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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열 컬럼, 수필

<한시산책>홍랑의 지독한 사랑

작성자박영우|작성시간11.03.23|조회수504 목록 댓글 0

묏 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折楊柳寄與千里人(절양류기여천리인)
爲我試向庭前種(위아시향정전종)
須知一夜新生葉(수지일야신생옆)
憔悴愁眉是妾身(초췌수미시첩신)

 


더 이상 따라갈수 없는 함관령 고개. 홍랑은 산비탈 길섶에 나있는 뫼버들을 꺾어

최경창에게 정표로 바친다. 이미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앞에 
홍랑도 최경창도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버들가지를 꺾어 준 홍랑의

마음을 최경창은 왜 모르겠는가. 버들가지란 잎이 시들었다가도 땅에 꽂기만 해도

다시 싹을 틔우는 나무인 것을....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님을 향한 마음은

항상 님의 곁에 있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북쪽 변방의 관기(官妓) 홍랑.


함경도 홍원 출신인 홍랑은 변방 경성(鏡城) 관아의 관기였다. 기생의 출신으로
비록 신분은 비천했으나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은 아무나 쉽사리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가지나 담장 및의 꽃을 의미하는 노류장화(路柳墻花)에
머물지 않았다. 교방(敎坊)에서 각종 악기와 가무를 단련하면서도 문장과 서화 등의
기예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그래서 홍랑은 관아의 연회장에서 흥을 돋우고

미색을 흘리는 여느 기생과는 달리, 그 품성과 재주가 뛰어난 예기(藝妓)였다. 

고죽(孤竹) 최경창과의 맞남.

 

최경창은 문장과 학문이 능해 이율곡. 송익필 등과 함께 '八文章'으로 꼽혔으며,

당시(唐詩)에도 뛰어나 옥봉 백광훈, 손곡 이달과 함께 '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불리었는데 율곡은 그의 시를 가리켜 청신준일(淸新俊逸)하다고 평할 정도였다.
미색과 재능이 뛰어난 홍랑은 최경창이 북도평사로 함경도의 경성에 부임하면서

만나게 되는데, 세세토록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의 인연이 비로서 시작되게 된다.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고죽 최경창과 함경도 경성의 최고 예기(藝妓)였던
홍랑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관기였기 때문에 관리와
만나는 일은 매우 자유로웠을 것이고, 홀로 생활을 하던 최경창에게 홍랑은 운명적
사랑에 불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의 시련.


그러나 이듬해 봄, 두 사람의 사랑에 이별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오게 된다. 
나라의 부름을 받은 최경창이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노비와
비슷한 신분이었던 기생은 관아에 속해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해당 지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뜻밖의
이별 앞에 선 홍랑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홍랑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기 위하여 한양으로 가는 배웅하러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태산준령을 넘고 넘어서 며칠 길을 마다 않고 따라갔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두 사람의 발길은 이윽고 함관령(咸關嶺)고개에 이르렀고...
더 이상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정을 뒤로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때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는 '묏버들 거려 꺾어...' 가 탄생하게 된다.


漢文시 번방곡(飜方曲)으로 번역되고


고죽은 홍랑의 연정가인 시조 한 수를 노래로서 건네 받고 곧바로  한문으로 옮겨
<번방곡>이라 이름 붙여 홍랑과 함께 나누어 가졌다. 번방곡(飜方曲)의 번(飜)이란

번역한다는 의미이고, 방(方)이란 곧, 바로 그 즉시의 뜻이니 곧바로 번역한 노래라는 
뜻이다. 최경창이 옮긴 칠언고시 번방곡은 그의 문집 고죽유고(孤竹遺稿)에 실려 있다.

최경창이 홍랑을 그리며 지은 시 두 수 더 소개한다(여자의 입장에서 쓴 것이 특이함)

 

映月樓  영월루에서


玉檻秋來露氣淸  고운 난간 가을 드니 이슬 기운 맑아지고

水晶簾冷桂花明  수정발은 차가운데 계수 꽃만 환한데
鸞驂一去銀橋斷  난새 타고 한 번 떠나 은하 다리 끊긴 뒤로

怊悵仙郞白髮生  서글퍼라 서방님은 흰머리만 생겨나네

 

無題 무제

 

君居京邑妾楊州  님께서는 서울 살고 첩은 양주 있으니까 
日日思君上翠樓  날마다 님 생각에 푸른 다락 오릅니다 
芳草漸多楊柳老  방초 점차 짙푸르고 양류조차 늘어지니
夕陽空見水西流  석양 무렵 부질없이 서쪽 흐르는 물만 보네



고죽의 병석을 찾아온 홍랑


함관령에서 홍랑과 애끓는 이별을 뒤로하고 떠나온 고죽은 서울에 돌아온 뒤 곧바로

병으로 자리에 누워 그 해 봄부터 겨울까지 일년 내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경창이 아파서 누워있다는 소식은 풍문을 타고 먼 함경도 변방의 홍랑 귀에까지

들리게 된다.  홍랑은 곧바로 경성을 출발하여 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 만에 서울에 이르렀다. 최경창의 기록에 의하면 "칠주야
동안 쉬지 않고 찾아왔다" 하였다. 거의 2년만에 최경창을 다시 만난 홍랑은 그의
수척함에 마음이 아팠지만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조석으로 병수발을 들었다.


홍랑과 최경창이 함께 산다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까지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1576년(선조 9년) 봄에는 사헌부에서 양계(兩界)의
금(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의 파직을 상소하기에 이른 것이다. 양계의 금이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함경남도의
홍원 출신인 홍랑이 서울에 들어와 있는 것을 문제로 삼은 것이었다. 결국 최경창은 파직

당했고,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별의 시간을 맞이하여 고죽은 홍랑에게 애절한 시 한 수를 읊어 주었다.

 


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마음속 정감이 고동 치지만 그윽한 난(蘭)을 보내오니,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이제 가면 아득히 먼 곳 어느 날에 돌아오리.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함관령 옛날의 노래를 다시는 부르지 마오.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지금도 궂은비 내려 푸른 산길 어둡겠지. 

홍랑은 고죽에게 그윽한 향을 풍기는 난(蘭)과 같은 존재였다. 시문의 첫 연에 '脈脈'

이란 "서로 말 없이 바라보며 마음속 깊이 정감이 고동치는 모양"을 표현한 말이다.
그들은 이번의 이별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만나지 못하고 슬픈 일화만 남기고 만다.


얼굴을 난도질하고 시묘 살이 했던 홍랑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곧바로 파직을 당한 최경창은 이후 복직이 되어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1583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었으나 상경 도중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부음은 그녀로 하여금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안겨주었다.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법이니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한에 홍랑은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사리를
시작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묘사리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 끝에 방법을 생각해낸 홍랑은  특히 다른 남정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신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하여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얼굴에 숯검정을 칠하고 살았다. 그렇게 3년을 지내고도 차마 떠날 수 없어

10여 년 동안 시묘사리를 계속하였다. 

 

죽어서도 최씨 문중의 귀신이 되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으니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청석초등학교 북편 산자락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고죽
최경창의 묘소와 그녀의 무덤이 있다.  홍랑의 지독한 사랑을 읊은 시 하나 여기에

붙이며 끝을 맺습니다.

 

홍랑, 그 지독한 사랑 / 구석기 


내가 가진 전체는 오로지
평생에 단 세 번 봄비를 맞고
흙밖으로 나와 너 하나만을 만나서
저렇게 지독하게 살아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지렁이 같은 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전생에 조선의 기녀 홍랑이었다
감히 말하는 여인을
나도 최경창이 되어 찾아가는 길이다
그 길은 살아서 닿을 수 없는
먼 벽지의 유배길이다
묏버들 갈해 꺾어 보내니 님의 손에,
사랑해 주어서 고맙다고 하는 것일까
홍랑에게 사랑이란
아무것도 침범하지 못하게
자신의 울타리를 높이 세우는 것이다
홍랑의 사랑은 얼굴에 상처를 내고
가슴에 묘막을 짓는 것이다
자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7일 밤낮을 달려와
무덤의 뿌리까지 더듬어 보는 것이
사랑이라고 거문고를 탄다 가야금을 탄다
밤비에 새 잎 나거든 나인 것처럼 여기소서
봄비에 밖으로 뛰쳐나온 사랑 대신
땅속에 묻힌 사람은 언제 다시 돌아오랴
사랑은 밤길을 가다 만날 수 있는
달빛 그림자가 아니라
가늠할 수 있는 깊이의 우물이 아니라
단지 오래되어 쓰러진
비석 같은 절대적인 기약인 것이다
사랑은 십년 동안이나
세수도 않고 머리도 빗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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