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용두열 컬럼, 수필

자하문 밖 세검정(洗劍亭) - 서울을 읊은 한시

작성자박영우|작성시간17.10.01|조회수355 목록 댓글 0

자하문 밖

 

한양 도성을 드나드는 문에는 4大門과 4小門이 있는데, 그 명칭이 너무 현학적이고 한문투라 백성들 사이에선 다른 이름으로 바꿔 부릅니다. 崇禮門을 남대문으로 興仁之門을 동대문으로 敦義門을 서대문으로 불렀는데, 북쪽에 있는 肅靖門은 백성들의 출입이 금지된 문이라 북대문이라 불릴 여지가 없었습니다. 숙정문이 폐쇄된 채 제구실을 못하자 북소문(또는 북문)에 해당하는 창의문(彰義門)이 개방되어 도성에서 북쪽으로 통하는 주된 통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彰義門 또한 다른 명칭이 있는데, '보라빛 놀이 내려앉은 문'이라는 시적인 이름의 자하문(紫霞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북문 밖 세검정 일대를 서울 토박이들은 흔히 '자하문밖' 또는 '자문밖'이라 부르는데, 그 일대의 풍광 또한 이름 못지 않게 수려했다지요.

(蛇足 : 동대문 남쪽에 세워진 光熙門(일명 남소문)은 백성들 사이에선 시구문(屍驅門)이라 불리웠는데, 이 문을 통해 죽은 시체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이 문의 음습한 명칭처럼 근처 경관 또한 별로라서인지 이 일대를 읊은 시는 눈에 잘 띄지 않는군요.)

 

 

세검정(洗劍亭)

 

고즈넉한 세검정 / 정선(숙종~영조대)

 

 

인파 가득한 세검정 / 김홍도(영조대)

 

 

자하문 밖을 대표하는 지형지물은 세검정(洗劍亭)일 것입니다. 인조반정 때 이귀(李貴)·김류(金瑬) 등의 반정주체들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씻었던 자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다만, 반정군들이 세검정에 모였다가 고개를 넘어 자하문(彰義門)을 부수고 대궐로 진입하여 반정에 성공한 건 사실입니다.

세검정에서 칼을 씻은 건 잠시겠지만 실록의 초본(草本)을 씻는 일은 드믈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계가 놀라는 기록유산 '조선실록' 의 초벌이 완성되면 사초(史草)의 비밀을 지키고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초초본과 중초본을 세검정에서 흐르는 물에 씻어(洗草) 먹으로 쓰여진 글씨를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그 종이는 재생하기 위해 세검정 근처에 있는 조지서(造紙署)로 보내져서 다시 종이로 만들어졌다네요.

 

세초연(洗草宴) / 조문명(趙文命, 조선 후기)

 

寸管那能盡畵天(촌관나능진화천)

한치 작은 붓으로 어찌 하늘을 다 그려내리요?
於休盛德百王前(어휴성덛백왕전)

아아! (숙종의) 성대한 덕은 백왕보다 앞서도다.
十年始訖編芸役(십년시흘편예역)

십년만에 비로소 실록 편찬의 일을 마치고,
暇日初開洗草筵(하일초개세초연)

한가한 날 마침내 사초 씻는 잔치가 열렸네.


晩後溪炊當美饌 (만후계취당미선)

해질녘 시냇가에서 밥 지으니 맛난 음식이요,
雨餘山水勝鳴絃(우후산수승명현)

비온 뒤 물소리는 거문고 가락보다 낫구나.
舊時簪筆今如夢(구시잠필금여몽)

지난날 붓 들었던 일이 이제는 꿈결 같은데,
手閱成書更泫然(수열성서갱현연)

완성된 책을 손에 쥐어보니 다시금 눈물이 흐르네.

 

실록 편찬에 참여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근처의 차일암(遮日巖)에서 세초연을 베풀었는데. 위 시는 숙종∼영조 연간의 문신 조문명(趙文命,1680∼1732)이 '숙종실록'을 편찬한 뒤 세초연에 참석하여 읊은 것입니다. 그는 병조판서, 대제학,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한 큰 정치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검정에서 노닐며(遊​洗劍亭) / 정약용(丁若鏞, 조선 후기)

 

層城複道入依微(층성복도입의미)

층층 성곽 비탈길 그윽한 곳에 찾아드니,

盡日溪亭俗物稀(진일계정속물희)

진종일 시냇가 정자엔 속물들 드물구나.

石翠淋漓千樹濕(석취림리천수습)

푸른 돌 이끼는 흠뻑 젖고 온갖 나무들도 습한데 ,

水聲撩亂數峯飛(수성요란수봉비)

물소리는 요란하고 수많은 봉우리 날아갈 듯 하구나.

 

陰陰澗壑閒維馬(음음간학한유마)

그늘진 산골물 계곡에 한가로이 말 매어두고,

拍拍簾櫳好挂衣(박박렴롱호괘의)

맞붙은 나뭇가지는 옷 걸기에 좋구나.

但可嗒然成久坐(단가탑연성구좌)

다만 (절경에) 정신 뺏겨 우두커니 앉아 있노라니,

不敎詩就便言歸(불교시취편언귀)

시 한수 짓지도 못했는데 돌아가자 재촉하네.

 

아파트촌이 점령한 세검정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