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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정거장

나는 아무 곳도 아닌 장소에서 여기저기 흘러내린 세계를 이유없이 대면하고,

작성자ralffinz|작성시간17.06.04|조회수30 목록 댓글 0

 오후의 한 귀퉁이를 봄볕이 걸어 나가는 듯한 길목에서, 물결처럼 산이 먼저 밀려왔다 나가는 가슴 한켠으로, 행

선지의 다음 장소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딱히 지금 내가 이곳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무 곳도 아닌

그런 장소와 공간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듯한 일과 속에서 그런 일과로 사는 듯이 느꼈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는 것처럼 또는 달이 지구를 맴돌 듯이, 누군가는 천만 년 후에 와서도 밤과 낮이 바뀌는 세상에 대해 고독

할 수 있다. 얼마나 더 잔인하고 잔혹한 시간의 고독을 맴돌고 있어야 비로소 나는 누군가에게...... 나는 `누군가에

게`, 어쩌면 이러한 수식이 이곳에 올 수 없는 경계에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의 감정 속엔 가공된 감정의 추상

성이 지표에 따라 더듬이를 움직이며 조금씩 이동하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속되는 외부와 내부의 갈등,

삶이란 압박 속에 깊어지는 구김이나 화석화, 돌덩어리가 가득 찬 느낌의 마음 안, 그러한 진부한 표현들 속에서

사회라는 설계된 대상이 있었다.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이미 오래 전부터, 거대한 조형물은 미래로부터 유물이 되며

현재는 전습이나 학습된 문명의 이기이며, 나아가 어제는 잠재된 또는 내재이거나 내포를 동반하는 유산이었다. 그

유산 앞에 내가 미래로부터 가져온 그림에는, 그림 앞의 패러다임은 삭제하더라도 분명해지는, 모종의 암각화에 대

하여, 인간이 사랑한 것은 `지배`라는 구속력 따위라는 것을.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을 통틀어 인류만이 잔인하게

일방통행으로 지배라는 도구를 사랑할 줄 안다. 이것은 우리가 왜 사회라는 시스템을 만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

인 이해와 연관되어 있는 개념으로써 충격과 회의를 방임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포와 두려움을 방출하고 있다. 어

느 사회든 지배구의 시냅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세상이 네트워크와 1일 세계권역으로 진보한 세계에서는 더

욱 가속화 되었을 뿐이다. 인간이 왜 지배라는 상하주종관계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서술은 이쯤에서 일단락하기로

하자. 내가 말하고픈 것은 사실, 위의 말과는 사뭇 다르며, 오히려 낯설고 부조리하며, 미지의 가능성에 대

한 글이었으므로, 위의 대목에 대한 언급은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무의식 속에 이미 상품화되

어 포장지로 가공 되어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고 질적 삶을 충족시키는 불확실성

과의 투쟁에 대해 말하여야 한다. 불확실성이란 불완전체에 대해 말하여야 한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불

완전한 미학에 대해 보다 진부하고 진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것이 모든 슬픔과 고통과 고독에 대해 저항할 만한

무한한 원동력의 항체가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시스템이 바이러스라면 이 불확실성이란 면역체계는 우주만

큼 무한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대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회 안에 뜻밖의 사고나 예상을 초월한 기적 같은 일

따위나 생계형 범죄에 대해, 또는 발견이나 신선한 아이디어 따위가 샘플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앰플을 깨뜨리고

그것을 희석하여 마시면 될 따름이다. 우리 사회의 구조와 사회순환의 원리와 사회조직 기타 조직원들에 대한 이

해가 갖춰진 당신이라면, 그러한 군락에 대해 이해가 완성된 바로 우리라는 단체라면, 새로운 세상을 이 세상 안에

서 우리라는 동력을 구실삼아 우리의 패러다임을 건설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로써, 그러니까 이상향의 세계에 대

해 공통된 합의에 의해, 이것은 구체적 표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 일 문형에는 이 질문이 가장

먼저 씌어져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지배당하길 좋아하는가, 에 대해 깊게 고심해 봐야 할 것이다. 

 흔히 동물의 세계에서 말하는 약육강식의 사회나 피라미드 구조 따위, 또는 동식물 군락에 관한 학술을 거들먹거

리며 저급한 의식화로 물든 저능아들에겐 일말의 양심을 바라지는 말자. 가령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은 인디언이

었으며, 거기에 정착한 현재의 인류에 관해 우리가 부조리라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이들에 관해 불한당이니 악당이

라고 지칭하지는 않겠다. 우리의 멸종에 관해 세계의 멸종이라 말하지 않는 것처럼, 글로벌화에 대해 대한민국의

사멸이라 쓰지도 않겠다. 나의 죽음을 인류의 슬픔이라 말하지 않는 것처럼, 당신의 죽음도 꽃가루 날리는 봄이 오

면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 날씨의 변덕보다 기분 나쁘진 않을 테니까.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들에 관하여 오늘을

소비하기로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굴종이나 피지배 식민지화의 그늘에서 우리를 지켜냈으면 하는 마음으로써, 이

것의 시선은 아주 먼 곳을 응시하는 것으로 보자.



4월 어느 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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