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부제 : 그날의 동행한 질서 또는 나를 보다.)
버스 안은 시원하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경쾌하였지만 슬픈 음색을 발하고 있었다. 밖의 열기를 받아 데워진 몸이 차츰 식어가면서 나는 밝은 듯한 슬픈 음색에 들뜬 마음이 침전하며 우울하여졌다. 버스 안의 찬 공기도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버스 안의 모든 보이는 것들이 슬픈 모습으로 돌변했다. 나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슬픈 것들을 차갑게 인식하였다.
신문사에 들렀다. 호의적인 사람들이 호의적인 태도로 호의를 갖추려 하였다. 나는 호의적인 말들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호의적이지 못한 나의 고무적이고 날카로운 인상이 이중인격을 외면적으로 방치하고 있었다. 나는 호의적인 것이 호의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의무감에 안절부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호의적이지 못한, 일종의 사무적인 발언을 남발하였다. 나의 인상처럼......
더위가 기류를 타고 바람처럼 피부에 와 닿았다. 더위는 아무래도 거짓인지도 모른다. 거짓인 것은 사실 바람인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게 사실이 아니라면, 나는 이 더위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디지털 시계가 오늘 14시 10분을 나타내고 있다. 버스기사가 사무적인 표정을 하고 사무적인 옷 매무시를 한 채, 사무적이지 못한 행동을 한다. 동료기사가 다가와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그에게 라이터를 빌리려 한다. 그는 겸연쩍은 듯이 터프 한 손놀림으로 그의 동료에게 양심적일 것을 무언의 신호로 말하며 라이터를 익살맞은 동작으로 건넨다. 그의 동료는 익살맞은 동작으로 익살맞게 건네는 그의 라이터를 장난하며 받는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담배를 피워 물었다.
태풍이 흘기고 지나간 하늘에 다시 거칠고 둔탁한 느낌의 구름이 덮쳤다. 햇살이 새초롬한 모양새로 슬그머니 도둑발로 걷듯 구름 뒤로 갔다. 다시 습하고 더운 날씨가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울컥 화가 치밀며 더위가 흘기고 지나간 시멘트 바닥에 침을 뱉었다. 나는 음료수를 마셨다. 깡통이 점점 데워지고 있다. 손은 젖어가고 있다. 나의 눈이 그것들을 보고 얼룩지고 있다. 드디어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무늬처럼 얼룩이 져 보이기 시작한다.
timeless time(담배상품명)을 한 갑 산다. 처음으로 피워보는 새로운 담배이다. 나는 포장을 뜯고 한 개비를 빼내어 피워 문다. 아! 기막히게 부드럽고 얌전한 담배이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초등학생 꼬마와 얘기를 나눈다. 이 꼬마 여자 애는 내가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지 모르면서, 무턱대고 아무런 질문이나 던진다. 나는 그만 골이 난다. 담배를 피워 문다. 꼬마 여자 애가 건물 밑퉁의 하늘을 멀겋게 본다. 나는 멀겋게 꼬마 여자 애를 본다.
젖가슴이 축 늘어진 늙은 여자가 공중화장실에서 나와 성큼성큼 벤치에 앉아있는 내 앞을 가로질러 휑하니 지나간다. 내가 늙은 여자의 젖가슴을 끊임없이 보고 있다는 것을 외면한 채, 나의 시선에서 벗어나려 한다.
편의시설, 터미널의 TV 앞에 와 선다. TV 옆으로 대형프로펠러를 장착한 선풍기가 의미 없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무감각한 얼굴들의 사람들이 무감각하게 시선의 자리를 아무렇게나 둔 채, 무감각을 바라볼 줄 안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버스를 기다리며 터미널 입구에서 서성인다. 나는 지금 초조해 하고 있다. 초조한 시간이다. 나는 어떻게 이 초조한 마음을 초조하지 않게 하여야 할지 몰라하며 서성이는 것이다.
시계탑이 교차로에서 의미 없이 세워져 있다. 저 큰 시계로 인해 내 시선이 의미를 가지게 하는 이유란 바로 여기에 있다.
PC통신에서 친분이 없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사람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열중한다. 대중(大衆)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그들보다 사람처럼 느껴지게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통신을 하면서 내가 사람흉내를 내는 기계를 느끼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잠깐 동안, 잠깐 동안 하지 않았던 일을 생각한다.
나는 간혹 외출하고 난 직후 멍한 상태에서 멍한 생각을 한다. 나는 내가 왜 외출한 뒤, 멍한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멍한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나는 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멍하여 지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나는 강을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서 강을 바로 보는 것처럼 멍하여 있는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샤워를 한다. 나는 도피한다. 나는 더위가 도피하길 바란다.
밤이 되면 우울해 진다. 계절이 바뀌면 우울해 진다. 혼자 있으면 우울해 진다. 말하지 않으면서 생각하고 있으면 우울해 진다. 시간이 느리게 가면 우울해 진다. 강물이 아름답게 출렁이며 흘러갈 때 나의 눈은 우울한 것을 목도한 것처럼 우울한 모양을 한다. 나는 우울해 하는 자신에게 우울한 생각을 우울한 감정에 맞춰 우울해 지도록 유도한다. 우울하지 않으면 우울할 수밖에 없는 우울한 생김새의 생각이 있다.
그리운 사람이 다가와, “그리워하고 있었니?” 하고 묻는다면, “지금은 그리워하던 때를 그리워하고 있어.” 라고 말할 테다.
누군가가 보았던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누군가에게 누군가를 말하며 누군가 궁금해한다면, 누군가는 누구인가를 누구이다라고 말할 테지만, 누구는 누구가 아닐 경우, 누군가에게 대하여 누군가를 누구인가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Beatles의 노래 중 <yesterday> 곡만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도 여전히 <yesterday> 곡만을 듣고 있다.
2000년 9월 2일, 토요일 am 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