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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음회

터키의 추억(제8편)-오스만터키의 1차대전 패배를 가져온 아라비아의 로렌스, 제국주의 국가들의 협잡과 탐욕-<아라비아의 로렌스>의 OST를 들으며

작성자블라디고|작성시간19.04.09|조회수1,965 목록 댓글 2


*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 오스만제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패망 ]


16세기 절정기 때의 오스만제국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대제국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접어들면서 유럽으로부터 ‘유럽의 병자’라고 모욕적으로 불릴 만큼 국력이 폭삭 짜브라들었습니다.


1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오스만제국은 자신들의 외곽인 중근동으로 세력을 넓히는데 혈안이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그리고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얼마 안 있다가 동맹국에 가담했습니다.


오스만제국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주축으로 하는 동맹국 편에 줄을 선 것은 한마디로 그쪽 편에 붙으면 나중에 취할 수 있는 이익이 많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죠.


한편 20세기 초 중근동으로 세력 확대를 노리던 독일은 베를린, 비잔티움(이스탄불),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철도를 구상(이른바 3B 정책)하면서 오스만제국과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써 왔습니다.


* 영화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서유럽의 영국, 프랑스와 흑해를 거쳐 러시아를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한 오스만제국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더욱 커졌습니다. 따라서 연합국 측에서도 오스만 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연합군 측은 여러가지 회유책은 물론 군함을 파견하는 등 압박을 가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였습니다. 전쟁 이전부터 외교적, 군사적으로 우호 관계를 다져 놓았던 독일도 이에 질세라 당연히 영향력 확대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발맞추어 오스만제국 내부에서도 중립을 지킬 것인지 전쟁에 참전할 것인지, 만일 전쟁에 뛰어든다면 어느 편에 붙을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관망하자는 주장이 많아서 전쟁 초기에는 오스만 터키는 중립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참전파는 바로 이때 적극 참전하여 그동안 찔끔찔끔 잃어버린 땅을 되찾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 편에 붙을 가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저울질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에 뛰어든다면 가장 위협적인 상대를 제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랜 옛날부터 지중해로의 진출을 위하여 끊임없이 다다넬스 해협을 넘보는 러시아가 오스만제국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이렇게 러시아의 위협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오스만제국이 동맹국에 전격 가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독일의 역할이 컸습니다. 독일은 1871년에야 겨우 통일을 이루었기에 역사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직접적으로 부딪힐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 오스만제국의 헤자즈 철도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로렌스는 아랍반란군을 이끌고 주로 이 철도를

  습격합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멋진 장면도 이곳입니다.



뒤늦게 제국주의 팽창 대열에 동참한 독일은 3B 정책 등 전략적으로 오스만 터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오스만 터키 또한 그 동안 수시로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비해 독일과의 교류가 상대적으로 편했습니다.


이때 마침 1차 대전이 터진 바로 직후인 8월 10일, 지중해에서 작전을 벌이던 독일 전함 괴벤 호와 브레슬라우 호가 영국 함대에 쫓겨 다다넬스 해협을 통과해서 콘스탄티노플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우연히 전함 두 척을 오스만 제국의 심장에 들여 놓은 독일 해군이 실질적으로 오스만 터키 해군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두 척의 전함이 오스만 터키를 1차 대전에 끌어들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1914년 10월 28일, 독일 수숀 제독이 이끄는 두 척의 전함이 터키 어뢰정을 대동하고 흑해로 살그머니 기어들어가 오데사, 세바스토폴, 페어도시아를 포격했습니다. 민간인 희생자를 포함해서 러시아 포함들을 격침시켜버렸습니다. 터키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 전쟁 행위에 대해 러시아가 선전포고를 했고 이어서 영국, 프랑스가 자동적으로 터키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터키도 독일의 전함 궤벤의 함포가 바로 코앞에 있었고, 이미 독일의 영향력이 오스만제국을 깊숙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만제국도 자의반 타의반 어쩔 수 없이 이들 나라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드디어 오스만제국이 주축국에 참여하면서 전쟁은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후 오스만제국은 갈리폴리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중근동에서 전설의 인물인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이끄는 아랍반란군과 영국군에 의하여 패배하면서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갑니다. 1918년 주축국의 우두머리인 독일이 손을 들면서 오스만제국도 마침내 항복을 하면서 찬란했던 오스만 대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아래에서는 오스만제국의 멸망에 일조했던 괴짜 영웅 T.E. 로렌스와 그의 활약상을 살펴봅니다. 이어서 1차 대전이 끝난 후 중근동 지역에서의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국가들의 탐욕과 협잡 등에 대하여도 간략하게 정리해볼까 합니다.


[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 ]





* 어린 시절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1888년 8월 16일 웨일스의 작은 소도시 트리머독에서 태어났습니다. 로렌스는 어린 시절부터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했습니다. 그의 이런 성격은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원래 이름은 준남작 칭호를 받은 토마스 로버트 채프먼 경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본부인과 네 딸을 둔 가장이었는데, 하녀 사라 메이든과 눈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가정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결국은 가정과 국가, 이름까지도 버리고 사라 메이든과 함께 도피하여 웨일스의 트리머독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새 보금자리에서 그는 성을 로렌스로 바꾸고 5형제를 낳았습니다. 토마스는 둘째였습니다. 아버지가 본부인에게 이혼을 요청했으나 본부인이 들은 채 만 채 해서 로렌스 이들 형제는 법적으로 사생아였습니다. 아버지는 사냥이나 낚시, 요트, 승마 등을 즐겼고, 어머니는 캘빈교도로서 의지가 강한 금욕주의 신봉자였습니다.


로렌스의 성격은 몽상적인 아버지와 금욕적인 어머니를 반반씩 닮았습니다. 금욕주의자인 어머니의 영향이었는지 그는 술과 담배를 멀리 했고, 일생 동안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몽상가라는 점 외에 로렌스는 아버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승마를 빼고는 아버지의 귀족적인 취미는 거의 닮지 않았습니다.로렌스는 어릴 때부터 자기 단련에 몰두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피곤하면 눕지만, 로렌스는 철이 들 무렵부터 굶기를 밥 먹듯 했습니다. 자기가 먹을 걸 안 먹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물을 안 마시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체력과 근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끊임없이 시험을 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체구는 상당히 작아 키가 166cm에 불과했습니다.


* 멀리 보이는 로렌스의 생가



어린 로렌스는 나무 오르기, 자전거타기, 헤엄치기, 말타기 등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운동신경이 발달했음에도 그는 단체경기를 질색을 했습니다. 축구나 크리켓 따위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 구경조차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규칙이나 약속에 얽매이는 것, 여러 사람이 함께 모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사람들과의 신체적 접촉을 극도로 싫어해서 사람을 만나면 악수조차 하지 않으려고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또한 섹스를 혐오하는 결벽증도 있어서, 로렌스는 평생 결혼은 물론 여자와 교제했던 기록도 없습니다.


자서전에 나온 글과 행적들을 보면 동성애자였던 것으로 의심이 가지만 아무튼 그 당시 반 동성애적 사회 분위기 때문에 자신은 성욕을 억제하거나 섹스를 멀리할 뿐이라는 인식을 외부사람들에게 보이게 한 듯싶습니다.


아무튼 로렌스는 친구들과 잘 어울린 편은 아니었고, 고독을 즐기며 혼자서 사색하는 외로운 몽상가였습니다. 방학 때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자전거 여행을 떠났습니다. 영국 각지는 물론 프랑스에도 다녀왔다. 주로 옛 교회와 성터를 답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중세의 웬만한 고적들은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고고학 탐구에 재능을 발휘했으며 옥스퍼드 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이후 첩보원 신분을 지닌 채 이라크의 유프라테스 강에서 발굴 작업을 하는 대영박물관 원정대원으로 특파되었습니다. 1914년까지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등지를 조사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로렌스는 아랍인들의 문화 및 언어를 배웠습니다. 그는 원래 이런 수순을 밟고 중동지역의 고고학자가 될 심산이었습니다.


* 영화에서...



* 중동 탐사


대학 시절 만난 옥스퍼드의 박물관장 데이비드 조지 호가스는 로렌스를 중동지역으로 안내한 사부(師父)였습니다. 호가스는 로렌스에게 아랍어를 배울 것을 권했고, 그로 인해 로렌스의 아라비아에 대한 관심도 배가되었습니다.


로렌스의 아라비아와의 직접적인 인연은 1909년 대학에서의 마지막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그는 졸업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메소포타미아에서 진행 중이던 고대 히타이트 문명의 발굴 사업을 견학하려고 아라비아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로렌스는 휴대품이라고는 카메라와 권총, 칫솔만 단출하게 챙기고는 이웃 마을에 놀러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물론 생각처럼 가벼운 여행길은 아니었습니다. 말라리아에 걸리기도 했고, 위장에 탈이 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지방 신문에 피살당했다는 기사가 실린 적도 있었습니다. 유프라테스 강변에서는 한 아랍인이 로렌스의 구리 시계를 금시계로 착각하고 로렌스를 살해하려던 위급한 상황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 아랍인이 권총의 안전장치를 푸는 법을 몰라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 중동 탐사중인 로렌스(오른쪽)



대학을 졸업 후 호가스 박사의 추천으로 대영박물관 산하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본격적인 원정대에 참가했습니다. 1911년 초부터 1914년 여름까지, 로렌스는 줄곧 중동 지역에서 생활했습니다. 작업이 끝나면 다른 연구원들은 귀국했지만, 로렌스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등, 중동지역을 두루 돌아 다녔습니다. 어차피 혼자 생활하는 것을 즐겼기에 여행의 고독이, 특히 사막의 고독이 그에게는 오히려 오래 입은 옷처럼 편안했을 것입니다.


1914년 1월 로렌스는 영국군의 지원 아래 시나이 반도의 네게브 지방에 대한 고고학 탐사를 진행했습니다. 물론 이는 순수한 고고학 탐사가 아니라 영국군에게 중요한 탐사였습니다. 향후 오스만 터키와의 전쟁이 터지면 오스만 군대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나이 반도를 지나야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이집트 방위에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로렌스는 즉시 영국군에 입대하지는 않았으나, 같은 해 정보 장교로 임명되어 카이로에 있는 아랍 부서로 배치되었습니다. 1915년이 되면서 아랍 민족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며 아랍 반란의 기미가 서서히 나타나게 됩니다.


당시 영국은 사우디 헤자즈 지역의 태수였던 샤리프(아랍의 지도자) 후세인과 접촉하고 있었습니다.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드는 대가로 영국이 헤자즈,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포함한 아랍 국가의 독립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10월이 되도록 영국이 답을 내놓지 않자,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 편에 붙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안 그래도 갈리폴리 전역에서 곤욕을 치루고 있던 영국은 결국 헨리 맥마흔 경의 편지를 통해 아랍 국가의 독립을 보장해주기로 합니다. 이에 따라 로렌스는 1916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파견되어, 아랍 반란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 1916년 아랍의 반란, 전투 참가


영국 군부는 아랍어도 능통하고 아랍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깊은 로렌스에게 터키에 대항할 아랍인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로렌스는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아랍인 지도자들을 불러 각자 병력을 모아 터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라고 종용했습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군자금을 제공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 사우디아라비아의 헤자즈 지역



이중 몇 몇은 거부했으며, 나머지도 이 일을 수행하기에는 힘이 모자랐습니다. 결국 로렌스는 실망하여 카이로로 돌아 왔으나, 얼마 후 그가 찾던 적임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메카의 대종주(大宗主)이자 헤자즈의 태수 후세인이었습니다.후세인은 모하메드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고 모든 아랍인들로부터 대단한 존경과 칭송을 받고 있었습니다.


* 비운의 주인공인 헤자즈 지역의 태수, 후세인

  그는 영국과 협력하여 오스만터키를 내쫓았으나 그도 결국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인

  사우드 가문에 쫓겨납니다. 파이잘 왕자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에게는 알리, 압둘라, 파이잘, 자이드의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알리와 파이잘은 터키군으로 복무하면서 터키군이 훈련한 아랍 병력을 이끌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지금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터키군에서 이탈한 아랍 병력을 이끌고 사막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즉시 터키에 대항하는 이 봉기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후세인의 가족 중 누가 지도자로 가장 적합한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로렌스는 우선 이들 가족을 만나고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 로렌스



그는 샤리프 후세인의 세 아들들과 면담을 한 후 그중 3남인 파이잘이 아랍반란을 이끄는데 적임자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후 파이잘 왕자와 로렌스의 떼어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인연이 시작됩니다.


로렌스는 파이잘과는 그럭저럭 잘 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파이잘의 부하들은 전형적인 아랍인들이어서 외부인, 특히 이슬람교도가 아닌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렌스는 아랍인들이 그를 신뢰하려면 가능한 한 아랍인들과 비슷하게 보이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랍인의 왕족처럼 옷을 입고 다녔고, 아랍어로만 말하였고 아랍 음식을 먹었으며, 낙타를 구하고, 맨발로 다니며 아랍의 벼룩을 견디어 냈습니다. 그리고 아랍인들처럼 바닥에서 뒹굴고, 아랍인들처럼 사고했습니다. 그제야 아랍인들은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그들의 진정한 일원이 되었고, 참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된 것입니다.그 효과는 대단해서 아랍인들은 곧 그가 요구할 때마다 기꺼이 싸움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 로렌스와 가까웠던 파이잘 왕자, 나중에 이라크 왕을 역임합니다



물론 그들은 그가 지불하는 금화를 좋아했으며, 그들이 습격해서 얻는 돈, 음식, 총, 옷, 카페트, 보석 따위의 전리품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들은 타고난 전사(戰士)였습니다. 그들은 강인한 힘과 용기를 신봉했는데, 험한 사막의 세계에서 생존하려면 그것은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당시 파이잘 왕자와 로렌스가 세웠던 아랍 반란군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오스만 제국의 거점이었던 메디나를 지속적으로 위협하되, 점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메디나는 메카 다음으로 두 번째 중요한 이슬람 성지였고 당시 주둔 중인 오스만 군도 질병과 포위 속에 약화 되어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점령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디나를 점령하는 대신 시리아-메디나 간 철도를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농탕질을 치고 다녔습니다. 이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메디나를 유지하기 위해 병력을 철도 복구 및 수비에 돌릴 수 밖에 없었고 아랍 반란군의 거점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이 불가능했습니다. 둘째는 아랍 반란군의 진격 방향을 남쪽에서 시리아의 중심도시인 다마스쿠스를 향해 북진하는 것이었습니다.


* 아카바 함락과 다마스쿠스 점령


1917년 로렌스는 아랍 반란군과 함께 홍해 근처 요충지였던 아카바 공략에 나섭니다. 로렌스와 아랍 반란군은 오스만 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공격을 가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막으로부터의 공격이었습니다.


2개월간의 피 말리는 행군 끝에 1917년 7월 6일 홍해의 북쪽 끝에 있는 아카바를 장악했습니다. 이후에도 힘겨운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1918년 10월에는 영국의 앨런비 장군의 부대와 협동 작전을 펼친 끝에 마침내 중동의 요충지 다마스쿠스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은 비로소 끝났습니다.


* 아카바



그러나 전쟁은 승리로 끝났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종전이 된 후, 영국과 프랑스가 이권을 챙기는 판이 벌어졌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국주의의 탐욕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로렌스는 아랍의 일은 세계 어느 나라도 간섭하지 말자고 주장했으나, 그의 주장이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고 파이잘을 국왕으로 한 시리아 아랍 왕국이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이 왕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약을 내세운 프랑스가 다마스쿠스를 다짜고짜로 점령해버리는 바람에 1920년 바로 증발해 버렸습니다. 아랍의 독립이라는 당초의 희망이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로렌스는 전쟁 막바지에 자신의 상관들에게 아랍 독립국 건설에 대해 지속적으로 설득했으나 영, 프 양국은 이전에 맺은 협약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결과적으로 로렌스가 바랐던 아랍의 진정한 독립은 산산이 부서지고 이들 지역들은 위임통치령, 보호령이라는 미명하에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이상적인 결말을 꿈꾸었던 로렌스는 깊은 환멸을 느꼈습니다. 그는 국왕 조지 5세로부터의 훈장과 작위 수여를 거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아랍인들에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었다며, 아랍 반란에서의 자기 역할은 자신에게나 영국에게나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것이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 베르사이유에서...파이잘 왕자, 뒷줄에 있는 로렌스



* 종전 후


이제 로렌스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으나 전쟁이 끝나자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신분과 이름을 통째로 숨기고 은둔해버렸습니다. 자신과 영국이 주도했던 아랍의 독립 운동이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 지역에 대한 식민지 지배로 이어지고 독립이 물거품이 되면서 로렌스는 깊은 실의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는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잊혀지기 위해, 30대의 나이에 영국 공군에 몰래 이등병으로 입대했습니다. 30세에 대령이었던 그는 35세에 계급을 낮추어 사병이 되었습니다. 1922년 8월 존 흄 로스라는 가명으로 공군에 입대한 것입니다. 이듬해 2월 신분이 밝혀져 제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월에는 다시 토마스 에드워드 쇼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다시 육군 전차부대에 입대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허울 좋은 명성만 무성한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아픈 추억으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름을 바꾸고 군대에 있으면, 복무기간 중에는 조용한 생활이 보장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 시기에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나에겐 살기 위해 싸울 기력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예전의 로렌스와는 헤어졌습니다. 세상의 소문이라는 것이 만들어놓은 그 로렌스를 생각만 해도 못 견디겠습니다.”


군대로 피신하고 싶은 그의 소원을 정부도 들어주었습니다. 로렌스는 1935년 2월 말까지 10년의 병역 만기를 채우고 제대했습니다.


이제 그를 귀찮게 하는 요소는 없어졌습니다. 새로운 이름으로 바꾼 로렌스는 마음껏 은둔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대 후 그는 클라우즈힐의 코티지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회고록인 <지혜의 일곱 기둥>을 썼다. 생각해보면 지나온 세월은 꿈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속력을 즐기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고독을 즐겼습니다.


바람을 일으키며 전속력으로 달리는 오토바이는 그에게 더 없는 해방감을 안겨주었습니다.





* 죽음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가 신나게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935년 5월 12일이었다. 친구를 초대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전보를 치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데, 바로 앞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소년들이 보였습니다. 그들을 피해 핸들을 꺾는 순간 오토바이는 곤두박질치고 오토바이로부터 분리된 로렌스의 몸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나동그라졌습니다.


의식을 잃은 그는 이튿날 육군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머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도 로렌스의 육체는 쉽게 꺼지지 않았지만, 소생할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5월 19일, 20세기의 괴짜 영웅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습니다.


이때가 그의 나이 45세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5월 21일 모턴 교회에 매장되었습니다.


* 인간 로렌스


그는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의리 있고 가끔 고집도 부릴 줄 아는 친구 같은 존재였습니다. 더욱이 그의 조국이 아닌 불우한 처지의 타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휴머니스트였습니다. 그러나 후세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무작정 찬양할 수만은 없습니다. 어찌됐든 그는 영국 제국주의의 군인이었고, 그가 기여한 아랍 반란의 성공이 결과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 국가들의 먹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랍인들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접근은 어떻게 보면 교활한 제국주의의 발톱이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렌스는 우리에게 그 누구와도 다른 감동을 선사한 영웅이었습니다. 제국주의가 로렌스의 특별한 능력을 이용하긴 했지만 아랍인들을 향한 그의 열정과 순수한 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로렌스의 아랍 독립에 대한 열정은 단지 전략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아랍과 아랍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기꺼이 영국 군복을 벗어던지고 아랍인의 복장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로렌스의 진정한 마음이 아랍인들에게 전달되었기에 그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터키군과 싸울 수 있었습니다.


* 영화에서...



"아랍의 일은 세계 어느 나라도 간섭하지 말자"


로렌스의 아랍에 대한 마음이 순수했다하더라도 그에게는 사실상 서구인의 오만이 약간은 있었습니다. 중동의 문제를 서양인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그것입니다. 실제로 로렌스는 “옥스퍼드 시절에 일생 동안 단 한 번쯤은 새로운 아시아를 건설하는 일에 뛰어들고 싶다”(<지혜의 일곱 기둥>의 에필로그에서)라고 생각했음을 고백했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1))에서 지적했듯이, 영국이나 프랑스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아랍은 스스로 터키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국주의 군대가 개입하면 당연히 이권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로렌스는 짐작했어야 했습니다. 터키의 지배를 벗어나 아랍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 아래 들어간 것이니, 결과적으로 로렌스는 아라비아의 영웅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영웅이 된 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렌스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쉽사리 폄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분명 고귀한 품성의 소유자였고, 잘못된 결과를 놓고 합리화하기보다는 부끄러워할 줄 알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행적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는 영국 왕실의 훈장도 사양했고, 작위 수여도 거부했습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20세기의 가장 특별한 기발한 인물이자 영웅이었습니다. 그의 영웅적인 행위는 결국 제국주의에 이용당하고 말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이상을 꿈꾼 몽상의 결과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회고록 <지혜의 일곱 기둥>에서 스스로가 결코 영웅이라는 것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 전쟁, 협잡, 제국주의의 탐욕 그리고 현대 중동의 탄생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은 오스만 터키와의 전쟁 와중에 여기저기 이중약속을 하면서 전후 중동지역을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먼저 1915년 맥마흔-후세인 서한을 통하여 아랍인들에게 오스만 제국의 멸망 후에 완전한 독립을 약속했습니다. 아랍인들의 반란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듬해에는 비밀리에 프랑스와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으면서 아랍지역을 갈라 먹겠다면서 아랍인들의 뒤통수를 쳤습니다. 그리고 밸푸어 선언으로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내주었습니다. 중동에 피바람을 일으키고 끝내는 아랍인들과 로렌스를 좌절시킨 영국의 3중 속임수의 핵심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이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현대 중동의 혼돈과 슬픔을 가져온 씨앗이었던 것입니다.


* 맥마흔



** 3년 동안의 제국주의의 침탈-중동의 비극 탄생


1. 맥마흔 선언(1915년)

2.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년)

3. 밸푸어 선언(1917년)


<맥마흔 선언>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이 독일 편에 서 있던 오스만제국 내 아랍인들의 반란을 지원하고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독립국가 건설 지지를 약속한 선언입니다.


맥마흔은 1915년 1월부터 1916년 3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헤자즈의 태수였던 샤리프 후세인과 전시외교정책에 대한 서한을 주고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아랍인들이 참전하면 전쟁 후 오스만제국지역 내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과 전쟁 중이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중동 영토 안에 많은 아랍 부족들이 존재하며, 이들의 협력을 얻어내면 전쟁 중인 오스만 제국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하여 무함마드의 후손이며 메카의 대족장이었던 후세인과 영국의 이집트 고등판무관 맥마흔 사이에 '맥마흔 선언'이란 이름의 비밀협정이 맺어졌습니다.


이 선언은 쉽게 말해서 '반란 일으키면 아랍 국가 만들어주마'라는 내용이었고 통일왕국의 야심을 가지고 있던 후세인은 여기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당시 반란군에 파견된 영국의 연락책이 이후 영화로도 만들어진 로렌스였습니다. 영국의 공세와 연결된 반란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오스만 군을 모두 몰아내고 시리아의 다마스쿠스까지 점령합니다.


그러나 영국은 한편으로는 이듬해 1916년에 사이크스-피코협정을 비밀리에 추진했습니다. 이 협정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사이의 비밀 협정으로 오스만제국을 분할하여 영국이 이라크ㆍ쿠웨이트를, 프랑스가 시리아ㆍ레바논을, 러시아가 터키 동부지역을 차지한다는 내용으로 나중에 이중외교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사이크스-피크 협정에 의한 나눠먹기



이 협정에 의거 프랑스는 이미 영국과 이 지역을 갈라먹자고 짬짜미를 해놨기 때문에 전후 이들 아랍 군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레반트(現 시리아, 레바논)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배신으로 통일 아랍 결성이 좌절된 헤자즈 가문의 에미르 후세인은 라이벌인 사우드 가문(2)의 사우디아라비아에 의해 본거지인 메카에서 패주하여 쫓겨납니다.


영국은 패망하여 쫓겨난 후세인의 아들들에게 자국령을 양도해서 요르단 왕국(둘째 압둘라에게)과 이라크 왕국(세째 파이잘에게)이 건설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랍 세계의 분할을 완성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자신들의 보호령으로 삼아 놓았습니다. 현재의 중동 문제는 상당부분 이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영국만 탓하기도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헤자즈 왕국이 망한 것은 성급하게 칼리프 지위 선포를 해서 중동 이슬람교도 전체의 반발을 부른 후세인의 실책이 주된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헤자즈 가문이 사우드 가문에게 한 순간에 근거지를 다 잃어버리고 빈털터리가 된 것을 영국이 후원해서 그럴듯하게 왕국(요르단,이라크)을 세우도록 도와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 해인 1917년에는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맥마흔선언과 모순되는 밸푸어선언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민족국가 건설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미국 내 유대인을 움직여 미국을 제1차 세계대전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영국의 대중동정책은 전쟁의 불씨를 만들어 향후 두고두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을 제공하게 됩니다.


* 팔레스타인인들의 웬수, 밸푸어



(1) 오리엔탈리즘


원래 유럽의 문화와 예술에서 나타난 동방취미(東方趣味)의 경향을 나타냈던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제국주의적 지배와 침략을 정당화하는, 서양의 동양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태도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2) 후세인과 사우드 가문


1902년 아라비아 반도의 리야드 토후국인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가 하일 토후국으로부터 리야드 지방을 탈환해 세 번째 독립국가를 건설했다. 한편 로렌스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모하멧의 직계 후손인 하심 가문의 후세인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게서 맥마흔 선언으로 아랍의 독립 약속을 받아 1916년에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를 요르단의 왕으로, 삼남 파이살을 이라크의 왕으로 각각 임명했다. 후세인 본인은 메카와 메디나를 거점으로 한 헤자즈 왕국의 왕이 되었다.그러나 후세인은 아랍 통일 왕국을 세워주겠다던 영국의 처음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1924년 스스로를 모든 무슬림의 칼리프로 선언했다. 이는 많은 반발을 불러왔고, 같은 해 결국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가 후세인을 공격했다.


후세인은 키프로스를 거쳐 차남이 다스리던 요르단으로 도망갔다. 헤자즈의 왕위는 그의 장남 알리가 계승했으나 1년 만에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에게 정복당하고 이라크로 추방되었다. 이후 압둘 아지즈는 사우디 반도를 통일하고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초대 왕이 되었다.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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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변호정 | 작성시간 19.04.17 고관장님 덕분에 터키의 역사 문화민족의영광 정치적배경
    문화 예술 등 두루 섭렵하게되어
    비로소 아라비아의로렌스가
    아카바로 낙타타고돌진하는 동기와 이유를 석연에서 확연으로
    전환되는계기가되었읍니다
    참 좋은공부가되었고 골조가
    바로서게됨을 고맙게생각합니다
  • 작성자블라디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4.18 "골조가 바로서게됨을..." ㅎㅎㅎ 항상 사람을 놀라케하는 변대감의 표현력이
    또 한번 본인을...일찌기 그 재능을 갈고 닦았으면 한국의 '빌 브라이슨'이 될
    것을...

    미국의 빌 브라이슨은 최고로 재밋는 여행기를 쓰는 밀리언셀러작가입니다. 그
    는 여행기 뿐만 아니라 워낙 박학다식해서 각종 장르를 아우르는 주옥같은 책을
    쏟아내고 있는 천재적인 글쟁이 반열에 올라있지요.

    브라이슨의 여행기 한권쯤 일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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