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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돌

한시여행(14) - 불세출의 神筆, 왕희지(王羲之)

작성자박영우|작성시간15.07.24|조회수1,077 목록 댓글 0

동양 3국이 함께 인정하는 최고의 名筆

 

 

右軍*本淸眞(우군본청진)  왕희지 선생은 본시 맑고 진실하여          *右軍 : 왕희지의 관직명인데 별호가 됨

瀟洒*在風塵(소쇄재풍진)  속세(風塵)에 살아도 시원스럽고 속기(俗氣)가 없네      *蕭洒 :맑고 시원스러움

掃素*寫道經(소소사도경)  흰 비단을 쓸고 도덕경을 써 내려가니        *素 : 흰색, 여기서는 흰 비단을 지칭

筆精妙入神(필정묘입신)   필법이 정치하여 입신의 경지로구나!

 

당나라 이백(李白)이 지은 '王右軍'이란 제하의 시의 일부인데, 우군(右軍)이란 바로 동진(東晉) 시대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관직명으로 그의 이름 대신 흔히 쓰는 명칭입니다. '글씨의 성인(書聖)'이란 말 그대로 서예의 비조(鼻祖)이며 불세출의 명필로,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에서 공히 인정하는 서예의 초고봉이지요.

(漢詩의 비조라는 도연명도 같은 동진시대 사람이라는 게 우연은 아닐듯..)

 

草聖最爲難(초성최위난)  초서의 성인이 되기는 가장 어려워

龍蛇競筆端(용사경필단)  용과 뱀이 붙끝에서 다툰다

毫釐雖欲辨(호리수욕변)  털끝 하나의 차이라도 분별되어야

體勢更須完(체세갱수완)  글씨의 모양과 필세가 더욱 완전해 진다

 

왕희지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초서 쓰는 노래(草訣歌)'의 앞부분으로, 조선시대 선비라면 다투어 익혔던 붓글씨 필법의 텍스트라고 합니다. 왕희지체가 아름다운 것은 그가 여성인 위부인(偉夫人)으로 부터 글씨를 배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씨는 뼈(骨)와 살(筋)이 조화를 이뤄 생동감이 넘치고, 힘이 느껴지는 필세라고 합니다.

 

雪作衣裳玉作趾(설작의상옥작지)  눈(雪)으로 옷해 입고 옥으로 다리를 만들어

窺魚蘆渚幾多時(규어노저기다시)  갈대숲 물가에서 물고기를 엿본 게 몇번인고

 

偶然飛過山陰縣(우연비과산음현)  우연히 산음현을 날아 지나다가

誤落羲之洗硯池(오락희지세연지)  잘못하여 왕희지의 벼루 씻던 못에 떨어졌구나

 

한편의 7언절구형의 시인데 앞뒤 2구씩 떼어 쓴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조선 초 문장 뛰어나고 시 잘 짓기로 이름난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이 중국에 갔을 때, 그의 실력을 시험해 보려고 백조를 두고 시를 지어보라 합니다. 그런데 한 聯(2구)를 지은 후 가지고 나온 그림은 검은 왜가리가 아닌가. 이에 지체없이 위와 같은 대련을 써 내려감에 원어민(?)들이 기절초풍 했다는데, 벼루를 너무 많이 씻어 온통 검은 색이 되었다는 왕희지의 연못 얘기는 우리나라에서도 人口에 회자되고 있었다는 방증이겠지요.

 

조선 후기, 문장은 물론 시와 글씨 그림(詩書畵) 솜씨를 두루 갖추고 풍채마저 빠지지 않았다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사신으로 연경(지금의 北京)에 갔을 때 얘기. 그의 재주에 반한 중국인이 강세황의 字인 광지(光之)를 빗대어, '문장은 한퇴지(당나라 문인 韓愈의 字), 글씨는 왕희지, 그림은 고개지, 인물로는 두목지를 그대는 모두 겸비했구려(文退之, 書羲之, 畵愷之, 人牧之, 光之兼之 : 갈 之 자가 열번 들어가 '10자평'이라고도 함)라 칭찬했다나요. 과장이 없지는 않겠지만, 붓글씨의 최고봉으로 왕희지를 꼽았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합니다.

 

우리나라의 왕희지 사랑은 유별납니다. 조선조 국립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에서는 유생들에게 왕희지와 조맹부(元代) 글씨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춘향전 첫머리 쯤에 '이때 사또 자제 이도령이 나이는 이팔이요, 풍채는 두목지라. 도량은 창해같고 지혜는 활달하고 문장은 이백이요 필법은 왕희지라.' 는 대목이 나오지요. 또한 장원급제하는 대목에서는 '왕희지 필법으로 조맹부 체를 받아 일필휘지 선장하니, 상시관이 글을 보고 자자이 비점이요, 구구이 관주로다’ 라는 구절도 보입니다. 암튼 범상치 않은 인물을 묘사함에 흔히 나오는 관용어구가 '문장은 이백, 글씨는 왕희지' 였다고 합니다.

 

일본은 종주국 중국보다 왕희지 글씨에 더 야단법석을 떨어서, 소학교 때부터 왕희지체를 배우고 있습니다. 당나라 구양순(歐陽詢)이 왕희지의 난정서를 베껴 썼다는 정무난정서(定武蘭亭序)를 어찌 입수했는지 토쿄국립박물관에 신주 모시듯 하고 있는 것만 봐도 짐작이 갑니다. 근래에는 왕희지의 진본 서첩을 한질 입수했다고 시끌벅적했구요.

 

*왕희지(王羲之, 307~365 ) / 다음백과사전 발췌

자는 일소(逸少). 낭야(瑯邪) 린이[臨沂 :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 린이 현(臨沂縣)] 사람이다. 아버지 왕광(王曠)은 동진 건국에 공을 세운 왕도(王導)의 사촌동생이다. 왕희지는 비서랑(秘書郞 : 궁중의 전적을 관장하던 관직)을 시작으로 회계왕우(會稽王友)·임천대수(臨川大守)·강주자사(江州刺史)·호군장군(護軍將軍) 등을 역임했다. 명문 출신이었으나 중앙정부의 관직을 구하지 않아, 351년(永和 7)에는 우군장군(右軍將軍)·회계내사(會稽內史)에 임명되어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으로 부임했다. 이 관직 이름에 의해 왕우군(王右軍)으로도 불린다. 그는 한대에 싹이 튼 해(楷)·행(行)·초(草)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까지 승화시켰다. 수대(隋代)를 거쳐 당대에 이르러서는 서예에 뛰어났던 황제 태종이 왕희지를 존중하여 그의 글씨를 널리 수집했기 때문에 왕희지의 서법이 크게 성행했다. 왕희지의 몇몇 필체와 서명은 그의 생존 당시에조차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며, 시대가 지나면서 중국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품격높은 예술인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그의 진적(眞跡)은 전해지지 않으나 난정서(蘭亭序), 십칠첩(十七帖), 집왕성교서(集王聖敎序) 등의 탁본이 전하며, 이중 가장 이름 높은 서첩은 난정서로, 여기에는 353년 계제사(禊祭祀 : 3월 삼짇날, 물가에 가서 흐르는 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제사)가 열리는 기간에 42명의 문사들이 모여 시를 짓고 술을 즐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행서로 씌어진 왕희지의 비문은 독특한 서체인 행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난정서는 후대 특히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명대(1368~1644)에 그림의 주제로 많이 채택되었다. 그의 후손 가운데 가장 이름을 떨친 서예가는 그의 막내 아들인 왕헌지(王獻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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