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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열 컬럼, 수필

Re 추사의 현판 글씨 몇점

작성자박영우|작성시간11.07.18|조회수180 목록 댓글 0
다산초당(茶山草堂)

                                                                                                                          

보정산방(寶丁山房)



 

강진에 유배가 있던 정신적인 스승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 위해 써준 글씨로 현재 다산초당에 걸려있다(이 현판은 2005년도에 도난당했다 되찾은 바 있음). 보정(寶丁)이란 말은 중국 옹방강이 소동파를 좋아해서 보소(寶蘇)라 당호를 썼듯이, 다산 丁若鏞을 보배롭게 여긴다는 뜻이다. 다산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그 후학들에게 다산 선생 계시던 곳을 잘 보살펴 달라는 무언의 뜻이 들어 있다고도 한다.

 

글씨는 별로 멋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전체적인 구도가 빈틈없이 짜여 있고, 큰 스승을 존경하는 추사의 마음이 글자에 배어있다. 제주도로 귀양가기 전 과천시절의 작품으로 귀양 후의 기괴한 느낌이 없이 매끈하고 유려하다  아래는 같은 다산 초당에 후학들이 다산의 글씨체를 모아(集字) 새긴 현판으로 두 사람의 풍모가 글씨에 잘 나타나 있다고들 한다.

 

 


                                                                                                                                          다산초당

다산동암(茶山東菴)-다산 글씨 集字

 

 

 

                                                                                                            국립중앙방물관 소장

谿山無盡

“계산은 다 함이 없다”라는 뜻으로 계산초로(谿山樵老; 산속의 늙은 나무꾼)라는 호를 가진 안동 김문 세도가  김수근(金洙根, 1978~1854)에게 써 준 것으로 자기보다 나이가 젊은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 써준 혐의(?)가 옅보인다(그러나 추사의 마음속엔 세상에 '끝이 없는(無盡)' 권세란 게 있게느냐는 뜻으로 써 주지 않았느냐 하는 역설적인 주장도 없지 않다.)

 

그러나 글씨 자체는 예술성이 매우 높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먼저 전체 장법(구도)을 살펴보면 실로 아주 대담하기 짝이 없다. ‘계’자를 오른쪽 에 큼직하게 자리잡고 ‘산’자는 과감하게 밑 부분을 여백으로 하고 중심의 윗 부분에 앉히고, ‘무’자는 왼쪽 위로 ‘산’보다 더 올려서 자리잡혀 놓으니 이 세자만 본다면 아주 불안하고 위태한 모습이다. 그런데 ‘계’자로부터 ‘산’, ‘무’로 점점 올라가면서 위험스럽고 불안한 느낌을 마지막 ‘진’자로 해결하였다. ‘진’을 ‘무’밑에 튼실하게 첫 자인 ‘계’자 보다 약간 아래에 까지 자리하게 배치하고 특히 마지막 가로획을 약간 오른쪽으로 길게 처리함으로써 전체적인 안정감을 확실하게 주었다.

 

실로 역동감을 추구하다 보면 자칫 놓쳐버리기 쉬운 안정감을 교묘하게 함께 추구한 대담한 작품이다. 전체를 관통하는 필획은 작은 기교 정도는 관심 밖이다 하는 듯이 질박하고 골기 물씬한 선질로서 무겁고 강인하게 표현되었다. 마치 험준한 바위산과 깊은 계곡을 보는 듯 긴장감이 팽팽하다. 만약 이러한 무거운 선질 분위기에서 ‘계’밑의 여유와 ‘산’밑 가운데의 시원한 여백이 없는 구성이라면 참으로 답답하여 숨막히는 작품이 되었을 것 같다.대담하고 골기 물씬한 선질과 머리를 탁 치는 듯한 탁월한 장법에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광주서예협회장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추사가 유배 후 노호(지금의 용산 부근)에 살면서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그의 글씨 중 명작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예서(隸書)이지만 전서(篆書)의 字形을 응용한 데다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의 運筆法을 섞어 썼기 때문에 횡액으로는 보기 드물게 장중함과 활달함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잔서완석(殘書頑石)에서 ‘殘’은 깨지고 남아 있는 부스러기를 뜻하고 ‘書’는 책이 아니라 글자를 의미한다. ‘殘書’는 세월이 흘러 깨지고 뭉그러져 겨우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글자 몇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頑은’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다는 말이고 ‘頑石’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돌을 말한다. 이것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깨지고 부서져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돌을 의미한다. 따라서 ‘잔서완석(殘書頑石)’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비바람에 깎인 볼품없이 깨진 빗돌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몇 개의 글자’라는 의미가 된다(자신의 험난한 인생역정을 비유한 것은 아닐런지...). 


‘殘’과 ‘頑’의 대비, ‘書’와 ‘石’의 대비는 더욱 강렬하게 가슴을 울리는 문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글씨에 있어서 김정희 서권기(書卷氣)의 일면을 보여준다. 글씨에 있어서 ‘서권기’란 수많은 독서를 통해 가슴속에 온축된 기운이 표현된 것을 의미하지만, 이렇게 종종 글씨를 쓰는 사람이 만들어낸 문구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당시 청나라의 문사들이 김정희의 글씨를 좋아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의 찬구(撰句; 자신이 새로운 문구를 만들어냄)와 집구(集句; 다른 사람의 글을 모아 새롭게 문구를 만들어냄)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대련(對聯)으로 표현되지만 글자 수가 적은 편액(扁額)에서 더욱 강한 느낌을 전하기도 한다. (이상 ‘추사 김정희 학예의 일치’에서)

 

사서루(賜書樓)

 

 

임금이 서책을 내리면(賜書) 신하된 자는 단청이 있는 누각(樓)을 지어 그곳에 보관하였다 한다.

예서체의 중후한 골격을 기본으로 글씨의 머릿줄을 가지런히 하고 하단을 자유롭게 풀어 주어 힘과 변화를 동시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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