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게티스버그> ]
이 작품은 미국 남북전쟁의 분수령이자 가장 유명한 게티스버그 전투 사흘간을 그린 영화입니다. 원작은 풀리쳐 상에 빛나는 마이클 사라의 입니다. 지금은 게티즈버그 국립 군사 공원으로 바뀌었지만, 당시 그곳에서 벌어졌던 피 튀기는 전투 장면 촬영에는 5천 명의 엑스트라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제작자 켄 번즈가 북군의 핸콕 장군의 부관으로, CNN사장 테드 터너가 보병 렙으로 찬조 출연한 것도 이색적입니다.
뛰어난 배우들이 온통 턱수염을 기른 채 펼치는 연기도 훌륭했습니다. 내용도 곁가지 없이 전투와 전략 그 자체를 온전히 담는 데 노력했다는 점도 돋보였습니다. 어쨌든 본고장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을 남부인의 시각에서 다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대한 테드 터너의 대답으로 불리며 화제를 모았던 영화였습니다.(사진:게티스버그 전투 삽화)
러닝타임이 무려 271분(4시간30분)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니시리즈로 계획하였으나 극장용으로 다시 편집하여 1993년도에 개봉하였습니다.(사진:영화에서 피켓 돌격장면) 그래도 너무나 긴 상영시간 때문에 미국에서 흥행은 크게 성공을 못했습니다. 후에 TV에서 다시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개봉할 예정이었지만 역시 긴 상영시간 때문에 영화사들마다 수입을 포기하였습니다. 결국 DVD로 출시되고 몇 년 후 HBO에서 특선 시리즈로 방영되었습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다 실존인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북군과 남군의 전쟁 상황을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한 시각으로 미국 역사의 최대 사건을 스펙터클하게 묘사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사진:둘째날, 리틀라운드 탑 전투 장면)
하지만 한국 시청자들에겐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대표작 하면 TV 시리즈물 <남과 북>을 많이 기억하는지 <게티스버그>는 의외로 잘 안 알려져 있습니다. <남과 북>의 메인타이틀 음악 못지않게 지금 흐르는 <게티스버그>의 메인테마 역시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 남북전쟁의 분수령, 게티스버그 전투 ]
미국의 남북전쟁(1861년~1865년)이 오늘날의 미국을 이룩하는데 중요한 전쟁이었다면 게티스버그 전투는 그 남북전쟁의 분수령을 이룬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그러니까 게티스버그 전투야말로 현재의 미국을 얘기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그 게티스버그 전투에 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게티스버그 전투는 남북전쟁이 거의 절반이 지나간 시점인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3일 동안 워싱턴 북쪽(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펜실바니아주의 게티스버그라는 자그마한 도시 근처에서 벌어졌습니다.
당시 남군과 북군의 대치상황을 개략적으로 살펴봅니다. 남서부전선에서는 미시시피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빅스버그라는 강변 도시 안에 남군이 그랜트가 지휘하는 부군에 포위되어 항복 일보 직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군의 수도 와싱턴과 남군의 수도 리치먼드가 있는 동부전선에서는 포토맥군(북군)과 북버지니아군(남군)이 서로 치고 받으면서 혈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 때 남군을 지휘하고 있는 로버트 리 총사령관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획기적인 전략을 수립하게 됩니다.
즉 그때까지 일방적으로 밀고 내려오는 북군을 버지니아에서 맞아 싸우기만 했지만 이번에는 병력을 이끌고 북부로 깊숙히 쳐들어가서 북군과 일대 자웅을 결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사진:게티스버그 위치도)
이와 같은 배경에는 고전하고 있는 서부의 빅스버그에 대한 북군의 압박을 풀어보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북부 깊숙한 곳에서 북군을 쳐부숨으로써 그때까지 북쪽 정부와 남쪽 정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저울질을 하던 유럽 열강들(영국,프랑스 등)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북군과의 화평 교섭을 이끌어내어 애초의 의도대로 연방으로부터 남부 연맹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인 북버지니아 군대는 총 7만 5천명이었고, 미드 장군(전임 후커의 후임으로 새로이 임명됨)이 이끄는 북군이 포토맥 군은 총 8만 8천명이었습니다. 이들 양쪽 군대는 우여 곡절 끝에 워싱턴 북방의 조그만 도시 게티스버그에서 역사적인 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리 장군의 남군은 첫 날(7월 1일)에는 북군의 우익을 때려 보았고, 둘째 날(7월 2일)에는 북군의 좌익을 때려 보았지만 결정적인 승기를 잡을 수 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마지막 3일째 되는 날(7월 3일)에는 최후의 시도로 중앙 공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이도 역시 대실패로 귀결되고 맙니다. 바로 이 세 번째 날에 벌어진 남군의 공격을 '피케트(중앙 공격을 맡은 남군의 장군) 돌격'이라고 하여 오늘날에도 남북전쟁의 사가(史家)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회자되고 있습니다.
아래는 3일 동안 벌어진 상세한 전투개황입니다.
7월1일
리의 선봉 부대와 최초로 만난 북군 부대는 새로이 포토맥군의 수장이 된 미드가 내보낸 기병정찰대였습니다. 6월 28일에 후커가 사임한 후 사령관이 된 미드는 남군의 북상 소식에 접하자 즉시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뷰포드 휘하의 정찰대를 내보냈는데, 뷰포드의 정찰대가 7월 1일에 게티즈버그 인근에서 남군 부대 일부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뷰포드는 처음에 힐의 남군 부대와 2시간 동안 물러나지 않고 총격전을 벌였지만, 이웰이 이끄는 남군 후속 부대가 도착하면서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났습니다.
뷰포드는 물러나면서 게티즈버그의 바로 남쪽에 있는 말발굽 모양의 고지인 세메터리 릿지(Cemetery Ridge)에 부대를 배치시켰습니다.(사진:첫째날 전투양상도)
리는 이웰에게 세메터리 릿지를 점령할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미드가 남군의 위치를 파악한 이상 부대를 이끌고 진격해오고 있을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드의 본군과 전투가 벌어지기 전 인근의 고지를 장악하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리가 이웰에게 내린 명령문에는 ‘가능하면’ 고지를 점령하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애매한 문구였습니다. 반드시 점령하라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웰은 세메터리 릿지에 포진한 북군의 수비가 너무 단단하다고 여기고 즉각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남쪽에서 북군의 증원군이 도착하였고 세메터리 릿지의 북군 방어진은 오히려 강화되었습니다. 만약 이때 기회를 포착하는 데 천부적인 감각이 있는 잭슨(리 장군의 핵심 부하)이 살아 있었더라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잭슨은 바로 이전 전투인 첸슬러즈빌에서 전사한 뒤였습니다.
북군 병력이 세메터리 릿지로 속속 도착함에 따라 북군은 세메터리 릿지를 따라 길게 수비진을 구축하였습니다. 아울러 세메터리 릿지의 왼쪽인 컬프스 힐에도 방어선을 만들고 남군의 공격을 대비하였습니다. 게티즈버그 북쪽에 있던 리는 북군이 강력한 방어선을 만든 것을 보고 어찌해야 할지 고심하였습니다. 일단 리는 양면 공격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동시 공격이 아니고 적절히 시차를 두어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 롱스트리트가 이끄는 군단으로 세메터리 릿지의 북군 좌익을 먼저 치면 위기에 몰린 좌측을 구하기 위하여 미드가 컬프스힐에 있는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좌측을 보강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본군으로 컬프스 힐을 공략하여 돌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롱스트리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고지에 자리를 잡은 적을 치는 대신 남군 전부를 남쪽으로 돌릴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남군 병력 전체가 북군 수도 워싱턴으로 향하게 되면 결국 미드는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가는 남군을 막기 위하여 고지에서 내려올 것이라는 예상이었습니다. 어찌보면 합리적인 건의였지만 리는 롱스트리트의 건의를 묵살하였습니다.
일설에는 전투 전의 경미한 심근경색 증세로 인해 리의 정신이 다소 혼미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리가 자신감을 넘어 자만에 빠졌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일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이전 프레데릭스버그와 챈슬러즈빌 전투에서 북군을 연파한데다가, 병사들은 여러 전투를 통하여 경험을 쌓았으며, 많은 보급 물자를 노획하였기 때문에 군의 사기가 충천한 상태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7월2일
리는 이와같이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데다 경험 많은 자신의 병사들이, 사기도 떨어지고 겨우겨우 훈련을 마친 북군 풋내기들과 싸워서 질 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롱스트리트는 리의 거부를 의아하게 생각하였지만 어찌되었건 명령은 명령이었습니다. 롱스트리트는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북군 좌측에 대한 공격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클즈의 북군 병력이 세메터리 릿지의 남쪽 끝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와 남군의 진격로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사진:둘째날 전투양상도)
시클즈는 좌측 끝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지만, 단순히 지키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원래의 방어선 보다 앞으로 나온 것입니다. 롱스트리트는 시클즈의 북군 병력 뒤에 있는 리틀 라운드 톱(Little Round Top)이라는 언덕을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시클즈가 방어선 끝에 있어야 했지만 시클즈가 명령을 어기고 부대를 함부로 이동시키는 바람에 남군에게 노출된 것입니다. 롱스트리트 생각으로는 만약 이를 점령할 수 있다면 북군의 진지를 완전히 우회함은 물론 야포를 올려 보내 노출된 북군 진지를 뒤에서 포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롱스트리트의 공격은 먼저 시클즈의 부대에 집중되었고 시클즈의 부대는 퇴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미드는 시클즈의 부대가 위치를 이탈해 있음을 알아채고 재빨리 방어선을 보강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시클즈의 부대가 한창 남군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리틀 라운드 톱에는 미시간 제16연대, 펜실베이니아 제83연대, 뉴욕 제44연대, 그리고 체임벌린의 메인 제20연대가 허겁지겁 올라가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로써 기회가 되면 리틀 라운드 톱을 차지하려고 했던 롱스트리트의 계획은 무산됩니다.
북군의 이런 배치 현황을 살핀 롱스트리트는 일단 휘하의 후드 소장이 이끄는 남군 부대로 하여금 리틀 라운드 톱에 대한 전면 공격을 지시합니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친 돌격이 모두 격퇴되었으나 리틀 라운드 톱을 지키는 병력이 부족하였던 탓에 북군은 저녁 무렵에 위기를 맞게됩니다.
참호선 왼쪽 끝을 지키고 있던 체임벌린이 이끄는 메인 20연대는 남군의 돌격을 막아내느라 싸울 만한 병력이 부족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탄약도 모두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이에 체임벌린은 남군이 돌격해오기 전에 연대 병력을 일렬로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착검!’을 명한 다음, 진격해 올라오는 남군에게 그대로 돌격을 명하였습니다.
이에 돌격해오고 올라오고 있던 남군 병력은 혼비백산하여 다수가 포로가 되거나 꽁지빠지게 아래로 달아났습니다. 물론 북군이 탄약이 떨어져 착검해서 달려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이런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여튼 많은 병력이 포로가 되고 남군의 돌격은 멈추었습니다. 리틀 라운드 톱의 전투는 다음날 5군단 소속 제3사단이 구원에 나서면서 북군의 승리로 마감되고 롱스트리트의 우회기동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와 더불어 컬프스 힐에 대한 남군 본대의 공격도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북군의 우측과 좌측 공격에 모두 실패한 리는 다음날 중앙 정면 공격을 결심합니다. 롱스트리트는 북군이 비록 좌측을 강화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약하니 북군의 좌측을 돌아 워싱턴 방면으로 진출, 지리적 잇점을 취해 결전을 벌이자고 재차 건의합니다. 그러나 리는 또 다시 롱스트리트의 건의를 묵살하고 다음날 북군 중앙에 대한 돌격을 지시합니다.
7월 3일
그의 생각으로는 이틀간 계속된 전투로 북군 본대 역시 약화되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마침 증원군 1만이 도착하면서 리는 증원 병력으로 북군의 중앙을 공격하여 돌파한 뒤, 돌파구로 예비 병력을 투입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7월 3일 오후 1시경 남군 포병대의 포격으로 전투가 개시됩니다. 이 포격은 2시간 동안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중앙에 포진하고 있는 북군 포병들은 잠시 반격을 하다말다 하고 포격을 그쳤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멀거니 남군의 포격을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리는 남군의 포격이 북군 포병대를 궤멸시켰다고 생각하고 피켓 소장의 병력 1만에다 힐 소장의 사단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15,000의 돌격대를 준비 시켰습니다.(사진:세째날 전투양상도)
오후 3시경, <피켓의 돌격(Pickett’s Charge)>이라고 알려진 그 유명한 돌격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돌격이 시작되는 지점으로부터 북군의 진지까지는 약 1km 정도의 거리였고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개활지였습니다. 돌격은 처음에 비교적 조용히 진행됐습니다. 처음 20분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남군이 개활지의 중간쯤에 도착하자 북군 포병대의 대포 80문이 일제히 포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 남군의 포격이 개시되자 곧 돌격이 이어질 것임을 눈치 챈 포병대장이 발포를 멈추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일제히 포문을 연 것입니다. 빗발치는 포격 속에 팔다리가 떨어나가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가는 아비규환 속에서도 피켓의 군단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북군 진지로부터 약 200야드 지점에 이르자 언덕 위의 북군 보병들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돌격대의 병력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고 일부는 북군이 있던 방어선에 난입하여 쌍방간에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졌습니다. 만약 남군이 제2파를 보냈다면 돌파가 가능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남군에게는 병력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미드는 전날 저녁에 1만의 증원군까지 지원받은 후였습니다. 남아 있는 돌격대로는 북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남군은 올라온 길로 다시 후퇴를 시작하였고, 피켓의 돌격은 결국 7,5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7월 4일
남군은 다음날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버지니아로의 긴 퇴각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전의 역대 북군 사령관들과 마찬가지로 우유부단한 미드는 리의 남군을 적극적으로 추격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공교롭게도 쏟아지는 비로 포토맥 강이 갑자기 불어나 남군은 강가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는데, 만약 미드가 전군을 몰아 추격하였더라면 포토맥 강변에 고립된 리의 군을 궤멸시켰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드 역시 소극적인 대처로 그럴 기회를 놓쳤습니다. 링컨은 미드 후임으로 그란트를 임명하였고 이후부터는 그 지긋지긋하던 북군의 우유부단은 사라집니다.
이제 남군은 게티즈버그에서 분명히 패하였고 이제는 더 이상 북진을 할 여력이 없어졌습니니다. 게티즈버그는 남북 전쟁 중에서 남군의 전력이 가장 최고점에 이르렀던 때였습니다.이 전투 이후 남군의 동력이 사라지고 남북전쟁은 이후 2년간 지속됩니다. 그러나 이 전투를 분수령으로 남군과 남부의 몰락이 시작됩니다.
승리의 쾌보가 워싱턴에 전달된 것은 다음날이었습니다. 승전보는 북쪽 지방 전체를 전율케 하였습니다. 특히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전달된 승전 소식은 워싱턴을 더욱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습니다. 3일 후 접수된 또 하나의 승전보. 남서부 전선의 빅스버그에서 북군의 그랜트가 거둔 남군의 항복 소식은 이들의 열광을 광희로 만들었습니다.
기쁨에 넘친 링컨은 백악관 발코니에 나와 환호하는 군중들을 향해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인간은 누누가 평등하다는 우리의 주의주장을 꺾으려던 반란군 집단이 마침내 우리의 영웅적인 아들들에게 굴복하였습니다."
<전투 뒷이야기>
* 피켓 돌격
미국사의 클라이막스가 남북전쟁이라면, 그 남북전쟁의 클라이막스는 게티스버그 전투라고 할 수 있지요, 또한 게티스버그 전투의 클라이막스야 말로 '피케트 돌격'이라고 남북전쟁의 작가인 스튜어트가 말했습니다. 7월 3일 그날, 역사상 유례없는 일대 돌격이 펜실바니아주 평화로운 들판에서 이루어지면서 엄청난 도살이 펼쳐졌습니다.
들판 서쪽 숲속으로부터 남군 주력부대 1만 5천명이 총검을 내밀면서 대오를 갖추고 푸른 사단기와 남부 연맹기를 중심으로 수많은 군기를 휘말리면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내 생애를 통해 내가 본 가장 아름답고 가장 장엄한 광경이었다" 이는 전투가 끝난 후 어느 북군 장교가 남긴 말이었습니다.
이 벌판에서 일대 살육전이 벌어졌습니다.(사진:피켓 돌격직전 남군의 모습)
최초 남군 포격에 의해 제압되었다고 여겨졌던 북군의 포대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고, 이 북군의 포 사격에 의해 벌판을 가로 질러오는 남군을 갈기갈기 찢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맹렬한 북군의 포 사격에도 불구하고 남군은 꾸역꾸역 벌판을 가로질러 전진을 계속했습니다.
포격을 가까스로 피해 북군 진영으로 가까이 접근한 기다리고 있던 북군들의 총알 밥이 되거나 총검으로 살육되기 시작하였던 겁니다. 남군의 처절한 패배, 30분간 잠깐 사이에 일어난 완패였습니다. 1만 5천명의 남군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패하고 돌아오는 일부 부하들에게 리 장군은 "걱정 말게, 모두가 내 잘못이네, 패전한 것은 나야, 남은 일을 해나갈 수 있게 나를 좀 도와주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리 장군다운 말이었겠지요.
* 남군의 패배 원인
그러면 게티스버그 전투의 남군의 패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리 장군이 너무 자신만만해서 세 번째 날, 무모한 중앙돌파를 시도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입니다. 사실 그동안 리 장군이 이끄는 북버지니아군은 북군과 싸워서 거의 진적이 없었습니다.
상승군에 대한 굳은 믿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또 다른 가설은 리 장군이 가장 믿고 있는 롱스트리트 장군의 소극적 자세에서 비롯되었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실제 롱스트리트는 이번 전투를 탐탁치 않게 여겨 직속 상관인 리 장군에게 게티스버그에서의 전투를 피하고 워싱턴 방향으로 군대를 돌려 좋은 지형을 확보하여 북군과 일전을 벌이자고 몇 번이나 건의를 했으나 리 장군은 거부했습니다.(사진:전투가 끝난후의 모습
* 전투가 끝난 후
한편으로는 3일째 피케트 돌격 직전에 남군 포대가 최후의 한발까지 퍼부은 포격이 정밀하지 못해 북군 포대를 잠재우지 못한 점도 패인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남군의 포탄들은 대부분 북군의 진지
뒤편으로 떨어졌습니다.(사진: 전투가 끝나고 패주해서 돌아오는 부하들을 맞이하는 리 장군)
그리고 또 한가지, 리가 간과한 것은 북군의 전력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이었습니다. 허구 헌날 어웨이 게임(버지니아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함)에서 깨지던 북군도 이제 홈 게임에서만은 질 수 없다는 단단한 각오로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게티스버그 전투장에서의 북군의 전투 의지는 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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