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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음회

프랑스 역사문화 기행(제12편)-노르망디의 경이(몽생미셸) &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탄생지(건지도)-프랑크의 <생명의 양식>을 들으며

작성자블라디고|작성시간19.09.20|조회수1,034 목록 댓글 0





[ 노르망디의 경이, 몽생미셸 ]


“천사는 거기에 성당을 만들라 명령했다”


몽생미셸은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그곳은 마치 군주가 왕좌에 앉아 있는 것처럼 바위섬 위에 잔뜩 무게를 잡고 앉아 있습니다. 몹시 거만하면서도 냉담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있어 누구라도 그 앞에 서면 두 손을 모으고 애원이나 간청을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8세기 초, 카톨릭교도들이 오로지 종교적 신념으로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성난 바다 위의 가파른 석회암 위에 자신의 모든 석공 기술과 수학, 그리고 공학을 집약적으로 활용해서 대성당을 짓겠다고 별렀습니다.





몽생미셸은 노르망디 반도 옆구리 코탕탱 반도의 남쪽 생말로 만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수많은 난관을 이겨내고 거대한 카톨릭 성전이 지어진 것은 대천사 미카엘이 이곳 바위산 꼭대기에 성당을 지으라고 명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 노르망디의 주교였던 오베르가 천사 이 계시를 받고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미카엘을 모신 작은 예배당을 바위산 서쪽의 지하 예배당으로 세웠습니다. 이후 800년이라는 오랜 세월 증개축을 거듭하며 오늘날의 모습을 드러냈는데,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 등 그때 그때의 시대를 반영하는 건축 양식이 다양하게 반영되었습니다.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35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옵니다.





이 중에서 13세기에 필리프 왕에 의해 증축된 수도원 건물은 특별히 ‘경이로움’이라는 뜻의 ‘라 메르베유’라고 칭합니다. 3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는 건물은 성직자(정신), 귀족(지성), 평민(물욕)을 상징합니다.


가장 아래층에는 평민 순례자를 위한 방이, 가운데 층에는 귀족과 기사를 위한 방이, 맨 위층에는 성직자를 위한 식당과 회랑이 있습니다. 백년전쟁 때는 프랑스군의 요새 역할을 하기도 했고, 프랑스 혁명 때는 감옥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이 수도원이 휘뿌연 안개가 피어오르는 바닷가의 만에 자리 잡지 않았다면 그저 프랑스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는 고풍스러운 유적의 하나에 불과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다의 거침없는 힘과 그에 저항하는 이 건축물과의 관계가 불가사의한 전설을 낳았을 겁니다.





[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의 탄생지를 찾아 ]

 

화가의 아틀리에 같은 방입니다. 지붕에는 훤한 채광창(採光窓)을 이고 벽면은 삼면이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3층 건물 꼭대기에 따로 우뚝 얹혀 큰 기선(汽船)의 조타실(操舵室) 같기도 합니다.

 

창에는 세인트 피터 항(항)의 부두와 수평선과 험 도(島), 제투 도(島), 사크 도(島) 등의 섬들이 가득 들어와 담깁니다. 그래서 방 이름이 루크 아우트(Look out).

 

* 위고의 집필실이었던 루크 아우트(Look Out), 전면에 세인트 피터 항구가 보입니다



 

바다를 향한 쪽 양벽 모서리에는 다리 없는 책상이 각각 허리 높이로 벽 중턱에 걸려 붙어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이 방의 이 책상에서 씌어졌습니다.

 

위고가 영불해협에 있는 영령(英領)의 섬 건지 도(島)에 온 것은 1855년, 공화주의자로서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하여 1851년 국외로 망명했던 그는 1852년 이웃의 저지 도(島)에 자리를 잡았다가 3년 만에 건지 도로 옮겼고 1856년 <오트빌 하우스>라 부르는 집을 사들여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몰락으로 파리로 귀환할 때까지 14년간(54세 때부터 68세 때까지) 살았습니다.

 

* 건지도 지도



 

“갈매기와 함께 밥을 먹고 가마지우 새와 함께 목욕을 한” 망명 생활이었습니다.

  

건지 도는 화초 재배가 주업인 인구 7만 5천의 기후 좋은 섬입니다. 영국의 포츠머드와 웨이머드에서 떠나는 정기선이 있지만 프랑스의 생 말로에서 배를 타는 것이 훨씬 가깝습니다. 셰르부르에서는 경비행기도 다닙니다.

 

섬의 주항(主港)인 세인트 피터에 배를 내리면 비탈진 시가지 중턱에 오트빌 하우스가 하얗게 보입니다. 이 집은 1927년 위고의 손녀인 잔 위고가 파리 시(市)에 기증하여 지금은 영국 땅이면서도 무슨 조차지(租借地)처럼 프랑스 국기를 문 앞에 달고 위고 기념관이 되어 있습니다.

 

* 오트빌 하우스



“큰 스펙타클로 둘러싸인 작은 처소”라고 스스로 위안하던 오트빌 하우스는 위고가 실향인(失鄕人)의 설음을 그 치장에 쏟아 낙을 찾던 집이었습니다. 집안은 오밀조밀한 각종 데코레이션으로 어지럽습니다.

 

그 하나하나에 그의 손이 안 닿은 것이 없어 각 방은 장식가로서의 위고의 재능에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자신이 일일이 조각한 문짝, 가구들에는 <V.H>라는 이름 약자가 그의 손 끝을 느끼게 하고 <희망은 나의 힘>, <인생은 망명이다> 등 여기저기 새긴 좌우명(座右銘)에서는 당시의 심란(心亂)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청실(靑室)도 있고 홍실(紅室)도 있습니다. 동양 취미가 있었는지 중국화(中國畵)가 유난히 많습니다. 서재에는 발자크, 라마르틴, 디킨즈 등의 책이 꽂혀 있습니다. 한 방에는 <레 미제라블>의 삽화들을 모아 놓아 위고가 이 집에서 구상하던 소설의 세계가 그림으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 위고의 방


 

널따란 뒤뜰에는 종려수(棕櫚樹)와 동백나무들 사이에 그가 직접 심은 참나무가 1백년이 넘은 나이에도 정정합니다.

 

한 망명 작가의 은신처이기에는 너무 호화로운 이 저택은 위고가 <정관시집(靜觀詩集)>의 수입으로 사서 <레 미제라블>의 수입으로 꾸민 것입니다.

 

위고는 여기 사는 동안 규칙적으로 매일 오후 산책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맨 꼭대기의 <루크 아우트>에 올라가 가족들의 접근을 금지시키고 다리 없는 책상 앞에서 늘 선 채로 글을 썼습니다. 집필 중일 때는 딸 아넬이 피아노를 쳐서도 안 되었습니다.

 

* 위고의 방

 


그러다가 저녁 때가 되면 위고는 장의자(長椅子)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곁에는 꿈에 나오는 시귀(詩句)들을 얼른 옮겨 담기 위해서 항상 종이를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위고의 애인이던 배우 쥘리에트 드루에가 이 섬까지 따라와 머물던 곳은 지금 <판도라>라는 호텔입니다. 쥘리에트는 위고가 쓴 <레 미제라블>의 원고를 일일이 정서한 여인이었습니다.

 

날씨 좋은 날이면 <루크 아우트> 창 밖으로 멀리 프랑스 땅이 보입니다. 프랑스를 떠난 지 10년 후에 완성한 <레 미제라블>이 파리의 거리들을 모두 잊지 않고 생생히 묘사한 것은 위고의 아린 향수(鄕愁)의 표현이었습니다.

 

* 위고의 방

 


위고가 <레 미제라블>을 처음 손대기 시작한 것은 망명 전 파리에서였습니다. 그는 1845년 <레 미제르>라는 작품을 착수해 3년 동안 쓰다가 1848년 파리를 떠나면서 중단한 뒤 1860년 건지 도에서 <레 미제라블>로 개제(改題)하여 다시 계속했습니다.

 

파리의 옛 바스티유 감옥 자리 가까이에 있는 보즈 광장 가에는 위고가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 집이 남아 있고 파리로 오는 위고 찬미자들은 반드시 이곳을 찾습니다.

 

위고가 1832년부터 16년 동안 거주한 이 집은 그의 탄생 1백주년인 1902년, 친구이던 극작가 폴 뫼리스가 위고의 유품들을 대량 기증함으로써 이듬해 기념관으로 개관했습니다.

 

* 보즈 광장의 위고 기념관

 


이 기념관에서는 이번에는 화가로서의 위고의 면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전문가 못지 않은 뎃상이 4백점이나 보존되어 있습니다. 위고의 손 모형과 함께 머리카락이 한 묶음, 그의 체온이 느껴집니다.

 

위고는 <레 미제라블> 외에도 시집 <빛과 그림자>, 희곡 <뤼 블라> 등을 이 집에서 썼고, 발자크, 알렉상드르 뒤마, 라마르틴 등을 이 집에서 맞았습니다.

 

* 위고의 침실

 


이 기념관에서 진열장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말굽조각, 탄환, 조약돌 등이 한 무더기 눈에 띕니다. 1861년 위고가 워털루에서 주워온 것이라고 설명에 되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패전한 대회전장(大會戰場) 워털루는 브뤼셀 남쪽으로 18km.

 

옛 싸움터는 넓은 평원이 끝 간 데 없이 뻗었고 그 가운데에 피라밋 형의 기념총(記念塚)이 솟아 있습니다. 여기서 한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굴뚝 같은 원주(圓柱)의 위고 기념탑을 길가에서 만나게 됩니다.


위고는 <레 미제라블>의 워털루 싸움 장면을 현장에서 쓰기 위해 1861년 5월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이 대작(大作)에 대미(大尾) 자(字)를 쓴 것은 이해 6월 30일 상오 8시 30분 바로 이 워털루에서였습니다.

 

이 커다란 종지부(終止符)를 축하하는 위고 기념관은 1912년에 처음 초석이 놓여졌으나 자금 사정으로 중단했다가 1956년에야 완성되었습니다.

 

* 워털루 전투장 사자상 기념탑

 


<레 미제라블.> 주인공 장 발장의 발길이 닿는 곳은 모두 실재(實在)의 지명(地名)들이라고 합니다. 장 발장이 감옥살이를 한 툴롱은 남프랑스의 해안 도시입니다. 미리엘 신부의 은촛대를 훔친 디뉴는 알프스 산맥 남단에 있습니다. 소설 속의 미리엘 신부는 디뉴의 주교이던 미올리스 신부가 모델입니다.

 

장 발장은 영불(英佛) 해협에 가까운 북프랑스의 몽트뢰이유까지 올라가 시장(市長)이 됩니다. 몽트뢰이유에는 장 발장을 시장으로 모신 영광을 기념하는 것이라고는 지금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장 발장이 불쌍한 코제트를 여인숙에서 구출해 내는 몽페르메이유 마을은 다릅니다. 장 발장을 역사상의 인물로 예우합니다.

 

파리에서 동쪽으로 21km 거리의 몽페르메이유에는 어린 코제트가 물 길러 나왔다가 장 발장을 만나는 우물이 있습니다. 이것을 <장 발장의 우물>이라고 부릅니다. 마을 아래쪽의 이 우물로 내려가는 길이 <장 발장의 우물 로(路)>요, 부근의 숲은 <장 발장 공원>입니다.

 

코제트를 잡아두는 테나르디에의 여인숙은 알 가(街) 5번지. 이 집이 그 여인숙이라는 확증은 아무것도 없는 채 마을 사람들은 심증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빨간 벽돌 2층 집은 줄곧 카페로 내려오다가 1980년 새로 개수를 해서 개인 살림집이 되었습니다.

 

* 19세기 말 몽페르메이유


 

장 발장과 코제트는 이 마을에 축제가 있을 때면 반드시 가장행렬 속에 등장하여 거리를 누빈다고 합니다.

 

1885년 6월 1일, 빅토르 위고의 장례식 날 몽페르메이유 마을은 시민대표를 조문 사절로 보내 위고의 관 위에 은방울꽃 한 다발을 얹었습니다. 위고가 이 마을에 와서 20여 일 머무는 동안 즐겨 산보하던 숲에서 딴 꽃이었습니다.

 

장 발장이 몽페르메이유에서 코제트를 데리고 파리에 와서 처음 숨는 곳은 고르보 옥(屋)입니다. 이탈리아 광장 부근 오피탈 대로(大路)와 뤼방스 가(街)의 모퉁이에 있던 이 집은 없어졌습니다. 장 발장과 코제트는 이 집을 나와 이번에는 프티 픽퓌스 가(街)의 수도원으로 달아납니다.

 

“네 개의 거리가 수구(水溝)처럼 둘러싼 수도원”이라는 소설의 묘사대로 투른포르 가의 수도원은 건물은 달라졌으나 길은 그대로입니다. 1975년까지 이 자리에 수도원이 있었는데 건물이 너무 낡아서 헐어 버리고 새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로몽 가 쪽으로 새로 난 정문 앞에서 행여 장 발장이 정원사로 일하던 들이라도 남아 있나 하고 안을 기웃거리니 아담한 안뜰이 있습니다. 이 수도원은 위고의 평생의 연인 쥘리에트 드루에가 어릴 때 들어가 있던 곳이어서 위고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에 그렸습니다.

 

장 발장이 코제트를 데리고 매일같이 산책을 나가던 뤽상부르 공원은 이 수도원에서 걸어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

 

* 뤽상부르 공원에서 장 발장, 코제트, 마리우스(상상화)

 


장 발장이 수도원을 빠져나오기 위해 죽은 이승(呢僧)의 관 속에들어가 생 매장되는 묘지는 보지라르 묘지였는데 파스퇴르 지하철역 부근의 그 자리에는 뷔퐁 중.고등학교가 들어섰습니다.

  

청년 마리우스가 봉기에 참가했다가 부상을 당하는 공화파의 본거지 <코랭트> 주점(酒店)은 랑뷔토 가 100번지에 <르 부브레>라는 식당이 되어 있습니다.

 

장 발장이 이 마리우스를 업고 파리의 하수도로 들어가 탈주하는 장면은 <레 미제라블>의 압권(壓卷)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파리의 하수도

 


장 발장 때문에 유명해진 이 하수도는 지금 일반에게 공개되어 매주 월,수요일과 매월 마지막 토요일이면 알마 교(橋)의 좌안(左岸) 쪽 모퉁이에 관광객들이 줄을 섭니다. 입구의 계단을 내려가면 첫 방의 슬라이드 영사실에서는 “파리의 땅 밑에는 또 하나의 파리가 있다”는 <레 미제라블>의 구절부터 인용하여 안내를 시작합니다.


1855년 장 발장이 등장할 무렵에 163km이던 하수도의 전장(全長)은 현재 2,100km로 10배 이상 늘었습니다.

 

<레 미제라블>의 현장감(現場感)은 인간애의 모뉴먼트인 장 발장을 소설에서 끄집어 내어 우리 곁에 영원히 살게 합니다.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 중동부의 브장송에서 테어나 파리에서 죽었습니다. 지금은 빅토르 위고 대로(大路)로 이름이 바뀐 길의 집에서  위고가 숨을 거둘 때의 방 모습은 모즈 광장의 위고 기념관에 그대로 재생되어 있습니다.

 

프랑스 국민은 이 국민적 대시인을 국장(國葬)으로 모셨고 그 영구의 행렬이 개선문 밑을 지나 위인들의 묘소인 팡테옹으로 행하던 광경은 또한 기념관에 사진으로 생생합니다.

 

* 팡테옹의 위고 대리석관(왼쪽)

 



 

[ 빅토르 위고와 <레 미제라블> ]




 

낭만파 문학의 총수(總帥)이자 19세기 프랑스의 최고 시인인 빅토르 위고(1802~1885)의 소설 <레 미제라블>은 그 주인공의 이름인 <장 발장>으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장 발장은 위고의 인도주의 정신의 화신(化身)입니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의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장 발장은 사회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미리엘 신부의 자비가 그를 개심시켜 그는 덕행을 쌓고 몽트뢰이유의 시장까지 됩니다.

 

자기 때문에 무고한 죄를 뒤집어 쓴 사나이를 살리려고 스스로 다시 붙잡혔다가 탈주한 뒤 팡틴이라는 불쌍한 매춘부를 동정하여 팡틴의 어린 딸 코제트를 데리고 파리에 숨습니다. 형사 자베르는 장 발장을 계속 쫓습니다.

 

코제트는 자라서 마리우스라는 청년과 사랑을 하게 되고...마리우스는 시민 반란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고 장 발장의 등에 업혀 파리의 하수도를 통해 도망쳐 나옵니다. 장 발장은 코제트를 마리우스와 결혼시키고 눈을 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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