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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음회

(새연재) 터키의 추억(제1편)-터키민족의 정체,이스탄불의 유래, 이스탄불의 명소1 소피아 성당-터키민요 '위스크다르'를 들으며

작성자블라디고|작성시간19.01.29|조회수1,426 목록 댓글 2


* 구시가지서 바라보는 갈라타 탑과 건물들



새연재 [ 터키의 추억 ]을 시작하며


오늘부터 [터키의 추억]을 새로이 연재합니다. 저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터키에 두 번씩(1990~1994, 1998~2000)이나 이스탄불 무역관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어 터키 얘기만 나오면 귀가 솔깃해지곤 합니다. 지금도 유럽쪽 이스탄불에 위치했던 사무실 창문으로 멀리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의 아시아가 아스라이 떠오르곤 합니다(이스탄불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어떤 날은 보스포루스 다리를 두 번씩이나 왕복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나만큼 아시아와 유럽을 많이 왔다리 갔다리하는 사람이 있을까하고 차 안에서 생각하면서 슬며시 웃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한편으로는 언젠가는 터키에 관해서 글을 한 번 써볼까 하는 생각도 언뜻언뜻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잘 알고 있는 출판사측에서 터키에 관해 글을 써보지 않겠느냐하고 제안을 해 와서 고심을 하다가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시중에 터키에 관해 많은 책이 나와 있어 한편으로는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저만의 독특한 경험을 살리고 차별화된 시각으로 글을 쓰다보면 나름대로 재미있는 책자가 되지 않을까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


터키의 역사, 문화, 국민성, 터키인들의 생활, 명소들(무진장한 이스탄불의 볼 것들, 이밖에 카파토키아, 트로이 유적, 안탈리아, 파묵칼레, 에페소스 등 터키 전역의 명소들), 세계적인 터키 음식, 터키와 우리나라와의 관계(터키군의 한국전쟁 참전 포함) 등에다가 여러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버무려 나갈 생각입니다. 겸사겸사해서 앞으로 혹시 터키 여행을 계획하실 때 요긴한 자료가 되지 않을까도 생각됩니다.


부연해서 그동안 70편에 걸쳐서 절찬리에 연재했던 <영화 & 그 역사적 배경>은 <영화와 함께 읽어보는 역사와 인물>이란 제목으로 상,하권 두 권으로 곧 출판된 예정임을 말씀드립니다. 다시 한번 종전과 같은 각별한 성원과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 터키의 추억(제1편), 터키민족의 정체, 이스탄불의 유래, 이스탄불의 명소1 소피아 성당 ]



< 터키족의 역사 >


터키인들은 자신들을 ‘투르크’라고 부릅니다. ‘투르크’는 ‘힘센, 강한’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었던 투르크 족은 말을 엄청나게 잘 타서 기동력이 뛰어났습니다. 유목민족이었던 몽고족과 같은 스타일의 민족입니다.


투르크족은 아시아 북동쪽에서 출발하여 중앙아시아 전역을 휩쓸고 아나톨리아 반도(지금의 터키 반도)에 정착하여 셀주크 터키와 이어서 오스만 터키를 세우면서 유럽의 발칸반도와 중동 전역, 그리고 아프리카 북부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형성했습니다.


투르크 민족사는 초기 중국사에서 꼭 등장하는 바로 그 흉노에서 출발합니다. 중국 북방에서 하도 설쳐대는 바람에 진시황 때 만리장성을 쌓게 만들었던 흉노 제국은 여러 유목민족들이 혼합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지배계층은 투르크족이었습니다.


이후 흉노가 쇠퇴한 뒤 5세기 경 유럽에 갑자기 나타나 유럽을 벌벌 떨게 했던 훈족은 바로 이 흉노의 후예였습니다. 아틸라(1)가 이끄는 무시무시한 훈족의 기세는 결국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낳았고 이는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가속화 시키면서 유럽의 중세암흑시대를 낳는 엄청난 사건이기도 합니다.


* 터키인들의 고향, 중앙아시아



훈족의 이주와 쇠퇴 이후 새롭게 떠오른 세력이 돌궐이었습니다. 돌궐은 투르크의 중국어 발음으로, 오늘날 투르크란 명칭이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돌궐을 위구르가 이어받고, 그의 일파인 오우즈 족이 서진(西進)하면서 셀주크 터키 제국을 건설합니다. 이 셀주크 터키 때문에 십자군 전쟁(2)이라는 역사적인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투르크 족은 7세기 경 아라비아 반도에서 마호멧이 일으킨 이슬람교를 접하면서 점차 이슬람교를 믿게 되면서 이후 셀주크 터키, 오스만 터키에 이르러 완전히 이슬람 국가로 탄생합니다.


위에서 얘기한대로 투르크족은 11세기에 아나톨리아 반도를 장악한 후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에서 셀주크와 오스만으로 대표되는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당시 유럽이 중세암흑시대를 헤매고 있을 때, 이들은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여 세계 문화를 한층 높은 수준으로 이끌었습니다. 더욱이 1453년 오스만 터키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동로마제국을 무너뜨림으로서 이른바 <팍스 오스만 시대:오스만에 의한 평화>를 600년간 구가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 지역의 민족들은 모두 투르크족입니다. 여기서 ‘스탄’이란 단어는 ‘땅’이란 말입니다. 지금도 터키인들은 중앙아시아 사람들과 70% 가량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 오스만 제국



(1) 아틸라


5세기 훈족의 왕으로서 훈족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아틸라는 게르만족뿐 아니라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까지 침략하여 악명을 떨쳤습니다. 그가 훈족의 왕좌에 앉았던 시간은 고작 8년 정도에 불과했지만, 아틸라는 재위기간 동안 온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2)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에 관하여는 <영화 & 그 역사적 배경(12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용음회 #679에 있습니다.


< 이스탄불의 유래 >


이스탄불의 고대적 이름은 비잔티움이었습니다. 이 명칭은 ‘비자스’라는 어느 고대 그리스 장군의 이름에서 유래합니다. 그는 식민지 건설을 위하여 그리스를 떠나기 전 델포이 신전(1)에서 새로운 식민지로 적당한 지역에 대한 신탁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가 받은 신탁의 내용은 “장님들이 사는 곳의 반대편에 도시를 건설하라”였습니다. 배를 타고 길을 떠나 보스포루스 해협(2)에 다다른 비자스와 그의 일행은 아시아 지역(지금의 위스크다르 지역)에서 반대편에 있는 언덕과 마주친 순간 숨이 콱 막히면서 동시에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곳에는 세 바다가 만나는 천혜의 요새에다 그 무엇과 견줄 수 없는 절경이 펼쳐져 있었던 겁니다.


* 이스탄불 지도

오른편이 파란색이 보스푸로스 해협, 왼쪽으로 꼬부라져 올라가는 파란색이 골든혼, 왼편 아래 큰 바다가

 마르마르해입니다.




보스포루스 물결과 골든 혼, 그리고 에게 해로 흘러가는 마르마르 해의 세 물줄기가 빚어내는 이 언덕은 바로 지상의 천국으로 보였습니다.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언덕에 비자스는 그의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래서 비자스의 이름을 딴 비잔티움은 이렇게 생겨났습니다.


이 도시는 32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틴 대제가 수도로 정한 후 그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 되었습니다. 이후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면서 동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이라고도 합니다)의 수도로서 자리 잡으면서 9세기 경에는 인구가 100만 명의 세계 최대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 터키와 이스탄불, 그리고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르해를 지나면 다다넬스 해협이

  나오고 이어서 에개해로 연결됩니다.



약 1천 년 간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다가 점차 제국이 쇠락하면서 1453년 5월 29일,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터키에게 함락됩니다. 메흐메트 2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도시로’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이스틴폴린’에서 유래한 이스탄불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1) 델포이 신전


델포이는 그리스의 아테네 북쪽 파르나소스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중요한 사항을 결정할 때마다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신들에게 가부를 묻는 일이 일반적인 관례로 되어 있었습니다. 무녀나 점을 통해 신과 접촉해서 신들의 지침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신탁(神託)'이라고 부릅니다. 현재는 델피라고 부릅니다.


(2) 보스프러스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은 이스탄불의 아시아와 유럽을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흑해에서 마르마르해로 연결되는 목 같은 모양이어서 모가지라를 뜻하는 터키어입니다. 해협의 동쪽이 아시아, 서쪽이 유럽입니다. 이 해협은 고대로부터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 보스포루스 해협의 과거 술탄의 별장



흑해와 지중해,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는 수로로서 지리적 가치가 높아 중세의 교통로와 무역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에는 아시아와 유럽 을 연결하는 자동차 전용 다리가 3개 있습니다. 그리고 해저터널이 1개 있습니다. 제1보스포루스교는 영국의 기술과 자본으로, 제2 보스포루스교는 일본의 기술과 자본으로, 제3보스포루스교는 우리나라의 SK건설과 현대가 합작으로 지난 2106년 완공했습니다.


* SK 건설과 터키업체가 합작으로 건설한 유라시아 해저터널





유라시아 해저터널이라고 불리우는 터널은 우리나라의 SK 건설과 터키회사가 합작으로 지난 2017년 완공했습니다.보스포루스 해협은 양쪽 기슭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치가 일품입니다.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돌마바흐체 궁전, 루멜리 히사르 요새 등 이스탄불의 유서 깊은 건축물들과 고급 주택, 오래된 멋진 별장들이 주욱 늘어서 있습니다.


제가 근무할 때는 제1보스포루스 다리와 제2보스포루스 다리만 있었는데 터키인들이 특히 일본의 기술과 자본으로 건설한 제2보스포루스 다리만 나오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때는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 손으로 제3보스포루스 다리와 유라시아 해저터널까지 완공했으니 가슴이 뿌듯하네요. 우리를 대하는 터키인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유라시아 해저터널은 세계에서 유일한 대륙간 해저터널이기도 합니다.


특히 유라시아 해저터널 건설을 진두지휘한 SK 건설 부사장은 제가 있을 때 가까이 지내던 SK 지사장이었고 저의 대학 후배이기도 해서 무척 대견스럽습니다. 그의 승승장구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보스포루스 다리 3개와 유라시아 해저터널은 BOT(Build-Own-Transfer) 방식,그러니까 민간투자사업 방식으로 건설했습니다. 이는 민간업체가 건설해서 운영하다가 일정기간이 지난 다음에 정부에 넘기는 방식이지요.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나 전철의 민자사업이 그런 경우입니다. SK나 현대가 앞으로 장기간 동안 통행료를 받고 운영하다가 터키 정부에 넘기겠지요. 아무튼 한번 가서 이 눈으로 똑똑히 보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 보스포루스 해협과 SK와 현대가 건설한 보스포루스 3교



< 이스탄불의 명소, 소피아 성당 >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소피아 성당입니다. 동로마제국 전성기인 537년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완성된 그리스 정교의 총본산이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을 대신하여 서구 정신의 요람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중앙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둥근 돔을 만들고 그 주위에 작은 돔을 올려 무게를 분산시켰습니다. 이 기술은 당시 신자들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비잔틴 시대 건축물의 압권으로 꼽힙니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황제의 문이 기다리고 있고 이를 지나 성당 본체로 들어가자마자 사람들의 입을 딱 벌어지게 하는 놀라움을 안겨줍니다. 그야말로 대규모 운동장이 건물 안에 들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중앙의 돔은 높이 솟아 커다란 공간을 만들며 방문객들을 압도하듯 웅장한 자태를 뽐냅니다.


까마득히 보이는 천장까지의 높이는 자그만치 54m로서 20층 가까운 빌딩의 높이입니다. 1,500년 전 당시의 기술로 이런 건물을 세웠다는 것이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1453년 오스만 터키에 점령당하면서 500년간 모스크로 사용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소피아 성당을 찾은 메흐메트 2세는 이곳을 모스크로 바꾸면서도 기독교 성화를 건드리지 않고 하얀 천으로 덮어놓고 의례를 행했다고 합니다. 우상 숭배를 극도로 꺼려하는 이슬람교도로서 참으로 훌륭한 태도였습니다.


오스만 제국 최고의 전성시대인 술레이만 대제(1) 시대에 들어서도 기독교 성화는 살짝 회칠로 가려졌을 뿐입니다.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유럽 각국은 성 소피아 성당의 종교적 복원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이에 터키 정부는 성 소피아 성당을 인류 모두의 공동유산인 박물관으로 지정하고, 그 안에서의 종교적 행위를 일체 금지했습니다.

현재는 회칠한 것을 거의 벗겨내서 동로마제국 당시의 소피아 성당의 화려했던 모습을 대부분 복원해 놓았습니다.



(1) 술레이만 대제





술레이만 대제는 오스만 제국의 제10대 술탄입니다(재위 1520년-1566년). 예술적 탁월한 재능과 군사전략가로서의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46년이라는 긴 치세 동안 세 대륙을 가로지르며 13차례의 대외원정을 실행에 옮겨 수많은 군사적 업적을 쌓음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룩하였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유사한 걸출한 정복자였습니다.


유럽인들은 그를 ‘위대한 술레이만(the Magnificent)’이라고 불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술레이만 대제’로 번역됩니다. 터키에서는 법전을 편찬하여 제국의 제도를 정비한 업적을 높이 사 ‘입법자’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 술레이만은 유대교와 기독교와 더불어 이슬람교에서도 경전으로 추앙받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고대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터키어식 발음입니다.


당시 이스탄불에 주둔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한 대사는 술레이만에 대해 ‘도리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맹렬히 공격하고 무너뜨린 인물’이라며 그를 평했습니다. 아버지 술탄 셀림이 술래이만에게 제위를 물려주었을 때 그의 나이 25세 때였습니다.


그는 성격이 관대했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인물로서 특정한 종교나 인종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백성들에게 숭앙받았습니다. 술레이만이 통치기간 동안의 탁월한 행정적 치적을 살펴보면 ‘카누니’ 즉 입법자란 칭호를 받을만했습니다. 그의 치세 때 발칸반도를 점령했고 빈을 포위하고 압박했으나 함락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때 빈을 함락했으면 유럽역사는 아니 세계사는 다시 써야할 뻔 했던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쪽으로 눈을 돌려 십자군이 지키고 있던 터키 반도 바로 아래의 로도스 섬을 함락함으로서 점차 지중해를 오스만 터키의 내해(內海)로 만드는 초석을 닦아 나갔습니다. 또한 지금의 이라크로 동진하면서 로마제국에 버금가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 시대별로 보는 오스만 제국 확장도



* 위스크다르 노래 가사


위스크다르란 이스탄불의 아시아쪽 지역을 말합니다. 이 노래는 한국전쟁 당시 참전했던 터키군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해졌습니다. 우리 어렸을 적에 “위스키 달라 찾아왔더니...어쩌구 저쩌구”하며 가사를 만들어 불렀던 기억이 떠오르게 합니다. 이 노래는 위스크다르에 사는 어느 처녀와 이 지역의 세관 관리 사이의 사랑을 읊고 있습니다. 

 

위스크다르 가는 길에 비가 내리네

내 님의 외투 자락이 땅에 끌리네

내 님이 잠에서 덜 깨어 눈이 감겼네

우리 서로 사랑하는데 누가 막으리

내 님의 깃 달린 셔츠도 너무 잘 어울리네


위스크다르 가는 길에 손수건을 놓았네

내 님을 위한 손수건에 사랑을 담았네

어느새 내 님이 바로 옆에 있네

우리 서로 사랑하는데 누가 막으리

내 님의 깃 달린 셔츠도 너무 잘 어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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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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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변호정 | 작성시간 19.01.30 터키는 관광으로 한번 구경햇는데 로마의 잔제와 사도바울의 행적지인 에페소 등
    위대한 술탄의 궁전과 ㅊ특히 침소에 들 하룻밤 궁녀의 간택권이 술탄의 모후에게 잇다는것
    아주 흥미로운것들이 마니 잇더군요.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배구선수 김연경이 활약하는 팀의 여자선수들이 넘흐 예쁘더군요. 터키 6년 생활 복받앗엇읍니다
    연재 기대됩니다 감솨!!!
  • 작성자블라디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1.30 집에 있는 소장 자료와 그밖의 신작 자료들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터키를 떠난지
    오래되서 당시 경험만 가지고 글 쓰는 것도 한계가 있어 잠깐 터키를 다녀올까를 생각중
    에 있지만...현재 <영화와 함께 읽는 역사와 인물> 하권 만지느라고 정신없어서...하여튼
    일단 갖고있는 자료와 도서관 자료들을 참고해서 시리즈를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항상
    성원해주셔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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