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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열 컬럼, 수필

팔도강산 한시비(漢詩碑) / 경기도 용문산 용문사 입구(1)

작성자박영우|작성시간16.04.22|조회수597 목록 댓글 0

우리나라에도 한시비(漢詩碑)가 많습니다.

 

전국 방방곡곡 명승지에서 시비(詩碑)를 자주 대하게 되는데, 그 중 한시비(漢詩碑)도 적지 않다는데 새삼 놀라게 됩니다. 옛날 시인묵객들이 머물렀거나 거쳐간 곳에 세워졌던  시 비석이나 암각문뿐만 않이라, 근래 지자체에서 향토문화 발전을 위해 조성한 시비 공원도 점점 늘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런 한시 비석이나 암각문을 전문적으로 탐방하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 명승지를 찾는 유람객이나 등산인들의 카메라에 포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서는 명승지에 세워진 우리에게 익숙한 문인 시인묵객들의 한시비나 암각문을 사진과 함께 붙여 보려고 합니다(아래 사진은 필자가 찍은 게 아니나 앞으로 직접 찍어서 대체시킬 계획임).

 

                                                                                                                       현판 : 一中 김충현선생 작품


용문산(龍門山) 시비공원

 

우선 서울에서 가까운 용문산 용문사 입구에 조성된 시비공원부터 찾아가 보겠습니다. 워낙 많은 문인들의 시비가 서있어 이름이 잘 알려진 이들의 시부터 올립니다.

 

                                                                                                                   현대 서예가 中觀 황재국 글씨


용문산을 바라보며(望龍門山) / 정약용(丁若鏞, 조선 후기)

縹渺*龍門色(표묘용문색)  아득한 저 용문산 산빛이
終朝在客船(종조재객선)   아침 내내  객선에 머물고
洞深惟見樹(동심유견수)   골 깊어 오직 나무만 보이는데
雲盡復生煙(운진복생연)   구름 걷히니 다시 안개 피어오른다

   *縹渺(표묘) : 끝없이 넓고 아득하여 어렴풋함
早識桃源有(조식도원유)   무릉도원 있는 줄 진작 알았건만
難辭紫陌*緣(난사자맥연)  한양과 인연 끊기 어려워라
鹿園棲隱處(록원서은처)   절은 깊숙한 데 숨어 있는 데
悵望好林泉(창망호림천)  아름다운 숲과 물을 마음아프게 바라본다. 

   *紫陌(자맥) : 번화한 도성의 거리

 

용문사 입구에 근래 시공원이 조성되어 많은 시비들이 세워졌는데, 다산 선생의 시는 바위에 새겨져 있어 이들시비보다 먼저 만들어 진 게 아닌가 짐작됩니다. 다산의 생가가 가까운 양평에 있기에 귀양에서 해배된 후 용문산을 가끔 찾아 오셨겠지요. 이 시의 묘미는 마지막 구절로 그냥 바라보는 게 아니고 '마음 아프게(悵)' 바라 본다는 표현입니다. 아직 귀양의 트라우마가 가시지 않은 건가, 아니면 정조대왕 이후 기울어가는 나라를 걱정하고 계신건가..

용문사로 돌아가는 은스님을 전송하며(送誾上人還龍門寺) / 서거정(徐居正, 조선 전기)

 

回首龍門揷碧天(회수요문삽천공) 머리를 돌리니 용문산은 하늘에 박힌 듯 하고

招提*一路細於絃(초제일로세어현) 절로 가는 길은 거문고 줄처럼 가느다랗구

携筇又入烟蘿去(휴공우입연라거) 지팡이 끌고 무성한 숲으로 들어가니

四月山深屬杜鵑(사월산심속두견) 초여름 깊은 산에 두견새 소리만 이어지네

  *招提(초제) : 위(魏)나라 때부터 절(寺)을 이렇게도 불렀음

 

당나라의 문장가 한유(韓愈)에 비견할 인물이라는 평이 나 있는 조선 전기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서거정(徐居正)의 시입니다. 그는 고려말 정몽주 정도전과 어깨를 나란히 한 권근의 외손자답게 학문이 깊고 시에도 일가견이 있었답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던 목릉성세의 디딤돌을 이루었다.

 

용문산(龍門山) / 김시습(金時習, 조선 전기)

 

龍門山色碧稜稜(용문산색벽릉릉)   용문산 빛은 푸르고 높고 엄숙한데

寺在寒烟第幾層(사재한연제기층)   절은 차가운 안개 속에 몇층인고

老鶴獨棲松嶺月(노학독서송령월)   늙은 학은 홀로 산마루 소나무 달빛속에 깃드는데

淸泉閑澆虎溪*藤(청천한요호계등)  맑은 샘물 한가롭게 흐름에 정신없이 지나왔구나

  *虎溪(호계) : 동진(東晉) 때의 고승 혜원(慧遠, 334-416)이 풍광 좋기로 유명한 여산(廬山)에서 수도하면서 공부에

     방해된다고  호계(虎溪)를 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절친인 시인 도연명(陶淵明)과 도학자 육수정

   (陸修靜)이 찾아왔다 돌아갈 때 정신없이 담소하다 호계를 넘으니 호랑이 울움소리가 들렸다는 고사가 있음.

鐘聲老杜曾深省(종성노두증심성)   범종소리에 두보는 일찍이 깊이 성찰하였고

波影神魚*已上騰(파영신어이상등)  물결 그림자에 신어(神魚)는 벌써 하늘로 올랐다

我欲駕風凌絶頂(아욕가풍능절정)   바람을 타고 산꼭대기를 넘으려다가

白雲堆裏費靑騰(백운퇴리비청등)   흰 구름 쌓인 속에 푸른 행전만 허비했네

  *神魚(신어) : 가락국 김수로왕의 비인 인도태생 허황옥의 상징.

 

수양대군의 단종 왕위찬탈과 사육신들의 비참한 죽음에 깊이 절망하고 중이 되어 전국을 떠돌던 김시습(金時習)이 용문산에 올라 지은 시라는데 상당히 난해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신어(神魚)'는 가락국을 세운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데, 경기도 용문산과는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어와 관련된 성지는 경상도 김해의  신어산(神魚山)과 은하사(銀河寺)인데..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일찍이 천재로 이름이 났으나, 수양의 단종 왕위 찬탈에 통분하여 유교서적을 불살라 버리고 중이 되어 강호를 떠 돈 조선 최초의 방랑시인.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한 생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강 건너 노량진에 묻어 준 이가 김시습이다. 숱한 일화를 남긴 그는 경주 남산에 은거하며 ‘금호신화’을 쓰기도 한다. 말년 부여 무량사에 기거하다 환갑도 안 된 나이에 입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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