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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탐방모임

<文化探訪>동양을 수집하다 /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수집 문화재들(11/27)

작성자박영우|작성시간14.12.01|조회수352 목록 댓글 0

기대하지 않은 횡재.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지요. 이번 <탐방>이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우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근래 수집한 '신소장 우리문화재' 를 둘러보는 게 주 목적이었고, '동양을...' 은 메인 일정이 너무 일찍 끝나기에 '시간때우기' 용으로 집어넣은 거였습니다. 더욱이 해설시간도 오전 오후 한번으로 잘 맞지도 않고 특별해설을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고.. 그런데 '신소장..' 관람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바로 옆 특별전시실로 들어가니 해설이 막 시작되고 있었는데, 비전문가가 얼핏 들어도 상당한 내공이 느껴졌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이들 <탐방>팀에 뭍어서 해설을 함께 듣게 되었는데, 이 전시를 기획한 이가 직접 나와서 진행하는  '특별한' 단체를 위한 '특별한' 해설임을 알았습니다(우리가 부탁했을 때는 안된다더니..-_-;; ).

 

 

이 전시회를 직접 기획했다는 해설자의 해박한 지식과 막힘없는 해설을 여기에 다 옮겨놓을 수는 없고,

다만 인터넷 사이트에 소개된 내용을 여기에 소개해 봅니다.  

구 총독부 건물 중앙홀 북벽 벽화


조선총독부 건물의 중앙홀 천장에 걸었던 그림이다. 한국과 일본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羽衣 說話(선녀와 나무꾼)를 소재로 북벽에는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한국의 이야기를, 남벽에는 미호(三保)를 배경으로 한 일본의 이야기를 걸었다. 이 그림에는 한국과 일본의 친연성을 강조하고 항구적인 식민통치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광복 이후 미군청 청사, 대한민국 정부청사,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철거되었다. 중앙박물관은 '민족수난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이 벽화를 해체하여 보관하였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이왕가미술관



 

조선총독부박물관

1918년 3월 도쿄제국대학 건축학과 조교수이자 조선총독부박물관 협의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7~1935)는 베이징의 유리창(琉璃廠)에서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보낼 골동품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유독 漢代文化財에 주목했다.






 

 

동제마면(銅製馬面) 1,7번

마면은 말의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실용적인 목적보다 장식적인 목적 혹은
수레를 탄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마구류(馬具類)

위쪽은 수레 굴대끝(車軸頭), 아래 좌측부터 마탁(馬鐸), 재갈(轡비)
2. 재갈, 3. 수레굴대끝, 5.일산대끝(蓋弓帽), 6.꽃모양 일산대끝(花頭金具)


15.손잡이가 달린 술그릇(提樑卣 卣:술통 유), 漢, 1918년 5월 13일 江藤濤雄(에토 나미오)에게서 구입
16. 청동용기(靑銅奩  奩 : 화장상자 렴)


19. 청동기 거푸집(銅器鑄范), 宋 이후, 傳 陝西省산시 西安 출토, 1920.3.20. 에토 나미오에게서 구입
20. 녹유 이배(綠釉耳杯)와 이배 손잡이(杯耳), 한, 1918.5.13. 에토 나미오에게서 구입


(위) 13번. 쇠뇌(弩機), 낙랑, 1942년 평양 石巖里 219호분(王根墓) 출토
(아래) 11번. 과(戈), 전국시대,1918.5.13  에토 나미오에게서 구입    
         14번. 할고자(銅弭  弭 : 할고자 미), 漢, 1918.5.13. 에토 나오미에게서 구입



띠고리, 대구(帶鉤, Buckle)

허리띠를 고정하는 장치로 '대구'라고 한다. 주 말기부터 제작하여 한대에 널리 썼다. 아래쪽이 둥굴고 넓어지는 비파형(琵琶形), 기다란 가지모양으로 만든 곡봉형(曲棒形) 등 금이나 은을 入絲하여 무늬를 넣거나 터키석을 감입(嵌入)하여 장식하기도 하였다.
1번 띠고리, 한, 1918.5.13. 에토 나오미에게서 구입
2번 띠고리, 낙랑


20번.금속장식(金具), 漢, 에토 나오미에게서 구입
14번.요전수편(搖錢樹片), 後漢 傳 陝西 西安 출토, 1920.3.30. 에토 나미오에게서 구입
12번.半兩錢, 13번.壯布七百과 貨布, 11번 戰國시대 원형 동전, 9번.布錢, 10번.明刀錢,
7번.貝化(貝貨), 8번.의비전(蟻鼻錢), 16번.진자(銅鎭), 漢, 에토 나오미에게서 구입,
18번.진자(虎鎭),樂浪




23번.玉璧, 24번.含玉, 25번.玉片, 26번.玉握, 27번.塞玉

무덤석문(墓門)







北齊말기~隋(6세기 말-7세기 초),전 허베이,츠저우(河北 磁州)출토,
1918년 5월13일, 에토 나미오(江藤濤雄)에게서 구입

무덤의 입구에 설치했던 구조물로 상부의 상인방 전면에는 寶珠를 맞잡은 靑龍과 白虎를 선각하고 문설주 전면에는 풀꽃무늬(唐草文)를 새겼다. 입구 양쪽에는 사자를 두었는데, 사자는 불교조각의 영향으로 北朝 말기부터 무덤 건축에 반영되었다. 이와 같이 발을 앞으로 내밀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형태는 누예묘(婁叡墓), 곡률철묘(斛律撤墓) 등 6세기 후반의 무덤에서 볼 수 있다.

도쿄제국대학 교수이자 조선총독부박물관 협의원이었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7~1935)가 베이징 리우리창(琉璃廠)의 골동품점 연고재(延古齋)에서 구입한 것으로 그는 판매자로부터 北齊 武平연간(570~576)의 무덤에서 발견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가 중국에서 수집한 문화재 가운데 가장 고가로 1162.5원에 구입했다. 세키노 다다시 구입품은 에토 나미오 매도품으로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들어왔다.
*1918년 물가로 본 무평석불의 구입가격은 쌀(한 되는 약 1.6kg)[50전] - 약 3,720kg
1162.5원은 쌀 3,720kg 값, 지금의 쌀값을 kg당 3,500원으로 계산하여 13,020,000원 정도이다.


화상전(畵像塼)



漢, 1918년 5월 13일 에토 나미오에게서 구입
안이 비어있는 空心塼이다. 이와 같은 대형 화상전은 무덤의 벽면을 구성한다. 동전, 말을 탄 사람, 수레 등 여러 종목의 문양을 틀로 찍었다. 뤄양(洛陽)에서도 이와 유사한 화상전이 발견된 바 있다

 


 

화상실 건물(厠所)

후한, 1918.5.13, 에토 나미오에게서 구입
漢代의 明器 가운데는 주택, 부엌, 축사 등 건축물 모형이 있다. 화장실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 건물은 장방형 평면에 2층의 구조로 단 위에 화장실을 만들어 계단을 통해 올라가고, 아래 공간에는 배설물을 이용해 돼지 등의 가축을 사육할 수 있도록 하였다. 河南省 汲縣(허난성 지현)에서도 이와 동일한 형태가 발견되었다.

 


 

화상전(畵像塼)


기와(瓦當)

왼쪽부터 문자무늬(銘文瓦當), 동물무늬(瑞獸文瓦當), 구름무늬(雲文)瓦當
문자무늬와당, 명문에는 長樂未央, 長生未央, 長生無極, 永奉無疆, 延年益壽, 高安萬世 등 상서롭고 복된 글인 吉祥句와 장소를 가리키는 上林, 長樂, 未央, 左弋(좌익), 衛, 長陵東當 등이 보이며 서체는 전서체가 많고 예서체도 일부 보인다.
瑞獸文 와당은 전국시대 秦에서 유행, 漢에서는 靑龍, 白虎, 朱雀, 玄武의 四神圖 와당이 많이 제작.
半瓦當은 전국시대(기원전 403~221)에 궁전과 관아 건축이 활발하게 축조되면서 유행했다. 齊는 樹木文, 秦은 동물무늬와 구름무늬(雲文), 燕은 도철문(饕餮文)과 山雲文등이 많았다.

 

일본토기













 

얼굴모양 장식





왼쪽 무인용(武人俑), 오른쪽 문인용(文人俑)

唐의 무덤장식물





1.말(馬俑) 唐, 전 허난河南 뤄양洛陽 출토, 1920년 3월 30일,에토 나미오(江藤濤雄)에게서 구입
2.말 모는 사람(牽馬俑) 唐, 1923년 8월8일,이케우치 도라요시(池內虎吉)에게서 구입


조선총독부의 학술조사




1912년 10월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1870~1953)는 만주로 향하였다. 조선총독부의 든든한 지원 아래 화가, 사진사, 통역, 헌병이 그와 함께 하였다. 영화 4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이었지만, 만주 일대의 풍광과 그곳에서 활동했던 이들의 유적을 사진과 그림에 담았다.


도리이 류조는 조선총독부 촉탁이 되어 1911년부터 1916년까지 8차례에 걸쳐 조선을 조사했고, 그 가운데 2회는 만주까지 포함되었다. 오랫동안 일본 인종의 기원에 관심을 가졌던 그에게 이 조사는 한국인을 포함하여 한반도, 만주 및 시베리아 일대의 민족과 일본인 사이의유사점을 찾는 작업이었다. 그의 조사 결과는 일제가 주장했던 일선동원론(日鮮同源論 :조선인과 일본인은 같은 뿌리)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도리이 류조는 京城(서울)에서 의주, 창성, 초산, 강계, 滿浦, 臨江, 丹東, 集安, 通化, 柳河, 하이퉁, 카이위안, 창춘, 선양, 뤼순을 거쳐 경성으로 돌아왔다.






사진과 글 : 권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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