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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음회

영화 & 그 역사적 배경(제14편)- 영화 <사막의 여우>, 신출귀몰. 전쟁의 달인 에르빈 롬멜 이야기-사막의 전장에 울려퍼진 노래 '릴리 마를렌'을으며

작성자블라디고|작성시간17.10.31|조회수1,553 목록 댓글 0


*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 실제 사진




[ 영화, <사막의 여우, 롬멜> ]


이 영화는 <엘다 4형제>,<진정한 용기>,<네바다 스미스>등을 연출한 헨리 하사웨이 감독이 1951년에 만들었습니다. 영화 <사막의 여우>는 히틀러와 롬멜의 대립을 다룬 전쟁 드라마로 군인으로서의 명분과 행동양식을 지킨 한 인간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볼만한 액션 장면 하나 없이 이 영화는 제2차대전 당시 아프리카 사막의 전장과 롬멜의 사택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명배우 제임스 메이슨은 영국군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독일군장군 에르빈 롬멜로 등장, 신출귀몰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전쟁터의 장군과 총통 히틀러의 옳지 못한 명령에 반기를 들고 그의 암살사건에 연루되는 역사적인 인물을 연기합니다.





하사웨이 감독은 1945년 영화 <92번가의 저택>에서 보여준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의 연출을 바탕으로 이 작품에서도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전개시킵니다. 실제로 촬영한 아프리카 전쟁 장면들을 요소요소에 편집함으로서 사막의 여우처럼 능수능란하게 전술을 구사하던 롬멜의 위용을 한껏 살려내고 있습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를 놓고 조국을 위해 고뇌하는 롬멜의 가정적이고 성실한 군인상이 무모한 히틀러의 광기와 대비되면서 하사웨이 감독의 카메라는 비극적인 주인공이 된 롬멜에게 동정의 시선으로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로 잘 알려진 젊은 날의 제시카 탠디가 롬멜의 현모양처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영국군 준장이었던 데스몬드 영의 저서를 바탕으로 에르빈 롬멜의 생애 마지막 부분을 각색했습니다.


* 영화에서...데스몬드 영(이 때는 중령이었음)


 

[ 간략한 줄거리 ]


1942년 6월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독일군 인솔 하에 일단의 영국군 포로들이 대오를 지어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영국군이 포격을 가해오자 대오가 흩어지고 통솔이 어려워집니다. 그러자 독일군 소령이 포로 중 최고 계급인 중령에게 휴전 깃발을 들고 가서 영국군 포로가 희생되고 있으니 포병대에 포격을 중지하도록 하라고 이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자, 이것은 명령이며 불복종 시에는 복종하도록 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자신은 포로이며 명령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중령은 항변합니다.





이렇게 옥신각신하자 근처에 있던 지휘관이 소령을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소령이 자초지종을 보고하자 지휘관은 포로의 말이 옳다고 말해줍니다. 그 지휘관이 야전사령관으로서 최전선을 시찰 중인 롬멜 장군임을 알게 된 중령은 자기를 구해준 그에게 경례를 합니다. 이와 같이 롬멜 장군의 명성은 영국군 사이에서도 자자했습니다.


사막의 여우라고 두려워하고 있는 터였습니다. 2년 후 독일은 롬멜 장군이 부상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갖가지 뜬소문이 돌고 있었고, 독일의 공식 발표가 거짓투성이임은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 맨 오른편, 롬멜...왼쪽은 서부전선 총사령관 룬트슈타트 원수



전쟁이 끝난 후 소령은 준장으로 제대하였고, 곧 롬멜 사망의 진상을 규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독일로 건너가 롬멜 부인과 아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자료를 수집합니다. 또 롬멜의 군대 동료 및 그와 싸웠던 영국군 관계자를 찾아서 취재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막의 여우; 롬멜>이란 전기를 내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영화는 이 전기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저자는 데스먼드 영 준장이고, 영화에서도 이 과정이 첫머리 장면으로 나옵니다.





1942년 12월23일 영국군은 이집트의 엘 알라메인에서 총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당시 귀국해 입원 중이던 롬멜은 급히 달려와 현장지휘에 임했습니다. 전차라고는 40대뿐이었지만 히틀러는 승리 아니면 죽음뿐이라며 막무가내로 후퇴 불가를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롬멜은 이는 중세적인 발언이라며 부하 장병들을 후퇴시켰습니다. 곧 이어 튀니지에서 주력부대가 영·미·불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어왔고 북아프리카에서 승패는 결정났습니다.


* 전선을 시찰 중인 롬멜 원수



그러기 한 달 전, 롬멜은 병세가 악화되어 독일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이 때 오랜 친구이자 슈투트가르트 시장을 지낸 슈트롤린이 병원으로 방문합니다. 그는 여러 가지 상황을 설명하며 히틀러를 비판하지만 롬멜은 여기에 적극적인 동조를 하지는 않습니다. 1943년 롬멜은 대서양 방어전선의 지휘권을 이양 받습니다.


한 달 후 롬멜은 서부전선 최고사령관 룬트슈테트를 만나 해안선에서 상륙군을 맞아 공격하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하나 수용되지 않습니다. 히틀러가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전쟁이 끝난후 롬멜의 생애를 추적중인 데스몬드 영(예비역 준장), 왼쪽은 아들

   만프레드, 오른쪽은 부인 루시



1944년 2월 롬멜이 가족과 함께 집에서 머물고 있을 즈음, 슈트롤린이 다시 찾아옵니다. 그는 독일을 위해서는 히틀러 제거밖에 방법이 없다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밝힙니다. 그러나 롬멜은 상관 명령을 집행하는 것이 군인의 유일한 존재 이유이고 나머지는 모두 정치일 뿐이라며 군인임을 강조할 뿐입니다.





독일이 전멸되기를 원하느냐며 슈트롤린은 강력히 참여를 종용하지만 그의 제거가 유일한 길이냐며 롬멜은 개입을 주저합니다. 롬멜은 아내가 이미 슈트롤린과 얘기를 나눈 바 있음을 알고 놀랍니다.


1944년 6월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하고 독일군은 궁지에 빠집니다. 연합군의 칼레 상륙을 확신하고 있던 히틀러는 15군단 90개 사단을 그곳에 배치 대기시키면서, 서부전선 사령부의 진언에도 불구하고 부대 이동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 실패로 돌아간 히틀러 암살 작전



7월 롬멜은 히틀러를 직접 면담하고 군사적으로 패배했으며, 2주일 안에 연합군이 프랑스 깊숙이 진입할 것이라 말하지만 히틀러는 롬멜을 비겁한 패배주의자라며 우리에겐 계획이 있다고 호언장담합니다.


전선으로 돌아가던 롬멜은 연합군 전투기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됩니다. 7월 20일 롬멜이 입원해 있는 사이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주도의 히틀러 암살 계획은 실패로 끝납니다.





시한폭탄이 폭발했으나 히틀러는 죽음을 모면했고 경상 치료차 입원한 사이 5천여 명의 관련 용의자가 처형되었습니다. 그 후 3개월 동안 고립되어 있던 롬멜에게 부르크드로프 장군이 내방하여 반역죄 범인이란 문서를 보여줍니다.


롬멜은 법정에서 말하겠다고 버텼으나 히틀러가 비공식 처리를 원한다며 그럴 경우 부인과 아들의 안전은 보장될 것이라고 위협합니다. 사태를 파악한 롬멜은 결국 그들이 준비해온 독약으로 자살하고 정부에서는 롬멜이 전선에서 순직했다고 거짓 발표를 합니다.


* 마지막 장면, 집과 가족을 바라보며...



[ 전쟁의 달인, 에르빈 롬멜 ]





1941-1942년 사이에 북아프리카 리비아 사막에서 벌어진 독일 전차부대의 승승장구는 롬멜이라는 한사람의 뛰어난 지휘관의 천재성에 의해서 가능했던 롬멜의 작품 그 자체였습니다. 단지 위장과 기만이라는 한가지 무기에 의하여 적군보다 전혀 나을 것이 없는 빈약한 병력으로 영국군을 수천 키로 밖으로 밀어내버린 그 전투는 분명 롬멜의 전쟁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롬멜은 1891년 남부 독일의 하이덴하임에서 시골 중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세에 프로이센 제국 육군에 입대한 그는 24세 때인 1915년에 중위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그 탁월한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 1차 대전시



1917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불과 1개 중대병력을 이끌고 9천여 명의 적군을 포로로 잡는 눈부신 전공을 세워 상관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고 그 후 많은 장군들까지 그로부터 조언을 구하면서 그를 휘하에 두기를 원했습니다.


초년 장교시절부터 그는 전술 교범의 원칙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순간적인 판단과 육감에 따라 지휘했고, 실제로 그것은 거의 한 번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흡사 군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전쟁과 군대,그밖에는 아무것도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것이 그에 대한 동료들의 일반적인 평가였지만 그가 충실했던 것은 하가지 더 있습니다. 1916년 결혼 이후로 그가 군대생활만큼이나 충실했던 자신의 가정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신출귀몰하는 눈부신 활약으로 연합군으로부터 유령사단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제7기갑사단을 지휘하여 프랑스를 파죽지세로 유린하는 와중에도 그는 거의 매일같이 아내 루시 앞으로 편지를 써 보낼 정도였습니다.


*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전장에서의 눈부신 무공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신사였습니다. 부하들에게는 항상 예의바르게 대했으며 최일선에서 싸우는 말단병사들의 경험과 고충에도 귀를 기울여 그것을 지휘통솔에 반영했습니다. 점령지의 주민들에게는 깍듯했으며 특히 포로가 된 적의 장군들에게는 충분한 예우를 다했습니다.


이처럼 완벽한 무인이었던 롬멜이었지만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제3제국의 치하에서 그는 한가지 결정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 가족, 부인과 아들



그는 나치즘의 신봉자가 아니었으며 그리고 내심으로는 능력보다는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과 능란한 처세술에 의해 그 자리에 오른 군의 고위 지휘관들을 경멸했습니다. 롬멜의 뛰어난 능력과 대중적인 인기를 의식한 히틀러는 그를 자신의 측근에 두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거들먹거리는 프로이센 출신 장군들보다 자기 자신의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는(히틀러의 고향은 오스트리아였지만 남부독일에서 정치적으로 기반을 닦았고 또 그곳을 사랑했다) 남부 독일 출신의 롬멜을 히틀러는 특히 총애했으나 롬멜은 점차 독단으로 흘러가는 히틀러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 전설의 시작


** 프랑스 침공 & 전격작전


* 진격하는 1호 전차



프랑스 침공 때는 육군 7기갑사단장으로 근무했는데, 부대 휘하의 장갑차와 전차를 앞세워 전군에서 제일 빠른 속도로 앞장서서 심지어 독일 기갑부대의 아버지격인 구데리안 장군보다 먼저 뫼즈 강을 도하했습니다.


롬멜은 여기서 막나가는 지휘패턴을 보여주었는데 뫼즈 강을 도하하기 위해 롬멜 장군은 도하작전, 수송대 편성 등을 직접하며 최전선에서 동분서주하고, 결국 한개 보병대대를 직접 지휘하기 시작, 포탄이 사방에 작렬하는 가운데 7기갑의 분견부대는 결국 강을 건넜습니다.


* 전장에서...



뫼즈 강을 건넌 롬멜 군은 옹에라는 마을로 서진을 시작했는데 진두지휘를 위해 휘하 연대장의 지휘전차인 3호 전차를 뺏어 타고 가다가 대전차포 매복에 걸려 피격되고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옹에를 손에 넣습니다.


혀를 내두르는 진격 속도와 신출귀몰하는 움직임에 프랑스 육군은 롬멜 7사단을 유령사단이라고 까지 불렀다고 합니다. 어쨌든 육군총사령부에서 진격 정지하라고 명령을 계속 내렸지만 그는 무조건 진격했습니다.


* 롬멜의 제7 기갑사단



이렇게 진격한 끝에 드디어 아헨에 도착, 프랑스 육군 전차부대와 조우하여 승리를 거두면서 그 여세를 몰아 서쪽의 랑드르시로 돌격합니다. 드디어 제7기갑사단은 유류와 탄약 고갈로 랑드르시에서 정지했고 이미 50km 가까이 진군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롬멜 장군 자신이 직접 지휘한 기갑연대만 돌진했고 군단장 명령에 인해 남은 병력은 아직도 한참 뒤에선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롬멜은 사령부로 돌아가기로 결심,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험을 시작합니다.


* 왼쪽, 롬멜



롬멜은 자기 지휘차와 3호전차 한대를 호위용으로 붙여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그 3호전차가 퍼져버렸고 결국 롬멜 장군의 지휘차만 다시 후방 50km를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후방에는 우회당해 교전도 못해본 프랑스 병사들이 득실거리고 있었습니다.


롬멜은 요새지대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행군 중인 적에게 지휘장갑차 혼자 달랑 타고 가면서 당당하게 적 지휘관에게 "항복하라!" 고 외쳤으며 프랑스 병사들은 이에 전부 낚여서 항복했고 이런 일을 몇차례 성공했습니다.





이런 사기(거짓말)가 연달아 성공할 수 있던 이유는 당시 프랑스 육군은 통신도 개판이었고 전투 상황도 개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의 장군이 툭 튀어나와서 "항복하라!"고 고함을 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장군이나 되는 자가 아무 대책없이 왔을 리가 없으므로 '어 우리 포위된 건가?‘'라 생각하고 그냥 손을 들어 버린 것입니다.


프랑스 침공에서의 극적인 활약으로 일약 독일 육군 최고의 저명인사로 떠오른 롬멜은 그를 주연으로 하는 전시선전영화 "서부의 승리"가 그를 위해 특별 상영되는 등, 인생 최고의 영광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의 영광이, 이후 그의 전설을 만들게 되는 또 다른 무대로 가는 계기가 됩니다.


** 북아프리카 전선, 사막의 여우


전광석화처럼 프랑스를 석권한 후, 독일은 소련을 침공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 때 이탈리아가 뜻하지 않게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에게 대패하면서 히틀러에게 SOS를 보냅니다.


칠칠치 못한 무솔리니 때문에 가끔 애를 먹던 히틀러도 북아프리카 전선을 방관을 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 시기에 소련 침공 작전 준비가 대부분 진행된 상태라, 빼낼 수 있는 병력이 얼마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독일군은 소수의 기계화부대와 유능한 장군 한명을 보내는 것으로 아프리카에서 완전히 이탈리아가 축출당하는 것만 막는 선에서 마무리 지으려 했습니다. 그때 차출된 장군이 바로 롬멜이었습니다.


롬멜은 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정찰기를 타고 영국군 지역 상공을 정찰했으며, 영국군의 상태가 이탈리아군을 추격하는 데만 집중되어 조직적인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알아 차렸습니다. 그래서 아직 수송선에서 병력이 완전히 하선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반격을 개시합니다.


* 북아프리카 전선 지도



반격할 병력이 없다는 말에 롬멜은 트럭과 경차량에 나무판자를 덧대어 전차 모양이 나게 만들라고 지시하고 이들을 끌고 가는 과감함을 발휘했는데, 놀랍게도 이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미 주력 지상병력을 처칠의 명령에 따라 억지로 그리스에 파견했다가 상당수 잃어버려 약체화된 영국군은 이렇게 롬멜의 이 기만 전술에 간단히 격파 당했습니다. 이후 사실상 아프리카의 전쟁은 롬멜 대 영국군의 전쟁이 되어 영국군으로부터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며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결국엔 롬멜도 거칠고 긴장된 생활의 연속으로 인해 병을 얻어 본토로 떠나게 됩니다. 그는 본디 규칙적인 군 생활에다 산악등반과 승마 등 운동으로 단련된 강인한 체력을 지녔으나, 북아프리카 사막의 혹독한 환경은 그런 그에게도 너무 힘들고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몰아붙인 것입니다.





그가 아프리카를 떠난 사이 엘 알라메인에서 영국의 대반격이 시작되고, 급하게 돌아왔던 롬멜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히틀러의 명령마저 무시해버리고 병력을 최대한 온존하며 퇴각하기 시작합니다.


* 엘 알라메인 전투, 찢어지는 사막의 밤



이후 독일군은 영미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으로 튀니지에 갇혀버리게 됩니다. 롬멜은 총통을 직접만나 병력 증파를 요청하러 독일로 다시 갔지만, 히틀러의 요구로 그는 요양을 위해 남게 되고 아프리카 방면군 사령관은 육군상급대장 폰 아르님 장군으로 교체됩니다.


이는 이미 대세가 결정되었으며, 여기서 롬멜 장군이 포로라도 되면 심각한 위신손상이 올 것을 우려한 조치였습니다. 실제로 아르님 장군은 분전을 펼쳤으나 결국 아프리카 전선에서 연합군에게 항복합니다. 항복 전날 아르님 장군은 롬멜이 자신에게 인계하고 간 지휘트럭 맘모스를 직접 소각하며 오열했다고 합니다.


*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히틀러 암살계획 그리고 자결


그 이후 유럽지역에서 연합군의 상륙을 막는 대서양 방벽 건설을 맡은 그는 짧은 시간 내에 임시방편이지만 방어능력을 상당히 향상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때 롬멜은 어이없는 행동을 합니다. 하필이면 연합군의 상륙 당일 날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을 보고 아내의 생일파티에 참석하러 떠나서 작전 당일 전선이 아니라 본국인 독일에 가 있었던 것입니다.


* 대서양 방벽을 시찰하고 있는 롬멜



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날까지 심각한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쳤으므로 상륙하더라도 이날은 아닐 것이라고 현지 지휘관의 대다수가 판단한 바 있기에 롬멜 장군 역시 안심하고 독일로 가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이는 롬멜의 실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연합군의 상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미 기울어 버린 전세를 간파한 그는 히틀러를 만나 몇 번이나 연합군과 휴전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점점 더 히틀러의 눈 밖에 날 뿐이었습니다.


그 후 1944년 7월, 이미 패전이 명백해진 조국 독일을 구해내자는 군부 안의 일부 장군들에 의해 히틀러 암살이 계획됩니다. 군과 국민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던 롬멜의 높은 명성이 필요했던 그들은 이 암살계획에 롬멜을 끌어들였고 롬멜 역시 평소 신념에 의해 여기에 어렴풋이 가담하게 됩니다. 하지만 암살은 실패했고 일제 검거 선풍이 몰아 닥쳤습니다. 주모자 시타우펜베르크 백작을 비롯하여 수천 명이 처형되었습니다.


연루자로 들통 난 롬멜은 자택으로 찾아온 히틀러가 보낸 특사들에 의해서 자살할 것을 종용받습니다. 롬멜은 원수 복장으로 갈아입고 가족과 이별을 한 다음에 메르세데스 벤츠 승용차를 타고 가면서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결합니다.


독일국민의 우상이 총통암살의 더러운 죄명으로 처형당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가족들(부인과 아들 하나, 나중에 그 아들은 슈투트가르트 시장이 됩니다)의 안전은 보장하겠다는 히틀러의 배려(?)에 의해서였습니다.


* 냉랭해진 두 사람



롬멜은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전사한 것으로 발표되었고 성대한 국장이 치러졌습니다. 세계전사의 큰 족적을 남긴 한 위대한 군인의 생애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 장례식



“독일은 전쟁에 패배했다. 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을 총통은 깨달아야 한다 이제 총통이 물러나야 할 시간이 왔다. 무질서한 정치와 독단적인 군사개입은 독일 국민을 나락으로 빠지게 했다. 우리는 이제 평화조약을 맺어야 한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게 되고 모든 것이 파괴되어 폐허로 변한다. 이것은 바로 범죄다.”


-롬멜(죽기 얼마 전)


* 묘지



[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양편 모두 전투도 중지했다는 '릴리 마를렌' 이야기 ]


북아프리카 전투가 시작된 이후 엘 알라메인 격전 시까지 모래 바람 속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양군 병사들에게 지친 심신을 달래주던 한모금의 청량제가 있었습니다.


황색의 모래 지옥 속에서 격전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독일군 병사들에게 먼 발칸반도의 베오그라드 방송국(유고는 이미 독일에 점령당한 상태였습니다)에서 독일군 병사들을 위한 위문 방송을 시작하였습니다. 고감도의 무전기에 주파수를 맞추면 거의 잡음이 없는 깨끗한 음질의 방송을 생생하게 청취할 수 있었습니다.


베오그라드의 한 방송기사가 먼지 쌓인 낡은 음반들 속에서 우연히 음반 하나를 찾아내었고 그것을 방송으로 내보냈습니다.

“외로운 병영에 어둠이 깃들고, 길 건너 가로등에 불이 켜지면 휘뿌연 안개 속에서 문득 혼령처럼 나타나는 나를 기다리던 너, 릴리 마를렌...”


독일 여가수 ‘랄레 안데르센’이 매혹적이고 우수어린 목소리로 불러주는 이 노래는 모래 먼지 속에서 악귀처럼 싸워야하지만 돌아서면 심약하고 외로움을 타는 젊은 병사들의 가슴 속에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밀려드는 전선의 요청에 따라 그때부터 라디오 베오그라드는 매일 밤 9시 57분이 되면 어김없이 이 노래를 내보냈고, 그 시간이면 병사들은 라디오 앞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고향집과 연인을 그리워하는 병사들의 심정에 국적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1차대전에 참전했던 독일 퇴역장교 ‘한스 라이프’가 쓴 짧은 시에다 곡조를 붙인 이 독일어 노래의 가사를 이해할 턱이 없는 영국 병사들도 애조 띈 이 노래의 가락에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그들은 곧 하나 둘, 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무전기 앞에 붙어 앉아 독일군의 무선통신 내용을 감청하던 무전병들이 그 선구자였습니다.


‘릴리 마를렌’은 사막에 싸우고 있는 영국군과 독일군 양쪽 병사들의 성가(聖歌)가 되었습니다.


< '릴리 마를렌' 가사 >


막사 앞의, 커다란 정문 앞에,

가로등이 하나 서있고 그녀는 아직도 그 앞에 서 있네.

그렇게 우리는 다시 그리워 하지 ,

가로등 옆에서 함께 서 있기를 원하지,

그때처럼 릴리 마를렌, 그때처럼 릴리 마를렌.

 

우리 둘의 그림자가 하나로 보이네,

우리가 서로 너무도 사랑한다는 것을 보는 사람은 금방 알겠지.

모든 사람들이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들이 가로등 옆에 서 있는 모습을,

그때처럼 릴리 마를렌, 그때처럼 릴리 마를렌.

 

벌써 보초병이 부른다

점호 나팔이 울린다(안들어오면)"3일 영창행일 수도 있어" 

"전우야, 나 곧 갈께"거기서 우리는 작별인사를 했지,

나 그대와 같이 가는 것을 얼마나 원했던가,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그녀는 그대의 발걸음을 알지,

그대의 멋진 발걸음을.매일 저녁 그녀를 애태웠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잊은지 오래됐지.

그래서 나는 고통을 느껴야 했지,

누가 가로등 옆에 서있을 것인가?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릴리 마를렌 그대와 함께.

 

조용한 공간(무덤)에서부터,

이 세상 밖으로 나는 꿈꾸듯 떠있다,

사랑스러운 그대의 입술,

늦은 안개가 방향을 바꾼다면,

나는 가로등 옆에 서 있을 것이다 ,                    

그때처럼 릴리 마를렌, 그때처럼 릴리 마를렌.


* 이 노래를 부르는 마를린 디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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