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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열 컬럼, 수필

연산군의 궁 밖 놀이터 탕춘대(蕩春臺) - 서울을 읊은 한시

작성자박영우|작성시간17.10.11|조회수347 목록 댓글 0

세검정 지척에 있던 탕춘대(蕩春臺)

 

세검정 동쪽 산마루에 있었던 탕춘대(蕩春臺), 지금은 사라지고 표지석만 남아 있습니다. 봄(春)을 질탕하게 즐긴다(蕩)는 탕춘대는 연산군 시절 지금의 세검정초교 자리에 있던 신라 고찰 장의사(藏義寺)를 부수고 지은 돈대(臺)로, 물가에는 수각(水閣)을 짓고 미희들을 불러 질탕하게 즐겼다고 하네요. 숙종 대에 이르러 북대문인 홍지문(弘智門)에서 탕춘대를 거쳐 북한산성에 이르는 성을 쌓고 그 이름을 탕춘대성(蕩春臺城)이라 명명합니다. 그런데 이 탕춘대란 명칭이 못마땅하셨는지 영조 임금 때에는 연융대(鍊戎臺)로 바꾸어 부르게 되지요. 다만 탕춘대성이란 성곽의 명칭은 그대로 두고..

(蛇足 : 鍊戎臺란 병사(戎)를 훈련시키는(鍊) 곳이라는 의미이나, 굳이 '되 융(戎)' 자를 쓴 건 병자호란 때 되놈들(淸)에게 당한 수모를 다시 하지 않기 위해 힘을 길러야 한다는 숨은 뜻이 있는 건 아닐런지요.)

 

탕춘대 터 / 세검정 동쪽 100m 지점 산마루에 위치(종로구 신영동 135번지)

 

탕춘대(蕩春臺) / 백광훈(白光勳, 조선 중기)


昔日君王巡幸多(석일군왕순행다)

옛날 임금님이 자주 행차하실 때에는,

照山丹碧貯笙歌(조산단벽저생가)

붉고 푸르름이 산을 물들이고 피리와 노래 소리 가득했었다지.
如今寂寞荒村路(여금적막황촌로)

지금은 적막하고 황량한 시골 길로,
寒食遊人不見花(한식유인불견화)

한식날 놀러나온 사람들도 꽃을 볼 수 없구나.

 

성리학의 위세가 등등하던 중종 대에 이르러 탕춘대는 임금은 물론 대소신료들도 외면하게 되자 그 빛을 잃게 됩니다.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은 중종~선조 초기의 문인으로 특히 당나라 풍의 한시에 능해, 허난설헌의 詩 스승인 이달(李達) 그리고 부안 명기 梅窓의 情人 최경창(崔慶昌)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불리지요. 그는 당대의 문장가 송순(宋純),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과 교류하였으며, 성혼(成渾), 정철(鄭澈)과는 절친한 벗으로 사귀었다고 합니다.

 

 

탕춘대(蕩春臺) / 홍가신(洪可臣, 조선 중기)

 

芳草溪邊坐(방초계변좌)  풀 내음 향긋한 개울가에 앉으니,

靑山影裏身(청산영리신)  푸른 산 그림자 속에 이 몸이 있구나.

斜陽無限恨(사양무한한)  지는 해가 무한이 한스러운데,

殘柳故宮春(잔류고궁춘)  버들만 남은 고궁의 봄이여.

 

 

전란(임진왜란 등)으로 황폐해진 궁성 밖을 읊은 시로, 만당(晩唐)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절창(登樂遊原) 중 명구 '陽無限好'를 연상케 합니다. 홍가신(1541~1615)은 중종 말~선조 대의 문신으로 의금부지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합니다. 그는 특히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탕춘대 자리에 있었던 장의사(藏義寺)

 

조선 초기에는 자하문 밖 장의사(藏義寺)가 주변의 멋드러진 풍광과 함께 온존하고 있었습니다. 세종~성종 연간 한양에서 시로 읊기 좋은 10군데 풍광(漢都十詠) 중 남산 꽃구경(覓木賞花), 마포 뱃놀이(麻浦泛舟) 등과 함께 '장의사로 스님 찾아가기(藏義尋僧)' 가 있네요. 당대의 문장가 강희맹(강희안의 친 동생), 월산대군(성종의 친형), 이승조 등이 한도십영을 지어 책으로 냈는데, 여기에서는 그 중 서거정의 시 한 수 붙입니다.

 

장의사로 스님을 찾아(藏義尋僧)-일부 / 서거정(徐居正, 조선 전기)

 

三峰亭亭削寒玉(삼봉정정삭한옥) 

세 봉우리 우뚝 솟아 경옥을 깍아 놓은 듯, 

前朝古寺年八百(전조고사연팔백)

지난 왕조의 옛 절(藏義寺) 8백년이 흘렀구나.

古木回巖樓閣重(고목회암루각중)

고목과 둘러선 바위 속에 누각은 겹겹인데,

鳴泉激激山石裂(명천격격산석렬)

냇물 소리 세차 산과 바위를 갈라 놓았구나.

 

사찰의 누각이 겹겹이라 표현한 걸 보면 그 규모가 꽤 컸으리라 집작됩니다. 시의 제목에서 '장의사로 스님을 찾아' 간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봐,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으로 개국한 조선이지만 초기에는 절과 중은 그리 멀리할 대상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대학자이자 문장가이며 정치가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차에 걸쳐 올렸기에 여기에선 부언치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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