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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우리나라 4대명필과 글씨

작성자박영우|작성시간11.08.12|조회수464 목록 댓글 3

우리나라 4대 명필

 

조선시대의 4대 명필(四大名筆)로는 안평대군 (安平大君),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 한석봉(韓石峰) 그리고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를 꼽는다.  또 우리나라 4대 명필로는 신라의 김생(金生), 고려의 대감국사 탄연(大鑑國師 坦然), 조선 전기의 안평대군 그리고 후기의 김정희를 꼽고 있으며, 여기서 또 그 중 둘을 고르라면 김생과 추사가 남는다(꼭 한명만 꼽으라면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라 할 수 있음). 여기 김생, 안평, 봉래, 추사의 유묵을 몇점 붙이니 조금이나마 그 향기를 맡아 보시길...  

 


                                                                                                                                                 추사 김정희 글씨

 

김생(金生)

 

동국명현유묵 중 - 김생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생(金生, 711(신라 성덕왕 10)~791(원성왕 7))은가난한 평민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서도에 정진해 예서·행서·초서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하여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불렸다. 안동 문필산(文筆山), 경주 경일봉(擎日峰) 석굴(石窟) 같은 곳에서 글씨 공부하였고, 충주 북진애(北津崖)에 있는 절에서 중이 되어 두타행(頭陀行)을 닦았다. 고려 사신 홍관(洪灌)이 송(宋)의 변경(汴京)에 체류할 때 김생의 글씨를 가져다 보이자 송의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왕희지(王羲之)에 비길 만한 천하의 명필이라고 격찬했다. 그뒤부터 중국 사신들은 김생의 필적을 매우 귀하게 여겨 얻어갔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나 미수기언(眉叟記言)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그의 유일한 서첩으로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가 있으며 해동명적(海東名蹟), 대동서법(大東書法)에도 몇 점의 글씨가 실려 있다. 이밖에도 백률사석당기(栢栗寺石幢記),·백월서운탑비(白月栖雲塔碑)에도 남아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

 

훈민정음(안평의 글씨로 알려져 있음)

 

 

몽유도원도(안견) 발문<일부>

<내용>

정묘년(1447-세종 29년) 4월 20일 밤, 내가 막 잠이 들려고 할 즈음, 정신이 갑자기 아련해지면서 깊은 잠에 빠지고 이내 꿈을 꾸게 되었다. 홀연히 인수(박팽년)와 더불어 어느 산 아래에 이르렀는데, 봉우리가 우뚝 솟았고 골짜기가 깊어 산세가 험준하고 그윽하였다. 수십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있고, 그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는데 숲 가장자리에 이르러 갈림길이 되어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던 터에 마침 산관야복 차림의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 나에게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도원에 이르게 됩니다.”라 하였다. 내가 인수와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갔는데, 절벽은 깎아지른 듯 우뚝하고, 수풀은 빽빽하고 울창하였으며, 시냇물은 굽이쳐 흐르고, 길은 구불구불 백 번이나 꺾이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중략)

 

이에 가도(안견)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옛날부터 일컬어지는 桃園이 진정 이와 같았을까? 뒷날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옛날 그림을 구하여 나의 꿈과 비교하게 되면 무슨 말이 있을 것이다. 꿈을 꾼 지 사흘째에 그림이 다 되었는지라 비해당의 매죽헌에서 이 글을 쓰노라.(안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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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安平大君, 1418(태종 18)~1453(단종 1))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글씨(書)와 그림(畵)에  뛰어났다. 그는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개성을 중시하던 송대의 서풍(書風)과는 달리 원나라 조맹부의 서법, 즉 진당(晉唐) 이전으로의 복고를 주장하여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바탕으로 필법이 굳세고 결구가 정밀하면서도 유려한 서체를 완성했다. 해서와 행서는 물론 당시에는 잘 쓰이지 않던 초서, 전서, 예서까지도 연구했다. 송설체는 고려말 원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충선왕이 조맹부와 직접 교류가 있었으며, 특히 이암은 조맹부 필법의 진수를 체득하여 귀국한 뒤 처음으로 송설체를 전한 인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안평대군을 위시하여 집현전을 중심으로 그와 교유하던 문사들이 송설체를 사용했다. 그후 조선 중기까지 200여 년 동안 해서·행서에서는 거의 송설체가 지배할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안평대군은 1445년까지 도합 222 축(軸)이 달하는 서화를 수집하였는데, 그 중에는 그가 아끼던 안견의 작품 30점과 일본의 화승 철관(鐵關)의 작품이 4점 외에 그나머지는 모두 중국 역대(歷代)의 서화였다(그는 형인 세조대왕에 의해 역모죄로 사사된다.) 

 

 

양사언(楊士彦> 

 

학성에서 벗에게 보냄(鶴城寄友人)

<내용>

山水情懷老更新(산수정회로경신)  山水에 대한 情懷는 늙을 수록 더욱 새로우니

如何長作未歸人(여하장작미귀인어찌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으리

碧桃花下靑蓮舍(벽도화하청연사)  (상상의) 파란 복사꽃 아래 푸른 연꽃집에서

瓊島瑤臺入夢頻(경도요대입몽빈)  꿈결에 자주 瓊島瑤臺로 들어가지 않으리 

    ♣瓊島와 瑤臺는 옥으로 장식한 섬과 누대라는 뜻

 

오언시 필적

오언시 필적은 둥근 원필세(圓筆勢)의 빠르고 거침없는 대자초서(大字草書)로 자유분방하고 도가적 기풍의 예술세계를 가졌던 양사언의 성품과 그가 지향한 초서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초성(草聖)이라 불렸던 그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는 명작으로 평가되며, 더욱이 뒤쪽에 조선후기 명필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1749년 발문(3건)과 조명교(曹命敎,1687~1753)의 발문이 딸려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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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로 잘 알려진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중종12)~1584(선조15))은 조선 전기의 문인이며 ·서예가이다. 자연을 즐겨 회양군수 때 금강산 만폭동(萬瀑洞)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8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시(詩)와 글씨에 모두 능했는데, 초서(草書)와 큰 글자를 잘 써서 안평대군(安平大君) ·김구(金絿) ·한호(韓濩) 등과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린다. 특히 초서를 잘 써서 초서의 성인(草聖)이라 불리우는 그는 허균, 이달 등 당대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그의 시풍은 이별과 상사()의  서정적인 시와 낭만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들로서  당대 조선문단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집으로 봉래시집()이 있고 유묵(遺墨)으로 그가 지은 미인별곡(美人別曲)과 허강(許橿)이 지은 서호별곡(西湖別曲)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석봉(韓石峰)

 

현판 글씨들

                                                                                                  전북 익산시 석불사 대웅전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정 

 


                                                                                                   전남 나주시 노안면 쌍계정

 
추풍사(秋風辭)


                                                                                                            

 <내용>

秋風辭    (漢武帝) 

秋風起兮白雲飛(추풍기혜백운비) : 가을 바람 일어나니, 흰 구름 난다
草木黃落兮雁南歸(초목황락혜안남귀) : 초목이 누렇게 떨어지니, 기러기가 남으로 돌아간다
蘭有香兮菊有芳(난유향혜국유방) : 난초가 향기로우니 국화도 향기롭구나
懷佳人兮不能忘(회가인혜불능망) : 미녀를 생각하니 잊을 수가 없도다
汎樓船兮濟汾河(범루선혜제분하) : 배를 띄워 분하를 건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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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韓石峯, 1542(중종38)~1605(선조38))은 문신이며 서예가로 석봉은 호이고 이름은 호(濩)이다. 명나라의 명필가 주지향(朱之香)은 한석봉을 가리켜 “왕희지(王羲之) 및 안진경(顔眞卿)과 우열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라고 비유할 정도로 글 솜씨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한석봉은 사자관(寫字官)으로서 국가의 주요 문서 및 외교 문서를 도맡아 작성하며 지냈는데, 그 동안 사신을 따라 몇 차례 명에 다녀왔으며 명나라에 갈 때마다 연석이 벌어진 자리에서 특유의 정교한 필법으로 글씨를 써서 동방 최고의 명필로 아낌 없는 칭송을 들었으며, 명나라의 여러 고위 관료들로부터 종종 완희지와 비교하는 평판을 들었다. 선조는 그의 글씨를 항상 벽에 걸어두고 감상하였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을 도우러 왔던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마귀(麻貴) 등도 한호에게 친필을 부탁하여 얻어 가지고 갔다고 전해진다.

 

한석봉은 왕희지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혔으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뛰어난 평필가들의 필법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 등에 모두 뛰어나게 되었다. 석봉 서체의 특징은 그가 조송설(趙松雪)체를 쓰면서도 자기 독특한 체풍(體風)을 세운 데 있다. 그렇게 한호는 그때까지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풍조를 깨뜨리고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여 석봉류의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만들어냈다. 중국 왕세정(王世貞)은 필담(筆談)에서 석봉의 글씨를 가리켜 “성난 사자가 바위를 갉아내고, 목마른 천리마가 내로 달리는 것같이 힘차다.”라고 했으며, 명나라 한림 주지번(朱之番)은 “석봉의 글씨는 능히 왕우군(王右軍)·안진경(顔眞卿)과 어깨를 겨눌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의 글씨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친필 진본이 별로 없으나 석봉서법이라든가 석봉천자문과 같은 책이 모사본으로 전해지고 있어 그의 흔적들 더듬어 보게 한다. 그러나 그의 글씨로 비문이나 편액 등에 많이 남아 있어 탁본으로 유행하고 있다.

 

 

秋史 김정희

 

현판 글씨들


                                                                                                            무량수전 현판-대흥사

 

                                                                                                               죽로지실-추사고택 

竹爐止室 : 대나무 화로와 차향이 머무는(止) 방이란 뜻으로, 추사 김정희 선생이 황상이라는

친구에게 써 준 다실 명칭으로  차를 달여 마시어 늘 차향이 그윽한 文士의 서재를 지칭함이다.

추사의 작품중 많지 않은 예서 풍의 빼어난 글씨다 

 

                                                                                                                보정산방-다산초당

 

강진에 유배가 있던 정신적인 스승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게 써준 글씨로 현재 다산초당에

걸려있다(이 현판은 2005년도에 도난당했다 되찾은 바 있음). 보정(寶丁)이란 말은 중국 옹방강이

소동파를 좋아해서 보소(寶蘇)라 당호를 썼듯이, 다산 丁若鏞을 보배롭게 여긴다는 뜻이다.  

 

                                                                                                        국립중앙방물관 소장 

谿山無盡-계산은 다 함이 없다”라는 뜻으로 계산초로(谿山樵老; 산속의 늙은 나무꾼)라는 호를

가진 안동 김문 세도가  김수근(金洙根, 1978~1854)에게 써 준 것으로 자기보다 나이가 젊은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 써준 것이나 글씨 자체는 예술성이 매우 높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기둥에 쓰여진 글씨들(柱聯)

화법서세(畵法書勢) <129.3×30.8cm>

 

화법유장강만리(畵法有長江萬里)

서세여고송일지(書勢如孤松一枝)

화법(畵法)에는 장강(長江) 만리(萬里)가 들어 있고,

서세(書勢)는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다.

 

협서(夾書 옆에 쓴 글),  "근래 사람들은 붓에 먹을 적게 찍어 가지고 원대(元代)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황한간솔(荒寒簡率)한 맛을 내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짓이다. 왕유(王維), 이사훈(李思訓), 이소도 부자(李昭道父子), 조영양(趙令穰), 조맹부(趙孟採)는 모두가 청록색을 사용한 것이 더 우수하였다. 품격이 높다는 것은 형태가 아니요 정신이다. 이 정신을 체득한 사람이면 청록이나 니금(泥金)을 사용해도 좋다. 서법도 마찬가지다."

 

 

 유애도서(唯愛圖書) <127.4×31.2cm>

 

 唯愛圖書兼古器(유애도서겸고기)

 且將文字入菩提(차장문자입보리) 

 오직 그림과 글씨를 사랑하되 옛것(古器)도 아울러 하며,

 또 문자(文字)를 가지고서 큰 깨달음(菩提)에 이른다


 

 

직성수구(直聲秀句) <122.1×28cm>

 

직성유궐하(直聲留闕下)

수구만천동(秀句滿天東)

곧은 소리는 대궐 아래 머무르고,

빼어난 구절은 하늘 동쪽(우리나라)에 가득하다.

 

<양 옆 작은 글씨 새김> 4쪽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계속 이어진 것임

 

고순(顧蒓 1765~1835) 선생의 문장과 풍채는 천하가 모두 다 압니다. 저번에 송균(松筠 1744~1835)을 위한 한 말씀은 더욱 동쪽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해 듣고 외우는 바 되어 크게 이야기 합니다. 만리 해외에 제접(梯接:사다리를 놓아 서로 만남) 할 길이 없더니 요즈음 『복초재집(復初齋集)』을 보는데, 고순과 주고받은 시 구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묵연(墨緣 :먹으로 맺은 인연)의 끝에 부탁하여 글귀를 모아 보내드림으로써 일찍부터 동경하고 사모하던 작은 뜻을 폅니다. 해동의 추사 김정희가 갖추어 씁니다.

 

<협서>

오른쪽 글 우단

顧南雅先生文章風裁天下皆知之向爲湘浦一言尤爲東人所傳

고남아선생문장풍재천하개지지향위상포일언우위동인소전

오른쪽글 좌단

誦而盛道之萬里海外無緣梯接近復初齋集多有

송이성도지만리해외무연제접근복초재집다유

왼쪽 글 우단

南疋唱酬之什回是而敢託於墨綠之末集句寄呈以伸風

남필창수지십회시이감탁어묵록지말집구기정이신풍

왼쪽글 좌단

昔憬慕之微私海東 秋史 金正喜 其草

석경모지미사해동 추사 김정희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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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정종선 | 작성시간 11.08.16 어렴풋이 알던 안평대군이 참으로 큰 인물이었는데.....
    참으로 안타깝게 다른 사람도 아닌 친형에게......
    우리 조선민족은 왜 늘 이렇게 서로 패를 갈라 붙지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오! 주님! 지극히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이제는 이 주술을 풀어주소서~~~
  • 작성자김천배 | 작성시간 11.08.17 초서체가 멋있어보이는데 ...암튼 이런 글씨체들이 부럽네,
  • 작성자송죽철 | 작성시간 11.08.18 잘은 모르지만 개성있는 글씨채의 획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 합니다...이 글을 쓰던 당시의 손놀림이 보이는듯 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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