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작은 거인(Little Big Man) ]
영화 <작은 거인>은 1964년도에 출간된 토마스 버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1970년 아서 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그때까지 서부극의 신화를 고발하고 공격한(사진, 더스틴 호프만과 그를 키워준 인디언 추장)
수정주의 서부극으로 그리고 서부극에 새바람을 불어넣은 아메리카 뉴시네마의 선구적인 필름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1990년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 춤을>이 개봉됐을 때, 가장 많이 비교되기도 했던 작품입니다.
영화가 개봉될 당시 까지도 미국인들의 시각에서는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숭고한 운명에 저항한 야만인이자 약탈자에 다름 아니었기에 이 영화는 미국인들에게 통렬한 시사점을 던지는 작품이었을 것입니다. <보니와 클라이드>로 유명한 아서 펜은 사실 감독생활 초기부터 미국적인 가치와 신화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해 오고 있는 감독으로 유명했죠. 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백인들과 인디언들 사이에서 자란 주인공 잭 그랩(더스틴 호프만 분)을 통해 이른바 ‘명백한 운명’으로 일컬어지는 미국 서부개척사의 신화가 다름 아닌 인디언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과 끝없는 탐욕에 불과하고 있음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청년이 된 잭 그랩이 중간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리틀 빅 혼 전투’와 인디언 보호구역의 약속을 스스로 깨고 미 기병대가 무차별적으로 원주민들을 도륙한 '워치타 강 사건'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현장감 있게 묘사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커스터 장군은 허영심에 들뜬 전쟁광으로,(사진, 기병대의 인디언 학살)
총잡이 와일드 빌 히콕은 노이로제로 불안에 떠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샤이엔 족은 예절이 바르고 삶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어 아서 감독의 역사를 보는 시각을 일면 짐작케 하고 있습니다. 커스터 장군이 제7기병대를 이끌고 샤이엔족을 도륙하는 사건(일명 1968년의 와시타 대학살)에 대한 묘사는 당시 한창이던 월남 전쟁 중 일어났던 미라이 학살 사건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아서 펜 감독의 새로운 시각과 뛰어난 솜씨로 다듬은 이 파란곡절 가득한 이색 서부극은 무엇보다 명배우 더스틴 호프만의 폭넓은 연기와 뛰어난 분장술로 더욱 빛이 났습니다. 14세에서 121세에 이르는(사진, 인디언 전사 잭)
한 인간의 역사를 완벽히 보여주는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는 그야말로 일품이었죠. 더스틴 호프만이 역을 맡은 주인공 잭 그랩의 별명은 ‘리틀 빅 맨’인데 이는 몸은 작지만 용기가 대단하다 해서 인디언 추장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영화는 능글맞을 정도로 여유롭고 영화 전편에 걸쳐 곳곳에 유머도 깔려있습니다.
이래서 이 영화를 코믹서부극으로 분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코미디를(사진, 기병대의 전진을 바라보는 잭)
의도했다기보다는 여러 아이러니를 영화에 버무려 놓은 아서 펜의 의도적인 연출과 주인공 역할을 탁월하게 소화한 더스틴 호프먼의 연기 덕분일 것입니다. 아서 감독의 전작 <보니와 클라이드>에서 나오는 명배우 페이 다너웨이는 이 영화에서 잭 그랩을 유혹하는 여인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녀는 한때 목사의 아내였다가 정욕의 다른 이름인 창부로 전락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이는 감독이 던지는 짓궂은 농담 같이 보입니다. 한창시절의 페이 더나웨이의 매력적이고 요염한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미국 역사에서 유명한 역사 중의 하나, 커스터가 이끄는 제7 기병대가 인디언들에(사진, 잭을 유혹하는 목사 부인)
의해 몰살당하는 ‘리틀 빅 혼 전투’를 현장에서 목격한 한 백인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잭 크랩이었습니다. 그는 자그만치 121세까지 살았습니다. 영화는 양로원에서 역사학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잭의 서부개척비사로 시작되어 같은 장면으로 돌아와서 끝이 납니다.
[ 리틀빅혼 전투 ]
대서부 평원의 인디언들의 삶은 대륙횡단철도의 개통과 더불어 서부의 개척이 급격히 진행되면서 나날이 피폐해져 갔습니다. 애초부터 백인들의 서부개척이 시작할 때부터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인디언들과의 충돌은 필연적이었습니다. 남북전쟁이 시작될 무렵 1861년에 미국에는 약 30만 명의 인디언들이 남았고 그중 20만 명 정도가 서부의 대평원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인디언들에 대하여 연방정부는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전 일정한 거주지를 정하여 강제적으로 백인들과 격리시켰습니다.
그 이후에도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 땅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욱박지르면서 조약을 맺고 그 땅을 점거했습니다. 이밖에 일부 백인들이 인디언 거주지역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사례는 일상사였고 인디언 거주지의 감독관들은 악덕 업체들과 결탁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인디언들의 권리를 짓밟는 등의 못된 짓을 일삼았습니다.
1862년에는 미네소타의 수우족이 백인들의 압박과 협잡에 참지 못하고 들고 일어나 수백 명의 백인을 살해했습니다. 이에 반란을 진압하던 연방군대는 38명의 수우족을 공개 처형한 후(사진, 리틀빅혼전투 상상도)
수우족 전체를 다코다 지방으로 추방하였습니다. 1864년에는 콜로라도에서 백인 광부들의 불법 진출에 항의하여 아라파호족과 샤이안족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의 진압 책임자 시빙턴 대령은 인디언들과 협정을 맺어 이들을 안심시킨 후 기습공격을 가해 500명의 인디언을 학살했습니다. 이 때문에 각지에서 인디언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반란은 그치질 않았습니다. 더구나 버펄로 사냥꾼들이 떼거지로 몰려들면서 인디언들의 생할의 기반인 들소까지 멸종 위기에 처하면서 백인들과 인디언들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연방군의 시빙턴 대령의 속임수로 인해 억울하게 500여 명의 동족을 잃은 아라파호족과 샤이안족은 이를 갈면서 수우족과 함께 틈틈이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1870년대 중반, 사우스다코타의 블랙힐에서 금이 발견되자 노다지꾼과 총잡이들이 밀물처럼 이 땅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원주민들에게 이 땅을 보장했던 1868년의 협약은 휴지 조각이 되고, 정부는 모든 수우족에게 1876년 1월 31일까지 따로 설정된 원주민 보호구역 내로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명령 불응은 정부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된다는 엄포가 뒤따랐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엄동설한에 노인과 아녀자, 그리고 아이들을 이끌고 장장 400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수우족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압박해오는 연방군과 대항하기 위해 수우족의 추장 시팅불(Sitting Bull, 앉은 황소)을 지도자로 하여 항전의 의지를 굳혔습니다. 여기에 그동안 아를 갈면서 훈련해 오던 아라파호족과 샤이안족이 가담했습니다, 수우족은 주로 말을 탔고 아라파호족과 샤이안족은 육탄전에 대비했습니다. 긴장이 고조되자(사진, 커스터 중령)
정부군은 원주민들에게 1876년 1월 31일까지 지정된 보호구역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하고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수우족의 일파인 훙크파파족의 추장이었던 시팅불은 인디언들에게 이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강인한 체력과 지도력을 겸비했으며 용맹, 인내심, 관용, 지혜 등 네 가지 덕목을 고루 갖춘 이상적인 추장이었습니다. 본명은 ‘타탕카 이요탕카’로 이는 인디언 말로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아 있는 끈기 있는 황소를 의미했습니다. 시팅불은 ‘타탕카 이요탕카’를 백인들이 자기네 식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그리고 시팅불 곁에는 탁월한 용사 미친 말(Crazy Horse)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연방군은 시팅불이 이끄는 수우족을 이번 기회에 단단히 토벌할 목적으로 리틀빅혼 강과 로즈버트 강이 만나는 지점에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사령관 테리 장군은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을 대장으로 하는 제7기병연대에 수우족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웨스트포인트 출신인 커스터는 남북전쟁 때 20대의 나이로 혁혁한 전공을 세워 소장계급까지 올랐던 인물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원래 계급인 중령으로 돌아왔는데 이와 같이 전쟁 전 계급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시에는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커스터가 이끄는 제7기병연대는 로즈버드 강을 따라 올라가 6월 24일 리틀 빅혼 강 동쪽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커스터가 가장 신임하는 척후를 담당하던 아리카라족의 블러디 나이프 추장은 “수우족이 너무 많으니까 조심하라.”라고 몇 번이나 커스터에게 충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커스터는 인디언들의 전력을 개무시했다. 아리카라족은
수우족과는 앙숙관계에 있었습니다.(사진, 전투장면 상상도)
1876년 6월 25일,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무더운 날이었습니다. 리틀 빅혼 강을 끼고 자리한 인디언 야영지는 평화롭기 그지없었습니다. 커스터가 이끄는 제7기병연대는 이 야영지 근처에 도착했습니다.(사진, 시팅불)
한편 시팅불의 지휘 아래 인디언 전사들은 이미 정탐꾼의 보고로 커스터 부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그들의 야영지 곳곳에는 전투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커스터는 그간의 전투를 통해 너무 자신만만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소 성급히 달려들었습니다.
원래대로 하면 당연히 테리 장군이 이끄는 본대가 수우족을 포위하고 난 뒤에 공격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커스터는 본대의 포위가 끝나기도 전에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시팅불이 이끄는 인디언의 병력이 무려 약 3천 500여 명에 달한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죠. 또한 개틀링 기관총과 야포 같은 최신 병기들도 ‘기병의 기동력을 죽이는 무기’라며 안 가지고 가는 실책까지 저질렀습니다.
돌격 명령에 이어 250명의 커스터 기병연대가 막상 수우족 진영에 뛰어 들었을 때는 그들의 전력은 수우족에 비해 10대 1에도 못 미쳤습니다. “아뿔싸, 큰 실수를 했구나!”하고 생각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당초 계획과는 정반대로 커스터 기병연대가 오히려 수우족에게 완전 포위된 상태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커스터 연대를 에워싸고 인디언들은 빗발같이 총탄과 화살을 날렸고 도끼날이 번뜩였습니다. 혼비박산에 넋을 잃은 커스터의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수적으로 워낙 열세여서 전투가 시작된 지 한 시간여 만에 커스터 연대는 완전히 몰살당했습니다. 다음날 테리 사령관의 본대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커스터 중령의 시체와 드문드문 머리가죽이 벗겨진 249구의 보기 흉한 시체들만이 뒹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인디언들에게는 역사에 없었던 대승리였습니다. 인디언의 경우는 27명 정도가 전사했습니다. 이 소식이 대륙 전역으로 퍼지자 명장 커스터의 패배와 죽음은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역으로 적장 시팅불은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시팅불은 백인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었습니다.(사진, 리틀빅혼 전투장)
약이 바짝 오른 연방군은 전체 전력의 절반을 동원하여 수우족의 일망타진을 외치면서 인디언들을 몰아붙였습니다. 인디언 전사들도 이에 맞서 초인적 사투를 벌였지만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연방군에 대해 버텨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한편으로 연방군은 인디언들의 주식인 버펄로를 닥치는 대로 죽여 그들을 아사시키는 작전을 폈습니다. 결국 굶주림에 지친 동료 부족들이 하나둘 정부군에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강철 같은 정신의 소유자 크레이지 호스는 나머지 900여 명의 인디언들을 이끌고 악착같이 항쟁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탄약이 떨어졌고 굶주림으로 더 이상의 항쟁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자 연방군은 항복하면 땅도 주고 살게 해주겠다고 회유를 해왔습니다. 크레이지 호스는 할 수 없이 항복을 했으나 이 역시 백인들의 사탕발림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크레이지 호스는 반항을 했으나 결국 유치장으로 질질 끌려가다가 첩보원 노릇을 하던 한 인디언의 손에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사진, 사우스다코타주에 있는 크레이지 호스 조각상,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드는 이 작업은 지금도 계속 중에 있습니다)
전설적인 용사는 이렇게 허망하게 스러져 갔습니다.
[ 시팅불의 죽음 ]
한편 시팅불은 400여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캐나다 국경을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미국을 의식하지 않은 수 없는 캐나다 정부 역시 그를 반길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도주와 기아에 지쳐 도피 4년 만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1881년 7월 20일, 몬태나의 부포드 요새에서 시팅불은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시팅불은(사진, 시팅불의 오른팔이었던 크레이지 호스)
어린 아들 까마귀발에게 장총을 주어 미군에게 전달했습니다. 이후 시팅불은 백인 사회에 동화하여 한동안이나마 그럭저럭 평안하게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시팅불은 그의 명성과 인디언에 대한 호기심을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려는 버팔로 빌의 초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시팅불은 빌의 서부유랑극단의 일원으로 4개월 동안 순회공연에 나서면서 전국적인 명사가 되는 웃기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버펄로 빌(Buffalo Bill, 본명 윌리엄 프레드릭 코디)은 아메리카들소 사냥꾼 겸 쇼맨이었습니다. 버펄로 빌은 서부 개척 시대를 소재로 한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라는 쇼로 순회공연을 벌이면서 시팅불도 꼬셔 와서 무대에 등장시켰습니다. 이후 시팅불은 1889년 수우족의 반란을 교사한다는 혐의로 다시 체포령이 떨어졌습니다. 결국 1890년 12월 15일 시팅불은 그랜드 강변에서 추격대의 총탄에 맞아 영웅적이고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습니다.
[ 운디드니 학살 ]
시팅불의 피살 소식은 나머지 수우족 인디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들은 차츰차츰 조여 오는 기병대의 압박을 느끼고 추장 큰 발(Big Food)의 인도로 사우스다코타 주의 운디드니로 피신했습니다. 남자가 106명이었고 244명은 아녀자와 아이들이었습니다.(사진, 운디드니 학살 현장)
1890년 12월 28일, 이들을 쫓아온 500여 명의 제7기병대는 인디언들의 천막을 발견하고 언덕에 기관총 4정을 배치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정부군은 이들에게 무기를 모두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때 한명의 수우족 용사가 칼을 놓지 않는다면서 양측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인디언과 기병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그 결과 추장 큰 발을 포함하여 아녀자들과 아이들, 인디언 146명이 그 자리에서 사살됐고 정부군도 2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운디드니 학살(Wounded Knee Massacre)’의 실상이었습니다. 미국인들은 이것으로 인디언과의 전쟁은 완전히 끝난 것으로 간단히 치부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많은 백인들은 “죽은 인디언만이 좋은 인디언이다.“라고 여기면서 ‘야만적이고 길들여지지 않는’ 인디언들의 완전 절멸까지를 고집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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