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은 초행길이었다. 첫눈이 오던 열흘 전 어머니가 갑자기 소쇄원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이루어진 여행이었는데 결국 모자간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네 시간을 운전해서 도착한 소쇄원은 눈 속에 묻혀 한 폭의 동양화 같았다.
외원(外園) 대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은 천리 남도 길을 달려온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는 듯 했다. 어머니를 부축하며 눈길을 걸어 애양단(愛陽壇) 담장을 지나 제월당(霽月堂)을
거쳐 광풍각(光風閣) 마루에 나란히 앉아 눈 내리는 고즈녁한 풍광을 말없이 내려다보시던
어머니가 말씀을 하셨다.
“그 때도 오늘처럼 눈이 내렸지.”
그리고 나서 어머니는 마치 먼 옛날로 홀로 여행을 떠난 듯한 눈으로 계곡을 휘감아 도는 바람에 흰 나비 떼 같이 날아다니는 눈송이를 하염없이 바라보셨다.
“제광아! 네 아버지를 처음 만난 곳이 이 곳이란다.”
처음 이 곳을 가자고 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했었지만 막상 어머니로부터 아버지 얘기가 나오니까 일순 가슴이 먹먹해졌다. 외갓집이 이 근처이지만 한 번도 왕래가 없었고 더군다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30년 동안 어머니와 나 사이에 암묵적으로 약속된 절대 불가침의 금단의 영역이었다.
“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와 있었지. 오늘처럼 눈이 오던 날이었지. 갑자기
소쇄원 설경이 보고 싶어 이 곳을 왔더란다. 그 때 여기서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이
있었단다. 그 사람은 아름다운 소쇄원의 설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옆에 내가 다가가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지.“
어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잠시 기둥에 등을 기대어 눈을 감으셨다. 얼굴은 오랜 병고에
홀쭉하게 수척해졌지만 두 뺨엔 홍조가 깃들었다.
“그 사람이 눈 속에 떨어뜨린 카메라 케이스를 내가 집어주고 그렇게 만난 게 결국엔 인연이
되었어. 폭설로 일찍 차가 끊겨서 내가 그 사람이 묵을 민가를 소개해주고 그 다음 날 다시
만났지. 그 사람 부탁으로 나는 이 근처 식영정, 송강정, 면앙정 등 이름난 유적지를 안내해 주고 그 사람은 열심히 사진을 찍었어. 아, 그 사람은 서울의 유명한 신문사의 사진기자였어,
겨울 특집 촬영으로 출장을 왔다고 했어“
눈발은 점차 약해지고 맑고 깨끗한 소쇄한 바람이 어머니의 열기를 식혀주는 듯 했다.
“기약 없이 헤어진 그 사람을 다시 만난 건 겨울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야.
글쎄 강의실 밖에서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지 않겠니? 놀라움보다는 반가운 감정이 훨씬 컸던 걸 보면 내심 그 사람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 아무튼 그 날 이후 두 사람은 1년 여를 거의 매일 만나며 소쇄원 인연을 이어 갔고 결혼까지 약속했단다.“
눈은 완전히 그치고 이따금 다니던 방문객의 인적도 끊겼지만 어머니는 일어설 기색이 없었다.
“결혼 날짜를 잡자 그 사람이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어. 부인이 있다는 거야.
말하자면 그 사람은 유부남이었어. 나는 그래도 부인과 이혼하고 결혼하겠다는 그사람의 말을 믿고 기다렸지. 그런데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더욱 놀라운 소식이 그 사람 집으로부터 왔어.
그사람이 교통사고로 그만 죽었다는 거야. 뱃속에는 네가 자라고 있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영악하고 조숙한 아이였다. 유복자로 태어난 나는 어머니의 자존심을 위해서도 아버지에 대해서 먼저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뼈대 있는 집안을 망신시켰다는 외할아버지의 절연 선언으로 외갓집과도 왕래가 없었고 미혼모로서 평생을 홀로 사셨다.
지방에서 중학교 영어선생님을 하시면서 아버지의 부재를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지극정성으로 가르치고 키워 주셨다.
“제광아! 나는 네가 자랑스럽고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이제 내가 하늘나라에 가면 네가
이렇게 아버지를 닮아 훌륭하게 헌헌장부로 자랐다고 떳떳하게 이야기하마”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는 한 말씀도 없으셨지만 입가에는 가끔 미소가 번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불현듯 내 이름 제광이가 소쇄원의 제월당과 광풍각의 두음을 딴 것임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소쇄원을 다녀온 지 정확히 보름 만에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위암으로 투병하시다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소쇄원의 바람처럼 그렇게 가셨다.
장례식 날은 소쇄원에 갔을 때처럼 눈이 왔다. 유골함을 안고 화장장을 나와 장의차를 타는데 먼발치에서 희끗희끗한 머리를 한 초로의 신사가 우두커니 서서 눈을 맞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신사의 모습이 나를 그대로 닮았다. 아니 내가 그 신사를 빼닮았음을 단번에 알고 나는 한참을 우두망찰 서 있었다.
*후기*
이 글은 지난 주 문화역사탐방모임 친구들과 함께 소쇄원을 갔다 온 후 아주 오래 전에 아내로부터 들은 소쇄원에 얽힌 사랑 이야기가 생각나서 복원해 재구성한 것이다.
시간이 나면 눈에 덮인 소쇄원을 다시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