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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시

2005년에 쓴 몇 편의 습작

작성자ralffinz|작성시간17.05.07|조회수32 목록 댓글 0




Ⅰ. 가을여자


- Mariah Carey , 겨울처럼 늘 떠나가지 않을 것만 같다.

심야 열차를 타고 호남지방을 경유했어. 열차는 하나 하나의 역(驛)에 정거하며
그때마다 온건하지 못한 회의라는 짐을 하나씩 내려놓게 했지.

열차가 미끄러져 나갈 때면 플랫폼 불빛 이면으로 퍼진 풍경이
유리창이 만들어낸 호수에서 헤엄쳐 나가며,
드디어 그곳에는 잔잔한 여운만이 찬바람에 나뒹굴게 됐다.

등 칸 안은 전등 불빛이 삼킨 고요와 목적지를 밝힌 부정할 수 없는
저마다의 의식으로 커다란 정적이 감돌았고 그것은 좀더 깊은 외로움으로 느껴졌지.

대기의 어둠을 흡씬 마신 실내등은 그때부터 더할 나위 없이 눈부시게 빛나고
유리창엔 땀방울이 돋아나며 ‘반 고흐의 <자화상>’에서처럼,
상처 입은 자(者)의 고뇌가 가을비를 타고 흘렀다.
유리창에 미끄러지는 계절이 슬픈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낙수가 떨어지는 기와지붕의 역사(驛舍)는 환희의 세계로 나가는 문이었지.
그녀의 환한 미소는 역 앞 광장에서 무척이나 젖어버렸지만
눈동자에는 단풍잎이 쉼 없이 떨어지고 있었지.

-내 마음은, “그녀가 떨어뜨린 낙엽으로 술을 빚어야지”

한 잔은 가을을 담아 따라주고,
한 잔은 인연을 담아 따라주고,
한 잔은 비로소 고향을 담아 따라주리라.

그녀는 내 귓가에 무엇인가를 속삭였는데,
내 코끝에는 마지막 가을이 비에 젖어 가는 냄새만이 느껴질 뿐,
우리가 사랑한 계절에는,
저 한 가지 끝에 매달린 단풍잎의 운명을,
어찌하여 볼 수 있었으리.


2005/10/09



Ⅱ. 표정


나는 알았지, 창가에 내리치는 허무의 조각들이 곱게 빛나던 이유를.
한적한 틈새로 잦아들며 아침 한 때 지저귀던 참새소리가
침대 위에서 티끌처럼 나풀거린 요무(妖舞)를.

나는 알았지, 그대의 손길이 간혹 얼굴에 와 닿으며 그리워한 이유를.
사람은 오래 된 습관으로 시간과 예정에 길들여지며,
그대가 애써 어루만지던 얼굴이 바닷가 모래와 다르지 않음을.

나는 알았지, 낙엽이 다 져버린 날 외롭다며 술을 마시자던 이유를.

"바다가 보고 싶어." 그녀의 이 한 마디는 낯설고 애절했다.
"그래, 그 말이 날 취하게 할 것 같아."

우리가 잔을 비워내며 삼킨 것은, 술과
외롭고 낯선 자신이었나 보다.

나는 알았지, 겨울이 깊은 골목에서 여인을 등에 엎은 이유를.

"시원하다. 이렇게 멀리 갔으면 좋겠어." 귀 끝이 시릴 정도로 바람이 찼다.
"그래, 밤바람 때문인가."

그녀는 싸늘한 바람에 숨기고 울었다.
등속으로 파고드는 눈물은 낯선 겨울이었고,
우리가 외로운 이유였나 보다.

나는 알았지, 창가에 내리치는 허무의 조각들이 곱게 빛나던 이유를.
한적한 틈새로 잦아들며 아침 한 때 지저귀던 참새소리가
침대 위에서 티끌처럼 나풀거린 요무(妖舞)를.


2005/10/11



Ⅳ. 여울목에 불던 바람


불빛을 보고 어디선가 나방이 찾아들었다.
바깥에는 종일토록 내리던 비가 그제야 그치려는지,
한량한 바람소리에 묻히고 있었다.

-저것 잡아야지.
하지만 거짓말처럼 불빛에서 춤추던 나방은,
센바람이 창(窓)을 후리던 때,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비가 그쳤나 보네.
그녀의 발목이 너무나 가냘픈 것에
막연한 고독(孤獨)을 느끼며,
종일토록 하늘을 가리고 내리던 비가,
다시 쏟아졌으면 바랬다.

어둠은,
저것마저 불식시켜 주리라.

-여울목에 나가볼까.

손을 맞잡고 거닐었다, 저 끝에 시선을 두며.
장난삼아 맞서서 거닌다, 그 찰라 견고한 직선의 세상이 뺨을 때린다.
그녀가 앞서가며 아름답게 웃었다, 가냘픈 발목이 아찔하게 세상을 두드린다.

그때였다, 불빛에서 춤추던 나방이 날아왔다.
나방은 센바람에 겨워 보였지만, 무희(舞喜)를 멈추지 않았다.

-저것 잡아야지.
하지만 거짓말처럼 내 앞에 춤추던 나방은,
그녀가 소리치며 부르던 때,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울목에 불던 바람이 어둠 저편으로 세상을 몰아가고 있었다.


2005/10/14




-건초(乾草)


태초(太初)의 바다를 건너와 미간(眉間)을 간질이는 천지(天地)를 만난다.
과거의 유물을 거머쥔 세상이 열리며 존재(存在)는 눈을 뜬다.
인간의 행적을 쫓아 한 시대(時代)를 소유한다.
감성(感性)의 나무를 숲에서 가져와 자신의 정원에 심는다.
때로는 시기와 질투로 숲을 불살라 버린다.
미지(未知)의 땅을 개척한 ‘우리의 아버지들’을 존경한다.
광활한 대지(大地)와 끝도 없는 바다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지난 시대(時代)의 투쟁이, 여전하다.
사욕(私慾)과 허영(虛榮)에 넘친 저 수많은 정원(庭園)이,
숲처럼 미상불 조림(造林)된다.

어느 날이었던가.
나는 저 숲 속 어딘가에 비밀스런 무엇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무엇은 시대(時代)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존재한,
‘숲의 정원(庭園)’일 것이다.
건초(乾草)를 밟으며 숲으로 들어갔다.
숲 속을 지칠 때까지 헤매었을 때, 내 몸은 땀과 먼지로 더러워졌다.
나무사이로 어둠이 들어찼고, 이제 곧 밤이 될 것을 의심치 않았다.
내 머릿속은 텅 빈 것처럼, 고요와 정적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갔다.
마치 지상에서 사라져버릴 것처럼.
순간 깨닫게 된 것은 ‘허무’였던 것 같다.

대지(大地)에서 숲의 경계가 사라지던 날,
달빛이 아름다워 정처 없이 숲 속을 거닐었다.
건초(乾草) 위를 걷는데, 무언가 그 사이에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들키지 않게, 한없이 바라보았다.
마치 그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타인(他人)의 소유인 정원(庭園)에 와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동일한 장소와 시간 안에 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숲의 경계가 사라지던 날, 세상의 경계가 그어졌다.

건초(乾草) 위를 걷고 있다.
나는 여전히 저 숲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숲의 정원(庭園)’을,
세상의 경계 안에서 찾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당신이 내가 찾는 그것이었으면 좋을 것 같다, 라고.

( -`건초'詩를 끝맺고 났지만, 이 의미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한 편씩 지을 적마다 이제는 생각으로 시름하는 시간이 더 길어진 것 같다는 말밖에는. 10월 20일 늦은 밤이다. Coldplay - 曲을 듣는다. 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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