 딸들에게 어머니가 보 내는 종교적인 메시지라고도 하고, 심리학에 조예가 깊은 이들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의 잠재의식이 구현된 것 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어머님이 내게 마지막으 로 주시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38세나 먹은 막내딸을 두고 떠나기가 안쓰러워 언니들과 형부들에게 막내 잘 보살피라는 당부 말씀을 유언으로 남기신 어머니의 귀한 선물이다.(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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