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제목으로 본 여인의 한(恨)
지금이야 여성상위시대라 남자들이 오히려 주눅들어 살지만, 불과 2, 3십년전만 해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하고 홀대받기 일수였지요. 그러니 사내들의 서슬이 시퍼렇던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겠지요. 억눌려 살았던 여자들의 원망(怨)과 한(恨)이 한시의 제목으로도 눈에 많이 띄는데, 다만 한문을 배운 일부 사대부집 여인과 기녀(妓女)의 작품에서 엿볼수 있습니다(남자가 여자를 대변해서 쓴 경우도..). 아이러니하게도 대다수의 교육을 받은 반가(班家)의 여자들도 한문에 익숙치 않았는데, 오히려 시인묵객의 놀이터었던 기방(妓房)에는 漢詩를 해득하고 직접 지을 수 있는 여인들(解語花)이 적지 않았다네요,
여인이 '한(恨)'을 품게 되는 과정은 처지와 신분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시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속상함(傷)이 시름(愁)이 되고 시름이 깊어지면 원망(怨)하는 마음이 생기겠지요. 그리고 원망이 쌓이면 마침내 한(恨)이 되는 게 아닌가요.
1. 속상함(傷)
自傷(스스로 속상해) / 梅窓*(조선, 1573~1609)
一片彩雲夢(일편채운몽) 한조각 꽃구름 같은 꿈
覺來萬念差(각래만념차) 깨어나니 만감이 교차하네
陽臺何處是(양대하처시) 임과 다시 만날 누대는 어디런고,
日暮暗愁多 일모암수다) 날은 저물어 어둑하고 시름만 더해가는데
自傷(스스로 속상해) / 梅窓*(조선, 1573~1609)
夢罷愁風雨(몽파수풍우) 꿈을 깨니 근심스런 비바람
沈吟行路難(침음행로난) 세상살이 어려움에 작은 소리로 읊조리네
慇懃樑上燕(은근량상연) 들보 위의 제비는
何日喚人還 하일환인환) 어느 날에나 은근히 임을 불러 돌아오려는지
(*본명은 향금(香今), 매창(梅窓)은 호인데 계랑(癸娘 또는 桂娘)이라고도 부름. 詩文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는데, 특히 유희경과의 로맨스는 유명하지요.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名妓로 쌍벽을 이루는데, 미인박명이라던가, 37세에 요절하지요. 문집으로 '梅窓集')
傷春(봄을 타다) / 梅窓
不是傷春病(부시상춘병) 이것은 봄을 타는 병이 아니고
只因憶玉郞(지인억옥랑) 다만 임을 그리워한 탓이네
塵豈多苦累(진기다고루) 티끌 같은 세상 괴로움 거듭되니
孤鶴未歸情(고학미귀정) 이 외로운 학 죽고만 싶은 마음
2. 시름(愁)
離愁(이별의 시름) / 李玉峰*(조선, 1550년대 후반에 출생 35세 쯤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
深情容易寄(심정용이기) 깊은 속마음을 쉽게 전하려
欲說更含羞(욕설갱함수) 말로 하려니 더욱 부끄럽네요
若問香閨信(약문향규신) 만일 내 소식 묻거든
殘粧獨依樓 잔장독의루) 화장 안 지우고 홀로 누각에 기대있다 하소서
(*玉峰은 호이고 본병은 숙원(淑媛).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충북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의 서녀입니다. 비록 첩의 딸이었지만 재주가 뛰어나 남의 첩살이를 원치 않았고 시인묵객들과 어울였다네요. 그때 조원(趙瑗)이라는 젊은 선비와 만나 사랑에 빠져 첩실로 들어가지요. 그러나 재주많은 게 오히려 화가 되어 버림을 받게 됩니다.)
春愁(봄 시름) / 錦園*(1817~?, 조선 순조대)
池邊楊柳綠垂垂(지변양류록수수) 못가의 버들은 녹색으로 드리우고
蠟曙春愁若自知(납서춘수약자지) 밀초도 새벽 봄시름을 절로 아는듯
上有黃隱啼未己(상유황은제미기) 나무 위 꾀꼬리 울음 그치지 않는 것은
不堪趣紂送人時(불감취주송인시) 임을 보내는 슬픔 이기지 못함입니다
(*錦園은 그녀의 호로 때로는 남장을 하고 금강산 등 관동지방과 의주 등 관서지방 그리고 한양 일대를 유람하면서 시를 썼다고 합니다. 여성의 신분이 신장하기 시작하던 당시, 여류시인의 모임인 삼호정(三湖亭)시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고 하네요.)
3. 원망(怨)
閨怨(신부의 원망) / 王昌齡*(698~765, 盛唐) ☞ 閨는 여자들이 거처하는 안방을 지칭
閨中少婦不知愁(규중소부불지수) 규방의 어린 색시 시름을 모르고서,
春日凝粧上翠樓(춘일응장상취루) 봄날 곱게 화장을 하고 푸른 칠을 한 누각으로 올랐네
忽見陌頭楊柳色(홀견맥두양류색) 문득 길가의 버드나무 파랗게 잎 피어났음을 보더니만,
(*왕창령은 이백과 동시대의 무인 겸 시인으로 변새시(邊塞詩)를 많이 지은 이로 알려져 있는데, 위의 시는 남편을 출세시키기 위해 변방으로 보낸 어린 신부의 뒤늦은 회한을 남자인 작가가 대신 읊은 것)
閨怨(소녀의 원망) / 林悌*(1549-1587, 조선)
十五越溪女 羞人無語別(십오월계녀 수인무어별) 열다섯 살의 아리따운 아가씨 부끄러워 말도 못하고 헤어졌네. 돌아와 문닫아 걸고는 배꽃 하얀 달을 보며 눈물 흘리네. 閨怨(아내의 원망) / 許蘭雪軒*(1563~1589, 조선) 月樓秋盡玉屛空(월루추진옥병공) 달뜨는 누각에 가을 다 가는데 옥병풍은 비어 있고 瑤琴一彈人不見(요금일탄인부견) 거문고 타고 있어도 임은 보이지 않고 (*허난설허은 허균의 친누나로 三唐시인 중 최고라는 이달에게서 시를 배움. 못난 남편과 시어미 구박에다 아들 딸 두 자식마저 먼저 보내고 시름속에 28살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지요. 美人薄命-_-;;) 閨怨(아내의 원망) / 曺臣俊*(1573~?, 조선) 金風凋碧葉 玉淚銷紅頰(금풍조벽엽 옥루소홍협) 瘦削只緣君 君歸應棄妾(수삭지연군 군귀응기첩) (*조신준은 선조대의 문인. 위 시는 여인의 심정을 잘 대변한 작품임.) 閨怨(一)(여자의 원망) / 梅窓(1573~1610, 조선) 離懷悄悄掩中門(이회초초엄중문) 이별의 아픔 품고 소리없이 문을 닫아 거니 羅袖無香滴淚痕(나수무향적루흔) 비단 소매엔 임의 향기는 없고 떨어진 눈물자욱만 獨處深閨人寂寂(독처심규인적적) 홀로 지내는 깊은 규방 사람없어 적적한데 一庭微雨鎖黃昏(일정미우쇄황혼) 뜨락에 가랑비 저녁놀까지 막는구나
歸來掩重門 泣向梨花月 (귀래엄중문 읍향이화월)
(*조선조 손꼽히는 바람둥이 임제는 여인의 마음을 잘 아는 詩客으로 유명한데 이 작품 역시 마치 여인이 직접 쓴듯하지요.)
霜打廬洲下暮鴻(상타여주하모홍) 서리 친 갈대밭에는 저녁 기러기가 내려앉네요.
藕花零落野塘中(우화영락야당중) 연꽃은 연못 속으로 시들어 떨어지는구나.
가을바람에 푸르던 잎은 시들고, 옥 같은 눈물 붉은 뺨을 지우네.
여윈 것이 그대 때문이련만, 임 돌아와 보고는 산다 안 산다 하시려나
相思都在不言裏(상사도재불언리) 서울 계신 그리운 임께 심중을 말도 못하고
一夜心懷鬢半絲(일야심회빈반사) 하룻밤 시름으로 머리는 반백이 되었네
欲知是妾相思苦(욕지시첩상사고) 얼마나 그림움에 괴로운지 알고 싶으면
須試金環減舊圍(수시금환감구위) 모름지기 금가락지 헐거워진 손가락 보소
昭君怨(왕소군의 원망) / 東方虯(동방규*, 5세기 初唐)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엔 꽃과 풀이 없어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네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절로 윗옷과 띠가 느슨해진 것이지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이것이 몸매를 위한 것은 아니라오
(*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 동방규(東方虯)란 무명의 시인이 漢나라의 미인 왕소군을 두고 읊은 소군원삼수(昭君首) 가운데 세 번째 연에 나옵니다. 오랑캐 땅으로 끌려간 절세미인 왕소군이 향수병으로 여위어가는 가련한 모습을 그린 시로, 왕소군은 날으는 기러기 조차 그 미모에 취해 떨러졌다 하여 落雁이라는 별명이 있지요. '春來不似春'이란 명구는 이름도 없는 동방규라는 이의 시에서 나옵니다.)
秋怨(가을의 원망) / 魚玄機*(843?~868? 晩唐)
自歎多情是足愁(자탄다정시족수) 정이 많은 것도 바로 시름임을 절로 탄식하나니況當風月滿庭秋(황당풍월만정추) 하물며 바람과 달빛 가득한 가을 뜨락에서랴
洞房偏與更聲近(동방편여경성근) 방안 구석까지 가까이 들려오는 인경소리
夜夜燈前欲白頭(야야등전욕백두) 밤마다 등불 앞에서 백발이 되어가누나
(*어현기(魚玄機)는 당나라 후기의 여류시인으로, 당대의 문인 皇甫枚는 그녀를 “얼굴은 경국지색이요, 재주는 신의 경지에 이르러 책읽고 글짓는 것을 좋아하여 짓고 읊조리는 것에 정성을 다했다 (色旣傾國, 思乃入神, 喜讀書屬文, 尤致意于咏.)”고 극찬한다. 그녀는 당대의 많은 유력 인사들과 염문을 뿌렸는데, 치정관계로 연적인 녹교(綠翹)를 죽여 젊은 나이로 처형을 당한다, 佳人薄命이라던가~~)
4. 한(恨)
閨恨(여인의 한) / 李玉峰*(조선, 1550년대 후반에 출생 35세 쯤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
平生離恨成身病(평생이한성신병) 평생 이별의 한이 병이 되어
酒不能療藥不治(주불능료약불치)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합니다.
衾裏泣如氷下水(금리읍여빙하수) 이불 속 흐느낌 얼음장 밑의 물과 같아
日夜長流人不知(일야장류인부지) 밤낮없이 흘러도 남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옥봉은 허난설헌에 비견할 재능을 지닌 여류시인으로, 졸장부 조원의 후실로 들어갔다 내침을 받고 지은 시 -_-;;
別恨(이별의 한) / 李玉峰(조선) 明宵雖短短(명소수단단) 임 떠난 내일 밤이야 짧고 짧더라도 今夜願長長(금야원장장) 임 오신 오늘 밤만은 길고 길어지소서 鷄聲聽欲曉(계성청욕효) 닭우는 소리 들리고 새벽이 밝아오는데 雙瞼淚千行(쌍검루천행) 두 뺨에 천갈래 눈물이 흐르네 自恨(스스로 한이되어) / 梅窓(1573~1609 조선)
春冷補寒衣(춘냉보한의) 봄날이 차 겨울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사창일조시)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네 低頭信手處(저두신수처) 머리숙여 손길 가는대로 맡기는데 珠淚滴針絲 주루적침사)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위에 떨어지네
秋恨(가을의 한) / 許蘭雪軒(1563~1589, 조선) 縫紗遙隔夜燈紅(봉사요격야등홍) 비단창 넘어 멀리 밤 등불 붉은데 夢覺羅衾一半空(몽각라금일반공) 꿈에서 깨어보니 비단이불 한켠이 비었구나 霜冷玉籠鸚鵡語(상냉옥룡앵무어) 서리 차가운 새장에 앵무새는 울고 萬階梧葉落西風(만계오엽낙서풍) 가을 바람에 떨어진 오동잎 뜰에 가득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