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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단양우씨

지부상소(持斧上疏)의 충절(忠節)-원조 고려조 우탁(禹倬)선생

작성자학천/우병구|작성시간20.09.03|조회수1,425 목록 댓글 0

 

지부상소(持斧上疏)의 충절(忠節)-원조 고려조 우탁(禹倬)선생

 

 

 

                 
지부상소
(持斧上疏)란 ?

'지니고[持]' '도끼[斧]'上 : 윗 상. 올릴 상. * 疏 : 성길 소. 통할 소. 

* 極 : 극할 극. * 諫 : 간할 간.

 

왕정 시대의 왕권은 무소불능이다. 생사여탈이 군왕의 말 한마디에 달렸으니 왕명 불복은 위험천만

이다. 하지만, 왕명 거부가 많을수록 그 임금은 현군(賢君)이었고, 없을수록 무능한 폭군(暴君)이었

는 역사 읽기가 있다. 조선 세종 때의 어전 회의에서는 신하들의 통촉(洞燭)하여 달라는 진언이 가

장 많았다 한다. 신하가 임금에게 왕명을 재고해 달라는 진언은 군신 간의 소통이다. 신하는 선비로

서 관직에 올랐으니 올곧은 선비 일수록 올바른 진언을 했을 터다. 왕에게 하는 진언의 자리에 도끼

가 등장하기도 했는데, 신하의 말을 믿지 못하면 도끼로 목을 치라는 선비의 결기였다. 신하가 임금

게 목숨을 걸고 했던, 이른바 지부상소(持斧上疏)다.

왕의 실정과 폐륜행위 등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지적하는 신하의 기개를 말함 즉,도끼를 옆에 놓고 올리는 상소다 .

임금이 상소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자신의 목을 도끼로 치라는 것으로서 선비의 기개를 보여 준다 .

고려 말의 일이다 .
고려왕들 중 7명이나 "원 왕조"의 사위가 되어서 시호 앞에 6명의 왕이 충자를 넣게 되는 치욕의 시대
충선왕은 고려 25대 충렬왕과 원나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었다 .
충렬왕의 사후에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그 아비의 후궁인 숙창원비를 가까이했다 .이는 아버지의 여자를 범하는 폐륜행위에 그치지 않고 왕도는 물론이고 혈연의 질서를 무너뜨린 부도덕의 극치였다 . 
충선왕은 뻔뻔하게도 숙창원비를 숙비로 봉작을 높였다 .

신하들이 사실을 알면서도 왕의 권력 앞에 말 못하고 있을 때 목숨을 걸고 극간에 나선 이가 우탁(禹倬)이었다 .
당시 감찰규정으로 있던 우탁 선생은 왕이 아버지의 후궁과 관계를 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흰색 상복을 입고 , 거적을 둘둘말아 어께에 메고, 한손엔 도끼를 들고 궁으로 들어가 상소를 올리고 엎드렸다 .

"전하께서는 부왕이 총애하는 후궁을 숙비에 봉했는데, 이는 삼강오륜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종사에 전례가 없는 패륜 이옵니다 ." (중략) 
"신하는 간언을 할 때 목숨을 건다 . 고 했는데  오늘 소신에게 터럭만큼의 잘못이 있다면 신의 목을 치시옵소서 " 

차마 상소문을 왕에게 읽어 아뢰지 못하던 신하가 우탁의 호통에 벌벌 떨며 읽고, 그 명분과 기세에 눌린 왕이 결국 패륜의 행위를 중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상소 중에서 이보다 더 강력한 주장은 없다. 내 말이 틀리면 도끼로 내 머리를 치라는 뜻이다 .

이와 같은 상소를 두고 도끼를 소지했다 . 하여 ‘지부상소(持斧上疏)’라 한다 .
유학의 정신주의가 도도한 흐름으로 관류한 우리 역사에, 시퍼렇게 살아 있는 올곧은 선비정신의 표본 이었다 .

정몽주는 우탁선생을 ‘동방사림(東方士林)의 조종’으로 받들었다 .
조선전기에 유학의 거목 퇴계이황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우탁선생을 지목하였는데, 이유는 선비로서의 청정한 몸가짐과 더불어 탁발한 학문적 경지를 함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황은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창건하였다 .
충청도의 단양팔경 중 하나인 사인암(舍人巖)은 우탁이 사인 벼슬로 있을 때 자주 찾았던 곳이다 .

<주역>은 동양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경전인 동시에 가장 난해한 글이다 .
"주나라의 역서"라는 뜻이고  유교의 경전 중에서도 특히 우주철학(宇宙哲學)을 논하고 있어 한국을 비롯한 일본·베트남 등의 주변국의 유교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점성술의 원전으로 깊이 뿌리박혀 있다 .

주역이 전래되었을 때 아무도 이를 풀어내지 못하자, 우탁은 혼자 문을 걸고 연구한 끝에 달포 만에 그 진의를 터득해 그로써 후진을 가르쳤다. 그를 존중하는 학자들이 이를 두고 ‘역이 동으로 옮겨 갔다’고 하여 ‘역동’이란 호를 붙였다 .

그런데 놀라운 일은, 바로 그 역동 우탁의 후대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란 사실이다 .

 

우탁의 지부상소 의 정신이 그의 충절의 피가 묽어지지 않았다면 현 시국과 같은 국가원수 파면이라는 역사적 부끄러운 기록은 피할 수도 있지 않았겠나 해서 옮긴 글 입니다. l

고시감상 두편

   탄로가(嘆老歌)
 (우탁(禹倬:고려1262-1342)    

   백발가(白髮歌) 

제 1수. 한 손에 가시 돌고

1,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를 쥐어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제 2수. 춘산에 눈 노긴 바람   

2.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듸 없다.

   져근 듯 비러다가 붙이고쟈 마리우희 불니고져

   귀밑에 해 묵은 서리를 녹여 볼가 하노라.

제 3수. 늙지 말려이고  
  
늙지를 말려이고 다시 져머 보려타니 
   靑春이 날 소기고 白髮이 거의로다 
   잇다감 곳밧찰 지날 제면 罪 지은 듯 하여라. 

 

 

제 4수「江行」(강행) 사인암의 풍경을 읊은 시

이슬맞은 단풍잎이 붉게 땅위에 떨어지며楓葉露乘紅墜地

석담에 바람일어 흔들리는 푸른하늘.石潭風動碧搖天

숲 사이 숨겨진 외로운 마을 아물거리며林間隱暎孤村逈

구름밖 우뚝솟은 산봉우리 연이어 있네.雲外參差遠岫連

 

우탁[禹倬] 1262년(원종 3)~1342년(충혜왕 복위 3)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

 

 

                            1262 원종 3년~1342. 충혜왕 3년  81세 졸

          문희공 우탁선생 영정 제작 봉안(정정재사,고려통일재전,역동서원,구계서원,희역당재사) 2011년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卓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 시호는 문희(文僖) 세상에서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시조 우현(禹玄)의 7대손으로, 증조는 우경절(禹慶節), 조부는 문하시중 우중(禹仲大), 아버지는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우천규(禹天珪), 배는 이원백(李元伯)의 따님의 아드님이시다. 부인은 영천이씨이며 아드님은 원광,원규이시다. 사관(仕官)이 계속 이어진 명문 선정(先正)의 후예이다. .

 

 

1262년 충북 단산현(丹山縣) 품달리(品達里) 신원((新院, 현 충북 단양군(丹陽郡) 적성면(赤城面) 현곡리(玄谷里))에서 태어났다.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고, 29세 되던 1290년(충렬왕 1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291년 영해사록(寧海司錄: 현 경북 영덕의 지방관)을 시작으로 진주목사 등 9개 군의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민간에 성행하던 음사와 미신을 타파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특히 영해에는 팔령(八鈴)이라 이르는 신사(神祠)가 있었다. 백성들이 그 영험을 믿고 팔령신(八鈴神)을 극진히 받들고 있었으며, 자주 제사지내고 재물을 바쳐 폐해가 막심했는데,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는 신사를 과감히 철폐하였다.

 

 

통사사인(通事舍人)시절 자주 찾았던 사인암(단양군 대강면) 

그후 통사사인(通事舍人), 진현관직제학, 성균제주직(成均祭酒職) 역임하셨다. 

 

47세인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렬왕(忠烈王1236~1308,고려 제25대 왕)이 승하 하자 원나라에 있다가 돌아와 왕위에 오른 충선왕(忠宣王,1275~1325,고려 제26대 왕)은 빈전(殯殿)에 제사를 행하고, 그 부왕(충렬왕)의 후비인 숙창원비(淑昌院妃)가 거쳐하는 그 친정으로 가서 숙창원비(淑昌院妃)를 간음하였다. 충선왕은 숙비의 교태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고, 팔관회(八關會)도 멈추게 했으며, 숙비는 왕의 총애를 믿고, 그 방자함과 사치함이 이를데 없어 벼슬아치들이 다투어 뇌물을 바쳐 그 환심을 사기에 급급한 판이었다. 왕의 불륜과 숙비의 방자함에 뜻있는 선비들이 모두 분격했고, 백성들도 못 마땅히 여겼으나, 그 무렵 조정에는 나약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가득하여, 감히 바로 간(諫)하는 신하가 없었다. 이에 우탁이 분연히 백의(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왕의 비행을 직간을 하는 과감한 상소를 올렸다. 임금 앞에 나아가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다면 목을 쳐도 좋다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군왕의 잘못을 극간한 기개가 통렬하다.

가까이 모신 신하가 그 상소를 펴들고 겁에 질려, 차마 임금 앞에서 읽지를 못하여, 우탁이 소리를 가다듬어 “그대는 근신(近臣)이 되어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하고, 그 허물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대의 죄를 아는가.”라고 꾸짖으니, 신하들이 모두 떨고, 왕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군왕들을 견제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상소(上疏)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상소가 지부상소(持斧上疏)이다. 도끼를 옆에 두고 내가 올리는 말이 틀린다면 나의 목을 치라는 강력한 주장이나 임금이라도 두려워했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도 창피한 일이었다.

역동은 지부상소(持斧上疏)후 벼슬을 포기하고 곧 단양 향리로 물러나 학문 정진과 후진 양성에 매진했으나 그 뒤 충숙왕이 역동의 충의를 가상히 높여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진현관직제학,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현(禮安縣)에서 서남쪽 오리 지점(현 안동시 예안면 선양리)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지금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지만 후세 사람들은 이곳을 선생이 도학(道學), 충의(忠義), 절조(節操)의 덕을 실천하는 곳이라 하여 지삼의(知三宜)라 불러 후세인의 사표가 됨을 기리고 있다.

선생은 1342년(충혜왕 3) 2월 7일 81세로 생을 마치셨다. 충숙왕은 선생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선생의 도학(道學)과 문행을 기려 문희공(文僖公) 시호가 내려졌다.  

역동 선생은 문성공 안향(安珦)의 제자인 육군자 중에 으뜸이었다고 한다. 특히 『화해사전」의 끝에 첨부되어 있는 『동방사문연원록」 에서는 나려대(羅麗代) 의 도학 연원과 도통(道統) 관계를 설총(薛聰)➡최충(崔沖)➡김양감(金良鑑)➡안향(安珦)➡우탁(禹卓)➡신현(申賢)➡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으로 기술하고 있다.

 

안향(安珦)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처음의 이름 : 유(初 諱 : 裕)

1243년 (고려 고종30년), 경북(慶北)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탄생(誕生)하셨다. 순흥 안씨(順興 安氏) 시조(始祖) 휘(諱) 자미(始祖 諱 子美)의 증손(四世)이다. 고려(高麗)의 명신(名 宰相)이요, 학자(學者)이다. 자(字)는 사온(士蘊), 호(號)는 회헌(晦軒)이다. 公의 아버지는 중의대부 밀직부사 판도판서(版圖判書) 諱 부(孚)이며, 수태사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어머니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우씨(剛州禹氏 현 단양우씨)이며, 예빈시동정 우성윤의 딸이다.

 

 

4세인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 문성공파(文成公派) 파조입니다.

 

도학파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는 정몽주는 1367년(공민왕 16)에 역동을 동방사림(東方士林)의 조종으로 받드는 상소를 올렸으며, 점필재 김종직은 예안(禮安)을 지나면서 지은 『추감시(追感詩)」 에서 역동의 충절은 송의 당개(唐介)에 비교하고, 학문은 후한의 정현(鄭玄)에 대비하여 그 학덕을 칭송하였으며, 1591년(선조 24) 일본 사신이 내왕하자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던 조헌(1544~1592)은 “우리나라가 군신과 부자의 도리를 알게 한 것은 우탁(禹卓)이 소학과 가례를 강명(講明)하였기 때문에 문명을 계승하게 되었다.” 하였다.

그러나 역동을 가장 존숭한 사람은 퇴계(退溪)선생(1501~1570)이다. 안동최초의 서원인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창건하고, 친필로 현판과 액자 등을 명명(命名)하였다.

역동서원기(易東書院記)에 “고려조의 우(禹)제주(祭酒) 선생께서 만년에 퇴거하여 이 땅에 있었고, 지금도 그 자손들이 살고 있다.  ”역동선생의 충의대절은 이미 천지를 움직이고 산악도 움직일 만하고 경학의 맑음이나 진퇴의 정당함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바 있으며 후학의 사범이 되어 백세의 묘향을 받아야 할 이가 선생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라고 쓰셨다. 중략

이것이 역동이란 이름으로 서원을 표시하는 까닭이다“ 라고 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程朱學)이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깊이 연구해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정이(程頤)가 『주역』을 주석한 『정전(程傳)』은 처음 들어왔을 때 아는 이가 없었는데,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 만에 터득해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고려사』 열전에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아주 뛰어난 역학자였다. 또한 시조 2수와 몇 편의 시가 전하고 있다.

  

선생의 대표적 배향 서원으로는 조선조에 와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발의로 1570년(선조 3) 예안 부포리 오담(도산 3곡)에 역동서원(易東書院 안동댐 수몰로 현 안동시 송천동 391 안동대학교 구내로 이건)이 창건되었으나, 1871년(고종 8)에 훼철 당했다가 1966년 복원되었다. 또 다른 서원인 구계서원(龜溪書院)은 영남대학교 구내로 옮겨졌다. 단암서원(丹巖書院)은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단산서원(丹山書院)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서원의 옛터엔 역동유허비(易東遺墟碑)는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지삼의),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정산리 1164-1(산 167-1)(정정재(鼎井齋)웃솥 우물 북쪽 산) 에 역동선생의 묘소가 있다.

역동서원(易東書院)

역동서원 현판(퇴계 이황 글씨)

상현사(尙賢祠) 

묘우(廟宇):고려성균관좨주단양우선생 위패

 

 

 

 

 

 

단양우씨 8세 문희공 역동 우탁선생 묘소

 

정정재(鼎井齋)

 

                        단양우씨 7세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 우천규 단묘

                               단양우씨 6세 시중공 우중대 묘소(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고려시대, 우탁(禹倬1262년(원종3)~1342년(충혜왕 복위3)의 지부복궐상소

 

고려의 충선왕은 아버지 충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부왕父王의 후궁을 범(犯)하고 말았다. 왕실의 윤리 도덕이 아비의 여인을 탐하기까지 막장으로 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절대자를 말릴 엄두는 내지 못 했다.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군왕의 패륜(悖倫)을 그냥 두고 볼 수 없게 되자, 감찰규정(監察糾正)의 벼슬에 있던 선비 우탁(禹倬)이 지부상소에 나섰다. 흰 두루마기에 거적을 짊어지고 어전에 들어선 선비의 한 쪽 손에는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가 들려 있었다. 임금의 불의(不義)와 벌일 신하의 결투 신청이다. 선왕의 후궁을 숙비로 봉해 더욱 가까이 하려던 충선은 신하의 도끼에 눌려 더 이상의 패륜을 접었다. 그런 임금과 더불어 부질없는 벼슬에 연연하느니, 차라리 야인으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정진했던 우 선비의 기개가 천둥같이 울려온다.

1308년(고려 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 우탁은 충선왕이 부왕인 충렬왕의 후궁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흰 옷 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조선시대 중기, 조헌(趙憲,1544~1592, 조선 문신, 의병장)의 지부복궐상소

 

조선의 선조왕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을 못 다스린 임금에 든다. 임진년 왜란의 치욕도 충직한 신하들의 직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던 데 있다.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의 대 선비이자 문신 조헌(趙憲)도 조정의 난맥을 규탄하는 직언을 여러 번 하였으나 파직과 유배의 응징으로만 대했다. 구차한 관복을 벗어 던지고 초야에 묻혀 학문과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을 때, 노략질 할 길을 내놓으라는 도요토미의 사신을 맞고도 임금은 우왕좌왕했다. 대궐 앞에 나아가 사신의 목을 베라며 사흘 동안 간(諫)했던 조 선비의 지부상소에 귀 기울였더라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왜란이 터지자, 조 선비의 그 도끼날 기개는 구국의 대의(大義)에 점화되어 의병장(義兵長)으로 싸우다가 금산의 칠백의총(七百義塚)에서 만 대를 지켜보게 되었다.  

 

1591년(조선 선조 24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명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에서 상경하여 지부상소로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사신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 ~ 1598, 일본 다이코太閤)가 사신을 보내 정명가도(征明假途)를 강요하였습니다. 이에 조헌(趙憲, 1544 ~ 1592, 조선 문신, 의병장)선생은 왜국사신의 목을 치라며 지부상소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후기, 최익현(崔益鉉,1833~1906,조선말 정치인.독립운동가)의 지부복궐상소

 

 

흥선 대원군의 철옹성 섭정 권력을 몰아내 왕권을 회복하고 친일 조정을 규탄했던 선비 최익현(崔益鉉)의 지부상소도 있다. 들고 간 도끼가 신하의 목이 아니라 방자한 권력의 끈을 끊었지만, 기우는 국운을 세우는 데는 때늦었던가 보다. 사헌부 장령(掌令)관직을 벗어던졌던 최 선비의 기개도 늑약(勒約)에 짓밟힌 국권 회복의 독립의병장 용맹으로 이어졌다. 74세 노선비의 꺾일 줄 모르는 기개는 청사(靑史)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선대의 선비정신 아니었던가. 명장(名將)은 덕(德)으로 명졸(名卒)을 거느리고, 그 덕은 대의에서 나온다. 대의는 아무리 짓밟아도 꺾이지 않는 정의(正義)를 혼으로 한다.

1876년(조선 고종 13년) 2월 강화도에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서 강화도조약을 강요한 일본 사신 구로다 교타카(黑田淸隆)의 목을 베라고 상소하였다. 그가 도끼를 들고 상소한 것은 조헌의 예를 따른 것이었다.

최익현은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최익현(崔益鉉, 1833 ~ 1906, 조선말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펼치며, 조약을 강요한 일본사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1840 ~ 1900, 일본 정치가)의 목을 베라고 지부상소 하였습니다. 물론, 세분 모두 지부상소만 한 것이 아니지요. 나라의 정기를 바로 세우려 수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잘못된 것을 방관하는 것도 커다란 죄악입니다. 

 

*** 지금 민주국가에서 나라가 국민의 뜻과는 다른 방향 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안보 경제 외교 국방 민생 모든 분야가 혼란스럽고 국가의 위상이 추락하는 감이든다. 자유와 권리는 지키려는 의지로 싸워서 쟁취 하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고 앉아있으면 남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모든 국민이 지부상소의 신념으로 떨쳐 일어나 체제를 수호하고 지켜 나가야 할 때인것 같다. 

 

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843) 상소극간(上疏極諫)

-소(疏)를 올려서 극도로 간쟁(諫諍)하다

경남신문  허권수 2020-09-01

 

요즈음 전통적인 상소문(上疏文)의 어투를 빌려 대통령에게 국민청원을 한 ‘시무(時務) 7조’라는 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 조은산이라는 사람은 공을 들여 상소문 형식으로 글을 지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아득한 옛날 중국에서는 요(堯)임금과 순(舜)임금 시대부터 상소가 있었다. 신하의 보고, 건의, 비판 등이 다 상소였다. 중국 고대의 정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서경(書經)’에는 상소문 형식의 글이 많이 들어 있고, 춘추시대 역사서인 ‘춘추(春秋)’에도 상소문 형식의 글이 많이 들어 있다. 다만 그때는 상소문 등의 명칭이 없었다. 상소(上疏)라 할 때의 소(疏)자를 쓴 것은 삼국시대 다음의 진(晉)나라 때부터다. 후대에 와서 명칭이 점차 많아져 소 이외에도 차자(箚子), 계(啓), 전(箋), 표(表), 봉사(封事) 등의 명칭이 다양하다.

소(疏)라는 글자에는 ‘통하다’, ‘조목조목 적다’, ‘아뢰다’ 등의 뜻이 있다. ‘상소한다’, ‘소를 올린다’라는 말은 되지만, 흔히 쓰는 ‘상소를 올린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상소문은 문학적인 가치가 적다하여 한문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이 연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지만, 사실은 문학적인 가치가 대단히 뛰어난 글이다. 선비가 임금을 감동시켜 자기의 뜻이 관철되게 하기 위하여 글을 쓰기 때문에 자신의 학식을 다 동원하고 수사학적인 기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지은 글이다. 그리고 내용상으로도 선비정신이 가장 강하고 풍부하게 담긴 글이 곧 상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평민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임금에게 상소해서 건의하고 비판할 수 있었다. 신하들이 상소문을 올리면, 임금은 읽어 보고 반드시 비답(批答)이라는 상소문에 대한 답변을 내렸으니, 상하가 잘 소통되는 나라였다.

선비들의 문집에는 상소문이 많이 실려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상소문이 많이 실려 있다.

강직한 신하들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같은 주장의 상소를 연달아 20회, 30회씩 올리기도 했다. 심한 경우 대궐문 앞에서 거적대기를 깔고 밤을 지새우는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기도 하고, 자기의 의견이 틀리면 자기를 죽여 달라고 손에 도끼를 들고 상소를 하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하기도 했다. 조선왕조 역사에서 목숨을 걸고 임금의 잘못을 바로 공격한 상소문으로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단성소(丹城疏)’가 유명하다.

선비들은 자기를 수양하고 나아가 남을 다스려 세상을 사람이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임금에게 건의를 하고 임금이 잘못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 하고 바로 상소를 해서 극도로 간하여 바로잡으려고 했다.

우리 조상들이 전해왔던 상소를 해서 임금의 잘못을 서슴없이 바로잡는 전통이 오늘날 잘 계승되어 국정이 바른 길로 가도록 각자 참여하기를 바란다.

* 上 : 윗 상. 올릴 상. * 疏 : 성길 소. 통할 소. * 極 : 극할 극. * 諫 : 간할 간.

동방한학연구소장

 

[천자 칼럼] 21세기 상소문

한국경제 오피니언 김현식 논설위원 2020.08.27.

 

사대부의 나라를 자처한 조선은 언로(言路)를 보장했다. 대표적인 게 삼사(三司)와 상소(上疏) 제도다. 삼사는 왕에게 충언을 간하는 사간원, 관원을 규찰하고 기강·풍속을 바로잡는 사헌부, 왕의 자문에 응하는 홍문관을 일컫는다. 모름지기 조선시대 정승까지 오르려면 한 번쯤은 이곳을 거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수시로 상소를 올려 왕에게 할 말을 전했다.

상소는 관직에 있는 이들뿐 아니라 일반 유생들까지 할 말을 할 수 있게 한 제도였다. 조선시대 문인이라면 써야 할 일곱 가지 글에 ‘소(疏)’가 꼽힐 정도였다. 조선왕조 500년간 관료와 학자, 유생들이 올린 상소는 수만 건에 달한다.

중종에게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물리치옵소서”라고 간언한 조광조의 상소, “치욕을 잊고 개혁을 단행하소서”라고 인조에게 올린 최명길의 상소, 효종 때 “북벌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한 윤휴의 상소 등은 명문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왕이 늘 상소를 기꺼이 받아들인 건 아니다. 연산군은 상소뿐 아니라 삼사 관료들까지 처벌해 그 기능을 사실상 없애기도 했다. 그래서 상소할 때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목을 쳐달라’는 ‘지부상소(持斧上疏)’라는 것도 있었다. 목을 내놓고 상소를 한 것이다. 대표적인 게 선조 때 “왜국 사신의 목을 베고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조헌의 상소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선조는 결국 임진왜란 때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야 했다.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시무 7조’란 글이 세간에 화제다. 이 글은 조선시대 상소문 형태의 글로 집값 폭등 등 정부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또 문재인 대통령에게 세금을 감하고, 명분보다 실리 외교에 임하고, 신하를 가려쓰라는 등 일곱 가지를 직언한다. ‘현미’ ‘해찬’ ‘미애’ 등 현 정부 실세의 이름을 따 두운(頭韻)도 살렸다. 어지간히 정성 들여 쓴 글이 아니다.

 

요즘 정권 핵심인사들이 사법부와 검찰, 감사원 등에서 맘에 들지 않는 판결, 조사 등이 나올 때마다 마구잡이로 비판하는 일이 늘고 있다. 외신까지 주목해, 영국 이코노미스트지(誌)는 “비판을 뿜어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향한 비판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고 꼬집었다. 청와대가 이번 ‘상소문’을 어떻게 처리할지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다.

김현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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