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漢 말기(建安年間), 세상은 어지럽고 民草들은 도탄에 빠져
漢季失權柄(한계실권병) 漢나라 말년에 황실이 권세를 잃으니
董卓亂天常(통탂란천상) 동탁이 하늘의 상도를 어지럽혔도다.
志欲圖篡弑(지욕도찬시) 옥좌를 찬탈하고 황제를 시해하고자
先害諸賢良(선해제현량) 먼저 뭇 어진이들을 해치는구나
逼迫遷舊邦(핍박천구방) 황제를 겁박하여 옛 도읍으로 옮기고
擁主以自強(옹주이자강) 임금을 끼고 세도를 부리니
海內興義師(해내흥의사) 나라 안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欲共討不祥(욕공토불상) 함께 역적을 치고자 하나 여의치 못했다.
(中略)
獵野圍城邑(엽야위성읍) 난적들이 들을 마구 짓밟고 성읍을 에워싸니
所向悉破亡(소향슬파망) 향하는 데마다 다 부서지고 망가지는구나
斬截無孑遺(참절무혈유) 몸이 베어지고 잘려 살아남은 자가 없고
屍骸相撐拒(시해상탱거) 시신들이 서로 지탱하며 쌓여 있구나
欲死不能得(욕사불능득) 죽고자 하나 죽을 수도 없고
欲生無一可(욕생무일가) 살고자 해도 그 또한 되지 않는구나!
彼蒼者何辜(피창자하고) 저 많은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어
乃遭此厄禍(내조차액화) 이런 재앙을 당해야 되는지
(後略)
'비분의 시(悲憤詩)' 의 일부를 뽑아 옮긴 것인데, 놀랍게도 지은 이는 후한 말기(建安年間)의 여류시인 채염(蔡琰, 일명 蔡文姬, 177?~239)이 쓴 것입니다. 긴 詩의 일부 만을 추려 옮겼음에도 당시 사회가 얼마나 혼란했고 백성들이 무슨 고초를 당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지요.
西京亂無象(서경란무상) 서경의 난리는 형언할 수가 없어,
豹虎方遘患(시호방구환) 늑대나 호랑이와 맞딱드릴까 두렵네.
出門無所見(출문무소견) 문을 나서면 보이는 건 없고,
白骨蔽平原(백골폐평원) 백골만이 들판을 덮었구나
路有飢婦人(로유기부인) 길에는 굶주린 아낙네들,
抱子棄草間(포자기초간) 품에 안은 자식을 풀밭에 버린다
顧聞號泣聲(고문호읍성) 뒤 돌아보면 아이 울음소리 들리지만
揮涕獨不還(휘체독불환) 눈물을 흘릴 뿐 돌아가지 못하네
건안칠자(建安七子)* 중의 한사람 왕찬(王粲, 176~217)이 지은 '7가지 슬픔의 시(七哀詩)'의 일부로 당시의 참상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비분강개한 시를 주로 짓는 시인들이 조조(曺操, 155~220)와 그 두 부자 (曺丕와 曺植) 주위에 모여들어 하나의 문학 그룹을 형성합니다. 이들을 건안풍골(建安風骨)이라 일컬어 백성들의 고통과 나라의 어지러움을 개탄하는 많은 시를 지어, 이후 한시의 하나의 사조를 이루게 되지요.
*건안칠자(建安七子)는 후한(後漢)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의 건안 연간(196∼220)에 조조(曹操)와 두 아들(曹丕,曹植) 그리고 공융(孔融),·진림(陳琳),·왕찬(王粲),·서간(徐幹),·완우(阮瑀),·응창(應瑒),·유정(劉楨) 등 조씨 삼부자 밑에서 활약한 문학 집단 가운데 특히 뛰어난 재자(才子) 7인을 가리킵니다. ‘업하(鄴下)의 칠자’라고도 하지요.
憑軒檻以遙望兮 向北風而開襟(빙헌감이요망혜 향북풍이개금)
난간에 기대어 아득히 바라보며, 북풍을 향해 가슴을 열도다
平原遠而極目兮 蔽荊山之高岑(평원원이극목혜 폐형산지고장)
먼 들판 눈 가는데 까지 쳐다보니, 형산(荊山)의 높은 봉우리가 가로막네
路逶迤而修逈兮 川旣漾而濟深(로위이이수형혜 천기양이제심)
길은 구불구불 아득히 이어져, 강물은 벌써 출렁거려 건너기에는 깊구나
悲舊鄕之壅隔兮 涕橫墮而弗禁(비국향지옹격혜 체횡타이불금)
슬프도다 고향으로 가는 막힘에, 눈물이 빗겨흘러 멈추지 않는구나
建安七子 왕찬의 유명한 '등루부(登樓賦)' 3단 중 제2단의 일부를 뽑은 것입니다. 후한말 동탁의 난리를 피하여 공향인 형산(荊山, 장강 유역 楊州 서북쪽에 위치) 강릉성루(江陵城樓)에 올라 회한을 읊은 절창으로 그후 많은 시인묵객들이 노래하고 차운(次韻)하고 또 붓으로 쓴 작품이라고 합니다.
비분강개(悲憤慷慨) 건안풍골(建安風骨)
田中有轉蓬(전중유전봉) 밭 가운데를 뒹구는 다북쑥처럼
隨風遠飄揚(수풍원표양) 바람따라 멀리까지 날아가는구나
長與故根絶(장여고근절) 오랜동안 원 뿌리와 떨어져
萬歲不相當(만세불상당) 평생을 서로 만나지도 못하네
奈何此征夫(내하차정부) 어찌하리오, 이렇게 전장에 나온 장부가
安得去四方(안득거사방) 사방 어딘들 아니 갈수 있으리오
戎馬不解鞍(융마불해안) 말의 안장도 풀지 못하고
鎧甲不離傍(개갑불리방) 갑옷을 옆에 벗어 놓지도 못하네
조조(曺操, 155~220)가 출병하면서 쓴 '그래도 동으로 서로 행군하다(却東西門行)' 란 제하의 시입니다. 찌르면 피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조조가 바람에 흩날리는 다북쑥 같은 신세임을 토로하면서, 그래도 싸우러 나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읊고 있네요.
白馬飾金羈(백마시금기) 백마는 금 굴레로 장식하고
連翩西北馳(연편서북치) 쉬지 않고 서북으로 치닫는다
借問誰家子(차문수자가) 묻노니, 뉘 집 아들인가
幽幷游俠客(유병유협객) 幽州와 幷州*를 넘나드는 협객
*幽州와 幷州 : 전국시대 연(燕)나라와 조(趙)나라의 옛 도성
(中略)
仰手接飛猱(앙수접비노) 손을 들어 날으는 원숭이를 잡고
俯身散馬蹄(부신산마제) 몸을 굽혀 말의 발굽을 부순다
狡捷過猴猿(교첩과후원) 민첩함을 원숭이를 능가하고
勇剽若豹螭(용표약표리) 용맹함은 표범이나 교룡과 같구나
(後略)
조조의 셋째 아들로 문재가 뛰어난 조식(曺植)의 시 '백마의 노래(白馬行)' 의 일부입니다. 여기에 묘사된 사람이 본인을 지칭하는지는 모르나, 조조가 한때 셋째 아들을 후계자로 찜(?)한 때가 있었기에 조식도 그런 속내를 여러 군데에서 나타내고 있지요. 암튼 글쟁이 정도로 알려진 조식의 호연지기가 느껴집니다.
여인의 원망하는 시(閨怨)로 변질?
秋風蕭瑟天氣凉(추풍소슬천기랭) 가을바람 소슬하고 날씨도 서늘하니
草木搖落露爲霜(초목요락로위상) 초목을 흔들어 잎이 지고 이슬은 서리가 되네요.
群燕辭歸雁南翔(군연사귀안남상) 제비들은 작별 인사를 하고 기러기 남으로 날아가니
念君客遊思斷腸(염군객유사단장) 객지에 떠도는 그대 생각에 애간장이 끊어집니다
慊慊思歸戀故鄕(겸겸사귀연고향) 원망스러워라, 그대는 고향을 그리는데,
君何淹留寄他方(군하엄류가타방) 그대 어느 타향에 머물러 계시는지요
賤妾耿耿守空房(천첩경경수공방) 소첩은 쓸쓸하게 독수공방 하며
憂來思君不敢忘(우래사군불감망) 그대 그리는 마음 떨칠 수가 없습니다
조조의 둘째 아들이며 위나라의 초대 황제(魏文帝)가 된 조비(曺丕)의 '사랑의 노래(戀歌行)' 란 제하의 시입니다. 초기 비분강개하는 건안풍골은 사라지고 남녀간의 사랑의 노래로 바뀌었네요(이 시는 최초의 7언시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음..).
借問歎者誰(차문탄자수) 탄식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니
自云宕子妻(자운탕자처) 정처 없이 떠도는 자의 부인이라네요.
君行踰十年(군행유십년) 낭군은 집나간 지 십년이 넘었는데
孤妾常獨棲(고첩상독서) 외로운 처는 항상 혼자 살고 있지요.
君若淸路塵(군약청로진) 낭군이 쓸면 말끔해질 길 위의 먼지라면
妾若濁水泥(첩약탁수니) 이 몸은 흙탕물 속의 진흙과 같습니다.
浮沈各異勢(부침각이세) 뜨고 가라앉음 각자 형편이 다르니
會合何時諧(회합하시해) 언제나 함께 만나게 될 것인지요?
조식(曺植)의 '7가지 슲음의 시(七哀詩)' 의 일부인데, 역시 앞의 시와 비슷하게 여인의 원망(閨怨)을 노래한 거네요. 그런데 다소 다른 해석은 대권이 둘째 아들로 굳어지고, 또한 조비의 핍박이 심해지자 규방 여인을 빗대어 형을 원망하는 시라는 해석도 있습니다만..
7발자국 걸으며 지은 시(七步詩)
煮豆燃豆萁(자두연두기) 콩을 삶느라 콩깍지를 태우는데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솥 안에 있는 콩은 눈물을 흘리누나
本示同根生(본시동근생) 원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음에도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서로 이리도 급하게 달구시는지
많은 이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조식의 '七步詩' 입니다. 조비가 황제가 된 후 동생에 대한 시기심으로 7발자국을 걷는 동안 시를 짓되, 형제란 말을 쓰지 않고 동기애를 나타내 보라 명하지요. 조식이 눈물로 마지막 걸음을 떼면서 읊는데, 이에 조비도 부끄러워 하며 동생을 살려줬다고.. (사실 이 시는 그 당시 지은 원문은 아니라는 게 정설입니다. 후대에 5언시로 운을 맞추고 다듬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