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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음회

영화 & 그 역사적 배경(마지막편)-영화 <발지대전투>, 히틀러의 최후의 도박 : 발지전투- 독일 전차병 군가(판저 리트)를 들으며

작성자블라디고|작성시간18.07.13|조회수2,189 목록 댓글 0


애독자 여러분들께!


지난해 9월초부터 시작했던 본 시리즈가 오늘 게재하는 60편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됐습니다. 지난 11개월 가까운 시간을 숨가쁘게 달려오는 동안 보내주신 뜨거운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당분간 본 시리즈를 좀더 손질 하면서 출판을 준비하려 합니다. 차기작은 <음악사의 재밋는 에피소드들>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차이코프스키 죽음의 실체는? 모차르트는 진짜 빚쟁이었는가? 브람스와 클라라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나 등등 음악사에 회자되는 흥미진진한 뒷얘기들을 엮어 보려고 합니다. 기대해 주셔도 무방하리라 사료됩니다. 다시한번 여러분의 뜨거운 격려에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다시 또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되길 고대합니다.


모두들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 영화, 발지대전투 ]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발지 대전투’를 소재로 하여, 워너 브라더스가 170분에 가까운 대하 장편으로 제작했습니다.


1944년 하반기 연합군에게 쫓기던 독일은 서부지역 사령관 룬트슈테트의 지휘 하에 1944년 12월16일 벨기에 아르덴 숲에서 강력한 기갑부대 반격을 전격 시도함으로써 연합군을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습니다. 





와이드 스크린을 꽉 채운 전투씬을 실감나게 표현한 이 영화는 당시 매우 획기적이고 스케일이 큰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전차들이 실제 모델이 아니어서 아쉬운 면은 있으나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는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고 영화 속 여러 장치들도 당시 상황을 잘 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로버트 쇼, 헨리 폰다, 로버트 라이언, 테리 사바라스, 찰스 브론슨 등 배역진도 화려합니다. 쟁쟁한 스타들이 무더기로 출연하면 구심점을 잃고 각개약진을 하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의 개성적인 연기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전쟁영화의 미덕인 볼거리와 구색을 갖추어 지루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날로그 방식의 호쾌한 전차전, 지휘부 간의 갈등, 병사들의 긴박한 심리, 투철한 군인정신, 극적인 반전이 어우러집니다. 종래의 전쟁 영화는 주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선이고 독일과 추축국은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그려졌습니다.


서부영화에처럼 미국우월주의의 구태의연함이 언뜻언뜻 혹은 적나라하게 드러나 불편한 느낌이 있곤 했습니다. 반면 이 영화는 객관적 관점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독일군 입장에 섬으로써 색다른 느낌을 줍니다.





독일군이 막바지 대공세인 벨기에 북방 아르덴 삼림지대에서의 대 연합군 반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국애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독일 기갑부대 장교의 삶과 행적, 장렬한 최후가 기둥 줄거리입니다.


특히 영화의 중심 서사를 이끌어가는 독일 장교 헤슬러 대령 역의 로버트 쇼의 연기가 압도적입니다. 전차전의 귀재인 헤슬러 대령의 기갑부대는 승승장구하다 다음 전투에 대비한  연료보급을 위해 유류창으로 향하던 중 미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합니다.





헤슬러 대령이 지휘 탱크에 갇혀 넘실거리는 불꽃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휘둘러 신입 전차병의 군가를 부르며 죽어가는 장면은 전율이 느껴집니다. 영화 속에서 대거 등장하는 독일 기갑부대의 킹타이거 탱크는 아쉽게도 실제 모델이 아니고, 미 육군 M-47 탱크입니다.


전차에서 발포되는 호쾌한 포성, 다이내믹한 카메라 앵글, 특히 달리는 기차에서의 절묘한 카메라 프레임, 헨리 폰다를 비롯한 배우들의 명연기, 장편의 지루함을 극복할 수 있는 위트 있고 인상 깊은 대사들도 한몫했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영화는 독일군 전차부대 군가인 <판저 리트(Panzer Lied)>의 연주로 시작됩니다. 1944년 12월, 러시아 전선에서 수많은 실전 경험으로 다져진 지휘관인 마르틴 헤슬러 대령이 당번병 콘라드 중사와 함께 서부전선에 도착합니다.


그는 서부 전선 독일군 사령관인 쾰러 장군의 사령부로 안내되어 라인 방어 작전에 대한 상세한 계획을 설명받습니다. 쾰러 장군은 이 작전을 준비 중인 독일군의 신무기, 즉 V-1 및 V-2 로켓, 제트 전투기, 킹타이거 전차 등을 헤슬러 대령에게 보여주며 독일군의 승리를 확신시킨 후 그를 최선봉인 킹타이거 전차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합니다.





한편 미군 측에서는 경찰 수사관 출신인 카일리 중령이 직접 정찰기를 타고 전선을 시찰하면서 독일군의 대반격 징후를 포착해 상부에 보고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미군 수색대가 잡아온 독일군 포로는 고무호스를 든 10대 소년병들뿐이었고, 상부에서는 이런 병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무시합니다. 하지만 카일리 중령은 계속 석연치않은 느낌을 받습니다.


결국 12월 16일, 독일군의 라인 방어 작전은 시작되었습니다. 미군 헌병으로 변장한 독일군의 위장 특공대가 낙하산으로 미군 전선의 후방에 침투, 전화선을 파괴하고 도로표지를 바꾸어놓는 등 혼란을 조성한 가운데 헤슬러 대령의 전차부대가 출동합니다.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최전선의 미군은 대혼란에 빠집니다. 그들은 바주카포, 소총 부착형 총류탄, 심지어는 수류탄을 손에 들고 독일 전차를 향해 장렬한 육탄 돌격으로 맞서지만 결과는 궤멸이었습니다.


후방의 미군 지휘부 역시 독일군의 반격에 혼란에 빠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독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다리를 폭파할 것을 지시하지만 이미 다리는 미군으로 변장한 독일 특공대가 점령하고 있었고, 다리 폭파를 위해 도착한 미군 공병대는 이들과의 전투 끝에 전멸당합니다. 독일군은 이렇게 제압한 우르 강 다리를 아주 쉽게 통과합니다.





독일군 특공대의 모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도로표지를 바꾸어놓은 탓에 암브레브로 후퇴하려던 미군은 전혀 엉뚱한 말메디로 향했으며, 그곳에서 독일군과 전투 끝에 패배한 미군은 포로가 되어 독일 친위부대에 의해 집단 학살당합니다.


미군은 암브레브에서 비전투 인원까지 박박 긁어모아 헤슬러 대령이 이끄는 독일군과 격전을 치릅니다. 강력한 독일 전차 앞에서도 화염병을 던지며 용감하게 맞서는 미군들에 의해 처음 한동안은 독일군이 밀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헤슬러의 강력한 지휘력에 힘입은 독일군은 결국 암브레브를 함락합니다.





한편 암브레브, 아니 다른 전선의 미군들에게까지 말메디에서의 미군 포로 학살 이야기는 널리 퍼져 병사들의 분노를 자아냅니다. 심지어 완전 포위된 바스토뉴에서는 항복을 권고하는 독일 사절단에게 “바보자식들(Nuts)!"이라는 한마디로 응수할 정도로 결사 항전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이 공격을 개시한 이래 계속된 기상 악화는 연합군의 항공 지원을 불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승승장구하는 독일군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은 있었습니다. 바로 연료 부족이었습니다. 앞서 독일군의 10대 소년병들을 사로잡았을 때 손에 들고 있었던 고무호스가 바로 그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 요놈들이 위장특공대입니다



헤슬러가 이끄는 독일군은 진격에 필요한 연료를 탈취하기 위해 미군 연료 저장소를 공격합니다. 이에 미군도 전차부대를 보내어 이들을 저지함과 동시에 연료 저장소를 폭파시킬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연료 저장소는 이미 위장 특공대가 점령한 상태였으며, 뒤늦게 도착한 미군 전차 부대 역시 독일군의 공격으로 지리멸렬한 상태에 빠집니다.


이때 우연히 기름을 얻으러 왔던 미군들이 연료 저장소의 독일군과 격전을 벌여 이들을 섬멸한 후 접근하는 헤슬러의 전차 부대애 연료를 이용해 화공을 가합니다. 격전 끝에 마침내 헤슬러의 전차에도 불이 붙고, 부하들이 탈출하는 와중에도 헤슬러는 혼자 미군을 향해 돌격하다가 전차와 함께 숨을 거둡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차량을 버리고 도보로 후퇴하는 독일군들의 긴 대열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 발지 대전투 : 히틀러 최후의 도박 ]


“절대적으로 판세가 불리할 때믄 한 장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어보는 모험도 해볼만 하지 않겠는가?”

- 알프레드 요들 독일 육군 참모총장


1944년 10월만 해도 연합군은 연말이 가기 전에 독일의 항복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으나 독일 국경으로 가까워지면서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이러한 희망은 물건너 간 것처럼 보였습니다.


* 발지전투의 목표지점인 왼쪽 상단 안트워프가 보입니다. 그러나 아래 삐죽나온 곳까지 겨우 진출하고...



1944년 10월 22일


히틀러는 육군 총사령관 빌헤름 카이텔 원수를 비롯하여 요직에 있는 장군들을 자신의 별장으로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비장한 결심을 한 것 같은 표정의 히틀러가 입을 열었습니다.


“대대적인 반격작전이 개시된다. 이 공세에는 20개 사단 30만의 병력, 전차와 장갑차량 1,000대, 화포 1,000문, 각종 항공기 약 1,800대가 동원된다. 이 작전을 위해 이미 425만 갤런의 연료와 화차 50대분의 탄약이 비축되어 있다."


대반격!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1943년을 기점으로 전 전선에서 패주만을 계속하던 독일군이 드디어 1940년의 그 찬란한 영광을 다시한번 재현하는 것입니다! 장군들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룬트슈테트 원수는 "이것이야말로 총통의 군사적 천재성이 만들어낸 작품"이라며 반색을 했지만, 모델 원수는 이것을 가리켜 "이대로 앉아서 죽느니 한꺼번에 다 몰려 나가서 죽자는 뜻"이라고 이죽거렸습니다.


육군 참모총장 요들은 “절대적으로 판세가 불리할 때는 한 장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어보는 모험도 해볼만 하지 않은가? 그게 안된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라며 이 작전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하여튼 이렇게 하여 훗날 '발지 대전투'로 불리우게 되는 1944년 연말 독일군의 이른바 크리스마스 대공세는 결정되었습니다. 발지(Bulge)는 특정한 지명이 아니라 영어로 돌출부란 뜻입니다.





이 전투가 개시되던 1944년 12월 당시의 전황지도를 살펴보면 프랑스와 벨기에 전역, 그리고 네델란드 남부를 장악한 연합군의 점령지역이 중부 벨기에의 아르덴느 지역에서 독일군의 침공 초기에 서쪽을 향해 불쑥 점령을 하고 이 지역에서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발지(Bulge)란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작전명은 <바하트 암 라인> 즉 '라인수비'작전으로 정해졌는데, 이것은 물론 아헨방면에서 라인강을 도하하려는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수비작전을 전개하는 것처럼 적을 기만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아헨 동쪽으로부터 쾰른에 이르는 라인강변으로 병력을 집결시켰는데, 이 부대이동 작업은 세상이 다 알만큼 시끌벅쩍한 소란 속에 이루어졌습니다. 그 반면 아르덴느 정면으로 항하는 주력부대의 이동에는 엄격한 보안 조치가 행해졌습니다. 그 결과 12월 중순까지는 화차 1만대분, 약 144,500톤의 무기와 탄약, 그리고 각종 보급품이 집결할 수 있었습니다.


작전 개요는 단순했습니다.


주공부대는 요제프 디트리히 SS(친위대)대장이 지휘하는 제6장갑군으로, 이들은 아르덴느 북방을 돌파하고 뮤즈강을 건너 안트워프를 탈환합니다. 그 남쪽에서는 폰 만토이펠 중장의 제5장갑군이 뮤즈강을 건너 주공부대의 좌익을 엄호하며 에리히 브란덴베르거 중장의 제 7군은 주공부대의 남쪽에서 연합군의 반격을 견제합니다.


마지막으로 귄터 블루멘트리트 중장의 제15군 역시 돌파지역의 남쪽에서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므로, 이 작전에는 처음부터 예비병력 따위는 없었습니다.


* 파란색 연합군의 역공



특히 히틀러의 특별지시로 구성된 오토 스코르체니 중령의 제150위장 기갑여단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라이프 즉, 유령부대란 별명이 붙은 그의 부하들은 전원이 노획한 미군 군복을 입고 미국제 무기로 무장했습니다. 이들은 주력부대보다 앞서 뮤즈강으로 직행하여 그곳에 있는 다리를 확보하는 한편으로, 미군들의 후방에 혼란을 조성하라는 특수임무를 부여받고 있었습니다.


아르덴느 서쪽의 미군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1944년 12월 16일 오전 5시 30분, 북으로는 몬샤우로부터 남으로는 에히테르나흐에 이르는 140Km의 아르덴느 전선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제6장갑군의 파이퍼 전투단은 12월 18일 스타벨로트 마을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전진한 거리는 불과 30Km남짓이었지만 이들은 그마마 가장 멀리까지 진출한 부대였습니다.


12월 17일 아침까지도 로스하이머 그라벤과, 크링켈트, 로세라트등의 주요 거점 대부분이 여전히 미군의 수중에 남아있었고, 독일군은 한발도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대공세 작전의 시작단계에서부터 뜻하지 않게 발목을 잡힌 독일군의 진격은 예정시간보다 최소한 24시간 이상 뒤쳐져 있었습니다.





12월 20일 제 12 SS기갑사단은 포위망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엘젠보른 고지의 99사단을 향해 필사적인 공세를 펼쳤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고, 정예 히틀러 유겐트사단의 전차들은 이 과정에서 속절없이 소멸되어갔습니다. 아르덴느 북익을 담당한 제 6장갑군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음이 분명했습니다.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이 독일군의 일제공세를 알게 된 것은 12월 16일 오후였습니다. 그는 랭스 근처에서 휴식하고 있던 제 82,제101공수사단과 제7, 제10 기갑사단에 아르덴느로 이동하여 방어진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17일 밤 자정 무렵에 증원부대로 투입된 제10기갑사단의 전차들이 굉음을 울리며 에히테르나흐 시내로 쏟아져 들어왔고, 다른 전선과 달리 전차의 지원이 전혀 없이 보병부대로만 구성되어있던 독일 제7군의 공세는 쉽게 저지당했습니다.


제 4사단의 북익에서는 미군 제 28보병사단이 선전을 펼치는 사이 제9기갑사단과 제5보병사단의 증원부대가 차례로 투입되어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해 버림에 따라 전선 최남단에서 시작된 독일군의 공세는 가장 먼저 한계상황을 맞게 됩니다.





그사이 제 5장갑군의 만토이펠은 다른 전선과 달리 포격 후 전차를 발진시키는 데신 보병부대를 먼저 진격시켜 기습을 가하는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제5장갑군의 보병부대는 그날 오후 미군의 방어선을 완전히 돌파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제 47장갑군단 예하 3개 사단은 이날 밤 서부전선에서 미군의 가장 큰 휴양소가 있는 클레르브를 함락했습니다. 클레르브를 점령한 이들은 다음 목표로 32Km 서쪽에 있는 바스토뉴였습니다.


12월 19일 아침 아이젠하워 원수가 서부전선의 군단장급 이상 지휘관들을 베르당으로 소집했습니다. 제 3군 사령관 패튼 중장에게 예정되어있던 독일본토 진공작전을 잠시 중단하고 아르덴느 지역에서 반격작전을 실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생비트에 대한 독일군의 공세는 20일 저녁부터 시작되었습니다. 6개의 포장도로가 교차하는 이곳은 양군에게 모두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미군 제7기갑사단이 생비트 방어 작전에 책임을 떠맡았습니다.


* 나포한 독일 킹타이거 전차



그리고 제 28사단과 제 106사단의 잔존병력도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오후 8시경 생비트 외곽 방어진지가 돌파 당했습니다. 23일 새벽 제 7사단은 생비트를 모두 철수했습니다. 22,000명으로 전투를 시작했던 그들의 병력은 6,000명으로 줄어있었습니다.


101공수 사단에게 바스토뉴를 사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제10기갑사단의 B전투단도 합류했습니다. 이들이 맞서 싸워야 할 상대는 만토이펠 중장의 독일 제 5장갑군 예하 3개 기갑사단 가운데서도 가장 막강한 전차 교도사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바스토뉴 약 10Km 지점에서 잘못된 정보로 만 하루이상을 낭비하고 미군은 시간을 벌수 있었습니다. 19일 아침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습니다. 미군은 점점 더 좁은 지역으로 밀리고 있었으나 12월 26일 제 4기갑사단이 바스토뉴에 도착하자 전세는 역전되었습니다.


* 발지전투 초기, 미군 포로들



이 시간 독일의 제2기갑사단의 야포 사정거리에 뮤즈강이 들어왔습니다. 제2기갑사단은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면 우회한다는 원칙으로 작전목표 가장 가까운 지점 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점점 더 강력해지는 미군의 반격을 혼자서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독일군은 어떤 적 전차도 상대할 수 있는 타이거 전차가 있었지만, 공중의 연합군의 타이푼 전투기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만토이펠의 제5장갑군 예하의 제 9기갑사단이 뮤즈강까지 겨우 도달하였지만 미 제 2기갑사단에게 저지당해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독일군에 남겨진 선택은 아르덴느로 밀어넣은 기갑부대들이 그나마 완전히 소멸되기 저에 재빨리 철수시키든가 아니면 현 전선에서 같이 자멸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보름간의 분투로 아르덴느 전선 서쪽으로 약 70Km정도 전진하는데 성공했지만 연합국의 점령지역 안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이 돌출부는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12월 30일 미 제3군이 제 11기갑사단을 선두에 세우고 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1월 3일에는 제1군의 부대들도 북쪽에서부터 협공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 미군의 역공



뮤즈강 건너편에 대기하고 있던 영국 30군단의 전차들도 이 돌출부의 서쪽 끝에서 서서히 압박해 들어옴에 따라 독일은 삼면에서 공격을 당하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1월 8일을 기해 히틀러는 아르덴느 전선의 모든 독일군 부대에 철수를 승인했습니다.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은 실패로 끝났음이 분명했습니다.


독일군은 이 라인수비작전에서 약 10만의 사상자를 내었고, 미군의 사상자는 8만이 조금 넘었습니다. 전쟁은 이후로도 약 4개월간 지속되었지만 마지막 한 장의 카드를 써버린 독일로써는 더 이상의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 발지전투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


* 독일 제6 장갑군 사령관 요제프 디트리히 SS(무장친위대) 대장





거리의 불량배 출신. 전차병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이 군 경력의 전부였습니다. 1930년대 초반에 나치 친위대(SS)에 입대했고, 히틀러가 정적(政敵)인 돌격대장 에른스트 룀을 숙청할 때는 그 행동대장으로 활약했습니다.


정규의 학교교육이나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그는 용맹 과감할 뿐 아니라 타고난 군인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히틀러가 좋아하는 것-나치당과 총통에 대한 열렬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눈부신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총통의 경호연대인 제1SS연대의 연대장이 되었고 이윽고 이 경호부대를 기갑사단으로 확대개편하면서 부대장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제1 SS 기갑사단은 러시아 전선에서 용맹을 떨치면서 줄곧 독일군 최강의 기갑사단이라는 명성과 함께 다른 부대에 비해 최신형 장비와 물자를 지급받는 정예부대 중의 정예부대였습니다. 이제 대장까지 승진한 그는 발지전투의 주공을 담담하는 제6장갑군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히틀러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뫼즈 강을 건너 안트워프까지 진출해서 연합군을 남북으로 두동강 내는 중책을 맡았으나 미군의 격렬한 저항과 물자의 부족 등으로 뫼즈 강을 도하하지도 못하고 후퇴하였습니다. 종전 후 말메디 학살사건(아래에서 설명)으로 10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 제1SS기갑사단의 제1전차연대장 요하임 파이퍼 중령





그는 나치와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공통점만 뺀다면 모든 면에서 디트리히와는 대조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중령은 그야말로 나치 친위대의 선민의식과 엘리트교육이 만들어낸 가장 전형적이고 모범적인 ‘작품’과도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베벨스부르크 SS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29세의 나이로 독일군 전체에서 최연소 연대장이었던 파이퍼는 잘생긴 용모에다 재능과 지성을 겸비한 탁월한 지휘관이었습니다.


러시아 전선에서는 소련군의 방어선을 단독으로 돌파하여 적진후방을 100km나 돌진, 아군 1500명을 구출하여 귀환하는 전공을 세워 최고훈장인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지만 그는 전장에서는 학살자에 가까웠습니다.


러시아 전선에서 그의 연대는 독일군 포로가 소련군에 의해 처형당한데 대한 보복으로 무려 4000명의 소련군 포로를 학살해 버렸고, 그의 부대는 발길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는 무자비한 만행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 종전후 전범 재판정에서...



그런 파이퍼에게 중책이 맡겨졌습니다. 공세를 앞두고 제1 SS전차연대는 45대의 최신형 타이거 전차를 수령함으로써 기존의 판터,4호전차와 더불어 140대 이상의 전차를 장비한 파이퍼 전투단으로 개편되었습니다. 파이퍼는 이 전투단을 이끌고 최선봉에 서서 앞길을 헤쳐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기대를 모았던 파이퍼도 미군의 극심한 저항, 좁아터진 산길, 연료의 부족 등으로 뫼즈강 직전에 진출이 좌절되었습니다. 종전 후 말메디 학살사건의 주범 중의 하나로 지목되어 11년 교도소 생활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으나 암살범에 의해 살해됩니다.


* 독일 제5 장갑군 사령관 핫소 폰 만토이펠 중장





독일군 중 유일하게 공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지휘를 받은 3개 기갑사단과 4개 보병사단은 아르덴느 중부지구에서 성공적으로 미군 전선을 돌파, 바스토뉴까지 진격함으로써 전 독일군 병력 중에서 최초의 작전의도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한때 ‘사막의 여우’ 롬멜의 부하로써 북아프리카에서, 러시아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운 노련한 야전지휘관이었습니다.


애초에 만토이펠 장군은 이 공세작전에서 조연급이었습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아르덴느 전선을 3개 구역으로 나눈 다음 이 3개군에 각기 할당했다고는 하지만, 공세의 중역은 최북단을 맡은 디트리히의 제6장갑군이었으며 다른 2개군은 이들의 남쪽 측면을 엄호하는 성격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남쪽과 북쪽의 공세가 일찌감치 거덜나버림에 따라 이제 누구보다도 실전경험이 풍부한 전차전술의 달인, 만토이펠이 이끄는 제 5장갑군에 짐이 지워졌습니다.


* 패튼 제3군의 전차부대 크레이튼 에이브람스 중령





에이브람스 중령은 벌지 전투에서 바스토뉴에서 포위된 제101 낙하산 사단의 구원부대 지휘관의 한 사람으로 있었습니다. 패튼 제3군이 바스토뉴를 구하려고 북쪽으로 치고 올라갈 때 가장 선봉에서 전차대를 이끌고 독일군의 치열한 포위망을 뚫고 미군을 구출하였습니다.


그는 2차 대전 중 패튼이 이끄는 제3군 선봉으로서 많은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그는 활동적인 전차 지휘관으로서 유명했습니다. 그는 지휘관으로서의 능력과 신뢰성이 높았고, 적극적이며 성공적인 장갑 지휘관으로서 알려져 있었습니다.


조지 패튼 장군은 그에 대해 "나는 육군으로 최고의 전차 지휘관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나에게는 한 명 동료가 있다. “바로 에이브람스, 그는 세계 챔피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후에 한국전쟁과 월남전에도 참전했고 합창의장을 역임했습니다.


* 바스토뉴 방어전에 투입된 미 101공수사단 부사단장 맥컬리프 부사단장





절박한 바스토뉴에 긴급 투입된 미 101공수사단의 테일러 소장이 회의 참석차 워싱턴에 가는 바람에 맥컬리프 준장이 이 역사적인 바스토뉴 방어전 전투를 맡게 되었습니다.


12월 22일 오후


바스토뉴를 포위하고 압박을 가하던 독일군 측에서 4명의 독일군이 백기를 앞세우고 미군 방어선쪽으로 걸어왔습니다. 전초 지휘소로 안내된 두명의 독일군 장교는 다음과 같은 항복 권고문을 전달했습니다.


“당신들은 완전히 포위되었소. 당신들에게 남은 선택은 오직 하나-명예로운 항복을 권고하는 바이오” 권고문을 다 읽은 맥컬리프는 종이쪽지를 손가락으로 퉁기면서 이렇게 뱉어냈다. “Nuts!, 미속어로 븅신들, 엿먹어라!”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 항복을 권유하는 독일군, 그러나 엿을 먹고...



독일군 장교들은 이 미국식 속어가 이해가 안되자 무슨 말이냐고 안내했던 킨나드 중령에게 물어보자 “이건 쉽게 말해서 당신들이 바스토뉴에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 우리가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뭐 이런 뜻이요” 독일군 장교들은 돌아갔고 다시 또 독일군의 포격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날 맥컬리프 준장이 내뱉은 "Nuts! 븅신들, 엿먹어라!" 이 말은 발지전투 내내 미군들이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 아이젠하워 원수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이 독일군의 일제공세를 알게 된 것은 12월 16일 오후였습니다. 장군은 전날 밤 워싱턴으로부터 자신의 계급이 원수로 승진되었음을 통보받아 썩 기분이 좋은 상태였습니다. 브래들리 중장과 더불어 패튼의 제3군을 라인강 건너 독일 본토의 자르지방으로 진격시키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보장교 니콜스 소령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와 그 사실을 보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두 장군은 일단 사태의 전말을 이해했습니다.


"지금 당장 그쪽으로 투입할 수 있는 예비병력이 얼마나 있소?" 총사령관이 물었다. "2개 공수사단과 2개 기갑사단이 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지체없이 명령을 내렸다. " 그 부대들은 즉시 아르덴느로 투입하시오."


그래서 미 제82,제101 공수사단과 제7,제10 양 기갑사단에 아르덴느로 이동하여 방어전에 합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 주요전투 및 특기사항 ]


< 말메디의 학살 >





파이퍼 전투단은 처음에는 모든 독일군 부대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진격을 계속하고 있지만, 그들이 진출한 거리는 아직도 30km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출발할 때부터 넉넉지 못한 연료가 벌써 달랑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최신형 타이거 전차는 천하무적의 괴력을 가진 대신에 10km를 주행하는데 무려 70리터의 연료를 퍼먹는 대식가였던 것입니다.


파이퍼는 다음 목표인 스타벨로트로 가기 전에 미군의 뵐링겐을 기습하여 배를 좀 채우기로 했습니다. 뵐링겐의 미군 연료저장고에 난입한 전차들은 약 5만 갤론의 연료를 탈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면서 여기서 포로로 잡은 50여명의 미군을 모조리 사살해버렸습니다.


만행의 시작이었습니다. 말메디읍으로부터 남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본드 마을에 도착하자 쫓겨온 미군과 전선으로 떠나는 미군들이 뒤엉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파이퍼의 전차들이 본드를 덮쳤습니다. 마침 140명의 병사를 태운 트럭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전차가 포문을 열자 순식간에 맨 선두에서 달리던 트럭이 산산조각이 났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두손을 하늘높이 쳐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두 120여명이었습니다. 독일군은 이들의 시계, 방한화, 돈지갑들을 강탈하고 방한 자켓을 모두 벗긴 다음 찬바람이 씽씽부는 벌판으로 몰고 갔습니다.


* 영화에서...



그리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때, 한 대의 장갑차가 덜커덕거리며 굴러 와서 그들 앞에 멎었습니다. 전차대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포이어(발사)" 명령과 동시에 장갑차에 설치된 기관총이 불을 뿜었고, 포로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그 자리에 픽픽 쓰러졌습니다.





일부 병사들이 운좋게 이 학살현장을 피해 도망쳤습니다. 순식간에 아르덴느 일대의 모든 미군 방어진지에 이 말메디 학살에 관한 소문이 쫙 퍼져나갔습니다. 미군들은 이제 최소한 독일 친위대 놈들과 싸울 때는 항복을 해도 소용이 없고, 자신들 역시 그들을 포로로 잡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요하임 파이퍼는 이 발지전투 이후 1945년에 종전될 때까지 긁힌 상처 하나없이 말짱하게 살아남았지만, 이 말메디의 학살로 인해 종전 후에 열린 뉘른베르크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그는 이 학살사건에 대한 책임으로는 비교적 작은 형기인 11년의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 석방됩니다. 이후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 가명으로 살다가 1976년 암살범이 투척한 화염병에 의해 살해된다. 그때 나이 61세였습니다.


< 위장 특공대 >


* 처형당하는 위장특공대


 

발지전투 초기에 깜쪽같은 독일군의 대규모 역습 외에 연합군을 혼란에 빠뜨린 독일군의 작전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위장특공대를 연합군 후방에 잠입시킨 것입니다. 이 위장 특공대는 전원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자들로 선발되어 미군복을 입고 카빈소총으로 무장했으며, 껌을 찍찍 씹어대는 모습까지 미군과 똑같아 보이도록 세심하게 훈련되었습니다.

 

2,500명이 되는 이 위장 특공대는 주로 무장 SS(친위대)의 특수 요원들이었지만 병력이 모자라서 육군과 공군에서도 영어를 할 수 있거나 미국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 사병들을 빌려왔습니다. 이들은 미군으로부터 노획한 지프와 트럭을 주로 사용했고 모자라는 경우에는 자기네 차량에다 녹색을 칠하고 큼직한 백색의 별을 그려 사용했습니다. 이들은 패주하는 미군들 후미에 붙어 여러 가지 교란작전을 벌이면서 미군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거미줄처럼 숲속을 가로지르는 오솔길이 태반인 아르덴느의 도로표지판을 바꾸어 놓는다든가 해서 미군들을 엉뚱한 데로 이동하게 했고 또 멀쩡한 도로 위에 지뢰밭 표시를 해둠으로써 미군 1개 포병대의 발을 하루 종일 발을 하루 종일 묶어 놓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미군 지휘관에게 접근하여 전방의 적정에 대하여 거짓 정보를 흘려줌으로써 이들이 점령지를 포기하고 후퇴하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팀은 미군 내부의 사소한 관습을 잘 모르는 바람에 정체가 드러나 사살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검문을 받게되자 ‘기병사단의 E중대’라고 대답했는데 기병사단은 중대를 말할 때 통상적인 ‘Company'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유독 ’Trooper'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또한 체포된 어느 팀은 심문을 받게 되자 자신들은 파리까지 침투하여 시내에서 집결, 베르사이유로 옮겨와 있던 연합군 총사령부를 기습하여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을 암살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는 허무맹랑한 진술을 태연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이래서 파리에는 비상경계망이 펼쳐졌고 아이젠하워 장군은 세겹 네겹의 엄중한 경호에 둘러싸여 졸지에 사령부 안에 유폐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르덴느 전선의 미군들은 이제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신경이 곤두선 헌병들이 검문을 강화함에 따라 부대의 이동은 더욱 시간이 걸리게 되었고, 헌병들은 계급고하를 불문하고 누구라도 불러 세운 다음 미국인이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외국인은 알기 힘든 질문을 퍼부어대는 방법으로 독일군 스파이를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키 마우스의 애인은 누구인가?” “일리노이주의 주도는 어디인가?” 따위의 질문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초기에 연합군을 혼란에 빠뜨린 독일 위장특공대들의 활약도 점차 진정되어 갔으나 그러나 발지전투 내내 연합군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한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이들 특공대들은 체포되었을 경우 미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규군이 아니라 스파이로 분류되었고, 전시의 스파이 행위는 제네바 협약에 의하더라도 총살형을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신분이 밝혀지는 대로 즉석에서 총살 되었습니다.

 

< 바스토뉴 포위전 >




 

파이퍼 중령이 이끄는 전차대가 벨기에 항구도시 안트워프를 향해 아르덴느 숲 북쪽으로 돌파구를 열고 있는 동안 아르덴느 숲 남쪽에서는 역전의 노장 만토이펠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들이 활로를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한때 ‘사막의 여우’ 롬멜의 부하로써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러시아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운 이 노련한 야전지휘관은 능수능란하게 미군을 유린하면서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르덴느 숲에 포진하고 있던 미군을 격파하면서 진격하던 만토이펠의 독일군이 미군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 곳은 숲 가운데 위치한 그 유명한 조그만 바스토뉴 읍이었습니다. 이 바스토뉴가 발지전투의 운명을 짊어진 중요한 전투장소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발지전투가 발발했을 당시 미군은 일시 혼란에 빠지긴 했었으나 아이젠하워 장군은 차라리 잘 됐다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다 죽어가던 독일놈들’이 선제공격을 걸어 왔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으나 이제 링으로 기어 올라와 한판 붙자고 나타났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느냐 하는 심정이 된 것입니다.



 

 

아이젠하워는 즉각 미군 101 공수사단을 바스토뉴로 급파시켜 그곳을 지키던 현지 미군 보병사단을 지원케하고 아르덴느 남쪽에서 제3군을 지휘하던 패튼에게는 바스토뉴를 구하도록 전차대를 선발하여 즉시 출발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바스토뉴는 상주 인구가 3,500명 정도로써 이 지방에서는 꽤 큰 시골마을이기도 하거니와 이 마을 광장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7가닥의 포장도로는 근처의 프랑스와 네델란드, 룩셈부르크,그리고 독일의 주요 도시들과 곧장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습니다.


바스토뉴를 지키고 있던 미군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상대는 만토이펠 중장의 독일 제5장갑군 예하 3개 기갑사단 가운데서도 가장 막강한 전력을 가진 전차교도 사단이었습니다.




 

이제 바스토뉴는 독일군에 완전 포위되었습니다. 발지전투가 시작된 이후 계속되는 악천후로 연합군은 공군의 힘을 빌릴 수도 없었고 오로지 패턴 전차부대가 구조하러 올 때까지 버티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바스토뉴를 둘러싼 인근 마을에서 치열한 격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폭설과 함께 모든 도로가 진창으로 변해버리는 바람에 전차가 기동하기에 고약한 상태가 되는 바람에 독일 전차부대가 바스토뉴로 진입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2월 23일


연일 계속되던 짙은 구름과 안개가 거짓말처럼 활짝 개었습니다. 200대가 넘는 아군 수송기가 날아와 무기를 포함해서 보급물자들은 바스토뉴에 떨어뜨리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 하루 일찍 도착한 셈이군. 오래살다 보니 공군 친구들이 일을 제대로 하는 걸 다 보게 되는구먼” 미군 병사들이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일시적인 한파와 청명한 날씨는 101사단에게 공중보급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었지만, 그 대신 독일군에게도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진창길이 단단하게 얼어붙자 전차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까지 바스토뉴로 진격하여 아군을 구출하고자 정신없이 달려오고 있는 에이브람스 중령이 이끄는 패튼 전차부대에게 패튼의 질타가 날아왔습니다. “뭘 꾸물거리고 있는가? 도상의 모든 도시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바스토뉴로 직행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에이브람스 중령이 결코 꾸물거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스토뉴를 16km 정도 앞둔 ‘바르나흐’에서 악귀처럼 달겨드는 독일군을 뿌리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려 버렸습니다. 이제 바스토뉴를 둘러싼 미군의 전초 진지로부터 8km 떨어진 외곽까지 도착하였습니다.


당장에라도 바스토뉴로 진입해야 했지만 또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독일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바스토뉴의 101사단이 매설해 놓은 지뢰와 숱한 도로 장애물이 아군 전차대에게도 적잖은 방해물로 등장했던 것입니다.



  


12월 26일 이른 아침


에이브람스 중령은 가볍게 몸을 날려 전차위로 뛰어 올랐습니다. “바스토뉴로 곧장 직행한다. 죽더라도 그곳에 가서 죽는다! 알았나?” 하지만 이 최후의 한걸음‘조차도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전차포를 든 독일병들이 도로 요소요소에 매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4시 45분


드디어 에이브람스 전차대가 바스토뉴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닷새간에 걸친 바스토뉴의 포위망이 풀리는 순간이었고, 히틀러의 대공세가 끝장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공은 미군편으로 넘어 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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