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1

작성자ralffinz|작성시간18.03.15|조회수34 목록 댓글 0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건너편 자리에서 처녀가 다가와 시마무라(島村) 앞의 유

리창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눈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처

녀는 창문 가득 몸을 내밀어 멀리 외치듯,

 "역장님, 역장님 ㅡ"

 등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으며 온 남자는, 목도리로 콧

등까지 감싸고 귀는 모자에 달린 털가죽을 내려 덮고 있

었다.

 벌써 저렇게 추워졌나 하고 시마무라가 밖을 내다보니, 철

도의 관사(官舍)인 듯한 가건물이 산기슭에 을씨년스럽게

흩어져 있을 뿐, 하얀 눈 빛은 거기까지 채 닿기도 전에

어둠에 삼켜지고 있었다.

 "역장님, 저예요, 안녕하셨어요?"

 "오, 요코(葉子) 양 아닌가. 이제 돌아오는 게로군. 다시

쌀쌀해졌는걸"

 "제 동생이 이번에 여기서 일하게 되었다죠? 폐를 끼치

겠네요"

 "이런 곳은 얼마 안 가 적적해서 못 견딜 거야. 젊은 사

람이 안됐어"

 "아직 어린애니까 역장님께서 잘 이끌어주세요. 정말 부

탁드려요"

 "염려 말아. 열심히 일하고 있는걸. 앞으로 바빠질 거

야. 작년엔 눈이 많이 왔어. 눈사태가 자주 나는 바람에, 기

차가 오도 가도 못해서, 마을 사람들도 승객들을 대접하느

라 엄청 바빴었지"

 "역장님께선 굉장히 두껍게 껴입으셨네요. 동생 편지엔

아직 조끼도 입지 않았다고 씌어 있던데요"

 "난 옷을 네 벌이나 껴입었다네. 젊은이들은 추우면 술

만 마셔댄다니까. 그러고는 저기서 나뒹굴고 있다고, 감기

에 걸려서 말야"

 역장은 관사 쪽으로 손에 든 등을 흔들어 보였다.

 "제 동생도 술을 마시나요?"

 "아니"

 "역장님, 벌써 돌아가는 길이세요?"

 "난 다쳐서 병원에 다니는 중이야"

 "어머, 저런!"

 일본옷에 외투 차림인 역장은 추운 데서 나누는 대화를

어서 끝내고 싶은 듯, 곧 뒷모습을 보이며,

 "그럼, 조심해서 가요"

 "역장님, 동생은 지금 나와 있지 않나요?" 하고 요코

는 눈 위를 두리번거리며,

 "역장님, 동생을 잘 돌봐주세요. 부탁이에요"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높은 울림이 고스란히

밤의 눈을 통해 메아리쳐 오는 듯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는데도, 그녀는 차창에서 몸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가 선로 옆을 걷고 있는 역장에게 가

까워지자,

 "역장님 ㅡ, 이번 휴가 때 집에 다녀가라고 제 동생에게

전해 주세요!"

 "알았네 ㅡ" 하고 역장이 목청을 높였다.

 요코는 창문을 닫고서, 발그레해진 볼에 두 손을 갖다

댔다.

 제설차를 세 대나 갖추고 눈을 기다리는, 국경의 산이었

다. 터널 남북으로 눈사태를 알리는 전기 통보선이 연결되

었다. 제설 인부 총인원 5천 명에 소방대 청년단 총인원

2천 명의 출동 준비가 이미 마쳐져 있었다.

 이처럼, 머잖아 눈에 파묻히게 될 철도 신호소에서 요코

라는 처녀의 동생이 올 겨울부터 근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시마무라는 한층 그녀에게 흥미를 돋우었다.

 그러나 여기서 <처녀>라 함은 시마무라에게 그렇게 보였

다는 것일 뿐, 동행한 남자가 그녀와 어떤 사이인지 시마

무라로서는 알 리 없었다. 두 사람의 동작은 부부인 듯 보

이긴 했지만, 남자는 틀림없는 환자였다. 환자를 상대하다

보면 쉽게 남녀 사이의 거리감이 느슨해지고, 정성껏 보살

피면 보살필수록 부부처럼 보이는 법이다. 실제로 자신보

다 연상인 남자를 돌보는 여자의 앳된 모성애는 먼발치에

서 바라보면 부부로도 여겨질 것이다.

 시마무라는 그녀 한 사람만을 따로 떼어서, 그 모습이

전하는 느낌만으로 멋대로 처녀일 거라고 단정했을 뿐이었

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가 처녀를 이상한 눈으로 너무나

뚫어지게 지켜본 나머지, 그 자신의 감상이 다분히 보태어

진 것인지도 모른다.

 벌써 세 시간도 전의 일로, 시마무라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왼쪽 검지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바라보며, 결국

이 손가락만이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를 생생하게 기억하

고 있군, 좀더 선명하게 떠올리려고 조바심치면 칠수록 붙

잡을 길 없이 희미해지는 불확실한 기억 속에서 이 손가락

만은 여자의 감촉으로 여전히 젖은 채, 자신을 먼데 있는

여자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같군,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면

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있다가, 문득 그 손

가락으로 유리창에 선을 긋자, 거기에 여자의 한쪽 눈이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마음을 먼데 두고 있었던 탓으

로,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그저 건너편 좌

석의 여자가 비쳤던 것뿐이었다. 밖은 땅거미가 깔려 있고

기차 안은 불이 밝혀져 있다. 그래서 유리창이 거울이 된

다. 하지만 스팀의 온기에 유리가 완전히 수증기로 젖어

있어 손가락으로 닦을 때까지 그 거울은 없었다.

 처녀의 한쪽 눈만은 참으로 기묘하게 아름다웠으나, 시

마무라는 얼굴을 창에 갖다 대더니 마치 해질녘의 풍경을

내다보려는 여행자인 양 재빨리 표정을 바꾸어 손바닥으로

유리를 문질렀다.

 처녀는 가슴을 약간 기울여 앞에 누워 있는 남자를 한결

같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으로 봐

서, 다소 매서워 보이는 눈조차 깜박이지 않을 정도로 진

지한 자세임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창 쪽으로 머리를 두

고 처녀 옆으로 다리를 구부려 올려놓고 있었다. 삼등 객

차이다. 시마무라의 바로 옆이 아니라 한 줄 앞 맞은편 좌

석이었으므로, 모로 누운 남자의 얼굴은 귀 언저리까지만

거울에 비쳤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