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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음회

터키의 추억(제6편)-투르크족의 이슬람화, 셀주크투르크 제국의 등장, 중세 최대의 십자군 전쟁-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OST를 들으며

작성자블라디고|작성시간19.03.19|조회수3,194 목록 댓글 4


*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 셀주크 투르크 군



[ 투르크족의 이슬람화 ]


오늘날 터키는 대부분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의 땅입니다. 터키는 20세기 초까지 500년 동안 이슬람 세계의 맏형이었습니다. 터키인의 90%가 무슬림(이슬람 교를 믿는 사람)입니다. 아르메니아족 등 10% 남짓한 소수민족 일부가 기독교를 믿고 있기 때문에 18%의 쿠르드 족과 72%인 투르크족은 거의 전부 무슬림입니다.


투르크족이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을 때 그들은 대부분 ‘탱그리’로 불리던 하늘 신을 믿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다른 자연 신들을 숭배하고 있었고 다른 일부는 불교를 믿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신을 믿고 있던 투르크는 어떻게 유일신 종교인 이슬람을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당나라의 무자비한 공격때문이었습니다.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투르크족에 속하는 흉노와 돌궐은 두렵고 귀찮은 존재였습니다. 기회만 되면 약탈을 하러 중원으로 몰려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인력을 동원해 만리장성을 쌓았던 것이죠. 8세기 중엽 잠시 투르크의 힘이 약화되자 당나라는 다시는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대군을 파견해 토벌에 나섰습니다. 이 군대를 이끈 사람이 바로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였습니다.


* 투르크족의 고향, 중앙 아시아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원정군은 승승장구하며 투르크족을 몰아붙여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이곳에 있던 투르크 부족 족장은 투항을 선언하고 당나라에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는 족장을 죽이고 마을을 약탈하고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화가 잔뜩 난 족장의 아들은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서 태동해 중동과 서아시아지역을 다스리던 이슬람 압바스 왕조에 달려가 도움을 구했습니다. 당나라에 위협을 느낀 다른 투르크 부족들도 일제히 압바스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압바스 왕국도 당나라의 확장을 경계하고 있던 터라 기꺼이 요청을 받아들여 바로 연합군을 조직해서 반격에 나섰습니다..


* 고선지



751년 7월, 30만 명의 투르크-압바스 연합군이 타슈켄트의 북동쪽에 있는 탈라스 강가에서 7만 명의 당나라 군대와 부딪쳤습니다. 중세 최대의 세계대전이라고 일컬어지는 ‘탈라스 전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5일 동안 진행된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는 참패했습니다.


병사의 70%인 5만 명이 전사하고 잡힌 포로의 수만 해도 1만 명이 넘었습니다. 간신히 살아서 당나라로 돌아간 병사는 수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로써 중안아시아는 압바스 왕조가 다스리는 이슬람 왕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부터 투르크족은 빠르게 이슬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늘 신 ‘탱그리’와 이슬람의 알라는 별로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후 셀주크투르크 제국의 창시자 셀주크가 이슬람을 받아들이자 더 많은 사람들이 무슬림이 되었습니다. 투르크족은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크스탄, 키르기즈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세웠는데 이들이 모두 이슬람 국가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1949년 중국의 강제점령으로 중국 땅에 편입된 신장위구르에 사는 사람들도 투르크족입니다.


* 셀주크투르크 병사



[ 셀주크 투르크 제국의 창건 ]


압바스 왕조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과정에서 이슬람화 된 셀주크투르크가 세력을 키운 후 자신들을 구해줬던 압바스 왕조를 공격해 중동 일대의 영토를 지배한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토사구팽은 많은 역사에서 일어나는 비일비재한 사건입니다.


셀주크의 손자 토그릴은 1055년 압바스 왕조의 수도인 이라크의 바그다드까지 함락하고, 이슬람교의 최고지도자 칼리프에게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지도자인 술탄의 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칼리프의 딸과 결혼도 했습니다. 칼리프와 술탄의 관계는 로마제국으로 치면 교황과 황제의 관계와 비슷하지요.


* 셀주크 투르크 판도



이로써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라크가 이끌던 이슬람세계가 셀주크투르크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온 것입니다. 셀주크의 압바스 점령은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냉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셀주크 제국은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기독교의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땅을 계속 침식해 들어갔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이교도 투르크인’들에게 당하고만 있을 비잔틴 제국이 아니었습니다. 1071년에 비잔틴 제국의 디오게네스 황제는 셀주크 제국을 혼쭐을 내기 위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원정을 나섰고, 지금의 터키 동부 반 호수 인근 만지케르트에서 셀주크와 마주쳤습니다.


셀주크 병력은 고작 5만 명, 상대를 얕본 비잔틴군은 지체 없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매복하고 있던 셀주크군에 속절없이 당했습니다. 투르크는 기마로 다져진 민족입니다. 말을 타고 도망가는 척 하면서 몸을 홱 뒤로 돌려 활을 쏘는 기술에 비잔틴 병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습니다.


비잔틴군은 대패했고 황제마저 포로로 잡혔습니다. 디오게네스 황제는 겨우 풀려났지만 아나톨리아의 영토(터키 반도)를 내주고 해마다 많은 조공을 바치겠다는 굴욕적인 약속을 해야 했습니다. 이로써 해가 뜨는 신비의 땅 아나톨리아는 투르크족의 차지가 되었고, 지금까지 이슬람의 영토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아나톨리아는 투르크족의 땅이라는 뜻에서 ‘튀르키아’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만지케르트 전투는 아나톨리아의 주인이 바뀐 전투이자 <십자군 전쟁>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인 전투이기도 했습니다.


아래에서 이 <십자군 전쟁>에 관하여 자세히 살펴봅니다.



[ 십자군 전쟁 ]


인류 역사상 200년이라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치러진 전쟁이자 세계 2대 종교가 격돌한 십자군 전쟁은 인류 역사상 대사건이었습니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교황 우르바노의 이 위력적인 한 마디로 촉발된 십자군 전쟁은, 그 무엇보다도 인간이 스스로 일으킨 전쟁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인간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200년에 걸쳐 총 9차례 치러졌습니다. 이 중에서 제1차 십자군 전쟁(예루살렘 함락), 제3차 십자군 전쟁(사자왕 리차드 1세와 전설적인 이슬람의 살라딘과의 격돌), 제4차 십자군(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눈여겨 볼만한 전쟁입니다. 아래에서는 주로 이 3개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십자군 전쟁의 배경, 만지케르트 전투와 카노사의 굴욕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와 1077년의 ‘카노사의 굴욕’. 이 두 가지 사건이 없었다면 십자군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은 11세기 초까지는 동유럽과 중동에서 막강한 위력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1025년에 바실리우스 2세가 죽은 후 약 반세기 동안 13명의 황제가 난립하며 혼란과 쇠퇴를 가져왔습니다. 한편으로는 동쪽에서 셀주크 투르크가 노도와 같이 밀려오면서 제국은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그리고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군이 비잔틴군을 대파했습니다. 이로써 터키 반도(소아시아 반도, 혹은 아나톨리아 반도라고도 함) 대부분이 셀주크의 손에 들어갔고, 셀주크 투르크는 이집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동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 후 6년 뒤에는 서유럽에서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로마 교황과 독일 황제의 극한 대립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독일 지역 사제들의 서임권이 황제에게 있느니, 교황에게 있느니 하면서 하인리히 4세 황제와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이 서로 투닥거리면서 벌어진 충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일단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에서 교황에게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교황권이 최종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이를 갈면서 복수의 기회를 노렸습니다. 클레멘스 3세를 대립교황으로 내세운 뒤 1082년에는 로마를 공격하여 그레고리오 교황을 내쫓아 버렸습니다. 원한 속에 숨진 그레고리오를 이어 1088년에 선출된 우르바노 2세도 교황권의 부활을 외칩니다.


이처럼 동서의 로마(동로마 제국과 로마 교황)가 모두 위기에 처한 가운데, 양측에서 서로 힘을 합쳐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그 뒤 비잔틴에서는 1081년에 알렉시우스가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그는 제국의 위기에 때맞춰 출현한 영명한 군주였습니다. 그는 나중에는 자력으로 셀주크를 물리치고 터키 반도를 대부분 수복하게 되지만 당시는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을 받고 있던 다급한 처지여서 서유럽 쪽에서 지원을 받아 보자는 생각을 합니다.


* 우르바노 2세



알렉시우스가 보낸 사절이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 참석하여 ‘이교도와의 전쟁에 힘을 보태주기 바란다’는 뜻을 전하자, 우르바노 2세 교황은 얼씨구나하고 이를 황제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치켜든 깃발 아래 전 유럽의 봉건영주와 기사들이 움직인다면, 로마교황으로써는 단숨에 입지를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8개월 뒤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마침내 아래와 같이 외치며 역사적인 ‘십자군 운동’을 제창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이 성지를 빼앗고 그곳을 찾는 순례자들을 박해하고 있다. 이슬람교도들과 싸워 예루살렘을 되찾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순례자의 맹세를 하라. 그리고 1096년 8월 15일 성모마리아의 승천 축제일을 기하여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여 그곳에서 성지로 출발하라. 그 보답으로 누구든지 모든 죄를 사면해주는 면죄부를 받을 것이다.”


교황이 굳이 프랑스 땅인 클레르몽에서 십자군을 부르짖고, 프랑스인이 앞장설 것을 촉구한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황제의 영향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클레르몽 회의



* 십자군 전쟁의 시작, 민중 십자군(거지 십자군)


“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ls Lo vult)"


교황 우르바노의 이 한 마디의 위력은 굉장했습니다. 중세 유럽인들은 매일매일의 소소한 죄가 쌓이고 쌓여 죽은 다음에 혹시 지옥에 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은자(隱者) 피에르(1)’라고 불리는 수도사를 따라 십자군에 참여하여 성지탈환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모든 죄가 사해진다고 교황이 약속한 것입니다.


십자군에 참가하면 지옥은커녕 천당자리를 예약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십자군 원정의 기세는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유럽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가족을 남겨두고 먼 동방으로 떠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은자 피에르의 열변에 감동해 동쪽으로 향하는 십자군에는 농민, 부랑자, 떠돌이 기사, 유랑민, 여자와 애들까지 무려 10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장비도 없었고, 식량도 준비가 안 된 완전 오합지졸들이었습니다. 해진 옷에 쪼록쪼록하는 배를 움켜잡고 길을 나서는 이들은 그냥 거지 떼와 다름없었습니다.


이들은 변변한 무기도 식량도 없이 출발했기에 현지에서 보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헝가리에서 그 문제로 현지인들과 충돌을 일으켜 “십자군 사상 첫 싸움”을 같은 유럽 기독교도들과 치르기도 했습니다. 어찌어찌해서 비잔틴 제국의 경계로 들어가서부터는 그런대로 제대로 된 보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원병을 기대했던 알렉시우스 황제는 이런 거지 같은 군대를 보고 당황스러웠습니다.


더구나 전쟁목표조차 이들은 비잔틴과 달리, “셀주크 침략의 격퇴”라기보다는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주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래도 알렉시우스는 계속해서 십자군을 후원해 주었습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식으로 서유럽인들을 이슬람과 싸우게 하는 동안 자신은 천천히 힘을 기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옳은 전략이었으나, 장기적으로는 비잔틴 제국에 재앙을 가져오게 됩니다.


아무튼 이 거지떼 민중 십자군은 간신히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입했으나 셀주크 투르크 군에게 1096년에 당연하게 격파되었습니다. 일부는 여기저기 흩어져 떠돌아다니다가 1차 십자군과 합류합니다. 이 패배는 이슬람 쪽에서 십자군을 가볍게 보게 만듦으로써 이후 전개되는 십자군과의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십자군은 정식 십자군으로 치지 않습니다.


* 십자군 원정길



* 제1차 십자군(1096~1099), 예루살렘 점령


1096년 하반기, 벨기에 남부 부용의 고드프루아, 그의 동생인 볼로뉴의 보두앵, 툴루즈의 레이몽, 블루아의 스테판, 타란토의 보에몽 등 주로 프랑스 출신의 영주들이 이끄는 군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를 제1차 십자군이라 합니다. 그리고 1097년에는 소아시아 반도 초입의 니케아를 점령합니다. 허를 찔린 투르크군은 도릴라이온에 약 3만의 병력을 집결시켜 습격을 시도했습니다.


이번에는 십자군 쪽이 허를 찔렸으나, 약 1만을 이끌고 앞서 진군 중이던 보에몽은 침착하게 방어전을 전개했습니다. 결국 고드프루아와 레이몽의 군대가 도착해 셀주크군의 측면을 무찌를 때까지 버텨냈습니다.


하나로 합친 십자군은 매섭게 역습했고, 투르크군은 완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십자군은 아나톨리아로 거침없이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1098년에는 보두앵이 시리아 지역의 에데사를, 보에몽이 안티오크를 공략해 모두 점령했습니다.


마침내 1099년 6월, 성도 예루살렘의 성벽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셀주크가 아니라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2)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파티마는 ‘십자군이 이제까지 획득한 영토는 모두 인정할 테니 그 대신 팔레스타인은 건드리지 말라’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일언지하에 거부당했습니다.


한 달 정도 계속된 공성전에서 보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십자군은 고통이 심했습니다. 하지만 성서의 여리고 공성전을 흉내 내어 맨발로 예루살렘 성벽 주변을 돌며 찬송가를 부르는 퍼포먼스를 하는 등 사기를 북돋웠습니다. 마침 제노바의 보급선이 도착하자 한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 1차 십자군 후



예루살렘의 이슬람 수비대는 일종의 화약인 ‘그리스의 불’까지 동원하며 악착같이 저항했지만, 7월 15일에 십자군의 공성기에서 처음으로 두 명의 기사가 성벽 안쪽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홍수가 범람하듯이 성스러운 도시는 십자군 군병들에게 함락되었습니다.


이어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노인도, 여자도, 어린애도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무슬림은 물론 유대인들도 십자군의 칼부림에 쓰러졌습니다. 이슬람 최초의 사원인 알 아크사 모스크에도, 유대인들의 예배당인 시냐고그에도, 천 년 전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넘었다는 길에도, 예외 없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흘러넘쳤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피가 무릎까지 차고 넘쳤다고 합니다.


낯선 땅에서 오랫동안 힘든 싸움을 하며 쌓인 울분과 이교도에 대한 극단적인 적개심은 정복자들의 이성을 마비시켰습니다. 이러한 광란의 학살극은 불과 몇 백 명만 살려둔 채 일주일 만에 가까스로 멈추었는데, 남아남은 자들도 도시를 뒤덮은 몇 만 구의 시체들을 눈물로 치우고는 이들 역시 시체더미 위에 쓰러졌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공정하며, 위대하시도다!” 현장을 지켜본 어느 성직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 십자군



* 재앙으로 끝난 제2차 십자군(1147~1148)


제1차 십자군 전쟁은 본래의 목적대로 예루살렘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기독교 순례자들에게 예루살렘을 개방했으며 팔레스타인에 새로운 기독교 왕국도 세웠습니다.


네 개의 나라(에데사, 트리폴리, 안티오크 왕국, 예루살렘 왕국)로 분리된 그곳은 지중해와 요르단 강 사이의 좁은 손가락 모양의 땅이었습니다. 북쪽으로는 투르크족의 시리아가 있었고, 남쪽으로는 이집트가 인접해 있었습니다.


12세기 중반이 되자, 아랍의 지도자들은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기 위하여 일어났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이마드 앗 딘 장기였습니다. 그는 1144년 크리스마스에 십자군 나라들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에데사를 함락한 후 유럽에서 온 모든 기독교인들을 몰살시켰습니다. 이 소식은 유럽에 전해졌고 이는 제2차 십자군 전쟁을 불러왔습니다.


분노한 성직자 클레보르의 성 베르나르가 에데사를 다시 찾아야한다는 격정에 찬 설교를 한 후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콘래드 3세가 여기에 합세했습니다. 제2차 십자군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군은 완전한 재앙이었습니다. 이 처참한 재앙은 다마스커스를 공격할 때 일어났습니다.


십자군은 대패를 했고 간신히 후퇴를 했습니다. 이 승리에 고무된 장기의 아들 누르 알딘은 부하들을 이끌고 십자군의 전초기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은 몇 년 동안 이런 양상으로 흘러갔습니다. 십자군은 성을 지키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이때 십자군 병사들은 이슬람교도들을 '사라센(3)인'이라고 불렀습니다.


1174년 누루 알 딘이 죽고 전설적인 살라흐 앗 딘 아이유브가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장기처럼 정복 사업을 펼치면서도 잔인하지 않았고, 공정하고 경건하다는 평가로 두루 인망을 모았으나 1174년에 병사하고 맙니다. 그의 뒤를 이어 마침내 ‘이슬람의 재정복’을 제대로 성취할 지도자가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아랍인들에게 두고두고 영웅이 되는 살라딘이었습니다.


* 전설적인 지도자 살라딘의 등장


쿠르드족 출신의 살라딘은 열네 살 때부터 누르 알 딘의 군대에서 복무했습니다. 1169년에 삼촌인 시르쿠를 따라 카이로를 점령했다가 두 달 만에 시르쿠가 죽자 그를 대신해서 파티마 왕조의 재상이 되어 이집트의 실권을 쥐었습니다.


2년 뒤에는 파티마 왕조를 폐하고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으며, 다시 3년 뒤인 1174년에 누르 알 딘이 죽자 1186년까지 시리아와 이라크를 병합하여 중동을 석권했습니다.


* 살라딘



살라딘이 중동을 통합하는 동안 십자군의 사정은 점차 나빠졌습니다. 1176년에는 비잔틴의 마누엘이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투르크군에 대패하면서 당분간 십자군을 도울 힘이 없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문둥병 환자였던 보두앵 4세와 5세가 잇달아 숨지고 보두앵 4세의 매제인 기 드 뤼지냥이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지도부내에 혼란이 있었습니다.


살라딘은 1175년에 예루살렘과 휴전협정을 맺었으나, 본격적인 전쟁만 자제했을 뿐 서로가 적대행위를 지속하던 중 1187년 초에 자신의 누이까지 포함된 대상(隊商)이 약탈되자 마침내 그 해 3월 지하드(4)를 선언합니다.


1187년 7월, 살라딘이 갈릴리 호숫가의 티베리아스를 공략하자 기 드 뤼지냥은 대군을 동원하여 원정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는 중대한 실수였습니다. 특히 병력 집결지인 아크레에서 티베리아스까지는 불과 30킬로미터였지만 뜨겁게 달궈진 염천(炎天)의 사막을 가로질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십자군 원래의 전술대로 요새에 틀어박혀 적의 침공을 방어하는 수비전술로 나가야 했어야 했습니다.


곧 십자군은 살인적인 더위와 갈증 때문에 기진맥진해지고 게다가 매복해 있던 살라딘군이 덤불에 불을 붙여 연기를 피우고, 화살을 소낙비처럼 쏟아 붓자 그들의 고통은 가중되었습니다.


더위와 갈증에 견디다 못해 말이 쓰러져 죽고, 탈진한 기사들은 갑옷을 벗어버리고 달아나다가 이슬람 병사들의 칼에 쓰러졌습니다. 결국 십자군은 북쪽으로 길을 돌아 ‘하틴의 뿔’이라 알려진 고원 지대의 샘물에서 한숨을 돌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낱낱이 지켜보고 있던 살라딘은 구릉지에서 십자군들을 사방으로 포위하고, 하늘을 새카맣게 덮을 만큼 화살을 퍼부었습니다. 전의를 상실한 기 드 뤼지냥의 군대는 드디어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 하틴 전투



이 하틴 전투로 십자군의 전력은 치명적으로 파멸했고, 살라딘은 거침없이 진격하여 9월에는 예루살렘을 에워쌌습니다. 수비대는 완강히 저항했으나, 결국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88년 만에 다시 이슬람의 손에 들어갔고, 살라딘은 항복한 기독교인들에게는 자유롭게 도시를 떠날 수 있게 함으로써 88년 전 1차 십자군 점령 때의 악몽 같던 학살극과는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 제3차 십자군(1189~1192) : 살라딘과 사자왕 리처드 1세의 대결


이슬람 군의 예루살렘 점령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각국은 경악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와 그 후임자인 클레멘스 3세가 새로운 십자군 파병을 호소하자 여러 군주가 적극적으로 호응했습니다.


그 결과물인 제3차(1187-92) 십자군은 중세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 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살라딘과 리처드 1세라는 중세 이슬람과 유럽의 전설적인 두 영웅이 격돌했다는 점 때문에도 각별한 주목을 끕니다.


‘사자왕’(5)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아들로 당대 최고의 명성과 무훈을 자랑했습니다. 훗날 로빈 후드 전설이라든지 월터 스콧의 소설 <아이반호> 등을 통해서 중세 기사도를 상징하는 인물로 영원히 이름을 남겼습니다.


* 사자왕 리차드와 살라딘



제3차 십자군이 동쪽으로 진군하는 동안, 팔레스타인에서는 기독교 국가의 잔존 세력이 다시 한 번 결집하여 살라딘의 대군을 상대로 전투를 재개했습니다. 기 드 뤼지냥이 지휘하는 기독교인 군대는 무슬림이 장악한 항구 도시 아크레를 탈환하려고 육지에서 포위 공격을 가했는데, 그런 기독교인 군대의 배후를 살라딘의 군대가 또다시 포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살라딘은 막강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적을 쉽사리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그런 와중에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함으로써 전세는 기독교인 군대 쪽에 유리하게 돌아갔습니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신규 병력에 리처드 1세라는 탁월한 지휘관까지 보유했기 때문에 살라딘의 대군조차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기독교 군대는 1191년 7월 12일에 아크레를 함락했으며, 이후 서서히 진군하여 이듬해 7월에는 예루살렘의 코앞에까지 다다랐습니다. 그러나 그때 마침 잉글랜드에서 국왕의 부재를 틈타 그의 망나니 동생 존(훗날의 존 왕. 폭정 끝에 귀족과 시민들에게 ‘마그나카르타’(6)를 강요당하는 수모를 겪었다)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게다가 절친이자 경쟁자였던 프랑스의 필리프 2세도 일찌감치 십자군에서 발을 빼고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휴전 서약을 깨트리고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영토를 야금야금 집어삼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즉시 귀국해야 했습니다. 1192년 10월 9일, 살라딘과 평화조약을 서둘러 맺은 리처드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고국으로 향함으로써 제3차 십자군 전쟁은 일단 막을 내립니다.


전쟁 내내 살라딘과 리처드 1세는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와중에도 상대방에 비상한 관심과 호의를 드러냈습니다. 가령 술탄이 병상에 누운 잉글랜드 국왕에게 과일과 얼음을 선물한다든가, 전투 도중에 땅에 서서 싸우는 상대방의 모습을 보고는 “체통에 어울리게 말에 올라 싸우시라”며 명마 두 필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리처드 1세 역시 살라딘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췄으며, 심지어 (물론 어디까지나 말뿐이었지만) 자신의 여동생과 살라딘의 남동생을 결혼시키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떠나며 리처드 1세는 조만간 다시 돌아올 테니, 그때 가서 진검 승부를 하자고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살라딘이 만약 내가 이 땅을 결국 누군가에게 잃어야 한다면, 차라리 당신 같은 훌륭한 적에게 잃고 싶다고 재치 있게 응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재대결은 결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리처드 1세는 귀국길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붙들려 1년 넘게 억류당했으며, 살라딘은 그 와중인 1193년 3월 4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는 살라딘의 사후에도 반세기 넘게 지속되었으며, 이후로도 지속된 제5차(1217-21), 제6차(1228-9), 제7차(1248-54) 십자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덕분에 팔레스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이 점령하기 전까지 이슬람 세력의 영토로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 오늘날에도 이슬람 세계의 구원자로 추앙받는 살라딘


살라딘은 탁월한 군사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포로 수백 명을 처형하거나 노예로 팔아넘기는 등, 그 당시로서는 지극히 당연시되던 전제군주 노릇까지 굳이 마다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밖의 면에서 살라딘은 상당히 관대하고 합리적인 면모를 종종 보여주었습니다. 전투에 임해서는 수시로 단호하면서도 교활한 작전을 구사했지만, 때에 따라서는 타협과 외교라는 대안을 적극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평소에도 살라딘은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했고, 종교적 의무를 항상 앞세웠으며, 결코 정무를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특히 가진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 장례를 치를 돈조차 없었다는 믿을 수 없는 후일담이 그의 검소함과 청렴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살라딘은 이슬람 세계보다 오히려 유럽에서 더욱 명성을 날리며 오래 기억되었습니다. 십자군을 소재로 한 여러 낭만적 문학작품에서도 살라딘은 종종 리처드 1세의 숙적이면서도 존경할 만한 인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 살라딘을 성전(지하드)의 영웅, 즉 저항과 독립의 상징으로 드높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 여러 독재 정권에서 대외적으로 이용하거나 혹은 테러를 정당화하려는 얄팍한 선전술이라는 비판도 따릅니다.


* 제4차 십자군(1202~1204), 엉뚱한 콘스탄티노플 함락





십자군 원정 중에서도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악명도 높았던 것이 제4차 십자군 원정이었습니다. 1198년 교황에 오른 인노켄티우스 3세는 1202년 제4차 십자군 원정을 승인했습니다.


그러나 이 원정은 영국, 프랑스, 독일의 참여를 유도하여 이집트 공략에 나서려는 교황의 의도와는 달리 고작 프랑스 북부의 기사들만이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놀라운 일을 계속 벌여 교황을 당황스럽게 만들었습니다.사실인즉 베네치아에 집결해서 원정에 나서려던 이들은 예상보다 훨씬 적은 병력이었고 게다가 베네치아에 지불해야 할 수송비도 조달하지 못했습니다. 원정이 지체되는 사이에 이들의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원정대에게 베네치아가 기발 난 제안을 했습니다. 그 무렵 헝가리가 점유하고 있던 아드리아 해에 면한 ‘자라’라는 기독교 도시를 탈환해 주면 모든 빚을 탕감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원래 종교적 열의는 눈곱만치도 없고 장사 속에는 일가견이 있는 베네치아의 이 제안을 원정대는 선뜻 받아들였고, 1202년 1월 자라를 덜컥 점령했습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교황은 분기탱천((憤氣撐天)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기독교 국가를 잡아먹다니, 더구나 헝가리 왕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주였습니다. 그는 즉시 십자군 전체를 몽땅 파문하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결정을 내렸고, 이제 십자군이란 말 자체가 아예 우습게 되어버렸습니다.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또 벌어집니다.


그 무렵 추방당한 비잔틴의 왕족인 이사악 2세라는 자가 파문자들에게 또 다른 발칙한 제안을 한 것입니다. 바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자신을 황제에 오르게 해주면 이집트 원정에 필요한 재정 지원은 물론 베네치아에 진 빚도 갚아 주고, 동로마 교회들마저 모조리 로마 교황청에 바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왕에 파문당한 몸이라 이들은 전혀 망설임 없이 바로 말머리를 콘스탄티노플로 돌려 또 다른 기독교 국가를 향해 칼을 빼들었습니다. 결국 이사악 2세를 황제 자리에 올리지는 못했지만 수개월에 걸친 격전 끝에 1204년 4월 12일,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기에 이르렀습니다.십자군들과 이들의 후원자인 베네치아 상인들은 승리의 전리품을 나누고 콘스탄티노플도 분할 통치하기로 했습니다. 이때 플랑드르 백작인 보드앵이 황제로 추대되면서 라틴제국(1204~1261)이 세워졌습니다.


이로써 그리스정교는 가톨릭교와 합쳐지니, 이것이 제4차 십자군 원정이 거둔 유일한 성과라면 성과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와중에도 자신들을 파문한 교황을 잊지 않고 그에게 성물(聖物)과 보물을 잔뜩 안겨주었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얼씨구나 하고 이들에게 내렸던 파문을 즉각 취소했습니다.이 후 라틴제국은 비잔틴인들의 지속적인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1261년 비잔틴 성직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부활한 니케아제국과 투르크 족의 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 소년 십자군의 비참한 말로


제4차 십자군 원정이 끝나고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프랑스 북부의 한 마을에서 양치기 소년 하나가 신을 접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티엔이었습니다.“가난한 순례자의 모습을 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 제게 빵을 청하셨습니다. 그런 후 이 편지를 임금님께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가 몰던 양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에티엔은 그러면서 출처불명의 편지 한 통을 들고 세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수천 명의 소년소녀가 그의 뒤를 졸졸 따라 나섰고, 이들은 부모나 신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명을 완수하러 길을 나섰습니다.


물론 이성적인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변치 않습니다. 남이 나서면 나도 나서고 남이 흥분하면 자신도 흥분하는 것이 평범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들을 본 수많은 사람들도 기적이 일어났다며 돈과 양식을 싸들고 아이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게다가 신의 부름을 받은 에티엔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천사가 되어 신이 출현한 것과 같은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찢겨 나가기까지 했습니다.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국왕은 그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누구도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고작 열두서너 살의 어린 십자군들은 마르세유 항을 향해 발길을 돌렸고, 이 무리는 이미 3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3만 명의 행렬이 한 곳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라니. 얼마나 많은 식량이 필요하고 얼마나 많은 잠자리가 필요했을까요? 그들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하면서 마르세유까지 탈 없이 당도했다는 것이야말로 그 시대의 광기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그러나 이들과 이들을 부추긴 어른들은 마르세유 상인들을 너무 우습게보았습니다. 마르세유에서 이들을 배 일곱 척에 태운 선주들은 곧 성지를 향해 출발했는데, 두 척은 이내 난파당하고 나머지 배에 타고 있던 어린 십자군들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내리자마자 노예 상인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후에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와 알렉산드리아 술탄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소년 십자군으로 잡혀갔던 노예 700여 명이 풀려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 후의 십자군(5,6,7,8,9차)


제5차(1217)와 제6차(1228년) 십자군은 아이유브 이집트와 대결했고, 이 중 제6차에서는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술탄 알 카밀의 협상으로 예루살렘이 다시 기독교도들에게 넘어가기도 했으나(1229년) 모두 일종의 해프닝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1244년에 아이유브는 다시 한 번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며 이후 20세기에 이스라엘이 세워지기까지 성도는 내내 이슬람에 손에 있었습니다. 제7차(1248년)와 제8차(1270년) 십자군을 이끈 프랑스의 루이 9세는 “성인(聖人) 왕”으로 불릴 만큼 돈독한 신앙심의 소유자로서 십자군의 불꽃을 되살리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 사이에 이집트는 노예들로 이루어진 맘루크 왕조(8)로, 나머지 중동 지역은 몽골의 일 칸국(7)으로 판이 바뀌어갔습니다.


최후의 그리고 무익한 십자군(제9차)은 1272년에 끝났으며, 맘루크는 1268년에 안티오크를, 1289년에 트리폴리를, 그리고 1291년에 최종적으로 아크레를 함락시켜 우트르메르(9)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했습니다.


* 끝나지 않은 전쟁


전쟁사의 이면에서 십자군은 많은 유산을 남겼습니다. 특히 무역과 국제교류에서 아시아와 유럽의 교류는 십자군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활발해졌으며, 십자군 지역이 멸망한 뒤에도 그런 흐름은 이어졌습니다.


동방의 문물이 유럽으로 퍼져가면서 철학과 과학, 예술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고, 교황의 권위와 기독교의 맹목적 신앙은 하향세를 탔습니다. 무역의 중심에 선 베네치아, 제노바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부흥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십자군은 서양이 중세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동과 서의 길고도 처참했던 이 전쟁을 놓고 두 세계의 지식인들은 반성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일찍이 볼테르나 루소 등은 십자군의 의미를 폄하했을 뿐 아니라,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십자군운동을 “광신에 따른 야만행위”의 다름 아니라고 평가절하 했습니다.


아랍 쪽에서도,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을 쓴 아민 말루프는 십자군을 기본적으로 서구의 침략전쟁으로 보면서도 ‘아랍은 반성해야 했다. 우트르메르의 도시들은 전제정치가 행해지던 아랍세계에 비하면 개인의 자유와 합리주의가 살아 있었다. 십자군 치하의 이슬람인들은 아랍 사회의 동포들보다 사적 재산권 등에서 훨씬 보호받고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 십자군 위력의 비밀


그러면 아랍인들이 우굴거리는 소굴에서 소규모 병력으로, 현지에 익숙하지도 않으며, 보급도 어려웠던 먼 땅에서 온 십자군이 어떻게 2백년 가까운 세월을 버텼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먼저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들 수 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는 중동을 제패하며 대제국을 건설했으나 1092년에 말리크샤가 죽은 후부터는 여러 왕족들이 각자 술탄을 내세우며 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나톨리아를 지배하던 셀주크 투르크는 십자군이 처음 침공해올 때 다른 투르크족과 싸우느라 제대로 대응을 못했습니다. 또한 수니파였던 셀주크에 대항하는 시아파의 아사신 세력은 알라무트에 버티면서 앉아 수시로 자객을 보냈으며, 파티마 이집트 역시 시아파로서 셀주크와 손잡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물론 십자군 내부에서도 알력이 없지 않았지만 적어도 전투 초기에는 기꺼이 손을 맞잡은 것과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군의 전술과 장비도 한몫을 했습니다. 11세기 후반은 유럽 기사도와 전법이 완성된 시기였습니다. 그때까지 가벼운 가죽갑옷이나 사슬갑옷을 입고, 곧잘 말에서 내려 전투했던 유럽의 기사들은 점차 튼튼한 철판 갑옷으로 온 몸을 감쌌으며 말에게도 갑옷을 입히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런 장비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몸이 무거워져 말에서 오르내리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낙마하면 치명상을 입기가 쉬웠습니다. 또 그 무거운 몸으로는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무기가 제한된다는 점도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단점을 덮을 만큼 방어력이 좋아졌으며, 말에 올라 창을 잡고 마치 작은 전차처럼 적진에 돌격하면 웬만해선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방어력과 돌파력을 두루 갖춘 점에서 옛 그리스의 팔랑크스(10)와 비슷했는데, 이 중장기병이 팔랑크스보다 나은 점은 기동력까지 갖추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에 맞서는 이슬람 전사들은 대체로 경장기병과 보병이었습니다. 특히 본래 유목민인 투르크군은 능숙한 승마술로 적진 주변을 빙빙 돌며 활을 쏴서 적진을 어지럽힌 다음 돌격하는 전법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말 위에서 날리는 가벼운 화살로는 프랑크 기사의 철갑옷을 뚫을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군에 대항하는 전술은 퇴각과 반격을 반복하다가 공격하기 유리한 지형으로 유인하거나, 그 측면을 기습하며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군에서도 이에 대응해 측면과 후면을 경장기병과 보병대로 둘러싸서 기사들을 보호하는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이런 유리함에다 이교도를 무찌르고 성지를 되찾는다는 사명감과 열정이 더해져서, 십자군 은 전쟁 초기 불리한 조건에서도 수적으로 앞서는 적을 거의 매번 격파했습니다. 잔인한 학살자이자 침략자로 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제1차 십자군에 참여했던 기사들은 신의 정의를 실현한다는 믿음에 불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잔인할 수 있었습니다.


* 십자군의 요새들과 외교술


십자군의 중장기병은 적을 격파하기에는 유리했지만, 적의 경장기병이 퇴각하면 중량에 따른 속도 차이와 소진된 체력, 그리고 지형에 밝지 못한 점 등으로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십자군은 한동안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적의 총 병력을 그다지 줄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승리하고 바로 귀환하는 게 아니라 빼앗은 성지를 지켜야 하는 한, 그것은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 시리아에 있는 크락 드 슈발리에 십자군 요새



그 고민을 십자군은 성을 쌓는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아직까지도 일부 남아 있지만, 십자군 당시의 성들은 요충지마다 빠짐없이 들어서서 적의 대규모 공격을 요격하고 필요할 때는 힘을 모아 반격하는 보루가 되었습니다. 유럽식 성곽 공략에 익숙하지 않던 이슬람 측에서는 한동안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해결책은 십자군의 본래 대의에는 벗어나지만, 어쩔 수 없이 외교술을 발휘해야만 했습니다. 이슬람 세력끼리 서로 견제하게 하거나 그들 중 일부와 손을 잡는 등 합종연횡을 하면서 십자군판 전국시대를 살아나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초기에는 대학살을 벌이기도 했지만,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인 땅에서 뿌리를 내리려다 보니 십자군 출신의 군주가 무슬림 주민들도 백성으로 여기고 통치하는 것이 불가피했습니다. 세월이 지나며 십자군과 아랍인의 혼혈아들도 늘어났습니다.


이런 현지적응과 세력균형 유지 전략으로 십자군 지배가 200년 가까이 유지될 수는 있었지만, 한편 그에 따른 한계도 있었습니다. 초기의 종교적 열정과 단합이 약해지면서, 일부 이슬람과 제휴해 다른 이슬람의 공격을 막아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기독교 세력끼리의 불화 때문에 이슬람의 공격을 막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1) 은자(隱者) 피에르


은자란 수도원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신앙에 정진하는 수도사와는 달리 인가(人家)에서 멀리 떨어져 깊은 산속이나 사막 한가운데의 동굴에서 혼자 수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때문에 그들은 인간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건에도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피에르는 9개월 동안 예루살렘에서 머무른 적이 있었다. 이 때 기독교 순례자들에게 이슬람 측이 횡포를 부리는 모습을 가끔 보기도 했을 것이다. 은자로 살아 성격이 외곬수로 변한 피에르는 이에 대해 과도하게 분개했다. 그리고 그는 유럽으로 돌아와 그 분노를 과대포장하여 토해내기 시작했다.


성지에서 이와 같은 기독교들에 대한 박해를 막기 위해서는 성지를 정복하는 수밖에 없다고떠들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십자군 운동을 제창한 로마교회는 잘됐다싶었다. 광신적인 그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슬람교도들은 기독교도들의 성지순례를 금지한 적이 없고 방해한 적도 거의 없었다. 단지 약간의 돈만 지불하면 예루살렘을 방문해 성모교회를 비롯하여 기독교들의 성스러운 사적(史蹟)을 참배할 수 있었다.


(2) 파티마 왕조


10세기부터 11세기까지 번성했던 아랍 이슬람 왕조를 말한다. 오늘날의 이집트와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지역이 근거지였고 수도는 카이로였다.


(3) 사라센 인


사라센인(Saracen)은 대체로 이슬람 제국의 사람들을 말하는 용어이다. 원래 로마 제국 말기에 시나이 반도에 사는 유목민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말은 아랍어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의 '사라킨'이라는 말에서 기원했다. 중세 초기 비잔티움 제국에서 사용하는 단어였는데 십자군을 거치면서 서유럽에 전파되었다.


(4) 지하드(jihad)


이슬람의 성전(聖戰)을 말한다. 이슬람교의 옹호와 전파를 위해 이교도에 대해 벌이는 전쟁이다. 칼뿐만 아니라 마음, 펜, 지배에 의한 성전 등 4종으로 나뉜다. 성년이 된 모든 남성 이슬람교도의 최대 의무로 지하드에서 죽은 자는 순교자가 되고 천국이 약속된다.


(5) 사자왕, 리차드 1세





‘사자왕’ 이라는 별명은 기독교도가 아니라 적군인 이슬람군이 붙였다고 한다. 사자왕 리차드는 항상 병사들의 선두에 서서 칼을 휘둘렀다. 그의 용맹함은 적군도 감탄을 했다고 한다. 사자왕 리차드 1세는 중세 유럽인들보다 당시 이슬람교도들에게 더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리차드 1세는 기사도 문화의 전형이었다. 교양 있고 행동거지도 세련되었으며 심지어 시인이기도 했다. 또한 대담한 용기의 소유자였다. 한 마디로 문무가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당한 풍채를 지녔으며 큰 키에 금발 머리, 강한 체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몸을 돌보지 않는 희생정신으로 부하들의 존경심과 강한 충성심을 얻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6) 마그나 카르타


<마그나 카르타>는 1215년 실지왕(失地 즉 땅을 잃은)으로 불리는 존 왕이 프랑스 내 영지 상실과 전쟁 패배, 국가 재정 악화 등 잇따른 실정에 덧붙여 귀족에 대한 과세로 인한 반발이 겹쳐 귀족들과 런던 시(市)가 존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각서를 강요하였고 존 왕이 서명한 것을 말한다. 영국 명예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비록 형인 사자왕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 등에 몰두해서 재정을 말아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충성스러운 가신들의 보필 때문에 어느 정도 용인이 되었다. 반면 존은 전쟁만 하면 지고 땅은 땅대로 뺏기는 칠칠치 못한 주제에 세금만 잔뜩 부과하니 귀족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7) 일 칸국


몽고의 제3차 유럽 침략(제3차, 1253~1260)에 의해 현 이란을 중심으로 한 서아시아 일원에 건립된 4대 칸국 중 하나다. 1259년 서아시아에서 계속 서쪽으로 진군 중에 있던 훌레구(칭기즈칸의 손자)는 대칸 몽케의 전사 소식을 접하자, 다마스쿠스 일대의 수비병력 일부만 남겨놓은 채 주력군을 이끌고 회군하였다. 회군 도중 이란 고원에 잠시 체류하는 동안 이란을 중심으로 일 칸국을 건립하였다.


(8) 맘루크 왕조


맘루크 왕조는 1250년부터 1517년까지 이집트와 시리아 일대를 통치하던 노예들인 맘루크가 세운 술탄 왕조이다. 맘루크는 노예라는 뜻의 아랍어이다.


(9) 우트르메르(Outremer)


우르트메르는 '바다건너의 땅'이란 뜻으로 서유럽 기사들의 입장에서 본 팔레스타인 지역을일컫는 말이다. 즉 우르트메르는 십자군의 활동무대가 되었던 예루살렘과 그 부근 즉 팔레스타인 지역을 의미한다.


(10) 팔랑크스


BC 7세기 무렵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만들어진 전투대형이다. 팔랑크스는 병사들을 밀집된 전투대형으로 배치하여 근접전을 중심으로 적을 압박하는 전술이다. 중장보병(重裝步兵)들로 구성되며 오른손에는 2.5미터 가량의 긴 창을, 왼손에는 커다란 둥근 방패를 들고 전투에 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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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변호정 | 작성시간 19.03.23 킹덤오브헤븐과 살라딘 십자군전쟁 사자왕 리쳐드
    정말 재미나게 읽었읍니다
    이작품은 여러번 정독해야
    정립하는데 도움이되겟네요
    수고하셨고 감사했읍니다
  • 작성자블라디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3.24 200년 가까운 장구한 세월동안의 십자군 전쟁을 위와같이 짧은 지면에
    정리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해서 중요한 내용과 주요
    등장인물만 요약했는데...어떻게 이해가 되셨는지...

    중동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는 살라딘이 쿠르드족이고 이 쿠르드
    족이 현재 터키인들의 18%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겸사겸사 참고하셨
    으면 합니다.
  • 작성자블라디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3.24 아울러 우리 조상인 고선지가 이 대목에 등장하는 것도 특이하지요. 만약에
    고선지가 나타나지 않고 당나라가 투르크족을 압박하지 않았으면 셀주크투
    르크 제국도 등장안했을 것이고 그러면 서양사를 뒤흔든 십자군 전쟁도 없었
    을텐데...

    그렇다면 세계사가 어떻게 진행됐을까하고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고선지)
    이 세계사를 움직이는데 큰 지렛데 역할을 했구나하고 생각해봅니다. 역사를
    가정한다는 건 부질없는 일이기도 하지만...ㅎㅎㅎ
  • 작성자변호정 | 작성시간 19.03.24 나비효과.! 한때 중국의세가 엄청났네요 맨날 훙노에게 조공바치다가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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