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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음회

멋진 음악과 함께 떠나는 미술대기행(제2편)-<르네상스의 대천재>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 리베라 소년합창단이 부르는 <상투스(거룩하시다)>를 들으며

작성자블라디고|작성시간15.12.26|조회수504 목록 댓글 0


* 리베라 소년 합창단이 부르는 <상투스(거룩하시다)>



* 피렌체 미켈란젤로 광장, 멀리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보입니다




[ 르네상스의 대천재 부오나르티 미켈란젤로(1775~1864) ]









한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위대한 작업 앞에서 우리는 경탄하기도 하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질투를 느끼기도 합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피에타>과 같은 조작 작품들과 바티칸 시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과 같은 그림을 보면 비록 그것이 진품이 아니라 화보일지라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더군다나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조각가라고 주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화가가 되어 붓을 들고 고개를 위로 쳐들고 천장에다 그림을 그리고 불멸로 만들었던 거죠. 그의 작품을 올려다보면서, 이 천재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천재란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라면서 프랑스의 대문호 로망 롤랑은 그가 어떻게 일을 했는지, 이렇게 귀띔합니다. "약간의 빵과 포도주를 들고 나면 일에 파묻혀 잠도 몇 시간밖에 자지 않았다. 볼로냐에서 율리우스 2세의 동상을 만들 때, 그와 세 사람의 조수를 위하여 마련된 침대는 하나뿐이었다. 이때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장화를 신은 채 잤기 때문에 한 때 다리가 부어 장화를 칼로 찢어야만 했다. 무리하게 장화를 빼면 다리의 살점까지 함께 묻어나올 지경이었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도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만년에는 병상에서 일어나 작업을 하기 위해 비를 맞으며 성 베드로 성당으로 달려가다 하인의 등에 업혀 오기를 여러 차례 하기도 했습니다. 항상 병치레를 하면서 '식사할 시간도 없이' 일에 몰두 해 작업을 멈추지 않았죠.



* 미켈란젤로 무덤의 그의 조각상






이런 고통의 삶 속에서도 그가 장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초인적인 열정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는 스스로 예술가의 울타리인 고독에 머물러 예술 이외에는 사랑하지도 사랑 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슬픔 그 자체로 살아,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걸작품들을 남겨 주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이탈리아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루도비코 디 레오나르도 디 부오나로토 시모니는 읍의 행정관이었고,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나 미켈란젤로는 어느 석공의 아내에게 맡겨졌습니다. 아버지는 영민한 아들에게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공부를 하기를 원했지만, 미켈란젤로는 학교에서 오직 데생만을 했습니다.



* 미켈란젤로의 생가






집안에서 예술가가 태어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아버지와 삼촌들은 매를 때려가면서 아들을 훈육했지만,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미켈란젤로의 외통수 고집을 꺾지를 못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3세 때 당시 피렌체의 뛰어난 화가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서 도제수업을 받습니다. 천재는 일찍 발견됩니다. 스승도 그의 재능을 질투할 정도였습니다.



일 년 정도 스승 밑에서 배우다가 그림에 싫증을 내고, 좀 더 영웅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 조각을 원해, 피렌체의 명문가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산 마르코 성당 정원에서 가르치던 조각 학교에 입학합니다. 예술가들의 후원으로도 유명한 메디치 가의 로렌초 공은 미켈란젤로를 눈여겨 보았고, 그의 배려로 피렌체의 뛰어난 학자와 미술 수집품을 보고 읽어내면서 성장합니다.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



* 피에타상,대리석을 떡주무르듯이 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명성은 로마에서 1498~1499년에 걸쳐 만든 <피에타>란 조각으로 이탈리아 전역에 떨치게 됩니다. 현재 바티칸 입구에 있는 <피에타>는 젊은 어머니 마리아가 죽은 아들 예수를 무릎에 안고 경건함과 측은한 동정심을 가지고 내려다보는 대리석 조각상입니다.



‘피에타’란 말은 이탈리아말로 경건과 측은의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피에타>의 위대성은 성모와 그리스도의 시체가 하나의 자연스러운 유기체로서 아름답게 균형이 잡혀있다는데 있습니다. 누나같은 젊은 마리아는 예수의 사명을 이해하는 듯 아들을 안고 경건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입니다.



미켈란젤로가 마리아의 어깨에서 앞가슴으로 두른 띠에 ‘조각가 미켈란젤로’란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보아 이 작품에 대해 조각가로서의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




* 피렌체 <아카데미 미술관>의 진본 다비드상







피렌체시의 지도자들이 26세의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한 다비드 상은 3년 동안에 걸쳐서 완성했습니다. 그는 3년 만에 <피에타>보다 더 훌륭한 걸작을 완성시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다비드는 골리앗이라는 적의 대장을 돌팔매로 죽인 소년 영웅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개혁의 왕으로서 당시 피렌체의 개혁정부에 타당한 상징적 인물이었습니다. 5.49m의 이 거대한 다비드상은 시 정부의 자유 수호의 상징으로 시청인 팔라조 베키오 앞에 세워졌습니다.



현재 원작 <다비드>상은 보존상의 문제로 시청 앞에서 피렌체 아카데미 건물 내부로 옮겨졌고, 팔라조 베키오 앞에 있는 것은 모사품입니다. 한 발을 앞으로 내딛고 서 있는 다비드는 가상의 적을 향해 일촉즉발의 긴장상태에 있습니다. 몸 전체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고, 노기 띤 얼굴로 무엇인가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그의 몸 오른편은 힘줄이 튀어나온 긴 팔이 방어하고 있고, 크고 힘찬 손 안에는 골리앗의 이마에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돌이 쥐어져 있습니다. 그는 <피에타>의 부드럽고 감성적인 모성애와는 대조적으로 아름답고 영웅적인 다비드 조각을 통하여 허약한 인간상을 탈피하고 초능력의 인간상을 제시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 작업을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연에서 얻어온 대리석 덩어리를 응시하고 있는 미켈란젤로. 그는 돌 안에 가두어져 있는 위대한 형태를 보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품 주위를 둘러쌓고 있는 돌을 조금씩 뜯어내었습니다.



* 팔라초 베키아 앞의 모조품






[ 미켈란젤로와 교황 율리우스 2세와의 관계,그리고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 천장화  ]



* 교황 율리우스 2세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미켈란젤로와의 만남은 동서양 모든 세계가 감탄하는 대걸작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를 탄생시키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성격이 불같이 무섭고 거만한 무인 기질의 교황 율리우스와 격정적이고 두려움을 모르며 자부심이 강한 미켈란젤로는 서로가 기질상 맞먹는 거인들이었습니다.



1505년 창조적 능력의 절정기에 도달한 서른 살의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온 것은 율리우스 2세였습니다. 처음에 율리우스는 미켈란젤로에게 어느 교황의 무덤보다도 거대하고 장엄한 자신의 무덤을 설계하고 건립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비싼 대리석이 나는 카라라에 가서 근 일년에 걸친 대리석 선정 작업을 마치고 무덤에 쓸 돌을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갑자기 생각을 바꾸어 초대 교회인 낡은 베드로 성당을 헐고 재건할 대성당에 자신의 무덤을 안치할 엉뚱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모르고 교황청으로 찾아가곤 했습니다. 몇 번이나 허탕을 친 뒤 화가 치민 그는 1505년 4월 17일 로마를 빠져나가 고향인 피렌체로 줄행랑을 쳐버렸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도망친 그 다음날 교황은 새 베드로 성당(현재의 바티칸 대성당)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다음해 1506년 피렌체 근방 볼로냐에 군사원정을 나온 교황에게 미켈란젤로가 사로잡혀 왔습니다.



교황이 감히 누군데 말도 없이 도망을 가? 이때 율리우스 교황이 분노를 못 참고 감정적으로 미켈란젤로를 처형했더라면 오늘날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나 <최후의 심판>같은 걸작들을 볼 수 없었을 겁니다. 한 예술가가 교황에게 등을 돌렸던 유례도 없었고 또 그런 성급한 일개 조각가를 관대하게 포용한 고객도 없었습니다.



*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 천장화






율리우스는 독선적이고 격정적인 교황이었지만 미켈란젤로의 타고난 재능을 용서할 만큼 도량이 넓었고 천재를 알아보는 혜안이 있었습니다. 로마로 다시 돌아온 미켈란젤로에게 교황 율리우스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맡겼습니다. 주로 조각을 하면서 그림에는 별로 경험이 없던 미켈란젤로에게 벽화를 부탁한 교황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일설에 의하면 베드로 성당의 건축가 브라만테가 미켈란젤로를 시기하여 교황을 선동하였다고도 합니다. 프레스코 벽화에 경험이 별로 없는 미켈란젤로가 실패하면 자기의 동향인인 라파엘로에게 일을 맡기려고 했다는 겁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후 4년 동안 천장벽화 매달려 작업을 진행합니다. 일반인은 물론 교황까지 출입을 통제시키고 받침대를 세워 직접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에는 온갖 물감이 흘러내려 피부병이 생기고 몸은 활처럼 휘어지고 고개를 뒤로 제끼고 그렸기 때문에 고개가 굳어 목이 잘 굽혀지지 않는 고되고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 천지창조 천장화




이 작품이 한창 진행 중 어느 날, 교황은 언제 작업이 끝나느냐고 물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퉁명스럽게 '완성되는 날!'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교황이 무슨 대답이 그 따위냐고 화를 벌컥 내자, 미켈란젤로는 즉시 집으로 달려가 로마를 떠날 차비를 했습니다.



아차 싶은 율리시스 2세는 급히 사자를 보내 사과하고 돈도 챙겨주어 미켈란젤로는 못이기는 척 사과를 받아들였습니다. 이후에도 둘 사이에 이와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곤 했습니다. 드디어 우여곡절이 많았던 시스티나 천장화 작업이 끝나자 율리우스 2세는 눈을 감습니다.



* 천장화 일부




1512년 10월 31일 시스티나 성당이 교황의 미사집전 후에 마침내 공개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전기작가 바시리는 이렇게 기록에 남겼습니다.



“ 작업이 공개되었을 때 로마의 모든 사람들이 미켈란젤로가 무슨 그림을 그렸는가를 보려고 달려왔고 그것을 보고는 너무도 경탄하여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관람객의 머리 위로 수천 피트 넓이의 천장에는 300명이 넘는 인물들이, 어떤 사람은 실물보다 3,4배나 더 크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창세기의 여러 장면들을 연출해 다양한 위치에서 본 것같이 그렸다. 찬란한 색채로 그려진 천장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거의 압도적인 스케일로 제시된 가장 거창하고 야심찬 화려한 장식이었다."



이 천장화와 더불어 시스티나 성당에는 벽화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1533년 피렌체에서 메디치 묘의 작업을 하고 있던 미켈란젤로에게 율리우스 2세의 후임인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의뢰를 해온 것입니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가 세상을 떠나자, 1535년 파울루스 3세가 다시 이 작업에 대한 명령을 내려 <천지창조>에 이은 <최후의 심판> 작업이 시작되었고, 역시 엄청난 노력으로 1541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60대의 미켈란젤로는 심신이 파김치가 되다시피 합니다.



*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 벽화






"영혼은 신에게, 육체는 대지로 보내고 그리운 피렌체로 죽어서나마 돌아가고 싶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미켈란젤로의 폭풍우와 같은 인생은 고요한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는 1534년 9월 도망치듯이 피렌체를 떠난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로마에 머물렀고 고향이 아닌 로마에서 8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순간에 그리운 피렌체의 환영을 다시 보았습니다.



로망 롤랑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씁니다. "그것은 2월의 어느 금요일 오후 5시경이었다. 날이 저물었다….'그의 생애의 마지막 날과 평화의 왕국의 첫날이…' 마침내 그는 휴식을 얻었다. 오랜 소원을 이루어 드디어 시간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상이 미켈란젤로의 성스러운 고뇌의 생애이다. - 이제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혼은 얼마나 행복한 것이냐."



미켈란젤로가 마지막으로 제작한 조각은 '론다니니 피에타'입니다. 1547년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중단과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하다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조각을 보면 예수의 모습이 성모의 신체 안에 갇혀 있어 마치 한 인물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이전에도 미완성으로 남긴 조각들이 여럿 있습니다.



* 론다니니 피에타






어떻게 보면 이 미완성은 미완성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덜 깎아낸 돌에서 몸부림치는 <포로>와 작은 조각들은 인간과 어쩔 수 없는 운명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특히 마지막 작품인 '론다니니 피에타' 는 성모와 예수을 통하여 신과 인간, 여성과 남성, 삶과 죽음이 함께 있는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미켈란젤로의 90년 세월은 고통과 슬픔 그리고 절망의 세월이었지만, 그의 작품으로 우리는 환희와 희망과 사랑을 보고 감동하고 앞으로 살아갈 삶의 의지를 마음속에 품게 됩니다.



*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바티칸 성당의 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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