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지금의 기분이나 심정은 습작을 하기에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불규칙한 리듬에 휩싸여있다. 감정에 휘둘린 이성은 불합리하며 통일된 중점과 동떨어진 변두리를 방황하는지도 모른다. 결국 중심에서 멀거나 동떨어진 아무 어느 이곳저곳에서 난잡하게 펼쳐놓은 듯 전개해 나갈 일만 남았다.
오전 중 일과에서 머리 위를 떠돌던 언어의 장식들이 이젠 나와 무관한 듯이 떠나버렸다. 이것은 전반적인 여자들에 대한 나의 사고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보편적 대중의 도구로 쓰이는 가치에 대한 사고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제 조금 내가 운행 중 사고했던 의식이 수면 위로 부상하려 한다. 그건 유투브에 다가 두테르테의 정치행각에 대한 정의였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최초로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동물이었다. 이것은 그냥 주변의 물건이나 물질을 만지는 의미가 아니며, 가공의 전말을 내포하는데 따른 정의라고 본다. 즉, 1차적 도구는 가시적 의미에서 출발하였고 내가 차수를 넣음으로 인해 다음 번에 올 것에 대해 암시하는 의미이다. 이것은 극대화된 도구의 정의라는데 순수한 본질이 있다. 2차적 도구는 그 성질까지 변화되었을 수도 있고 가시적 의미를 완전히 배격하는 이원론적 물질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왜 두테르테를 개테르테라고 비난했을까? 두테르테는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사회개혁과 범죄와의 전쟁을 공약하였으며 취임했을 때, 마약사범에 대한 인권보다 국민의 안전과 치안유지를 위해 계엄령까지 선포한 바 있다. 말 그대로 두테르테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 일선에서 활약하며 이렇게 연설하였다. "마약상이 죽든가 내가 죽든가 어느 한쪽이든 끝장을 보기 전까지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라는 비슷한 약속. 그는 말 그대로 정의의 사도가 되어 무자비하고 무관용을 창과 방패로 마약상을 비롯한 마약사범들을 처단했다. 여기까지는 만화책을 보듯 속시원한 전개였었다. 정의의 입장에서 말이다. 그 뒤에 두테르테는 국민의 열의와 같은 지지와 지지율을 바탕으로 무소불휘의 권력을 맘껏 휘두를 수 있었고, 이것은 군부의 반발과 저항을 최저화 시키기위한 방편으로 군대를 가용함에 있어 터무니 없는 발상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바로 얼마전 내란으로 인해 분열된 분쟁지역 안의 인권에 대해 박해를 가한 거나 다름없는 발언을 쏟은 것인데, 인권의 사각지대 안에서 얼마든지 군인들의 수탈과 수음을 용인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제 바위처럼 확고하며 부동의 것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다름아닌 1차적 정의라는 순수물질이 오염되었으며 이것은 두테르테가 정의를 도구화 시켜 버린 행위에 대한 규정으로 볼 수 있다. 즉, 더 이상 두테르테는 정의롭지 못하다. 두테르테는 단지 정의를 도구로 다룰 수 있는, 인류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2차적 도구의 상징적 사용으로 규정하고 싶다. 이것은 단순히 도구가 아닌 목적도구로써 규정한다. 최근에 관심이 있던 이슈에 대한 나의 간략한 서술이기에 이런 나의 표현은 재미를 가미하고 보다 과장되어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어떤 포커스에 대해 심화를 원한다면 어느 정도의 과장은 필수가 아니겠나.
우리 인간은 읽고 쓰고 말하면서부터 2차적 도구의 사용을 더 진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3차적 도구에는 무엇이 오는 게 합당할까?
2017.06.06.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놀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