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만에 다시 찾은 국립중앙박물관
5개월만에 다시 찾은 국립중앙박물관
오전까지 쏟아지던 늦은 장마비가 오후들면서 잦아들어 <탐방>하기엔 안성맞춤입니다. 집합시간(오후 3:20) 훨씬 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탐방단들, 먼저 들어가라는 姜翁을 뒤로하고 고대관 입구로 갑니다. 2명의 여성 해설자가 기다리고 있는데, 눈에 많이 익은 키작은 여인은 지난번 우리 안내를 맡았던 그 해설자네요. 백제, 신라를 주로 보고 싶다는 말에 이 여인이 바로 우릴 백제관 앞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백제, 가야, 신라 그리고 통일신라의 유물 가운데 중요한 몇점을 골라 약 1시간에 걸쳐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 중에서도 각관당 1점만을 뽑아 인터넷君의 도움을 받아 사진과 함께 올리니 부디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사실 들었던 해설 내용이 아득하여 잘 기억이 나지 않기에 -_-;; )
<백제관>
백제금동대향로
1993년, 부여 인근 능산리고분 기념관 주차장을 확장하는 공사를 진행하던 중 놀라운 유물 하나가 발견하는데, 이것이 바로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이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도 곧 잘 비견되는 걸작 금동대향로는 그 명성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사비백제' 시대를 연 성왕은 554년 신라와 벌인 관산성(충북 옥천) 싸움에서 위기에 처한 왕자를 구하러 직접 달려가지만 허망하게 전사하고 만다. 삼국사기는 "왕이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혼전 중에 임금이 살해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왕자가 왕위에 오르니 위덕왕(재위 554~598년)이다. 복수할 겨를도 없이 고구려군도 웅천성(공주)을 침공해오니 백제 사회는 크게 동요한다. 이런 혼란 가운데 위덕왕은 567년 왕실 사찰을 지었다고 하는데.... 갓 즉위한 위덕왕은 흔들리는 통치 기반을 확고히 하고 실추된 왕권을 지켜려 . 밖으로 수(隋) 등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고, 안으로는 백성들 사이에 신망이 컷던 부왕을 모시는 능산리사찰을 짓기 시작한다. 사찰과 사비왕궁 사이에서 목제다리와 도로 등도 발굴되었는데. 다리의 너비는 6m가 넘고 수차례 보수한 흔적도 나왔다. 이로 미루어봐 위덕왕이 이곳을 빈번하게 드나들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향로도 이시기에 만들어진듯 하다.
당연히 향로 제작에는 백제 최고의 장인들이 동원됐을 게 분명하다. 향로는 이형잡종의 서수(瑞獸), 인면조신(人面鳥神), 인면수신(人面獸神) 등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용과 전설 속의 봉황, 고관과 우의를 입은 선인 등 다른 차원의 생물체가 낙원인 神山에서 공존하는 모습이 표현되었다. 위덕왕은 불멸과 국가안녕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향로에 새겨 넣은 것이리라. 이 향로가 중국에서 제작돼 한반도로 건너왔다는 중국 일각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박산향로' 계통인 금동대향로는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중국에서 한 무제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건 사실이나 그후 한반도 등 동아시아 지배층 사이에서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백제금동대향로는 그 우아함과 세밀함이 중국 것과 차이를 보이고 있기에..
<가야관>
철갑옷
가야는 백제나 신라에 비해 약한 존재로 비쳐지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를 보면 가야가 과연 그 당시에 약소국이라고만 보아야 하는지에 의문이 간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풍부한 갑옷과 무기들이며, 이들은 가야의 무력이 결코 약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이를 통하여 한반도 남부에서 가야의 세력은 한때 신라를 압도할 정도라고 보기도 하며, <삼국사기>에서도 그러한 기록들은 종종 보인다.
우리나라 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무기와 갑옷 분야에서 학자들이 가장 많이 참조하는 자료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발굴을 통해 출토된 유물들이다. 이 중에서 출토된 갑옷들 중 3/4정도는 옛 가야가 있던 곳에서 출토되었으며 다른 백제나 신라에 비해서도 그 수가 압도적이다. 갑옷의 존재는 그 당시 발달되어 있던 군사문화를 잘 말해준다. 또한 갑옷의 생산은 철제품 중에서도 가장 고난이도의 작업이 필요하며,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서는 그만큼 발달된 철제 가공능력과 과학이 필요하다.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갑옷들은 그런 점에서 당시의 뛰어난 과학수준을 잘 말해주고 있으며, 동시에 과학의 발달사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가야의 갑옷들은 김해 대성동고분군이나 부산 복천동고분군 등에서 널리 보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위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야는 이 갑옷과 무기들을 통하여 강대한 무력을 자랑하였고, 한때는 신라를 압박하는 수준까지 이를 정도로 강성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가야가 철갑옷의 메카가 된 것은 가야지방에 철이 풍부했고 철을 다루는 기술 또한 앞서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야는 철제품을 팔아 지방 토호족까지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어 굳이 강력한 통일국가의 필요성이 없었다고 해석하는 사학자도 있다. 그리고 이런 요충지를 빼았들기 위해 주변 신라나 백제가 끊임없이 침략했다는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신라관>
신라 황남대총금관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 북분에서 발견된 금관. 신라 금관을 대표하는 것으로 높이 27.5㎝, 아래로 늘어뜨린 드리개(수식) 길이는 13∼30.3㎝이다. 이마에 닿는 머리띠 앞쪽에는 山자형을 연속해서 3단으로 쌓아올린 장식을 3곳에 두었고, 뒤쪽 양끝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2곳에 세웠다. 푸른 빛을 내는 굽은 옥을 山자형에는 16개, 사슴뿔 모양에는 9개, 머리띠 부분에 11개를 달았다. 또한 원형의 금장식을 균형있게 배치시켜 금관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였다.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는 좌·우 각각 3개씩 대칭으로 굵은 고리에 매달아 길게 늘어뜨렸다. 바깥의 것이 가장 길고, 안쪽으로 가면서 짧아진다. 장식 끝부분 안쪽에는 머리띠 부분과 같은 푸른색 굽은 옥을 달았고, 바깥쪽에는 나뭇잎 모양의 금판을 매달았다. 발견 당시 금관과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들이 분리되어 있었다. 이 금관은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어느 것보다도 굽은 옥을 많이 달아 화려함이 돋보이고 있다.
참고로 세계적으로 금관은 10점인데 그중에 8점이 한국에서 나왔으며 8점중 이 황남대총금관이 제일 아름답다고 한다.그런데 이 황남대총 북분은 여자묘가 분명한데, 여왕의 무덤은 아니라고 한다. 여왕의 묘도 아닌데도 이렇게 순금으로 아름답게 장식했으니, 금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조금도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는 산 증거가 아닐까.
<통일신라>
돌상자와 뼈단지(石函 骨壺)
국보 제125호인 뼈단지와 골상자는 통일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화장한 후 남은 뼈를 담는 안그릇과 그것을 보호하는 바같그릇인 돌상자가 셋트를 이루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장골용기(藏骨容器)라 부른다. 합형(盒形)인 안단지는 항아리와 뚜겅으로 구성되며, 전체적으로 구형에 가깝다. 뚜껑은 완만한 반구형을 이루며, 항아리는 짧은 구면에 뚜껑받이턱이 있고 바닥은 둥굴다. 항아리와 뚜껑에는 꽃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고, 안팎으로 초록색의 유약이 고르게 입혀져 있다. 화강으로 된 둥근 바깥 돌상자는 뚜껑과 몸토으로 구성되있고 표면은 꽃모양으로 각지도록 다듬어져 있다
이 장골용기는 1966년 일본에서 환수된 1,326점의 문화재 중 한점으로, 해방전 한 일본 수집가에 의해 일제 패망 직전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쿄국립박물관에 수장되었던 것으로,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67년에는 뼈항아리 중 위의 항아리가 가장 뛰어나고 아름다워 국보로 지정되면서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가 된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 홀에 옮겨 전시된 경천사지(敬天寺址-개성) 10층석탑 앞에서 한방 (유근국 회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