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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

마야문명-중미 멕시코 잉카문명-남미 페루 칠레

작성자더드미|작성시간09.10.03|조회수1,566 목록 댓글 0

마야문명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마야유적지

 
 
아시아에서 온 인디언들

 


지금으로부터 4만년에서 1만년 전 사이, 마지막 빙하기에 해수면은 현재보다 50m 정도 낮았다. 베링해에는 물이 없었고, 시베리아에서 알래스카까지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아시아에서 온 인디언들은 이 길을 따라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고, ‘비어 있는’ 땅에 자리를 잡았다. 사냥과 어업으로 먹고살던 유목민이었던 그들은 새로운 땅에 널려 있는 들소와 맘모스 등 풍부한 사냥감에 매료되었다. 파나마해협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 인디언들은 기원전 1만년경에는 최남단 ‘불의 땅(티에라델푸에고)’에 이른다. 인디언들이 정착하면서 다양한 문명이 태어났다. 3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마야 문명,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 중미의 아스텍 문명,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 안데스 산맥의 잉카 문명 등이 그것이다.

 


1492년 바하마 제도의 과나하니 섬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그곳이 인도 대륙인 줄 알았다. 그래서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른 것이다. 당시 ‘인디언’은 약 5000만명이었다. 유럽 인구 6700만명에 버금가는 수였다. 하지만 150년이 지나고 인디언의 수는 50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정복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유럽에서 들어온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마야문명 (-文明 Maya Civilizatio...)
멕시코 남부 및 과테말라·벨리즈를 중심으로 온두라스·엘살바도르 일부를 포함한 약 32만 4000㎢의 지역에서 번영했던 마야족 문화.

언어와 기원
현재 200만 명 이상의 마야족 후손이 멕시코·중앙아메리카에 살고 있으며, 마야어는 30가지 이상의 방언으로 나누어져 있다. 크게 북부 베라크루스와 타마울리파스지방의 아스텍어와 유카탄지방의 유카텍어 및 남부 마야의 여러 언어로 분류된다. 언어연대학적 연구에 의하면 BC 3000년대에 원(原)마야어족이 과테말라 고원 서부에 살았으며, 거기에서 아스텍어족과 유카텍어족이 나뉘어진 뒤에 다시 마야어족의 모체에서 서부그룹과 동부그룹으로 나누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서부그룹은 BC 100년 무렵 촐어와 첼탈어로 나뉘었으며, 첼탈어족은 400년 무렵까지 현재의 멕시코 남동부 치아파스고지로 이동하여 다시 초칠어가 생겼다. 촐어족에서는 또다시 여러 어족이 파생했다. 많은 연구자들은 촐어족이 고전 마야문화를 창조하였고, 고전기 전기에는 첼탈어족도 이에 관여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지역과 시대구분
마야문명은 지역적으로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태평양연안저지대·남부고지대·북부고지대·남부저지대·중앙부저지대·북부저지대로 나뉜다. 이 가운데 마야문명의 중심이 된 곳은 남부와 중앙부의 저지대였다. 마야시대에서 수렵사회로부터 농경·정주사회(定住社會)로의 이행기인 고기(古期;BC 8000∼BC 2000)의 양상은 1980년부터 3년에 걸쳐 이루어진 R.S. 맥니시의 벨리즈조사에 의해 밝혀졌다. 고기 이후에 정주생활의 패턴과 토기문화가 확립되는 기간을 선고전기(先古典期;형성기)의 전기(BC 2000∼BC 900)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에 태평양연안 저지대에는 바라·오코스 등의 토기복합이 나타났다. 남부고지 카미날후유유적 아레발로상(相)도 같은 시기의 것으로 해석된다. N. 해먼드가 발굴한 벨리세·쿠에요의 첫 토기복합은 처음에는 BC 2000∼BC 1200년대의 것으로 여겼으나, 그 뒤 방사성탄소(放射性炭素) C-14값의 재검토로 선고전기 중기 이후의 것으로 여겨진다. 선고전기 전기 중에 일어난 주목할 만한 현상은 멕시코만 연안지방에서 발생한 올멕문명이다. 올멕문명이 나중에 마야문명지대에 미친 영향은 아직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고전기의 마야문화에서 사용된 장기일계력(長期日計曆)이 올멕문명에서 이미 나타나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다음의 선고전기 중기(BC 900∼BC 300)는 올멕문명이 쇠망한 시기인데, 이 시기에 마야문명지대에서는 농경사회가 확립되어 분업과 교역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쿠에요에서는 제사를 위한 공공건물이 건조되었다. 카미날후유의 라스차루카스와 중앙부 저지대의 마몬 등의 토기복합도 이 시기에 속한다. 선고전기 후기(BC 300∼AD 200)에는 마야문명의 특징이 뚜렷이 나타나, 남부 해안 비탈면에서 고지대에 걸쳐 돌비석·기단(基壇)·신전 등을 갖춘 이사파·아바하 타칼리크·엘 바우르·차르추아파 등 제사센터가 생겼고, 중앙부 저지대에도 티칼·엘 미라도르·라마나이·세로 등에 신전이 건립되었다. 엘 미라도르는 1970년 이래의 조사로 밝혀진 대도시 유적으로, 그 규모는 고전기에 번영한 티칼을 능가한다. 마야문명 최성기인 고전기는 종래 292년의 연호를 갖는 티칼의 돌비석 29호에 의해 300년 무렵 시작된 것으로 여겼으나, 최근의 조사로 마야문명의 특징을 모두 갖춘 대도시가 선고전기 후기에 발생한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2세기에는 이미 고전기가 시작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잉카문명 (-文明 Inca Civilizatio...)
남아메리카 페루 남부 쿠스코분지를 중심으로 15∼16세기 초까지 번영했던 문화. 북쪽으로는 에콰도르로부터 남쪽으로는 칠레 중부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하여 그때까지의 안데스문명을 집대성했다.

잉카의 역사
잉카족은 일명 케추아족이라고도하며, 그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전설을 종합하면 13세기 무렵 쿠스코분지에 침입하여 원주민을 정복하고 정주한 것으로 짐작된다. 정복자 에스파냐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잉카의 전설에 따르면 초대 망코 카파크 이후 13명의 황제가 있었는데, 제7대까지는 전설상 인물이다. 제8대 황제 비라코차시대에 강적 창카족의 공격을 받았으나, 그를 격퇴하는 데 성공한 그의 아들 티투 쿠시가 제9대 황제 파차크티가 되어 많은 개혁을 단행하는 동시에 주변 여러 민족을 정복하여 제국을 이룩하는 데 기초를 닦았다. 파차크티 자신이 정복한 곳은 티티카카호(湖) 연안 루파카족과 쿠스코 동쪽에 있던 쿤티스유지방 등이었고 그 아들 투파 잉카 유팡키도 페루 북부에 쳐들어가 치무왕국을 멸망시켰으며, 파차크티가 죽은 뒤에는 에콰도르와 칠레, 아르헨티나의 북부까지 정복했다. 15세기 말 잉카(왕이라는 뜻)가 죽자 우아이나 카파크가 잉카가 되어 에콰도르지방 개척에 주력했기 때문에 원래 수도인 쿠스코에 있던 잉카지배층과 에콰도르 키토에 있던 잉카 부장(部將) 사이에 대립이 시작되었다. 1525년 무렵 우아이나 카파크가 죽은 뒤 쿠스코에는 우아스카르가, 키토에는 아타우알파가 대두했으며 1531∼1532년에 내란이 일어났다. 아타우알파군이 쿠스코군을 완전히 제압함으로써 내란은 끝났으나 그 직후 F. 피사로가 인솔하는 에스파냐군이 침입하였다. 1532년 11월 16일 고원도시 카하마르카에서 에스파냐군에게 아타우알파가 사로잡혀 사실상 잉카제국은 무너졌다. 그 뒤 망코라는 잉카와 그 아들들이 1571년까지 쿠스코 북서쪽 산 속에 진을 치고 에스파냐인에게 저항을 계속했다.

정치·경제
잉카문명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정치제도와 경제통제방법이다. 이론상 잉카국가에서는 각지방 토지를 잉카(왕)와 태양신 및 일반 국민을 위해 셋으로 나누어 경작하고 잉카와 태양신을 위한 수확물은 창고에 보관하였으며, 그 일부는 쿠스코로 보냈다. 따라서 쿠스코는 전국에서 집하되는 방대한 물자집적소가 되었고, 그 물자를 이용하여 잉카는 국민을 대토목공사나 군대로 징발할 수 있었다. 동원되는 인구는 10진법에 따라 10명·100명·1000명 단위로 집단을 조직하고 1만 명을 기준으로 행정책임자를 임명하여 통솔하게 했다. 전국을 4개 지방으로 나누고 각지방마다 왕족 중에서 지사를 선발했다. 중요한 곳에는 행정관을 파견하는 한편 순찰사는 각지방을 순시하며 매년 인구통계조사를 하기도 하고 재판도 했다. 세금으로 납입되는 물자의 수송이나 군대의 이동 등을 위해 전국적으로 도로망이 만들어졌고, 도처에 숙소와 창고가 설치되어 여행자의 편의를 도모했다. 수도와 각지방 사이에는 파발꾼을 두어 연락을 취했으며, 군사(軍事)나 제사용 물자는 각지방에 세워진 <처녀관(處女館)>의 여성들에 의해 생산되었다. 수도에는 태양신과 잉카왕에게 시중드는 여성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선택된 자>라고 불렸다. 남성들은 야나코나라고 하는 사용인을 각지방 공동체에서 뽑아 귀족이 소유하는 사유지 경작이나 가축지기일을 맡았다. 이 나라에서는 강제적 인구이동도 시행되었다. 국가통치를 위하여 태양신 숭배나 공용어(케추아어)의 사용이 강요되었으나, 잉카사회의 기본단위는 아이유라는 각지의 친족공동체였으며 또 잉카 이전의 지방세력이 편성한 정치조직이나 안데스의 고도차를 이용한 생산방식도 대부분 그대로 답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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