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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음회

음악사의 재밋는 뒷얘기(제28편)-쇼팽의 심장에 얽힌 이야기(제28편)-쇼팽의 <전주곡 4번 E단조>를 들으며

작성자블라디고|작성시간18.12.27|조회수1,521 목록 댓글 2





[ 쇼팽의 심장에 얽힌 이야기 ]


프레데리크 쇼팽은 바르샤바에서 20마일 떨어진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 대혁명기에 사회적 혼란을 피해 폴란드로 이주한 프랑스인이었고, 어머니 유스티나는 폴란드의 몰락한 귀족의 딸이었습니다.


니콜라스는 처음에 연초 공장의 회계사로 일하다가 스카르벡 백작의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들어갔습니다. 니콜라스가 계속 폴란드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폴란드 귀족 집안에서 프랑스어를 쓰는 것이 유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쇼팽의 어머니 유스티나는 먼 친척뻘이 되는 스카르벡 백작의 가정부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정교사와 가정부는 곧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해 1남 3녀를 낳았고, 그중 둘째가 프레데리크였습니다.


국적은 아버지의 나라를 따르는 것이 보통이지만 쇼팽은 죽을 때까지 폴란드를 조국으로 여겼습니다. 어머니 고향이 폴란드인데다 아버지가 폴란드에 머물며 그곳을 무척 사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쇼팽의 생가



쇼팽은 1849년 10월 17일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조국의 흙을 자신의 무덤 위에 뿌려주되 자신의 심장만은 조국에 묻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저 고향에 잠들고 싶다는 감상적인 생각으로 남긴 말이 아니었습니다.


사망 당시 쇼팽은 폴란드 독립의 상징적 인물로 전 유럽에서 알려졌습니다. 1830년 11월 파리에 머물던 청년 쇼팽은 폴란드에서 독립혁명이 일어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1831년 9월 러시아군에 의해 폴란드 혁명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그는 귀국을 포기하고 파리에 정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한마디로 정치적 망명자의 신분이 된 것인데, 그로부터쇼팽은 평생 폴란드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자국에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망명객을 받아주는 이른바 망명의 천국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파리에는 많은 폴란드 독립운동가들이 우굴거렸습니다.


쇼팽은 자주 자선 연주회를 열어 폴란드 독립운동가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쇼팽이 이른바 ‘심장 유언’을 한 것은 조국 폴란드의 현실을 유럽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서였을 겁니다.


쇼팽은 장례식 때 연주할 곡까지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사후 보름이 지난 1849년 10월 30일 쇼팽의 장례식이 치러진 파리의 마들렌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에서는 그의 <전주곡 4번 E단조>가 흘러나왔습니다.


불과 2분 남짓의 이 짧은 곡을 쇼팽은 생전에 무척 좋아해서 그의 장례식 때 연주해줄 것을 원했습니다. 이 전주곡은 끝나갈 것 같은 무렵에 다시 시작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아쉬운 눈길로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듯한 쇼팽의 마음이 읽힙니다. 장례식 후 그의 시신은 파리의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 쇼팽의 묘지



쇼팽의 유언대로 그의 심장을 폴란드로 옮기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요즘이야 이식을 위해 장기를 해외로 옮기는 경우가 간혹 있다지만 이것은 사실 불법입니다. 국가 간의 장기 이동은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쇼팽의 심장은 우여곡절 끝에 고국 폴란드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교회에 안치되었습니다. 임종을 지켜 보았던 쇼팽의 누나 루드비카가 사랑하는 동생의 심장을 옷 속에 숨겨 경비병의 눈을 피해 바르샤바까지 아슬아슬하게 옮겼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안식을 찾은 듯 했던 쇼팽의 심장은 그 후 계속 수난을 겪었습니다. 가장 심각했던 일은 1944년에 일어났습니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에 이어 독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군이 패퇴할 기미가 보이자 폴란드 저항군은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1944년 8월 1일 오후 다섯 시에 시작되어 1944년 10월 2일까지 두 달간 계속된 봉기는 그러나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실패로 끝났습니다. 봉기의 중심지 바르샤바는 깡그리 폐허로 변했습니다. “바르샤바라는 지명만 빼고 모두 파괴하라”는 히틀러 명령의 결과였습니다. 훗날 1970년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바르샤바 봉기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습니다.


그 때 바르샤바가 파괴될 당시 시내 중심부에 있던 성 십자가 교회도 폭격을 받았습니다. 그 안에 안치된 쇼팽의 심장도 위기에 처하게 되자, 평소 쇼팽을 존경했던 슐체라는 독일군 군종 목사가 성당의 주임 신부에게 진심 어린 제안을 했습니다. 쇼팽의 심장을 자신이 안전하게 보관했다가 전쟁이 끝나면 돌려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임 신부는 그가 독일인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무척 고민했지만 폭격이 심해지고 성당의 천정까지 무너지게 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슐체에게 심장을 넘겨주었습니다. 그 후 목사는 실종되었고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영원히 사라져버렸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쇼팽의 심장은 안전하게 보관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엉뚱하게도 바르샤바 봉기의 진압군 지휘관이었던 SS친위대 장군 하인츠 라이네파르트가 보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후 하인츠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 날 슐체 목사가 폴란드의 귀한 종교 유물이라면 흑단 상자 하나를 그에게 헌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흑단상자 뒷면을 자세히 살펴보다 쇼팽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진압 후 흉흉해진 폴란드인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폴란드인들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슐체 목사가 왜 종교 유물이라고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혹시 쇼팽 심장이라고 하면 독일로 반출할까봐서 그러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하여튼 쇼팽의 심장은 군인으로서 비교적 양심적인 인물이었던 라이네파르트 장군 덕택에 이 세상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바르샤바를 지키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어 징계를 받았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덕분에 2차 대전이 끝난 후 전범재판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 하인츠 라이네파르트



다시 쇼팽의 심장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반납식은 1944년 9월 라이네파르트 장군의 명령에 따라 나치 군악대의 연주 속에 성대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쇼팽의 심장을 헌납 받은 폴란드 대주교는 그것을 성 십자가 교회가 재건될 때까지 쇼팽의 생가인 젤라조바 볼라의 피아노 위에 보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폴란드 의사들이 흑단상자를 개봉해서 확인해 보았는데, 쇼팽의 심장은 코냑으로 추정되는 알코올에 담긴 채 잘 보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폴란드 바르샤바 폭동에 관해서는 용두열 #662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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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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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변호정 | 작성시간 18.12.29 쇼팽의 일대기 잘 읽엇읍니다, 조국애가 처절하네요
  • 작성자블라디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12.30 쇼팽의 일대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첫사랑 이야기와 조르주 상드와의
    연애 이야긴데, 상드와의 연애 행각은 이미 소개한 바 있고...쇼팽의 유명
    한 이별곡이 탄생하는 첫사랑 얘기는 다음에 기회있으면 소개를...
    변대감,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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