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사의 재밋는 뒷얘기(제18편)-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풍운아, 리하르트 바그너-그의 오페라 <탄호이저>의 '순례자의 합창'을 들으며
작성자블라디고작성시간18.10.24조회수733 목록 댓글 0[ 파란만장했던 풍운아, 리하르트 바그너 ]
바그너의 생애는 일견 못된 짓만 골라가면서 한 ‘부도덕’의 표본과도 같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그 역시 독일 낭만파의 최고봉을 이룬 음악가였던만큼 행실만 가지고 평가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영일(寧日)이란 없었던 그의 생애를 한번 흝어 봅시다.
우선 그는 출생부터 알쏭달쏭합니다. 탄생 일자는 일단 1813년 5월 22일로 되어 있으나 그보다 이틀 전이란 설도 있고 사흘 전이란 말도 있습니다. 어느 음악대학 입시에서 바그너의 출생 일자를 쓰라는 문제에 한 학생이 “바그너는 그의 생일날에 태어났다”고 썼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입니다.
아버지가 과연 누구였는지도 깔끔하지가 않습니다. 법률상 아버지였던 프리드리히 바그너는 아들이 태어난 지 반년 후에 세상을 떴고, 그 무렵 어머니는 배우인 루드비히 가이어와 밀애 중이었던 까닭에 그렇습니다. 남편이 죽은 지 약 1년 후 어머니는 가이어와 재혼했으므로 바그너의 진짜 아버지는 가이어란 소문이 파다했고 그 자신도 그렇게 믿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바그너는 고등학교 때까지도 학교 공부를 건성으로 했음은 물론 음악적 재능도 그다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8세 때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음악과 철학을 청강했지만 방탕한 생활로 인해 곧 바로 퇴학을 당했습니다. 요행히 그 곳 토마스 교회의 합창지휘자 바인리히를 알게 되어 그에게서 처음으로 진짜 음악 이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 바그너의 후원자였던 루드비히 2세가 지은 노이슈반스타인 성
19세 때 그는 <교향곡 C장조>를 작곡했습니다. 이 작품을 두고 슈만의 부인 클라라는 “베토벤을 그대로 흉내낸 것”이라고 비평했고, 멘델스존은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여 훗날 두 사람 사이의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가수였던 형을 찾아 20세의 바그너는 빌츠부르크로 가서 가극(오페라)의 실제면을 습득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다음 해 가극 <요정>을 완성한 그는 막데부르크 극단의 음악 지휘자가 되면서 비로서 자활의 길이 열립니다. 23세에는 4년 연상의 미모의 여배우 민나 플라너를 쫓아가 결혼을 하게 됩니다.
* 첫 부인 민나 플라너
그 후로도 실업과 취업을 되풀이하면서 불안정한 생활을 지속합니다. 멀리 러시아령 리가까지 갔다가 빚쟁이들에 몰려 야반도주를 하여 국경을 넘어오기도 했습니다. 바닷길로 프랑스 파리로 오다가 폭풍우를 만나 구사일생으로 파리에 오게 된 경험은 후에 <방랑하는 화란인>을 작곡할 때 많은 영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파리에서 바그너는 독일의 무명 신인 음악가로서 변변한 대접도 받지 못한 채 몇 줄의 글을 쓰는 등의 일을 하면서 겨우 연명하면서 <리엔치>, <방랑하는 화란인>을 작곡했습니다. 독일에서는 그래도 평판이 좋아 그는 자신감을 갖고 귀국했습니다. 라인 강을 처음 보고 조국에 성실할 것을 맹세하면서 눈물도 흘렸습니다.
위의 두 가극이 드레스덴 초연에서 성공하자 그는 그 곳 궁정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어 안정된 생활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무렵 쓴 작품이 <탄호이저>, <로엔그린> 등입니다. <로엔그린> 속의 <혼례의 합창>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신부가 예식장에 입장할 때 연주되는 곡입니다. 알고 보면 좀 찜찜하겠지만 <로엔그린> 자체는 경사스런 것과는 거리가 먼 비극으로 끝나는 가극입니다.
184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 혁명’은 다음 해 독일 드레스덴에도 파급되었습니다. 바그너는 혁명운동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그는 혁명을 지지하는 군중 앞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왕정을 즉각 폐지하고 화폐를 개혁하라!” 그러자 누군가 빈정대는 말투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의 열변은 좀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즉 ‘왕정을 즉각 폐지하고 화폐를 개혁하라! 그러면 나의 빚도 말소될 터이니...”
혁명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바그너는 지명수배되었고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스위스로 잽싸게 도주해서 이후 9년 동안을 그 곳에서 보냈습니다. 이 때를 ‘취리히 시대’라고 부릅니다.
* 왼쪽으로부터 부인 코지마, 바그너, 코지마의 아버지이자 바그너의 친구, 동시에 장인인 리스트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음악면에서 거창한 구상을 했습니다. 글쓰는 솜씨도 뛰어났던 바그너는 희곡을 최고의 예술 형식으로 정하고 음악을 비롯한 여타의 예술은 그에 융합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썼습니다. 이 작품은 전작인 <로엔그린>과는 동일인의 작품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판이했습니다.
그리고 ‘가극’이라는 타이틀도 붙어 있지 않아, 누군가에 의해서인가 ‘악극’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바그너 자신은 이 용어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나 그 때 이후 그의 작품은 후기의 것뿐 아니라 전기의 것도 희곡성이 강하다 하여 통틀어 ‘악극’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파리에서의 <탄호이저> 공연도 실패로 돌아가 멀리 모스크바까지 가는 등 유럽 각지를 전전하는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뜻밖에 구원의 손길이 뻗쳐왔습니다. 진작부터 바그너를 숭배하던 남독일의 바이에른 국왕 루드비히 2세가 그를 초빙한 것입니다. 거의 국빈급으로 당당히 뮌헨에 입성해 국왕의 파격적인 후원을 받으며 바그너는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착착 진행시켰습니다.
그러나 국왕이 그로 인해 너무 국고를 낭비한다는 비난이 일자 그는 또다시 쫓겨나다시피 스위스의 주네브로 가야 했습니다.
56세 때 그는 23세나 연하인 신부와 스위스에서 결혼했습니다. 신부는 다름 아닌 친구 리스트의 딸이자 제자 폰 뷜로의 아내였던 코지마였습니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뷜로는 분개한 나머지 그 후부터 죽을 때까지 바그너의 작품을 절대 지휘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바그너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니 이런 묘한 대답을 하더랍니다. “나의 아내의 남편이오”
* 부인을 빼앗긴 한스 폰 뷜러
59세가 된 바그너는 다시 독일로 돌아와 오랫동안의 이상이었던 새로운 양식의 극장을 중부 독일 바이로이트에 건립하기로 하고 4년 걸려 준공을 보았습니다. 그 극장의 개관 기념 연주용으로 작곡한 것이 4연작 <니벨룽겐의 반지>입니다. 전부 연주하자면 연속 나흘 밤이 걸리는 거작으로서 음악사상 그렇게 대규모의 작품은 전무후무합니다.
* 바이로이트 극장
초연 때는 새로운 독일제국의 황제인 빌헬름 1세와 옛 바이에른 국왕, 그 밖에 전 유럽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이로써 만년의 바그너는 결정적인 승리자로 자리를 굳혔으며 최종작인 <파르지팔>까지 호평리에 초연되었습니다. 노후 요양차 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그는 지병인 심장장애로 70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습니다.
* 바그너를 위한 변명
바그너의 생애가 파란만장했던 것만큼이나 그에 대한 해석 또한 분분합니다.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예술가의 삶이 작품과 일치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바그너는 말과 행동이 다른 파렴치한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바그너를 비난하는 이들은 그를 ‘배은망덕한’ 파렴치한으로 못을 박습니다.
바그너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당대의 거부 오토 베제동크의 부인을 유혹했고, 바그너 음악의 전도사라고 알려진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부인 코지마까지 유혹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게다가 바그너 음악의 광적인 숭배자였던 젊고 순진한 루드비히 2세 국왕을 꼬드겨 국가 재정을 파탄시키고 국왕에게 비운의 죽음까지 안겼다는 점도 비난의 사유에 들어갑니다.
* 루드비히 2세
그런데 그가 저지른 범죄행위나 윤리적 일탈행위의 특징을 잘 살펴보면 머리를 갸우뚱하게 하는 한 구석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그너는 평생 재산을 쌓아두고 산 적이 없습니다. 늘 빚에 쫓기며 살았고 살아생전 자신의 힘으로 집을 마련한 적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남이 준 돈으로 줄창 ‘소비’만 하고 살았습니다. 경제관념이 아예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돈을 갈취해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범죄행위를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 마틸데 베젠동크
그리고 여자 문제에 있어 그는 평범한 바람둥이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이혼한 첫 부인 민나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생활비를 보냈습니다. 마틸데 베젠동크가 바그너와의 사랑을 담은 시를 지었을 때는 이를 가사로 하여 <베젠동크 가곡>을 작곡했습니다. 심지어 두 사람의 운명을 빗대어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불륜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두 사람의 관계는 진실했습니다.
* 코지마
그런가 하면 코지마와는 세 아이를 낳고 평생을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그너를 아무리 변호한다고 해도, 치명적 결함이 많은 모범적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바그너는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서 치열하게 살다 간 사람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