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문화 기행(제4편)-행복만을 그렸던 행복의 화가, 프로방스 레콜레트의 르느아르의 집을 찾아-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들으며
작성자블라디고작성시간19.07.05조회수1,094 목록 댓글 0[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가 창조해 낸 집, 프로방스의 레콜레트 ]
오래된 올리브 나무들로 이름이 높은 눈부신 땅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매력적인 저택은, 많은 사랑을 받았던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입니다.
르누아르는 말년에 점점 더 자주 프랑스 남쪽 레콜레트를 방문했습니다. 이는 이 지역의 따사로운 날씨가 1890년대부터 그를 괴롭혀 오던 심한 류머티즘을 좀 누그러뜨려 줄까 하는 바람에서였습니다. 그는 마침내 레콜레트에 영구히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 르누아르의 집
그는 무엇보다도 저택의 아름다운 정원에 홀딱 반했는데, 자연에서 일하기 좋아하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본성에 충실하게 그는 정원에 이젤을 세워 두고 여러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말년의 르누아르를 찍은 마음 아픈 사진 한 장에서는 그가 카뉴의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우산 하나가 그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그림붓은 거동이 힘든 손에 묶여 있습니다.
르누아르는 국내외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기인 1907년에 이곳 토지를 구입했습니다. 그는 이 땅에 새 집을 지었는데, 1908년에 완공된 집은 멀리 떨어진 산과 해안선이 내다보이는 아름다운 전망을 선사했습니다. 르누아르는 정원과 주변 지역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오늘날 이 집은 미술 애호가들이라면 반드시 들러 봐야 할 곳입니다.
* 그의 휠체어와 그림, 옷가지들
르누아르가 살았던 당시 모습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방 장식과 가구, 두 개의 스튜디오도 그대로입니다. 진본 그림들, 조각품, 드로잉, 판화, 과거를 회상시키는 사진들, 개인 소지품 등도 있습니다. 앙리 마티스가 1917년 르누아르를 방문했을 때, 그는 레콜레트에서 영감을 얻어 저택의 정원과 레콜레트 이곳저곳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 휠체어에서 그림 그리는 르누아르
1912년부터, 르누아르가 앓던 고통은 심해져 그는 휠체어를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건강이 점차 악화되어 갔음에도 그는 1919년 죽음을 맞기 바로 전까지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계속해서 화폭에 담았습니다. 르누아르의 아들인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는 이곳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레콜레트와 르누아르의 이야기는 러브 스토리이다."
"예술 작품? 첫 번째, 예술 작품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어야 하며, 두 번째 그것은 모방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 프로방스 리콜레트 마을
[ 행복을 그렸던 행복의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하며 예쁜 것이어야 한다. 세상에는 이미 불유쾌한 것이 너무 많은데 또 다른 불유쾌한 것을 만들어 낼 필요가 어디 있는가." -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르누아르는 생기 넘치는 파리시민들의 일상과 여인들, 그리고 아이들의 생동하는 모습을 다채로운 색깔과 빛으로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는 많은 그림을 그려 많은 사람들에게 시랑을 받고 있는 화가입니다.
르누아르는 1841년 파리의 리모주에서 아버지가 재봉사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마네, 세잔, 드가 보다 하층 계급이었던 셈이죠. 그는 가난 때문에 12세부터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을 했습니다.
* 그의 그림 <객석>
그러나 얼마 후 산업혁명의 여파로 대량생산 기계가 도입되자, 도자기 그림은 사양산업으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술집이나 카페 등지에서 사용되는 방수천이나 부채 등에 그림을 그리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1862년부터는 국립미술대학인 <에콜 데 보자르>의 야간부에서 소묘 및 해부학 강의를 듣는 한편, 스위스의 화가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 그림 교습을 받게 되었습니다.
르누아르는 몇 달 뒤 화실에 들어온 시슬레와 모네 및 바지유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현실생활에 좀 더 충실하고 과거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네 젊은이의 공통된 이상은 곧 강한 우정으로 이어졌습니다.
* 말년의 부부
같은 무렵, 스위스 아카데미의 또 다른 곳에서는 폴 세잔과 카미유 피사로라는 젊은 화가들이 똑같은 문제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바지유의 소개로 두 그룹은 서로 자주 만났습니다. 이들이 바로 프랑스 인상주의를 일구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림을 심지어는 풍경화까지도 화실에서 그리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젊은 화가들은 퐁텐블로 숲 등으로 화구를 들고 다니며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리는 한편, 자신들의 미술에 대한 의견들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미술 운동을 제창하기 시작합니다.
* 그의 그림, 그림그리는 친구 모네
1863년 에두아르 마네는 훨씬 더 대담한 방법을 택했는데. 이러한 대담성으로 인해 젊은 예술가들은 마네를 새로운 운동의 지도자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와 모네의 풍경화들이 화단의 떠들썩한 화제가 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1874년 기성 살롱전과는 별도로 첫 번째 인상파 전시회가 열렸으며 그들의 그림은 전통적인 규범에서 너무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살롱전 심사위원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그림을 팔기도 무척 어려웠습니다. 물감을 살 돈조차 없다고 하소연할 만큼 생활고에 시달렸으나 꾸준히 작업을 계속하여 기교면에서 점점 더 완숙해져 갔습니다.
르누아르는 인체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풍경에 더 매혹되어 있는 다른 화가들과 거리를 두고 지냈습니다. 그리고 특히 야외에서 빛을 받은 젊은 여인의 살갗을 섬세하고 다채로운 붓놀림으로 훌륭하게 묘사했습니다.
* 바다가 보이는 그의 집 테라스에서...
미술 평론가 테오도르 뒤레는 “르누아르는 빛과 속도감있는 붓질로 여인에게 유순함과 편안함을 더해주고, 여인의 피부를 투명하게, 뺨과 입술을 장밋빛 욕정으로 채색한다”고 말했습니다.
덕분에 얼마 후 그는 초상화를 몇 점 주문받았고 비교적 쉽게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여갔고 브르주아이자 예술가들의 후원자였던 조르주 샤르팡티에에게서 중상류층 사람들을 소개받아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사르팡티에는 르누아르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수집가입니다.
* 그림그리는 르누아르
르누아르는 점차 자신의 기술에 숙달되었고, 생기에 가득 찬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작품은 인기가 좋아서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습니다. <객석>, <물랭 드 라 갈레트>, <뱃놀이에서의 점심>,<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 등은 이 시기의 작품들입니다. 샤르팡티에는 1879년 '현대생활'이라는 화랑에서 르누아르 개인전을 열어주었습니다.
1881년과 1882년 르누아르는 알제리와 이탈리아 및 프로방스 지방을 몇 차례 여행했는데, 이 여행을 통해서 자신만의 예술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880년대 인상주의 운동이 방향을 상실하면서 이들에 대한 실망감이 커짐에 따라 인상파와 점차 거리를 두면서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해 나갑니다.
그는 엑상프로방스와 마르세유 및 마르티그 같은 프랑스 남부 지방을 몇 차례 여행했고, 이와 같은 남부 프랑스에서의 체류는 그만의 독특한 화풍을 이루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형태는 한결 뚜렷해지고, 붓질은 부드러워졌으며, 구성과 색채는 단순하면서도 균형감을 이루게 됩니다.
* 정원 1, 온통 올리브 나무들입니다.
1889년, 르누아르의 작품이 파리 세계박람회의 일환으로 열린 <프랑스 미술 100년전>의 전시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또한 1892년에는 정부의 청탁으로 <피아노 앞의 소녀들>을 비롯한 6점의 그림을 그리면서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화가가 됩니다.
이래저래 그는 어느 때보다 높은 명성과 함께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자전거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고, 이 후유증으로 류마티즘 발작이 일어납니다. 이 류마티즘은 눈을 감을 때까지 그를 괴롭힙니다.
통증이 심해지는 겨울이 되면 그는 따뜻한 남프랑스로 내려가 지내곤 했습니다. 드디어 1898년 그는 니스의 작은 마을에서 안식처를 찾았고, 1907년 레콜레트에 땅을 사들여 저택을 짓고 완전히 정착했습니다.
* 정원 2
1910년 경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걷지 못하게 됩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게 되어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지만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는 붓을 손에 붙들어 매고 그림을 그릴 정도로 치열한 에술정신을 보여 주었습니다. 죽기 전에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보낸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라고 즐겁게 회상했다곤 합니다.
이런 고난에도 그는 여전히 인생에 대한 밝고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내와 아이들, 하녀 가브리엘의 초상화는 물론, 정원에 유리로 화실을 짓고 풍경화도 그렸습니다. 종종 가브리엘이 따다 준 꽃들도 정물화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르누아르는 프랑스 화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1919년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특별전이 열렸습니다.
* 집(기념관) 내부
1915년 르누아르의 아내는 전쟁에서 중상을 입은 아들 장을 만나러 갔다가 돌아온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르누아르는 아내보다 4년 더 살았는데, 죽기 몇 달 전 그는 자신의 그림을 보러 파리에 갈 수 있었고. 그의 친구들은 그를 루브르 박물관으로 데려가, 그가 평생 존경해왔던 걸작들을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1919년 12월 3일, 르누아르는 폐결핵으로 레콜레트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숨지기 직전 이 노화가는 아들 장에게 꽃을 그리고 싶으니 붓을 가져다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이걸 좀 이해하기 시작했어”라고 중얼거리며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 정원 3
[ 작품 감상 ]
* 두 자매
봄의 아름다움과 젊음의 생기발랄함을 축하하고 있는 <두 자매(테라스에서)>는 기법적으로나, 구성적으로나 르누아르의 대역작입니다. 이 거장은 이 그림을 통해 활기가 넘치는 색상과 변화무쌍한 붓 터치를 구사했습니다. 거의 실물 사이즈의 인물(이들은 작품의 제목과는 달리 실제의 자매가 아니고 모델입니다)은 테라스 앞 철 난간의 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들 뒤로는 생기발랄하게 흔들리고 있는 나뭇잎들의 풍경이 깔끔한 윤곽을 보여주면서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소녀의 얼굴은 매우 아름답게 표현되었습니다. 도자기 표면처럼 반짝이는 얼굴의 윤기는 명암으로 인해 잘 표현되고 있다.
어린이들의 눈동자는 놀랄 정도로 선명합니다. 투명한 푸른색은 순진무구한 눈을 통해 세상을 새로이 바라볼 수 있도록 하려는 작가의 욕망이 드러납니다.
* 믈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있는 <물랭 드 라 갈레트(Moulin de la Gallette)>는 19세기 말경 파리지앵들로부터 사랑받던 무도회장으로, 일요일 오후가 되면 젊은 파리의 연인들이 모여들어 햇빛을 받으며 춤과 수다를 즐기던 장소였습니다. 르누아르는 이곳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화폭에 담아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하여 근처의 코로가(街)에 아틀리에를 얻고 1년 반 가까이 매일 이곳을 드나들면서 수많은 스케치와 습작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120호나 되는 대형 캔버스를 아틀리에에서 몽마르트르의 무도회장까지 매일 가지고 가서 현장의 정경을 직접 묘사하였다고 합니다.초여름의 햇빛이 나무 사이를 비추는 서민적인 야외 무도회장에서 무리를 이룬 젊은 남녀들이 춤과 놀이를 즐기는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림에 등장한 인물들의 다양한 동작들은 우아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두운 명암을 쓰지 않고도 햇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창조해 내는 르누아르의 기법이 두각을 나타내는 작품입니다.
* 뱃놀이에서의 점심
르누아르는 초상화를 제작했던 경험을 살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에서보다 정확하게 개별 인물들을 묘사했습니다. 한층 다채로워진 붓 터치와 색상은 색조들의 조화에 종속되기 보다는 인물들과 그들의 특징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에서 화면 전반에 분산되어 나타났던 빛의 표현은 이제 개별 형태 안에서만 한정되어 나타납니다. 구도 또한 전경의 양쪽의 인물들로부터 사선으로 후퇴하는 구도로 비교적 정돈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산뜻한 대조들이 부각되어 나타납니다. 부드러운 붓질과 완화된 색채 톤은 테이블 위의 술병과 유리잔, 과일에 반사된 반짝이는 빛과 대조됩니다. 이와 같은 하이라이트 부분에는 하얀 색 물감을 매우 두텁게 칠한 반면, 주변의 회색 톤은 매우 얇게 채색되었습니다.
따뜻하고 차가운 색, 어둡고 밝은 톤들이 서로 병치되어 나타남으로써 전반적으로 화면은 산뜻하며 풍요로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 시골 무도회
이 작품은 소박하고 정겨운 시골의 무도회 장면을 담았습니다. 여성은 후에 르누아르의 아내가 되는 알린느 샤리고입니다. 풍만한 신체를 가진 알린느의 아름다움은 부드러운 선과 따뜻한 시선 속에 충만한 행복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춤추는 여성의 붉은 모자와 뺨, 바닥에 떨어진 꽃 송이 등, 무르익은 무도회의 흥취가 한껏 느껴집니다.
* 피아노치는 소녀들
이 그림은 매우 섬세한 필치로 그려졌습니다. 부드럽고 자유롭게 인물의 옷과 머리모양을 표현하는 것은 르누아르 후기 작품의 대표적인 특징이기도 하죠. 이러한 표현은 그림 전체 분위기를 리드미컬하고, 흐르는 듯하고 부드러운 서로 맞물리도록 하는데 효과적입니다.
소녀들은 모두 뒤의 커튼과 그들 앞에 놓인 화병과도 잘 어우러집니다. 화면이 꽉 찬 구성은 관람자로 하여금 피아노 치는 소녀들에 모든 시선이 가도록 이끕니다. 그림 전체적인 분위기를 따뜻하고 부드럽게 만드는 금빛이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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