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아시는 벗님들이 많겠지만, 안서(岸曙) 김억 선생의 시 '동심초'는 唐나라 여류시인 설도(薛濤, 770?~832 )의 춘망사(春望詞)를 번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원문의 느낌을 그대로 지니면서도 우리말 특유의 정서를 잘 살린 사실상의 창작시라 하지요.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을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風花日將老
佳期猶渺渺
不結同心人
空結同心草
선생은 이 시의 4번째 구절 마지막 3자를 빼내어 시제로 삼았는데, 이 또한 대단한 시적 감수성이라 느껴지네요. 이런 애닲은 시를 지은 설도(薛濤)는 빼어난 미모까지 갖추었기에 悲戀의 연속이었는데, 가인(佳人)은 박복하다는 말이 이 여인을 두고 이른 것 같습니다.
두보의 詩都에서 시짓는 기생(詩妓)으로
대시인 두보가 만년을 보낸 장강 중류 촉도(蜀都, 지금의 四川 成都)에서 걸출한 여시인이 탄생한 건 우연인가요. 설도의 생몰년대에는 이견이 많은데, 일설에 의하면 설도가 2살 때 두보가 졸하였다고도 합니다. 원래 설도가 태어난 곳은 당나라의 서울인 長安인데 어릴적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촉도로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근에서 일어난 난을 평정하다 아버지가 전사하고, 이어서 어머니 마져 죽자 호구지책으로 기생이 되었다네요. 당연히 설도의 재능과 미모에 당대의 내노라하는 고관대작과 詩人墨客들이 불원천리 몰려와 기방의 문지방이 닳아 없어질 정도였다나...
사랑에 속고 배신에 울고
설도가 기생으로 들어간 초년 쯤, 당시 사천절도사 (韋皐, 혹은 武元衡이라는 설도 있음)이 지극히 총애하여 술시중을 들게 하고, 심지어 교서랑(敎書郞)이라는 벼슬까지도 준 적이 있었답니다. 그러나 설도에게 지울수 없는 사랑의 상처를 안긴 건 의리없는 바람둥이 원진(元稹)의 배신입니다. 당시 원진은 잘 나가는 관리이며 詩人(백거이와 맞먹는 詩名을 날림)으로 동천감찰어사란 직책으로 사천지방으로 오면서 둘 사이에 로맨스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작자는 출세에 눈이 먼 사람으로 명문가의 규수 최앵앵과 혼약하고는 그 집안이 기울자 미련없이 버립니다(이 이야기는 西廂記란 희곡으로도 출간되는데, 춘향전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함). 그는 이미 절강 소흥(昭興)의 명기를 농락하여 자살에 이르게 한 전과도 있었다네요. 원진은 당시 권력자였던 재상의 딸 위총(韋叢)과 결혼하여 출세의 가도를 달립니다. 결국 원진과의 러브스토리는 설도가 단념함으로서 비극적으로 막을 내립니다. 버들솜(柳絮)같은 남정내의 마음이여!
二月楊花輕復微 봄날 버들솜 꽃 가볍고도 작아서
春風搖蕩惹人衣 봄바람에 날아와 옷깃에 휘감기네
他家本是無情物 저놈들(버들솜)이야 본디 무심할 터
一向南飛又北飛 한편으로 남으로 또 북으로 날아가네.
미남자 두목지와의 사랑도 내려놓고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소개에 '문장은 이태백, 글씨는 왕희지요. 풍채는 두목지라...' 비슷한 사설이 나오는데, 바로 이 동양의 최고 미남이며 대풍류객인 두목지와도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답니다. 일찌기 두목지가 楊州에서 작은 벼슬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지나가는 수레에 양주 기생들이 던져주는 귤로 가득할 정도로 인기짱이었던 미남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두목지가 촉도로 오게 됨에 두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이 역시 연상이었던 설도의 눈물어린 결별로 맺지 못하게 됩니다.
♣ 설도전(薛濤箋) :
설도가 창안하여 만들기 시작했다는 색종이. 설도는 하얀 종이가 죽음을 상징하는 등 불길하다 여겨 종이를 만들때 꽃잎이나 천연 염료를 넣어 여러가지 색상의 색종이를 만들었다고 함. 특히, 나중에 그녀를 배신한 원진과의 사이에 서신은 주로 이 색종이 편지지를 썼다고 전해짐(설도가 죽은 후, 이 기술을 전수받은 이가 설도전으로 떼돈을 벌었다니, 중국넘들의 상사속이란 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