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곡을 들으며 찾아가는 대음악가들의 발자취(제14편)-<이탈리아 오페라의 대부> 안토니오 조아키노 롯시니, 오페라 <윌리엄 텔> 서곡을 들으면서
작성자블라디고작성시간15.10.13조회수840 목록 댓글 2* 카라얀 지휘,베를린 필 연주 롯시니의 <윌리암 텔> 서곡
* 롯시니의 고향, 밤의 페사로 광장
[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부, 안토니오 조아키노 롯시니(1792~1868) ]
이탈리아에서 마카로니와 오페라를 빼면 남는 것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나라입니다.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발상지일 뿐 아니라 많은 오페라 작곡의 거장들을 낳았고 가수들을 길렀고 국민들은 지금도 오페라애 열광합니다.
19세기에 들면서 이탈리아 음악의 역사는 거의 오페라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19세기 전반에 이탈리아 오페라를 근본적으로 새로운 길로 인도한 작곡가가 롯시니였고 도니제티였고 벨리니였습니다. 그 전통이 베르디와 푸치니로 이어지는 것이죠.
이탈리아에서는 웬만한 도시치고 오페라 극장이 없는 데가 없고, 조그만 마을에서도 축제가 있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끼리 오페라를 올립니다. 여름철이 되면 야외 오페라가 대성황을 이루는 것은 이 나라가 오페라의 母國임을 더욱 실감시켜 줍니다.
로마의 카라칼라 大浴場, 베로나의 아레나(원형 극장), 그리고 마체라타의 대경기장에서 열리는 야외 오페라가 특히 유명합니다. 베로나에서는 입장객들이 손에 초를 한 자루씩 들고 들어가 開演 직전 별이 총총한 밤하늘 아래서 일제히 불을 밝힐 때, 그 장관은 실로 오페라 만세의 대함성 같은 것입니다.
이탈리아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인 롯시니는 뚱뚱한 몸집에 쾌활하면서도 언제나 機智가 넘쳐 농담을 잘하고 美食家인데다 大食漢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음악가 중에 일화도 가장 많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게으름뱅이여서 침대에 누워서 작곡을 하다가 곡을 쓴 오선지가 바닥에 떨어지면 그것을 도로 줍기가 귀찮아 다른 오선지에 처음부터 새로 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한편으로 겁쟁이이기도 해서 어는 집에 살 때나 절대로 가스등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는데 이는 폭발할까봐 두려워서였기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이런 롯시니가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의 페사로라는 곳에서 였습니다. 페사로는 이탈리아의 동부,세계에서 가장 푸르다는 아드리아 해 기슭의 항구 도시입니다. 바닷가를 따라 난 길을 달려 페사로로 가노라면 큰 만곡(灣曲)이 없는 해안선이 우리나라 동해안 같은 인상을 줍니다.
* 이탈리아 지도, 페사로는 오른쪽 산 마리노 공화국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페사로는 비치가 4km나 길게 뻗어 明沙 10里입니다. 여름에는 이 해수욕장에 모여든 인파가 시내의 거리를 빽빽히 메웁니다. 롯시니가 태어날 때 인구가 1만 8천 가량이던 漁港이 이제는 10만을 넘는 해안 도시가 되었습니다.
롯시니의 생가는 바닷가에서 걸어 5분도 채 안 걸리는 시내 중심지의 로시니 街 34번지. 시커먼 벽에 비늘이 돋은 낡은 돌집입니다. 이 좁다란 건물 2층의 방 2개를 롯시니 일가가 쓰고 있었습니다. 지금 기념관이 되어 있는 이 방에서는 로시니의 유물들, 그가 쓰던 소형의 하프시코드, 그리고 죽음의 병상에 누운 롯시니의 모습 그림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방에서 롯시니가 출생할 때의 일이 전해집니다. 대음악가의 출산은 대단한 난산이었습니다. 성격이 활달하여 '비바짜'라는 별명을 가졌던 롯시니의 아버지는 옆방에서 10인의 聖者 석고상 앞에 촛불을 켜 놓고 순산의 기도를 하다가 화가 나 지팡이로 성자들을 하나 하나 두들겨 부숴 버렸습니다.
* 롯시니 생가 입구
마지막으로 聖 야콥 像에 지팡이가 올라갔을 때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기쁨에 넘친 아버지는 얼른 이 상 앞에 무릎을 꿇고 몇 번이나 절을 하며 감사의 말을 큰 소리로 되뇌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롯시니입니다.
롯시니가 태어나던 1792년은 윤년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나는 윤년에 태어났으니 4년에 한 살씩밖에 나이를 안 먹는다"고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롯시니는 11세 때 일가가 아버지의 고향인 루고로 옮겨 갈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트럼펫을 부는 거리의 악사였고 빵집 딸인 어머니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져 양친은 순회 극단을 따라다녔기 때문에 어린 롯시니는 이 집에 남아 조모 밑에서 컸습니다. 그는 독자라 버릇없이 자랐고 장난이 심했습니다.
* 생가 내부
8세 때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나 빼먹기가 일쑤였습니다. 뒷날의 대음악가는 특히 음악 시간이 싫었습니다. 음계(音階)를 들으면 구토증이 난다고 달아나곤 했습니다. 싫거든 그만두라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대장간 일도 시켜보고 소시지 상점에도 취직시켰으나 도망쳐 나와 결국 다시 학교에 집어 넣었더니 그 때는 음악 성적이 뛰어났습니다.
그의 생가를 찾으니 한 윤년생(閏年生) 장난꾸러기의 어린 시절에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페사로가 롯시니를 기념하는 것으로는 이 생가 외에 로시니 음악원이 있습니다. 막대한 유산을 남기고 죽은 로시니는 유언에서 그의 재산으로 고향에 음악원을 설립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가 죽자 200만 리라가 페사로 市에 기증되었습니다. 이 돈으로 1882년에 창설된 것이 롯시니 음악원입니다.
올리비에리 광장 5번지에 있는 음악원은 정문을 들어서면 안뜰이 있고 거기 로시니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동상을 바라보니 또 로시니의 농담이 생각납니다. 그는 자신의 기념상을 밀라노에 세운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 장소에 내가 서 있어 주겠는데"라고 했다나 뭐 어쨌다나.
* 음악원 안뜰에 있는 롯시니 동상
이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져 이탈리아에서도 권위있는 음악 교육기관의 하나가 된 이 음악원은 로시니 재단이 관리를 합니다. 학생 수는 1,200명.여기서 성악 공부를 한 한국 학생도 꽤 많습니다.
롯시니 음악원이 자랑으로 여기는 이 학교 출신의 성악가로는 테너의 마리오 델 모나코와 소프라노의 레나타 테발디가 있습니다. 테발디는 페사로가 고향이고 마리오 델 모나코는 유년 시절을 페사로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페사로는 이렇게 여러가지로 로시니의 이름이 황금빛으로 塗色된 도시입니다. 한 위대한 작곡가의 光輝가 그의 고향을 환하게 밝힙니다. 죽으면서 자신을 낳은 고향을 잊지 않았던 한 빛나는 鄕人의 이름을 페사로는 높이높이 치켜듭니다.
* 롯시니 음악원
롯시니 일가는 롯시니가 13세 때 볼로냐로 이사 와 정주를 하게 되고, 롯시니는 이 곳을 근거지로 하여 각지로 떠 돌아다니며 작곡 활동을 했습니다. 1808년 16세 때 첫 작품을 쓴 롯시니의 오페라 중 1815년 23세 때 작곡하여 그의 이름을 불후하게 만든 것이 <세빌랴의 이발사>입니다.
이 오페라는 로마에 체재하면서 단 13일 만에 완성한 작품인데(13일 간은 오선지에 그냥 음부만 적어 내려가도 다 써내기 어려운 기간입니다), 펜 끝에서 樂想이 절로 줄줄 흘러 나오던 達筆의 그 산실은 로마의 어디쯤인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다만 <세빌랴의 이발사>가 1816년 로마에서 초연된 극장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아르젠티나 광장 서쪽 편에 위치한 아르젠티나 극장입니다. 1730년에 지어 260년이 넘은 것으로 지금은 연극도 하고 영화도 상영하는 극장이 되어 있습니다. 이 극장에서의 초연 때 파이지엘로 일파의 방해 소동으로 <세빌랴의 이발사>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 롯시니의 다른 대표작은 <윌리엄 텔>입니다. 1829년 37세 때 작곡하여 이 해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는 정면에 모차르트를 중심으로 7인의 작곡가 像이 줄서 있고 ,그 중에 맨 왼쪽에 로시니가 있습니다.
롯시니는 1829년 36세 때 작곡한 <윌리엄 텔>을 마지막으로 오페라를 더 쓰지 않습니다. 1850년 볼로냐의 집을 팔고 피렌체로 이사 온 뒤 1855년에는 파리로 나와 여생을 보내며 다시는 고국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파리에서 롯시니가 살던 집은 쇼세 당탱 街 2번지에 남아 있습니다. 오페라 극장의 뒤쪽, 라파예트 백화점의 바로 옆길입니다. 당시 이 거리는 파리의 번화가로 집 앞에는 人馬의 왕래가 번잡했다지만 지금도 백화점을 드나드는 인파로 항상 붐비는 곳입니다.
* 파리 라파예트 백화점(오른쪽)
그러나 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중 롯시니의 저택을 눈여겨 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특별히 다를 것 없는 아파트 건물 벽에 기념판이 걸려 있기는 하나 2층 창문가에 있어 너무 높은데다가 그나마 새까맣게 때가 묻어 얼른 눈에 띄지 않습니다.
롯시니는 이 집에서 65세 때인 1857년부터 죽는 해까지 11년 간을 살았습니다 .매년 봄과 여름철에는 불로뉴 숲에 가까운 파시 지역의 별장에서 지내고 겨울철에는 시내의 이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파리 시절 롯시니가 토요일마다 자기 집에서 열었던 '음악의 저녁' 모임은 유명합니다. 참석자는 음악가나 가수가 주로 많았지만 사회 각층의 인사들이 끼였습니다. 이 모임에 초대되는 것은 큰 영광이었고, 유럽의 저명한 예술가들은 거의 다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리스트,베르디,구노,생상스 등도 나타났습니다. '음악의 저녁'은 로시니가 죽기 직전까지 파리 시내의 이 집과 파시의 별장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쇼세 당탱가의 이 집은 롯시니가 죽던 해인 1868년 2월 어느 날의 감격을 잊지 못합니다. 이 날 오페라 극장에서 500회째의 <윌리엄 텔> 공연이 있었습니다. 공연이 끝나자 관현악단과 가수들이 이 집으로 몰려와서, 창 밑에서 관현악단은 이 가극의 서곡을 연주하고 가수들은 제1막의 노래들을 불렀습니다. 롯시니가 2층 창가에 나타나자 길을 메운 군중들이 열광하며 환호했습니다.
그 며칠 뒤인 2월 29일 롯시니는 마지막 생일을 맞았습니다. 태어나던 해처럼 이 해가 마침 또 윤년이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축전과 축하 편지가 쏟아져 날아들었고 이 집에서는 축하연과 연주회가 성대히 열렸습니다. 이런 榮華의 집이 지금은 기억 상실자처럼 아무 표정 없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버림받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롯시니는 그 해 11월 파시의 별장에서 76세로 죽었습니다. 1859년에 롯시니 자신이 지은 이 별장은 그가 죽은 지 2년 뒤인 1870년의 普佛 전쟁 때 부서져 지금은 없습니다.
로시니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 공동 묘지에 묻혔습니다.그 러나 고국 이탈리아의 피렌체 市는 그의 유해를 이탈리아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라 할 산타 크로체 성당에 옮기기를 희망했습니다 1887년 移葬이 실현되었습니다. 피렌체에서는 6천명의 군중 행렬이 뒤따르는 가운데 관이 산타 크로체 성당에 옮겨져 롯시니는 갈릴레오,미켈란제로,마키아벨리와 함께 누웠습니다.
* 파리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의 롯시니 묘
롯시니는 죽은 후 유산으로 고향 페사로에 음악원을 설립했지만, 프랑스가 그에게 바친 호의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고 있다가 유언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출신 老歌手들을 위한 양로원을 설립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미라보 다리 가까이의 미라보 街에 있는 '메종 롯시니(롯시니의 집)'입니다.
* 피렌체 산타 크로제 성당의 롯시니 묘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돌쇠 작성시간 15.10.17 윌리암텔서곡! 오랫만에 들으니, 또다른 감동이..., 꾸준한 노력에 감탄하네, 계속건투을 빌며,
-친우 길중- -
작성자블라디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10.17 탱큐!! 솔직히 얘기해서 이렇게 댓글 달아주면 기분이 좋지요. 글올리는 사람들 심정이
다 똑같을 겁니다. 다음달 용음회는 부르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나 드보르작 교향곡
8번을 준비할까 해요. 두곡 모두 가을철에 꼭 들을만한 명곡입니다. 많이들 와 주세요. Bye-B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