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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열 컬럼, 수필

<한시산책> 벗과의 이별 앞에 늘 아파했던 이백(李白)

작성자박영우|작성시간15.12.08|조회수1,699 목록 댓글 0

벗을 보내며(送友人) / 이백(李白)

靑山橫北郭(청산횡북곽) 靑山은 성곽 북편으로 빗겨 있고

白水繞東城(백수요동성) 맑은 물은 성 동쪽을 에워쌌구나.

此地一爲別(차지일위별) 이곳에서 한번 이별하게 되면

孤蓬萬里征(고봉만리정) 외로운 쑥부쟁이 만리를 떠돌리

 

浮雲遊子意(부운유자의) 뜬 구름은 나그네(이백) 마음이요

落日故人情(낙일고인정) 석양에 지는 해는 벗의 정이라

揮手自玆去(휘수자자거) 이리 손을 흔들며 떠나시는가

蕭蕭班馬鳴(소소반마명) 홀로 남겨진 말(馬) 쓸쓸하게 우는데

   *班馬 : 무리를 떠난 말

 

 

나이를 잊은 사귐(忘年交)

 

시인들이라고 다 사교적이지야 않겠지만, 이백(李白, 701~762)만큼 많은 시벗을 나이 불문하고 사귄 이도 드믈 것입니다. 그를 당현종에게 천거해 정치에 입문시킨 하지장(賀知章, 659~744)은 그보다 마흔살도 더 위지만 시(詩) 친구이자 술(酒) 벗이기도 했으니, 말 그대로 '忘年交(나이를 잊은 사귐)'이지요. 하지장은 이백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를 '하늘에서 귀양나온 신선(謫仙)'이란 별명도 지어 주고요. 또한 성당(盛唐)의 자연파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과도 열살 이상 차이가 나지만 '죽고 못사는' 사이였다는 게 그다지 이상하지도 않습니다. 이백과 더불어 唐나라, 아니 중국의 양대 시인이라 불리는 두보(杜甫, 712~770)는 그보다 열살이나 아래지만, 서로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하는 情人과도 같은 사이였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요.

 

황학루에서 광릉으로 가는 맹호연을 보내며(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

人西辭黃鶴樓(고인서사황학루) 벗(맹호연) 황학루를 서쪽에서 작별하고

烟花三月下揚州(연화삼월하양주) 아지랭이 꽃피는 춘삼월 양주로 떠나신다네

孤帆遠影碧空盡(고범원영벽공진) 외로운 돛단배 먼 그림자 창공으로 스러지고

惟見長江天際流(유견장강천제류) 보이는 건 오로지 하늘 끝에 흐르長江뿐

 

황학루에 대한 시는 짓지 않겠다는 말을 스스로 깬 것은, 맹호연과의 애닲은 이별 앞에 어쩔 수 없었겠지요.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황학은 한번 가고 돌아오지 않는데, 흰구름만 천년을 부질없이 떠도네)라 읊은 최호(崔顥)의 시(黃鶴樓)를 이백이 보고는 이보다 더 잘 지을 수는 없다는 말은 지금까지도 회자(膾刺)되고 있으니까요. 이백이 맹호연을 더없이 좋아하고 존경했다는 걸 보여주는 시(贈盟浩然)가 있습니다.

 

吾愛孟夫子 (오애맹부자) 내가 사랑하는 맹호연 선생

風流天下聞 (풍류천하문) 그의 풍류는 천하가 다 아는 일

紅顔棄軒冕 (홍안기헌면) 젊어서부터 벼슬 버리고

白首臥松雲 (백수와송운) 늙어서는 솔 숲에 누웠구나

醉月頻中聖 (취월빈중성) 달에 취해 빈번히 취객이 되고

迷花不事君 (미화불사군) 꽃에 홀려 임금도 섬기지 않았네.

高山安可仰 (고산안가앙) 산처럼 높은 인품 어찌 우러를까

徒此揖淸芬 (도차읍청분) 다만 그 맑은 향기에 읍할 뿐

   *中聖 : 당시 술꾼들 사이의 은어로 술에 취하면 중간 성인이 된다는 의미

 

선주 사조루에서 교서랑 아저씨 이운을 전별하고(宣州謝脁樓餞別校書叔雲)
棄我去者 昨日之日不可留(기아거자 작일지일불가류) 날 버리고 간 어제란 날은 잡을수 없고

亂我心者 今日之日多煩憂(난아심자 금일지일다번우) 내 마음 어지럽히는 오늘은 근심도 많아
長風萬里送秋雁(장풍만리송추안) 만리 긴 바람에 가을 기러기 보내오니
對此可以酣高樓(대차가이감고루) 이를 대함에 높은 누각에서 술취할 만합니다
(中略)

抽刀斷水水更流(추도단수수경류) 칼을 뽑아 물을 끊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
舉杯消愁愁更愁(거배소수수경수) 잔들어 시름을 씻어도 시름 더욱 시름겹네요
人生在世不稱意(인생재세불칭의) 사람이 이 세상 살면서 뜻대로 되지 않으니
明朝散髮弄扁舟(명조산발롱편주) 내일 아침 머리풀고 작은배 노 저으렵니다

   *산발(散髮) : 벼슬길에 오르려면 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관을 써야 하는데, 이를 포기하고 뭇 백성으로 돌아가겠다는 의미

 

이운(李雲) 삼촌과는 몇살이나 차이가 나는지 모르지만 친구처럼 지냈나 봅니다. 위 시 중 생략된 부분에 삼촌을 평하기를, 蓬萊文章建安骨 中間小謝又淸發(漢나라 때의 봉래 문장에 魏나라 건안풍의 시, 그리고 남북조시대의 문인 사조(謝脁)와 같은 청신발랄함이 있다)고 한 것으로 봐 문장과 시를 함께 논하던 벗 사이가 아니었을까요.

 

노군 동쪽 석문에서 두보를 보내고(魯郡東石門送杜二甫)

醉別復幾日(취별부기일) 취한 뒤 이별하고 다시 몇날인고

登臨編池臺(등임편지대) (풍광 좋은) 호수와 누대를 두루 다녔지

何言石門路(하언석문로) 여기 노군 석문(石門의) 길위에서 언제나

重有金樽開(중유금준개) 다시 금술동이를 함께 열어 보나

秋派落泗水(추파락사수) 가을 물결 사수(泗水)에 쓸쓸하고

海色明徂來(해색명조래) 바다 빛은 조래산을 비추네

飛蓬各自遠(비봉각자원) 날리는 다북쑥처럼 각자 멀어져

且盡手中杯(차중수중배) 또 손에 든 술잔을 비울 수 밖에

    *시의 제목 중 杜甫 사이에 二를 넣은 건 둘째 아들이라 이렇게 지칭하였다 함

 

범선을 송별하고(送別範宣*)

(前略)

此地傷心不能道(차지상심불능도) 이런 처지에 상심하여 말로 할 수가 없고

目下離離長(목하리리장춘초) 눈앞 長春門엔 풀만 울창하게 자라고 있구나

送爾長江萬里心(송이장강만리심) 長江 만리 너(範宣)를 보내는 마음이야

他年來訪南山(타년래방남산로) 어느 해 일없는 노인이 되어 다시 찾으리

*남산 늙은이(南山老) : 吳越春秋에· “今越王放於南山之中,遊於不可存之地(지금 월나라 왕 구천이 남산 안에서 돌아다니는데,

살아갈 수 없는 땅에서 노는 것이네)

*範宣 (晉代) : 나라의 부름에 出仕하지 않고 은둔해 살면서, 많은 책을 널리 모으고 배워 통달할 때까지 책을 읽고 또 읽고

글씨를 쓰고 또 쓰는 각고의 노력을 다하여 스스로 배워 典籍에 널리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老莊사상이 성행했으나 이에

물들지 않고 제자들을 불러 모아 유학(儒學)을 양성했다.

 

아무리 나이를 초월하여 사귐을 갖는다지만, 4백년이나 윗 세대의 문장가 범선(範宣)을 사귀고 또한 떠나보내고 있으니 과연 이백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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