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용음회

대표곡을 들으며 찾아가는 대음악가들의 발자취(제7편)-<가곡의 왕>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교향곡제8번(미완성 교향곡)을 들으면서

작성자블라디고|작성시간15.06.23|조회수1,365 목록 댓글 0

 

* 게오르그 솔티경의 지휘,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슈베르트 교향곡 8번(미완성 교향곡)

 

 

 * 슈베르트 친구들의 예술인 모임 <슈베르티아데>,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슈베르트

 

 

 

 

[ 가곡의 왕,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

 

 

 

 

 

 

아름다운 가곡들로 우리에게 친숙한 슈베르트는 가장 비엔나적인 작곡가입니다. 이른바 비엔나 악파 중에서도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은 모두 딴데서 태어나 비엔나에서 활약하다 죽은 사람들이지만 슈베르트는 비엔나에서 태어나 비엔나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비엔나 사람들의 심정에 가장 강하게 호소하는 작품를 썼습니다. 게다가 슈베르트만큼 여행을 많이 안 한 음악가도 드물죠. 안했다기 보다는 못했다가 맞겠지만...

 

그는 비엔나에서 가까운 헝가리 귀족의 저택에 가정교사로 나간 일이 있을 뿐 평생 오스트리아 땅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가곡왕은 그처럼 행동 반경이 좁은 사람이었습니다.

 

 

슈베르트는 또한 일생을 비엔나에서 지내면서 자기 집을 한번도 가져 본 일이 없었습니다(평생 자기 피아노도 가져본 적이 없었죠). 태어난 곳은 물론 아버지 집이었고 죽기는 형 집에서였습니다. 그 사이는 친구들 집에서 동가숙 서가식하며 살았습니다.

 

비엔나에는 지금 그가 태어난 집과 죽은 집 두 군데가 기념관이 되어 슈베르트의 생애를 처음과 끝으로 연결시켜 줍니다.

 

 

 * 슈베르트의 생가

 

 

 

슈베르트의 생가가 있는 곳은 당시 리히텐탈이라는 비엔나 교외였지만 현재는 전혀 시외 맛이 없는 비엔나 제9구의 거리입니다. 누스도르퍼 슈트라세라는 큰길의 54번지에 옛날 그대로의 2층 집이 있습니다.

 

 

생가의 문을 들어서면 ㄷ자형 건물 사이로 안뜰이 길쭉하고 그 끝의 조그만 녹지에 슈베르트의 가곡<송어>를 상징하는 하얀 석상이 서 있습니다. 송어를 안고 있는 나신의 소녀상입니다. 이 청순한 기념물 하나가 슈베르트의 구슬같이 맑은 음악 세계를 다 말해 줍니다.

 

송어의 가사대로 물이 너무 맑으면 송어가 낚이지 않는다고 물을 일부러 흙탕으로 만드는 낚시꾼을 곁에서 안타깝게 바라보는 詩人, 이것이 슈베르트의 음악 정신이었습니다.

 

생가는 2층 전체가 기념관이 되어 있지만 슈베르트의 탄생 당시 가족의 주거는 방 2칸뿐이었습니다. 그는 부엌의 부뚜막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은 좁다란 그 자리가 헛간같이 휑합니다. 하루 평균 100명 가량의 방문객들이 이 빈 산실에 목례를 하고 간다고 합니다.

 

전시품 중 아우구스트 리터가 그린 슈베르트의 초상화는 우리가 흔히 보는 것이죠. 이웃에 살던 리터가 소나기를 피해 슈베르트의 문간에 섰다가 슈베르트를 발견하고 스케치했다는 그림입니다.

 

슈빈트의 작품인 '슈파운 家의 슈베르트 夜會' 그림 앞에서는 슈베르트의 交友를 생각케 합니다. 슈빈트도 슈파운도 슈베르트의 친구들 이름입니다. 제 집 하나 없는 가난뱅이였지만 슈베르트에게는 친구가 주위에 많았고 그들의 집에서 가우(假寓)하며 그들과 마시고 떠드는 사이에 주옥같은 작품들을 썼습니다.

 

 

 * 생가 내부,1914년

 

 

슈빈트는 슈베르트의 초상을 여럿 남긴 화가로 만년에 "지금까지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가장 뜻 있었던 것은 슈베르트한테 오선지를 그려 준 것이다"라는 말을 한 사람입니다. 피아노는 말할 것도 없고 오선지 살 돈조차 없는 빈곤 속에서 나온 것이 그렇게도 아름다운 슈베르트의 음악이었던 것입니다.

 

슈베르트의 초상에서 반드시 보게 되는 검은테 안경은 그 실물이 이 기념관에 와 있습니다. 1820년경에 쓰던 것입니다. 슈베르트는 눈을 뜨면 금방 곡을 쓰는 버릇 때문에 잠잘 때도 안경을 썼다고 합니다.

 

 

 * 슈베르트 안경

 

 

어려서부터 스스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던 슈베르트는 11세 때인 1808년 궁정 예배당의 소년 합창단 단원이 되면서 콘빅트 학료(學寮)에 들어갑니다. 궁정 합창단은 지금의 비엔나 소년 합창단의 전신이요, 1803년에 설립된 기숙학교는 지금 과학 아카데미가 되었습니다.

 

이 학교에 다닐 때 수업 시간에 몰래 책상 서랍을 열고 작곡을 하고, 어떤 때는 무의식중에 소리를 내어 노래를 부르다가 들키기도 했던 슈베르트를 생각하면 슬며시 苦笑가 나옵니다. 가곡 <마왕>을 쓴 후 집에 피아노가 없었기 때문에 달려와 친구들에게 처음 들려 준 것도 이곳이었습니다.

 

슈베르트의 가곡집 <겨울 나그네> 중 널리 알려진 <보리수>는 비엔나 근교의 힌터브륄이라는 마을에서 쓰여진 것입니다. 이 마을 시냇가에는 '휠드리히뮐레'라는 식당이 있고 슈베르트는 1820-1821년에 이 집에 이따끔씩 왔습니다. 식당 한쪽 우물 곁의 보리수는 이를 기념으로 심은 것입니다.

 

 

 * 휠드리히뮐레 식당겸 호텔

 

 

낡은 물방아도 하나. 이것은 슈베르트의 다른 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가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행을 많이 안 한 슈베르트이지만 1825년(28세) 그의 곡을 세상에 소개해 준 가수 포글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절경인 호수지대 잘츠캄머쿠트로 연주 여행을 한 일이 있습니다. 이 때 머문 곳 중의 하나가 트라운 湖 기슭의 그문덴이라는 마을입니다. 호수가의 아름다운 공원에는 슈베르트의 하얀 석상이 서 있습니다. 그는 이 여행 때 <아베마리아>를 작곡했습니다.

 

 

600곡이나 되는 가곡 외에 슈베르트가 남긴 곡 중 유명한 것은 <미완성 교향곡>입니다. 슈베르트 특유의 아름다운 향기가 진한데다 미완성의 여운이 남아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교향곡의 하나가 된 작품이지만 이 곡이 태어난 곳은 아무 정취도 없는 여염집입니다.

 

 

 * 슈베르트가 사용하던 피아노(동생의 것)

 

비엔나의 고급 쇼핑가 그라벤의 뒤쪽 길인 슈피겔가세 9번지. 여기는 당시 슈베르트의 친구인 쇼버의 집이었고 슈베르트는 이 집에 얹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뜻의 기념판만 덜렁 걸렸을 뿐, 건물은 원상대로의 古家이지만 제 집도 아니었으니 남아 전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미완성>은 그런 뜨내기 생활 속에서 나온 명곡입니다. "나의 음악은 내 재능과 가난의 산물이지만 내가 가장 괴로울 때 쓴 작품을 세상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 같다"라던 슈베르트 자신의 말이 생각납니다.

 

 

1935년에 나온 오스트리아의 명화 <미완성 교향곡>은 슈베르트의 실연 때문에 이 곡이 미완성으로 끝난 것처럼 그렸지만 그것은 픽션이요, 다만 "나의 사랑이 끝나지 않듯이 이 곡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한 마디가 명대사였습니다. 미완성이 끝나지 않는 한 이 곡에 대한 사랑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 비엔나 시립공원(슈타트파르크)의 슈베르트 동상

 

 

머물 곳이 없던 슈베르트의 체취가 고인 곳을 찾자면 오히려 그가 자주 드나들던 술집이나 식당을 안내받는 편이 낫습니다. 그중 비엔나에서 아직도 성업중인 곳은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낙서가 그대로인 '그리헨 바이젤',' 슈베르트의 방'이 따로 있는 '골데넨 글로케',그리고 국립 오페라 극장 부근의 '춤 그뤼넨 앙커' 등입니다.

 

슈베르트가 31세의 아까운 나이로 죽은 집은 케텐브뤼겐가세 6번지.3층으로 올라가 문간의 줄을 당기면 슈베르트가 듣던 초인종이 지금도 울립니다. 그가 숨을 거둔 장방형의 나무 마룻바닥 침실인데 너무 좁아 침대 하나만 놓아도 가득 찰 것 같습니다.

 

슈베르트는 죽던 해(1828년) 역시 친구 쇼버의 집에 살다가 건강이 나빠지자 그 해 9월 1일 형 페르디난트가 살고 있던 이 집으로 옮겼습니다. 온 지 3개월도 채 못 된 어느 날 그는 먹을 것을 입에 대지 않더니 램프가 켜지기 시작할 무렵 잠들 듯이 숨졌습니다. 고결한 藝術心의 임자는 죽어서도 얼굴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 베링에 있는 슈베르트 첫번째 묘지

 

 

이 방의 전시품 중 슈베르트의 사후 형이 아버지에게 쓴 편지는 대음악가의 최후를 전해줍니다. 이 편지에 의하면 슈베르트는 죽기 전날 헛소리를 하면서 "나를 내 방으로 데려다 줘.이 땅 속에 두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형이 "네가 지금 네 방에 있다"니까 "아니야, 여기는 베토벤이 누워 있는 곳이 아니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마지막 말을 유언으로 들어 슈베르트는 소원대로 한 해 전에 죽은 베토벤 곁에 묻혔습니다.

 

 

 * 비엔나 중앙공원의 슈베르트 묘지

 

 

슈베르트의 무덤은 처음에 지금은 슈베르트의 공원이 된 베링 묘지에 베토벤과 나란히 있었으나 1888년 두 악성이 함께 중앙 묘지의 특별 명예 구역으로 이장되었고 서로 이웃하고 있습니다.

 

 

[ 미완성 교향곡 이야기 ]

 

 

청순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선율! 영롱하게 빛나는 화성적 조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은 비록 2악장으로 된 미완성 곡이지만 형식적인 균형과 낭만성이 비할 수 없이 매혹적으로 수놓아져 있는 명곡입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처럼 모두 아홉 개의 교향곡을 남겼지만 어찌된 셈인지 제8번 교향곡에서는 단 두 개의 악장뿐, 마무리를 짓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원래 건망증이 심했던 슈베르트가 여기까지 썼다가 잊어버렸다는 설과 뒤가 막혀서 중지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슈베르트가 이 2개의 악장에서 이미 할 얘기를 다했기 때문에 직감으로 그냥 펜을 놓지 않았느냐하는 설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완성미를 보여주고 있는 2개의 악장 뒤에 구태여 어떤 스케르초나 마지막 악장을 덧붙이는 것이 군더더기가 될 것으로 생각했을 거란 거지요.

 

 

이와 관련하여 평생토록 슈베르트의 작품을 깊이 사랑했던 브람스는 이 곡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 곡은 양식적으로는 분명히 미완성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결코 미완성이 아니다. 이 두 악장은 어느 것이나 내용이 충실하며, 그 아름다운 선율은 사람의 영혼을 끝없는 사랑으로 휘어잡기 때문에 누구라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온화하고 친근한 사랑의 말로 다정하게 속삭이는 매력을 지닌 교향곡을 일찍이 들은 적이 없다.”

 

 

미완성 교향곡은 슈베르트가 25세 때인 1822년 10월에 작곡해 이듬해 슈타이어마르크 음악협회의 이사인 휘텐브레너 앞으로 보내졌습니다. 슈베르트가 슈타이어마르크 음악협회의 명예 회원으로 추대된 것에 대해 고맙다는 사례였습니다.

 

그러나 이곡은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2개의 악장밖에 안되었기에 후일 나머지 악장을 보내올 거라는 생각에 서랍 속에 고이 보존되어 있었던 거죠. 그래서 슈베르트는 이 곡의 연주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채 그로부터 6년 후,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고 맙니다.

 

슈베르트 사후,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면서 사장되고 있던 이 곡이 발견되고, 작곡된지 43년만에 이 명곡은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