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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 전태일 | |
|---|---|
청계천8가에 있는 전태일 흉상 | |
| 출생 | 1948년 9월 28일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부 |
| 사망 | 1970년 11월 13일 (22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
| 사인 | 분신 자살 |
| 거주지 | 대한민국 |
| 성별 | 남성 |
| 국적 | 대한민국 |
| 학력 |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1학년 중퇴 |
| 직업 | 재봉사, 노동자, 노동 운동가, 인권 운동가 |
| 종교 | 감리교 |
| 부모 | 전상수, 이소선 |
| 자녀 | 없음 |
| 친척 | 여동생 전순옥, 여동생 전순덕, 동생 전태삼 |
| 웹사이트 | (재) 전태일재단 |
전태일(全泰壹, 1948년 9월 28일 (1948년 음력 8월 26일)[1] - 1970년 11월 13일)은 대한민국의 봉제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 인권1960년대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결성하고, 다니던 교회와 엠마누엘 수도원 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중 다시 왕성사의 재단사로 청계천동대문구청과 서울특별시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가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고, 박정희평화시장 입구에서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라이터로 분신 자살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 운동
사건 당시 그는 친구 김개남(가명)에게 자기 몸에 성냥 불을 그어 달라고 했고[2], 익명의 친구는 그의 몸에 불을 붙였다. 불이 전신에 붙은채 평화시장주사 비용이 필요하여 근로감독관의 보증이 필요하다 했지만, 근로감독관
생애[원본 편집]
생애 초반[원본 편집]
초기 활동[원본 편집]
전태일은 1948년 9월 28일 대구 남산동의 가난한 노동자인 전상수와 그의 부인 이소선[3] 그러다 재봉사였던 아버지 전상수가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서울1954년 서울 남대문국민학교
그의 가족은 처음에 서울역 근처 염천교[3] 한때 그의 어머니는 만리동 일대를 다니며 동냥했다.[3] 그러나 봉제 일을 하던 아버지가 취직하여 월세방을 마련하면서 월세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60년
1963년 3월 대구 청옥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지만[4], 가정 사정으로 1학년 재학 중 그해 12월재봉
청소년 시절[원본 편집]
아버지에게 재봉 일을 배웠으나 1964년 동생 전태삼을 데리고 다시 가출, 서울1965년 구두닦이로 구두통을 메고 평화시장을 돌아다니던 중, 그해 가을 의류제조 회사인 삼일사
하루에 하숙비가 120원인데 일당 오십원으론 어림도 없지만 다니기로 결심을 하고,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서 보충해야 했다. 뼈가 휘는 고된 나날이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희망과 서울의 지붕 아래서 이 불효자식의 고집 때문에 고생하실 어머니 생각과 배가 고파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 막내동생을 생각할 땐 나의 피곤함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후 1년간 회사를 다니면서 그는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노동운동과 노동자 인권 운동[원본 편집]
노동자 생활[원본 편집]
1965년 평화시장 내 삼일사의 미싱사로 옮겨 재봉사로 일하며 어린 여공들이 적은 월급과 열악한 근무환경과 위생 환경,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특히 함께 일하던 한 여공이 가혹한 노동 환경으로 인한 직업병인 폐렴1966년
1966년 8월 17일 평화시장 2층 244호에 있는 점퍼, 의류 공장인 한미사 재단보조로 취직하였다가, 그해 말 한미사1967년 2월
그는 공장 노동자 생활 중에도 고등학교 복학을 꿈꿨고, 1967년 2월 20일
1968년에 우연히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인 근로기준법[5] 그 뒤 해설서를 구입해 그 내용을 공부하면서 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의로운 분노를 느끼고,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6] 를 창립하여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과 현재 근로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기 시작하고 설문을 통해 현재의 근로실태를 조사하였다.
삼동회 조직과 노동자 권리 청원 활동[원본 편집]
그는 재단회사 시다들과 인근 공장 노동자들의 생활을 듣고 집에 와서 말하는 일이 잦아지다가 나중에는 노동 운동에 본격 투신하게 되었다. 어머니 이소선은 처음에는 그를 말렸지만, 1969년 6월 아버지 전상수가 고혈압
1969년 6월부터 재단사 친구들, 근처 공장의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바보회바보회
그는 여러가지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친구들을 규합하는 어려움, 주변의 냉소와 비야냥거림, 노동청과 근로감독관, 언론들의 기만극, 생계를 책임져주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간절한 바람 속에 서있었다.[7] 일부 미싱사와 봉제 노동자들은 그가 죽은 뒤에도 "자기 하나 죽는다고 뭐가 해결되느냐[3]"라고 비판하였다. 이 당시에 어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현실의 조롱과 냉소가 너무나도 잔혹하고 괴로웠다" 라고 썼다.[8]
노동실태 설문조사와 노동자 집회[원본 편집]
그는 밤이 새도록 근로기준법동대문구청근로기준법노동청[9] 가뜩이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던 전태일에게 그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노동이나 근로 기준법조차 사업주들의 편이라는 현실은 그를 한동안 허탈 상태로 몰아 넣었다.[9] 그는 청계천 일대의 노동 실태를 직접 조사, 설문하여 이를 토대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노동청노동청경향신문
1969년 7월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노동청노동청1969년 9월부터 1970년 4월감리교회1970년 4월부터는 평일에는 자신이 다니던 감리교회의 신축 공사장에서 일하며 밤에는 노동자 동지들에게 근로기준법
다니던 감리교회의 건물이 완공되자 1970년 4월부터 8월까지는 서울 삼각산의 임마뉴엘 수도원1970년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8월부터 9월
| “ | 1970년 여름 무렵, "아마도 한두 달 동안" 전태일은 김씨의 외삼촌이 운영하는 봉제공장에서 재단사로 일했다. 그가 노동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나중에 들었다. 재단사 전태일은 키가 작았다. 얼굴도 작았다. "땅땅했다"라고 김씨는 회고했다. "뭐랄까, 아주… 아주 자그마했어.[3]" | ” |
당시 그가 2개월간 일했던 미싱회사 대표의 외조카는 그가 키가 작고 탄탄했다고 기억하였다.
정치적 관점[원본 편집]
그는 매일 일기를 썼다. 한 일기에서 그는 북한한국 전쟁은 북한
| “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야수와 같은 북괴는 평화 속에 잠긴 남녁 땅을 피로 물드렸다.[10] | ” |
노동운동의 대부로 인식되는 탓에 그를 마치 반정부적이고 반체제적인 인물로 왜곡된 인식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정부와 대통령을 향해 보낸 탄원서에서도 그는 '대통령은 국부이고, 곧 저희들의 아버지'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대통령에게 노동자들의 극히 열악한 작업환경을 개선해주기를 호소하는 내용의 탄원서를 보냈다.
| “ |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들의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혁명 후 오늘날까지 저들은 각하께서 이루신 모든 실제를 높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경할 겁니다.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여 은미 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 한번 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 ...(이하 중략)... 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 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구두로써 감독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1개월에 첫 주와 삼 주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써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림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최소한 당사들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만족할 순진한 동심들입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 - 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11] | ” |
박정희[12]…(이하 생략)…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요.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곳(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13]"라고 했다.
생애 후반[원본 편집]
정부 탄원 실패[원본 편집]
1970년 9월 전태일은 한미사의 재단사가 되었다가, 같은 9월 왕성사삼동친목회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개선 진정서'라는 이름으로 노동청경향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자, 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임금, 노동 시간, 노동환경의 개선과 노동 조합 결성 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으나, 일을 무마하려는 정부의 약속 위반으로 인해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으며, 자본가들도 삼동회는 사회주의 조직이라고 헐뜯음으로써 노동자10월부터 그는 근로조건
그는 언론사들을 찾아다니면서도 노동자들의 참상을 전달했다. 1970년 10월 7일 마침내 시내 각 석간신문에 평화시장
1970년 10월 8일 그는 삼동회 대표들을 이끌고 평화시장 사무실에 찾아가 노동자 숙소 다락방 철폐, 정식 기숙사 설치, 노조박정희 대통령 앞으로도 탄원서를 보냈지만 탄원서10월 24일 그는 서울 도심에서 근로 조건 개선 거리시위를 기도했으나, 오후 1시 사전에 경비원의 신고로 정보를 입수하여 출동한 경찰
노동청에서는 11월 7일까지 법을 개정해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법 개정을 약속한 11월 7일에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11월 8일 전태일은 동료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근로기준법 책을 화형하자"고 제의했고, 거사 날짜는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원본 편집]
이에 따라 전태일은 삼동회 회원들을 이끌고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이라고 고발하는 뜻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의하고, 플래카드석유와 휘발유조영래는 1983년 전태일 평전[14]'는 것이다.
불길은 순식간에 전태일의 전신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그는 사람들이 많이 서성거리고 있는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나갔다. 그는 몇 마디 구호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15] 전태일은 3분 가량 방치되었으며, 이때 누군가가 근로기준법
| “ | 때마침 그 자리에 있던 한 회원이 근로기준법[15] | ” |
그러나 전태일의 몸에 불이 붙은 상태에서 방치당하고 있었다. 조영래[15]" 한다. 그는 온 몸에 불이 붙은채 평화시장 앞을 달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정부는 근로기준법잠바[15]" 한다.
최후[원본 편집]
쓰러진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으며 이 소식을 듣고 병원에 온 어머니 이소선에게 전태일은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16] 쓰러졌다.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응급치료를 받은 전태일은 온몸이 굳어서 펴지지가 않았다. 전태일의 어머니는 추워서 떨고 있는 아들에게 앞치마를 벗어 덮어주고 의사에게 갔다. 1만 5천 원짜리 주사 두 대면 우선 화기는 가시게 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훗날 집을 팔아서라도 돈을 갚을 터이니 그 주사를 맞게 해달라고 애원하자 의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러면 근로감독관에게 가서 보증을 받아오라고 했다.[17] 이때 평화시장 담당 서울시청
어머니 이소선이 다시 의사에게로 가서 매달리자 의사는 고개를 흔들며, "그 약이 지금 여기에는 없으니 성모병원으로 옮기도록 하라"고 했다. 이때까지 전태일은 간단한 응급치료 외엔 서너 시간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17] 명동 성모병원으로 전태일을 옮기는 앰블런스가 오자, 이때 근로감독관이 다시 나타나 전태일 등과 함께 타고 병원을 떠났다. 차 안에서 전태일은 근로감독관이 어머니와 하는 소릴 듣고 나서, "사람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감사가 끝났다고 그렇게 배신할 수가 있소? 내가 죽어서라도 기준법이 준수되나 안되나 지켜볼 것이오" 라고 마음 속으로 분개하였다.[17]
오후 4시경 그는 그는 구급차에 실려 서울 성모병원 응급실로 다시 후송되었지만, 11월 13일[17] 그는 한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그날 저녁 눈을 떠서 힘없는 목소리로 "배고프다……" 라고 하였다.[17] 11월 13일모란공원(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전태일의 유서 전문[원본 편집]
다음은 전태일이 분신하기 전 청옥고등공민학교 동창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유서의 전문이다.[18]
사랑하는 친우(親友)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19] 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사망 직후[원본 편집]
노동계[원본 편집]
그의 자살 이후 평화시장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다른 공장들에도 노동조합노동운동
회사의 착취와 해고를 당하면서도 단결하여 투쟁할 생각을 못하던 노동자들이 죽음1970년 11월 25일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의 분신 기도, 1971년 9월 한국회관(음식점) 노동자 김차호의 분신 기도, 8월 신진자동차 노조 조합원과 가족 1900여명의 파업투쟁, 한진상사 파월 노동자 400여명의 대한항공1971년[20]
청계천의 다른 반응[원본 편집]
1970년 8월~9월[3]"고 한다. 그의 외삼촌은 "우리 공장에 있다 그런 일 났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라고 나중에 말했다.[3] 사장의 외조카 역시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집안에 누워 계시고, 오빠가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로 일하고 있었으며[3], 그는 외삼촌의 공장에서 월급 2만원을 받고 시다로 일하면서 전태일을 봤다고 한다.[3]
일부 미싱사 등은 냉소적으로 반응하였다. 일부 노동자와 미싱사들 중에는 "자기 하나 죽는다고 뭐가 해결되느냐"라고 말하기도 했다.[3] 당시 초등학교만 나와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던" 일부 노동자들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이야기를 그저 귓등으로 흘렸다.[3]
정치, 사회계의 반응[원본 편집]
기본적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고발한 그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켜, 11월 16일 서울대11월 20일
시위 직후 서울대 측은 무기한 휴업령을 내렸으나 서울대생들은 계속해서 철야 농성을 벌였다.[21]
22일 새문안교회(예장통합23일에는 기독교계에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집전으로 추모 예배를 거행하였는데, 고(故) 장공 김재준 목사[22]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1971년 1월 23일[23] 이후 신민당은 노동 운동에 호의적인 정책을 펼쳤고, 노동자 시위는 경찰과 정부의 탄압을 피해 신민당
사후[원본 편집]
1972년이소선1984년 서울에서 노동운동가들 중심으로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85년1987년 6.10 항쟁 이후 노동단체들이 모여 그해 7월부터 8월1988년 11월 전태일의 분신 자살을 기념하기 위한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매년 11월2002년1996년[24] 이 '전태일 거리'에서는 전태일을 추모하기 위한 '전태일 거리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1999년부터는 민주열사를 비롯해 의롭게 숨진 시민의 기념표석을 세우는 서울시'유적지 사업'에 포함되어 평화시장 분신장소에 기념표석이 세워졌다. 하지만 2003년 청계천 복원공사로 철거되기도 하였다.[25]
저서[원본 편집]
- 《전태일 일기》
-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돌베개, 1983) : 전태일의 수기, 편지 서신, 노동설문조사 등 모음
학력[원본 편집]
명예졸업[원본 편집]
- 서울남산초등학교(남대문초가 폐교 후 흡수된 학교) 명예졸업
논란 및 이슈[원본 편집]
봉제 노동자 월급 조사[원본 편집]
동아일보의 1983년동아일보 기자가 1983년[26]"고 한다.
방조, 방치 논란[원본 편집]
전태일이 불을 붙일 당시 다른 사람이 그의 몸에 불을 붙였으나 불을 붙인 이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인권변호사 조영래[27] 《전태일 평전》을 처음 집필한 조영래[27] 1970년 11월 13일[27] 조영래[27]' 한다.
성냥불을 켜서 갖다 대어 달라는 전태일의 부탁이 심각하였기 때문에 불길한 예감이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긴 했으나 "설마…"하는 생각에 그는 성냥불을 켜서 전태일의 옷에 갖다 대었다. 순간 전태일의 옷 위로 불길이 확 치솟았다. 친구들 보고 먼저 내려가라고 한 뒤 그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한 되 가량의 석유를 온 몸에 끼얹고 내려왔던 것이다.[15]
그의 몸에 불이 붙은 뒤에도 현장에 사람이 있었으나 3분 가량 방치되었다. 조영래국민은행[15]" 한다. 그러나 전태일은 현장에서 3분 가량 방치되었다. 도리어 근로기준법 화형식이라 하여 근로기준법[15] 그러다가 한 친구가 뛰어와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잠바[15]
병원 방치 논란[원본 편집]
서울 성모병원[28] 그는 병원 도착 직전까지 사망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전태일은 구급차로 인근 병원에 후송되었다가 다시 서울 성모병원으로 후송된 뒤에도 3~4시간 정도 방치되었다고 한다. 성모병원에서는 전태일을 응급실에 얼마간 두었다가 입원실로 옮겼는데, 이미 회생할 가망이 없다고 의사는 진단했다.[17] 의사는 전태일에게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3~4시간 가량 그를 진료하지 않았다.
입원실에서도 별다른 치료없이 환자를 거의 방치해두다시피 하였다.[17] 어머니 이소선은 목이 마르다면서 물을 달라고 수없이 졸라대며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물을 마시면 화기가 입 속으로 들어가서 영영 살릴 수 없게 된다는 생각에 물을 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서 갈증이라도 면하게 해주려고 물을 적셔서 입에 축여주었다.[17] 저녁이 되면서부터 전태일은 기력이 탈진해 가는 듯 잠잠히 누워 있었다.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듯하더니 눈을 떠서 힘없는 목소리로 "배고프다…" 라고 하였다.[17] 그리고 누구도 전태일의 진료비를 내지 않았다.
이를 두고 환자를 살려야 되는 의사1970년 11월의 대한민국1987년의 의료계도 사회적 책무라는 면에서는 1970년[29]"는 비판이 있다.
노동인권선언에 영향[원본 편집]
- 당시 노동자들의 참혹한 노동노동자와 학생, 지식인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연대는 종전에는 보도조차 하지 않던 노동문제신문, 방송
- 전태일의 항거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민주노동[30]
-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은 전태일 열사의 삶을 비정규직 노동운동한겨레 21과의 인터뷰에서 "전태일 열사는 그 자신도 어려웠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여성노동자비정규직[31]
보상금 문제[원본 편집]
2002년 11월 28일윤용하[32] 위원회는 이에 대해 "국가배상법은 희생 당시 월급액을 기준으로 보상금[32][33]
그의 어머니 이소선(李少線) 등 민주화운동 관련자 유가족 8명이 12월 31일[34] 어머니 이소선은 "태일이가 보상금으로 930만원으로 받는데 비해 1991년 분신 자살한 윤용하씨는 2억 3천만원을 받는다"며 "이는 태일이의 보상금을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지 않고 당시 임금만을 단순 반영한 호프만식 계산법[34] 재심청구를 주선한 전국민주민족유가족협의회(유가협)도 보상금심의위원회가 당시 전문 기술자였던 전씨를 단순일용직 근로자로 분류해 보상금[34]
결국 2005년 4월[35] 이에 따라 전태일 열사의 유족들에게 1억 4천여만원이 추가로 보상되었다.[35]
전태일 관련 작품[원본 편집]
그의 삶은 1983년 출판된 조영래 변호사의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전태일 역을 맡은 배우 홍경인과 내레이션 역할을 맡은 배우 문성근[36] 2000년에는 전태일 30주기에 맞춰 제작된, 전태일열사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엮은 영화 《전태일의 기억》이 개봉하였다.[37] 연극으로는 자유학교 물꼬 학생들의 연극모임 '터'의 9기 학생들이 선보인 《스물 한살》이 있다.[38]
가족[원본 편집]
그에게는 성이 다른 이모와 외삼촌이 있는데, 이는 그의 외할아버지 이성조는 어머니 이소선
- 외할아버지 : 이성조(? ~ 1933년)
- 외할머니 : 김분이
평가[원본 편집]
성서학자 정승우에게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39]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는 대한민국의 노동 인권과 민주주의열사'나 '동지'[40] 호칭을 붙인다.
한편 이후 노동운동과 반정부 운동의 상징이 되면서 대단히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인물인 것처럼 이미지가 만들어졌다[41] 는 시각도 있다. 역사학자 함규진에 의하면 "노동운동과 반정부 운동의 상징이 되면서 대단히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인물인 것처럼 이미지가 만들어어졌지만, 그가 쓴 글은 아주 소박하고 온건하다. '대통령 전상서'의 내용을 보면 골자가 근로기준법[41]"라는 것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어보면, 전태일은 급진적이거나 생각이 편향된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인십계명으로써 하나님이 안식일을 정하셨으니 노동자
어머니 이소선의 회고[원본 편집]
자식들에 대해서: 이소선
태일에 대해: "태일이는 사람을 참 좋아했어. 같은 노동자를 너무도 사랑했다고. 그러니 열사나 투사보다 그냥 동지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어. 태일이는 지금도 노동자와 함께하는 동지라고, 제발 그렇게 불러달라고 전해줘. 태일이는 날 참 좋아했어. 아직도 이 옷을 못 버리고 겨울이 오면 꼭 챙겨입는데, 태일이가 공장에서 남은 천으로 엄마 준다고 손수 만들어 준 내의야. 누가 새옷 입으라고 사줘도 안입고 난 이것만 입어…그런 태일이 아니냐"
태일의 동무들에 대해: "나 그대들 없었으면 지금 살아있지도 못했어. 태일이가 죽고 병원에 찾아와서 이제부터 지들이 내 아들이라는거야. 그리고 지금 40년 가까이 지났어. 변치않고 엄마 이상으로 잘해줘. 얼마나 챙겨주는지 몰라. 난 정말로 태일이 친구들을 내 아들이라 생각해. 배곯아가며 두들겨 맞아가며 청계노조를 만들고 지켜냈지. 이들이 나와 함께하지 않았다면 태일이와의 마지막 약속도 지킬 수 없었을거야. 난 그냥 미쳐 죽었을테지. 어머니라고 얼마나 생각해 주는지, 순덕이 결혼할때도, 손주들 대학들어갈때도 이들이 태일이 노릇 다했어. 열서너살 먹은 여공들, 그 어린 것들이 얼마나 고생했냐. 이들이 없었으면 청계노조를 지탱해올 수도 없었을꺼야. 명절때마다 한복 차려입고 세배하고 그랬어. 지금 다 시집가고 애낳고 살지만 그래도 떡이랑 사들고 찾아오고 그래 이 엄마 준다고."[42]
기타[원본 편집]
70년대 봉제공이던 전태일의 경우 당시 월급이 2만원 가량이었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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