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 난초 그림을 그리지 않은지 20년 만에 우연히 그렸다. 마음속의 자연에 대해 문을 닫고 생각해 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維摩-석가모니의 제자)의 불이선(不二禪)이다.” 여기서 유마의 불이선란 유마경(維摩經)의 불이법문품(不二法門品)에 있는 얘기로, 모든 보살이 선열(禪悅) 에 들어가면서 한마디씩 하는데 유마 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보살들은 말과 글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고 감탄했다 한다. 이것으로 난초 그림을 설명한 것은 곧 화폭에 그리는 것 보다는 마음속으로 체득하는 것이 난을 그리는 더 큰 경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계속해서 추사는 “누가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한다면 유마의 말없는 대답으로 대신하겠다." 라고 하였고 이어 ”이 그림은 초서와 예서 기자(奇字)의 법으로 그린 것인데 세상사람이 어떻게 이를 알겠으며, 어찌 좋아하겠느냐?“라고 스스로 이 그림을 그린 근거를 설명하였다. 추사는 난초모양을 표현했다고 하기보다는 글씨 쓰는 법을 그림에 응용하여 상징적으로 난초의 정신을 나타내려한 것이다.
작품의 제작 시기와 소장하였던 사람들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본래 추사가 쑥대머리의 시동(侍童)이었던 달준(達俊)에게 어느 날 우연히 손이 가는 대로 그려주었던 작은 난초 그림이다. 그런데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될 때 고금도(古今島)에 동배(同配)될 정도로 추사의 복심(腹心)으로 불린 규장각의 각감(閣監) 오규일(吳圭一)이 어느 날 우연히 이 그림을 보고 몹시 마음에 들었던지 억지로 빼앗아가고 말았다. 그 후 이 그림은 추사 말년의 애제자였던 소당 김석준을 거쳐서 장택상과 손재형 등을 지난 뒤 지금은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는, 매우 흥미로운 사연이 담겨있는 그림이다.
여러번에 걸처 추가한 글씨들(題跋)
그런데 이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그림보다도 글씨가 더 많을 뿐만 아니라, 그림보다도 오히려 글씨를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독특한 그림이다. 그림보다도 글시가 많아지게 된 것은 추사가 제발(題跋-표제 글과 발문)을 네 번이나 추가했기 때문이다. 추사는 우연히 손길 가는 대로 그렷던 이 그림이 이외의 득의작(得意作)으로 느껴졌는지 불이선란도에 여러가지 사념(思念)과과 심회(心懷)를 적으며 제발을 추가했을 뿐만 아니라, 눈앞에서 문하생들끼리 주인이 두 번이나 바뀌게 되었던 특별한 사연까지 밝히며 제발을 계속 추가했다. 그러나 추사는 제발을 네 번이나 쓰면서도 기년(紀年)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 그림은 정확한 제작 시기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북청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후 과천에 은거한 추사의 말년에 가까운 시기일 것이다.
그림 중 글씨의 뜻풀이
-左上端 큰 글씨 (글씨 순서 좌->우)
不作蘭畵二十年(부작란화이십년) 난초를 안 그린지가 스무 해인데
偶然寫出性中天(우연사출성중천) 우연히 그렸더니 천연의 본성이 드러났네
閉門覓覓尋尋處(폐문멱멱심심처) 문 닫고 찾고 또 찾은 곳
此是維摩不二禪(차시유마불이선) 이게 바로 유마거사의 佛二禪이라네
제2구 끝자 천(天)과 제4구 끝의 선(禪)을 운(韻)에 마추어 7언체로 쓴 것으로 보아 분명히 그림을 그리고
처음 써 넣은 표제 詩인듯 하다. 다른 제발문처럼 좁은 공간에 억지로 넣은 글이 아닌 것 만은 분명하다.
-右上端 작은 글씨 (글씨 순서 좌->우)
若有人强要(약유인강요) 만약 누군가 강요한다면
爲口實又當以毘耶(위구실위당이비야) 또 구실을 만들고 비야성에 있었던
無言謝之, 曼香(무언사지, 만향) (유마의) 말없는 대답으로 거절하겠다. 曼香
-右中端 작은 글씨 (글씨 순서 우->좌)
以草隸寄字之法爲之(이초예기자지법위지) 이 글은 초서와 예서의 기자의 법으로 썼으니
世人那得知(세인나득지)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를 알아 보랴
那得好之也(나득호지야) 어찌 이를 좋아할 수 있으랴
구竟又題(구경우제) 구경이 이 또한 표제를 달다
*구 : 삼 수(水) 변에 區
어찌 보면 추사의 오만한 모습이 잘 나타낸 글이라 할 수 있다(귀양살이 10년에도 결코 꺾이지 않는 선비의 오기를 보는 듯함)
左下端 큰 글씨 (글씨 순서 좌->우)
始爲達俊放筆(시위달준방필) 처음에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인데
只可有一不可有二(지가유일불가유이) 이런 그림 은 한번이나 그릴 일이지
두번 그려서는 않될 일이다
仙客老人(선객노인) 선객노인이
그리고는,
吳小山見而豪奪 可笑(오소산견이호탈 가소) 오소산이 이를 보고 얼른 빼앗아 가니
가소롭다
이미 짐작 했겠지만 小山은 추사의 제자인 오규일의 호이다. 위의 글씨(題跋)가 같은 날 쓰여지지 않은 것은 글의 말미에 쓴 추사의 별호가 만향(曼香), 구경, 또는 선객노인(仙客老人)으로 각각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듯..
박영우 블로그 : 한시와 묵향이 있는 오두막 (http://blog.naver.com/ywpar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