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사의 재밋는 뒷얘기(제4편)-절망을 딛고 울린 승전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으며
작성자블라디고작성시간18.08.12조회수756 목록 댓글 0[ 절망의 늪을 딛고 울린 승전가 ]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다르의 헌신적인 치료로 그간의 고통스러운 우울증에서 회복한 뒤에 쓴 곡입니다. 이 곡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그 강렬함에 흠뻑 매료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몇 년전 설문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클라식 곡으로 이곡이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피아니스트는 큰 손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마치 쥐어 뜯어내듯이 강렬하게 한 음 한 음을 혼신을 다해 내리꽂습니다. 연주장 전체가 떨리는 듯한 강렬한 전율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어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느리게 그러면서도 가슴을 뒤흔들 듯이 장중한 멜로디를 토해 놓습니다.
듣는 이의 심장과 영혼을 송두리째 뺏어가면서 한치의 틈새도 주지 않습니다. 홍수 시의 폭포수가 바다를 향해 달려가듯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러시아의 강물을 연상시키는 볼륨 넘치는 오케스트라의 위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피아노 소리가 건반 위로 격정적으로 흐르는 이 곡은 바로 라흐마니노프를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곡이 되었습니다.
* 교향곡 제1번
그런데 라흐마니노프에게 지독한 우울증을 안겨준 사건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러면 라흐마니노프의 명곡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한 1901년 4월부터 약 4년 전인 1897년 3월 그의 최초 교향곡(1번)을 발표했던 시점으로 돌아가 봅니다.
그의 교향곡 1번 초연은 처참한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의 완성하기 위하여 1년 동안 매일 7시간 씩 작곡에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초연 날 지휘자 글라즈노프가 술에 취한 채 지휘를 하는 바람에 완전히 연주는 망가졌습니다.
거기다 당시 ‘러시아 5인조(러시아 국민음악파를 대표하던 5인의 음악가, 발라키레프, 세자르 큐이,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 중에 세자르와 림스키코르사코프(‘세라자드’ 작곡가) 두 사람이 혹평에 가세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초연의 실패와 혹평에 큰 충격 속에 빠져버렸습니다.
* 젊은날의 라흐마니노프
사실 오늘날 그의 <교향곡 1번>은 결점을 찾아볼 수 없는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음악학자들에 의하면 그의 음악이 당시 보수적 음악 풍토를 뛰어 넘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해 보수층의 반발을 불러 온 것으로 추측합니다.
또 한가지는 위에서 말한 당시 러시아 음악계를 좌지우지하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5인조들이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전학한 라흐마니노프에게 비뚤어진 반감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뒤따르고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작곡가로서 회의를 느꼈고 음악적으로 완전히 무기력하고 의욕상실에 빠져버렸습니다. 극심한 우울증 증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스물 네 살이라는 젊은 시기에 닥친 이 병은 그에게 조금도 음악적 영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새로운 창작을 위해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습니다.
* 유난히 컸던 라흐마니노프의 손
* 니콜라스 다르 박사와의 만남
이 때 라흐마니노프는 주위의 권유로 정신병을 치료하는 니콜라스 다르 박사를 만나게 됩니다. 다행히 박사는 열광적인 음악 애호가였습니다. 치료를 시작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일반적인 의사와 환자 관계 이상의 정성과 집념과 사랑의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다르 박사가 3년이나 끌었던 중증 우울증 환자에게 시도했던 것은 최면 치료였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거의 매일 다르 박사를 방문했습니다. 다르 박사는 최면을 이용한 암시요법을 사용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던 박사는 그에게 다시 일어설 것이라고 용기를 끊임없이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세르게이, 자네는 이제 다시 음악을 쓸 것이야. 너무나 쉽고 자연스럽게...그것은 협주곡이 될 것이야. 그 어느 것보다도 뛰어나고 훌륭한 최고의 작품을!” 두 사람의 노력은 무려 3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봇물처럼 터진 그의 창작욕은 다시 활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 젊은날의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여기에서 나온 것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제2번 C단조>였습니다. 최고의 찬사가 뒤따랐습니다. 이제 리스트를 계승할 위대한 피아니즘의 주인공, 라흐마니노프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입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위대한 협주곡을 자신에게 새로운 예술 생명을 불어넣어준 은인 다르 박사에게 헌정하였습니다.
* 망명
이후 1902년 결혼을 하고 볼쇼이 극장의 지휘자 자리를 얻는 등 안정을 되찾던 라흐마니노프는 1907년부터 불리 시작한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서 러시아를 떠날 결심을 합니다. 그가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특별히 정치적 성향이 강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아내 나탈리아와의 애틋한 추억이 깃든 라일락 피는 아름다운 모스크바 인근의 이바노브카의 별장, 이 별장이 민중의 봉기로 불에 타 없어져 버리자 아무 미련없이 보따리를 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당시 볼쇼이 극장
고국을 떠난 후 유럽에서 12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던 라흐마니노프는 1918년 그의 나이 45세 때에 미국에 정착하게 됩니다. 사실 그는 자본주의 비즈니스만 있다면서 미국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가족의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작곡가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연주자로 나섰습니다.
커다란 손으로 옥타브를 뛰어넘는 기교적인 연주를 자유자재로 한 덕분에 피아노 마에스트로로 인정받으면서 활기찬 연주생활을 지속했습니다. 특히 라흐마니노프는 당대의 피아노 마에스트로에 걸맞게 스타인웨이 피아노의 전속 연주자로 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신흥대국 미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피아노 제작사 스타인웨이는 독일에서 사용했던 슈타인벡이라는 이름을 미국식 스타인웨이로 고치고 라흐마니노프를 전속 피아니스트로 스카우트한 것입니다. 지금 스타인웨이 브랜드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해진 배경은 이 때의 라흐마니노프 공로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 이바노브카 별장에서 교향곡 3번 작곡에 몰입하고 있는 라흐마니노프
러시아 혁명의 피해자로서 볼세비키와 레닌 정부를 싫어했던 라흐마니노프였지만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조국을 돕는 자선연주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이를 안 스탈린은 그에게 소비에트 1급 예술가로 대우하겠다며 귀국을 종용했지만 그는 거절했습니다. 아마도 이바노브카 별장이 없는 고국으로 선뜻 돌아갈 마음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제2차 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3년 3월 28일, 비버리힐스의 자택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1930년대부터 유럽에서 망명한 수많은 예술가들과 작가들은 미국, 특히 헐리우드나 비버리힐스 등지에 정착했습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토마스 만, 아르놀트 쇤베르크,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그러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도 이런 망명 예술가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조금이나마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달랬으리라 생각됩니다.
* 그의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