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대를 사랑한 관동(關東) 방백(方伯) 나리들
"강호(江湖)에 병이 깁퍼 듁님(竹林)에 누엇더니 관동팔백니(關東八百里)에 방면(方面)을 맛디시니, 어와 성은(聖恩)이야 가디록 망극(罔極)하다. 연츄문(延秋門) 드리다라 경회남문(慶會南門) 바라보며 하직(下直)고 믈너나니 옥절(玉節)이 압패 셨다... "
좋은 학교를 다니셨던 님들 모두 고딩 때 눈을 감고도 줄줄 외우던 바로 송강(松江) 정철의 관동별곡 도입부지요. 벌써 반세기 전의 일이라 단어 몇이 가물가물 하기에 인터넷을 뒤져보니, '방면(方面)'은 방백(方伯) 즉 도지사를 이르는 말, '옥절(玉節)'은 옥으로 만든 관직을 나타내는 증패라는데 행차 때 대개 앞세운 거라고 합니다. 송강 선생은 성질이 급하셨던지 아니면 생략법을 적절히 구사한 건진 몰라도, 임금의 하교가 떨어지자 깊다던 병도 씻은듯 가시고 벌떡 일어나 들이달아 경회루 남문에서 강원도로 떠나는 행차를 출발시키시네요 ^^.
(필자는 송강의 문학작품들은 좋아하지만 그의 정치적 족적엔 의문이 있기에 한 번 꼬아 본 겁니다.)
"샤양(斜陽) 현산(峴山)의 텩튝(躑躅, 철쭉)을 무니발와 우개지륜(羽蓋芝輪)이 경포로 내려가니, 십리 빙환(氷紈)을 다리고 고텨 다려 장송(長松) 을흔 소개 슬카장 펴뎌시니, 믈결도 자도 잘샤 모래랄 혜리로다. 고쥬(孤舟) 해람(解纜)하야 뎡자(亭子) 우해 올라가니 강문교(江門橋) 너믄 겨태 대양(大洋)이 거긔로다. 둉용(從容)한다 이 긔샹(氣像), 활원(闊遠)한다 뎌 경계(境界), 이도곤 가잔 대 또 어듸 잇단 말고. 홍장고사(紅粧古事)랄 헌사타 하리로다..."
관동별곡 중 경포대에 해당되는 부분만 뽑아 본 것인데,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요새 말로 통역(?)한 걸 붙여 봅니다.
'해지는 현산의 철쭉을 즈려 밟고 (신선이 탄다는) 깃털 일산에 난초로 장식한 수레를 타고 경포로 내려 가니, 십리에 얼음처럼 하얀 비단을 다리고 또 다린 듯, 낙낙장송 우거진 숲속에 마음껏 펼쳐 있고 경포의 잘고 잘은 모래알 헤일 정도로다. 외로운 배 닷줄을 풀어 정자 위에 올라가니, 강문교 넘어 바로 곁에 동해가 거기 있구나. 조용하구나 이 기상, 광활하구나 저 경치. 이 같이 갖춘 데 또 어디 있단 말이요. 홍장의 사랑 이야기 야단스럽다 하리로다..'(일부만 잘라 보아도 명문은 명문이네요.)
조운흘(趙云仡,麗末鮮初) /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
新羅聖代老安詳(신라성대노안상) 신라 태평성대에는 화랑 안상*이 노닐었다는데,
千載風流尙未忘(천재풍류상미망) 천년 전 풍류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있구나.
聞說使華遊鏡浦(문설사화유경포) 듣자하니 중국(明) 사신이 경포에서 놀러 온다는데,
蘭舟不忍載紅粧(난주불인재홍장) 놀이 배에 홍장*이라도 태우지 못하랴.
*안상(安詳) : 신라시대에는 15~18세의 청소년을 선발(화랑)해 산천을 찾아 수련하며 가무도 즐겼는데,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이 중 4국선(國仙)이라 불리는 영랑(永郞)·술랑(述郞)·남랑(南郞)·안상(安詳) 등이 금강산을 비롯하여 강원도 일대를 유람한다. 금강산 총석정에는 이들이 노닐었다는 사선봉(四仙峯)이, 바닷가에는 3일간 머물다 갔다는 삼일포(三日浦)가, 그리고 속초에는 영랑(永郞)호 등 많은 족적을 남긴다. 강릉 경포대에도 영랑(永郞), 안상(安詳)이 노닐었다고 전해온다.
*홍장(紅粧) : 보통 곱게 단장한 여인을 의미함. 경포대에는 홍장과 박신의 러브스토리로 유명한데, 박신은 강원도 방백으로 강릉을 순행중 절세가인 홍장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시를 지은 조운흘이 바로 당시 강릉 부사로 박신에게 자리를 마련해준 장본인이라고 한다(야화에 의하면 박신과 조운흘은 동문수학한 벗으로 나와 있는데 무려 30살의 나이 차이가 있어 믿기 어렵다. 그러나 사실이라면 나이를 잊은 벗이라는 忘年之友의 모델케이스일텐데..)
♣조운흘(趙云仡,1332~1404) : 호는 석간(石磵) 또는 서하옹(棲霞翁).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족의 난이 일어나자 형부외랑으로 임금을 끝까지 호종하여 난이 평정되자 2등공신이 된다. 이어서 삼도안겸사(三道按廉使)를 거쳐 정삼품의 전법총랑(典法摠郞)이 되나 정치에 관심을 잃어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에 은둔한다. 이 때부터 소를 타고 다니는 기행으로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한다. 그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등에 기용되나 다시 벼슬을 버리로 낙향한다. 창왕 원년(1388)에 다시 조정에 불려가 벼슬을 살았으며 공양왕 때(1390)는 계림부윤(鷄林府尹, 경주 시장)로 나간다. 신생 조선조에는 강릉시장에 해당하는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플어 현지인들이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사당(生祠堂)을 지어 보답한다.
박신(朴信,麗末鮮初) / 교주강릉도안렴사(交州江陵道按廉使, 강원도관찰사)
少年持節按關東(소년지절안관동) 젊은 시절 지방관의 명을 받고 관동을 돌아볼 때,
鏡浦淸遊人夢中(경포청유인몽중) 경포대에서 노닐던 사람 꿈속 같은데,
臺下蘭舟思又泛(대하난주사우범) 경포대 아래 놀이배가 생각나 또 띄운다면
却嫌紅粧笑衰翁(각혐홍장소쇠옹) 추책없는 늙은이라 홍장이 비웃겠지
♣박신(朴信, 1362~1344) : 호는 설봉(雪峰), 시호는 혜숙(惠肅). 본관은 운봉(雲峰).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고려 우왕 11년(1385)에 문과(文科)에 급제,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을 거쳐 예조ㆍ형조의 정랑(正郎)을 역임. 조선 초 봉상시소경(棒常寺少卿). 감문위 대장군(監門衛大將軍) 겸 사헌중승(司憲中丞)ㆍ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된다. 태종이 즉위(1400)하자 승추부좌승지로 발탁되어 관로가 트이기 시작 그후 개성유후, 한성부윤을 역임하고, 한때 대사헌이 되었으나 왕의 비위를 거슬려 아주현에 귀양가간다. 세종이 즉위(1418)하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선공감 제조로 있을 때 선공감 관리가 저지른 부정사건에 연루되어 13년 동안이나 통지현에 유배되었다가 1432년 풀려난다.
고려말 관동을 뒤흔든 러브어페어(愛情故事)
강릉은 큰 고을이라 기적에 올라있는 기녀만 이백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때는 초가을. 한송정(寒松亭) 위에서는 강원감사 박신이 만기가 되어 한양으로 떠나는 송별연이 한창입니다. 여기에서 송강의 관동별곡에 나오는 '헌사로운(야단스런) 홍장과 박신과의 러브어페어(愛情故事)'는 시작됩니다. 뻔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대신 조선 전기 문장가 서거정의 글(동인시화)을 붙입니다. '고려 우왕 때 강원 감사 박신이 강릉 기생 홍장을 사랑하였는데, 박신이 만기가 되어 떠나려 할 때 강릉 부사 조운흘이 짐짓 홍장이 죽었다고 하니 박신이 몹시 슬퍼하였다. 하루는 조부사가 박감사를 초청하여 경포대로 뱃놀이를 나갔다. 문득 놀이배 한 척이 앞에 나타났는데, 그 속에선 미인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는지라, 박감사는 진정 신선이로다 하고 감탄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홍장이라. 배에 탔던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러나 아무리 불같은 사랑도 끝이 있는 법, 박신이 한양으로 떠나던 날 홍장은,
울며 잡은 소매 떨치고 가질 마소,
초원장제(草原長提)에 해 다 져 저물었네.
객창에 잔등을 돋우고 새워보면 알리라.
어느 스토리나 비슷하겠지만 가신 임은 돌아오지 않고.. 그러나 박신도 평생 가슴 속에는 그녀를 품고 살았던지 늙으막에 옛날을 회상하며 위와 같은 시를 남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