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모든 것조선을 바친 헐버트
‘파란눈의 한국혼…’ 등 한일관계 연구서 출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지 11년 만인 1887년 조선정부는 도쿄(東京)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상주 공사관인 주일공사관을 개설했다. 이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당해 주일공사관이 폐쇄된 1905년 12월까지 조선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근대적 외교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주일공사로 임명돼 부임했던 인물은 초대 공사 민영준을 비롯해 총 8명이었다. 이 가운데 1907년 사망한 조병식을 제외한 7명은 1910년 일본의 국권 강탈 후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친일파로 전락했다.
이에 비해 조선정부가 최초로 설립한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가 되기 위해 1886년 조선에 왔던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사진)는 1907년 여름 일본의 박해로 한국을 떠날 때까지 20여년간 활약하며 근대교육의 초석을 놓은 것은 물론, 고종황제의 특사로 대한제국의 주권 수호 활동도 펼쳤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서재필·이승만 등과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그는 생전에 AP통신 기자에게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을 남겼다. 1949년 광복절을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돌아온 지 1주일(8월5일) 만에 서거한 그는 소원대로 현재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혀 있다.
일본의 한국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대일외교의 실무를 담당했던 주일공사들의 파견 배경 및 과정, 외교활동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대일정책과 한·일관계사를 살펴본 연구서와 헐버트의 평전이 최근 출간됐다. ‘친미개화파연구’ 등의 저서를 펴낸 개화기사 전공자인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펴낸 ‘한국근대 주일한국공사의 파견과 활동’(푸른역사)과 체이스맨해튼은행 한국대표 등을 지낸 금융인 출신으로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김동진씨가 쓴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참좋은 친구)가 바로 그것. 두 책은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 근대사의 비극과 관련, 일제의 침략행위나 친일파에 대한 비판 못지않게 우리의 내적 반성도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일공사의 파견과 활동을 정리·분석한 한 교수의 책에 따르면 1887년 주일공사관 설치는 당시 청나라의 간섭을 피해 미국과 유럽에 전권공사를 파견하기 위한 선례를 만들고자 추진됐다. 이렇게 파견된 주일공사들은 특정 업무를 수행한 수신사 등의 외교사절단이나 유학생들과는 달리 일본에 장기간 주재하면서 양국간 외교 현안을 처리했으며 일본의 동향을 광범위하게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귀국 후 정부의 각종 개화자강 추진기구에서 근무하거나 갑오개혁·독립협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등 정치·외교분야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한 인물들이 많았다.
하지만 정작 주일공사로 임명된 인물들은 많았지만 실제로 부임한 경우는 민영준과 김가진, 김사철, 고영희(2차례 부임), 이하영(3차례 부임), 조병식, 성기운, 조민희 등 8명밖에 안되는 등 이들의 활동에는 한계도 적지 않았다. 이완용 등 무려 10명이 주일공사로 발탁됐지만 갖가지 이유를 들어 부임하지 않았다. 민영준이 실제 도쿄에서 근무한 기간이 1개월 반밖에 되지 않는 등 주일공사들의 근무기간도 짧았다. 이는 무엇보다 고종 또는 정부가 상주외교관인 주일공사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갑오개혁·아관파천·의화단사건 등 국내외 정세 변동에 따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일회성의 특사 형식이나 요식행위로 임명·파견한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헐버트의 ‘대한제국멸망사’를 읽고 감동을 받아 수십년간 헐버트를 연구해왔다는 김씨가 쓴 평전은 고종황제가 해외 은행에 맡겼다가 일본에 빼앗긴 거액의 내탕금과 관련된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전달한다. 김씨에 따르면 고종은 1903년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독일계 덕화(德華)은행에 51만마르크를 맡겼다. 이 돈은 당시 대한제국 총세입의 1.5%나 되는 큰돈이었으며 연리 10%로 100년을 계산하면 현재 가치가 약 2조원에 달한다. 일본이 1908년 탈취해간 이 돈을 찾기 위해 40년 동안 동분서주했던 헐버트 박사의 노력을 추적한 김씨는 헐버트가 평소 강조했던 올바른 나라사랑과 교육입국, 박애주의 정신 등을 오늘날에도 우리가 이어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최영창 2010-07-20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미국 선교사·언어학자·사학자. 버몬트주 뉴헤이븐 출생. 한국이름은 할보(轄甫). 1884년 다트머스대학을 졸업한 뒤 유니온신학교에 들어갔다가, 1886년(고종 23) D.A. 벙커 등과 함께 한국에 와서 육영공원(育英公院)의 외국어 교사로 1891년까지 재직하였다. 그 뒤 삼문출판사의 2대 사장, 황성기독교청년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반일(反日)입장을 취해 을사늑약 후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였고,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가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만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한국평론》을 통하여 일본의 야심과 야만행위를 폭로하였다. 1907년 고종에게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파견을 건의하였고, 한국 대표단보다 먼저 헤이그에 도착하여 《회의시보》에 대표단의 호소문을 싣게 하는 등 한국의 국권회복운동에 적극 협력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徐載弼)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수립 후 1949년 국빈으로 초대되어 방한중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 《한국사(2권)》 《대동기년(大同紀年, 5권)》 《한국견문기》 등이 있다. 1950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이 추서되었다.
헐버트 57주기
독립유공자 헐버트 박사 57주기 추모식
4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에서 독립유공자 헐버트 박사 57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헐버트 박사는 조선말 왕립영어학교 교사로 고종 황제를 보좌했고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와 싸우다 추방당했다. 정일권 서울지방보훈처장이 추도사를 읽고 있다. 2006-08-04
사후 반세기만에 새겨진 헐버트박사 묘비명
4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서 열린 호머 헐버트 박사의 묘지에 헌화가 되어 있다. 헐버트 박사는 1950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았으며 사후 반세기가 지난 1999년 8월 5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헐버트의 묘" 라는 묘비명을 썼다 . 2006-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