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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용문사 주변 고려 강종대왕, 조선 문효세자 및 폐비윤씨 태실 예천 명봉사 주변 조선 장조대왕(사도세자) 및 문종대왕 태실

작성자학천/우병구|작성시간19.10.20|조회수646 목록 댓글 0

칼럼 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예천 용문사에 고려 강종대왕, 폐비 윤씨와 문효세자의 태실?


[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이정표와 안내문을 찾기 힘들어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2019.07.10.




[논객닷컴]  작년 예천에 있는 용문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들르게 된 용문사는 


고즈넉한 사찰의 분위기와 함께 경내에 많은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어 볼만한 요소가 많았다. 이 가운


데 몇 가지를 꼽자면 자운루(慈雲樓)가 있는데,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회담장으로 사용된 


나름의 상징성과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주목해야 할 장소로 대장전(大藏殿, 보물 제145


호)이 있다. 


용문사 대장전과 뒤쪽 봉우리, 봉우리의 정상에 문효세자의 아기씨 태실비가 자리하고 있다. Ⓒ김희태

용문사 대장전 목불좌상 및 목각탱 Ⓒ김희태


우선 대장전을 올라가는 계단 옆에 웬 표석이 하나 있는데, 해당 표석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


에서 세운 고적비다. 즉 용문사 대장전은 예나 지금이나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


한 대장전 내부에는 윤장대(輪藏臺, 보물 제684호)와 대장전목불좌상(보물 제989-1호) 및 목각탱(보


물 제989-2호) 등이 자리하고 있다. 처음 용문사를 방문했을 때 대장전과 내부에 있는 윤장대, 대장


전목불좌상 및 목각탱이 깊은 감명을 주었다.


고적비,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표석이다. Ⓒ김희태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회담장으로 사용된 자운루 Ⓒ김희태


그랬던 용문사를 얼마 전 다시 방문했다. 없는 시간을 만들어 또 다시 다녀왔다. 이유는 바로 용문사에 태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다. 분명 작년에 왔을 때 용문사 경내를 돌아봤지만, 태실에 관한 이정표나 안내문을 보지 못했던 터라 “태실이 어디 있지?”라는 의아함과 혹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금 용문사를 찾게 된 것이다.


■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의 성격을 지닌 용문사


예천 용문사와 관련해 정조가 쓴 <일성록>에 언급이 되는데, 여기에 서호수라는 인물이 정조에게 용문사 승려들이 잡역에 동원되는 것을 우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천 용문사는 고려 태조가 창건한 것이고, 우리 조정의 광묘(光廟: 세조를 말한다)께서 특별히 유지를 내려 승도들의 잡역을 영구히 면제해 주어서... <중략> 그런데 그 후로 승도들의 역이 많아져서 대부분 흩어져 천 년에 가까운 고적이 장차 지탱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만으로 이미 애석합니다. 게다가 이번에 태실을 봉안한 뒤 수호하는 일을 전적으로 승도들에게 맡기고 있으니... <중략>”

<일성록> 정조 7년(1783) 9월 15일

위의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용문사가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의 지위를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기록에서 나오는 태실은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인 문효세자 태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 때 호불군주를 자처했던 세조에 의해 승려들의 잡역이 면제되기도 했지만, 정조 때가 되면 서호수의 언급대로 승려들에 대한 역이 많아져 천년 고적인 용문사를 지탱할 수 없고, 이로 인해 태실을 수호하는 것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하는 염려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장전 뒤쪽 봉우리 정상에 자리한 문효세자의 아기씨 태실비 Ⓒ김희태


기록에 언급된 문효세자의 태실, 정확히는 문효세자의 태실지. 용문사 대장전을 기준으로 뒤쪽 봉우


리 정상에 문효세자의 아기씨 태실비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곳은 말 그대로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은


데, 이곳에 묻혀있던 태항아리는 일제강점기 당시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고양시 원당동에 위치한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현재 문효세자의 태실은 서삼릉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고양 서삼릉, 비공개 지역인 태실의 전경 Ⓒ김희태

서삼릉으로 옮겨진 문효세자의 태실 Ⓒ김희태


이처럼 사찰이 태실을 수호하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용문사에서 멀지 않은 예천 명봉사(鳴鳳寺) 역시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이곳에는 문종대왕 태실과 사도세자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김천의 직지사(直指寺)에 정종대왕 태실이, 영천의 은해사(銀海寺)에는 인종대왕 태실이 있는 등 태실과 사찰의 관계가 비교적 끈끈하게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 폐비 윤씨의 태실이 용문사에 있다고?


놀랍게도 예천 용문사에는 폐비 윤씨의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폐비 윤씨(?~1482)가 누구인가?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연산군의 어머니이자, 훗날 연산군이 일으킨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의 원인이 된 인물로, 우리 역사에 깊이 각인이 된 경우다. 본래 폐비 윤씨는 성종의 후궁이었는데, 성종의 왕비였던 공혜왕후 한씨(1456~1474)가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왕비가 된 인물이다. 당시 성종의 총애를 받은데다 임신한 것이 왕비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때 태어난 아이가 바로 연산군이다. 하지만 폐비 윤씨는 후궁 때와는 달라져 있었고, 투기와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내는 행동을 하면서 폐출이 되고, 결국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회묘 Ⓒ김희태


훗날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한 연산군에 의해 정국은 요동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연산군은 폐비 윤


씨에 대한 신원 회복을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여기에 반대하는 이들을 숙청한 갑자사화


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폐비 윤씨는 제헌왕후로 추숭되고, 기존의 묘에서 능으


로 승격되며, 회릉(懷陵)으로 불리게 된다. 회릉은 지금의 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었다. 하지


만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묘로 격하되어 이때부터 회묘(懷墓)로 불리게 되는데, 실제 회기동의 옛 이


름이 회묘동이었다는 점은 지명에 영향을 남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정표가 없어 한참을 헤맨 끝에 찾을 수 있었던 폐비 윤씨의 태실 Ⓒ김희태


이러한 폐비 윤씨의 태실이 용문사에 자리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태실가봉(胎室加封)이 이루어졌


다는 점이다. 보통의 경우 태실가봉은 왕자 혹은 세자가 왕위에 오른 뒤 기존의 태실에 추가로 태실


가봉비와 태항아리를 봉안하는 장태석물을 추가로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왕비의 태실이 


확인된 사례는 ▶ 강원도 홍천군 동면(=수타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정희왕후 윤씨 태실 ▶ 경상


북도 영주시 순흥면(=초암사)의 소헌왕후 심씨 태실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용문사)의 폐비 윤


씨 태실이다.



측면에서 바라본 태실가봉비, 현재까지 확인된 왕비 태실 3곳 가운데 하나로, 왕의 태실에서나 볼법한 태실가봉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김희태


현재 폐비 윤씨의 태실은 태실가봉비만 세워져 있을 뿐, 장태석물은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또한 


일제강점기 당시 폐비 윤씨 태실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폐비 윤씨의 태실


은 서삼릉으로 옮겨지게 된다. 한편 발굴 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태항아리와 지석의 경우 각각 국립중


앙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폐비 윤씨의 태실가봉비의 경우 글자 부분에 인위적


인 훼손이 가해져 알아보기 어렵지만, 앞면은 왕비태실(王妃胎室)이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고, 뒷면


의 경우 앞선 지석을 통해 성화십사년십일월십이일(成化十四年十一二月十二日)이 새겨진 것으로 보


인다. 성화 14년은 성종 때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폐비 윤씨의 태실이 경상도 예천(醴泉)에 있음


을 적고 있어, 해당 태실이 폐비 윤씨의 태실인 것이 명확한 것이다.



태실가봉비의 뒷면, 인위적인 훼손으로 인해 글자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당대에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희태 


폐비 윤씨 태실의 정확한 위치는 용문사 대장전을 기준으로 동남쪽으로 300~400m 지점의 봉우리에 자리하고 있다. 가는 방법은 용문사 해우소 뒤쪽의 길을 따라서 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오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200m 가량 더 가면 사진 속의 폐비 윤씨 태실을 만나게 된다. 아쉬운 점이라면 예천 명봉사와 달리 용문사에서 태실과 관련한 이정표나 안내문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미 태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방문했음에도 현장에서 관련 정보를 찾기가 어려웠기에 초행길에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날 용문사 인근을 헤맨 끝에 폐비 윤씨의 태실을 마주한 순간 찾았다는 기쁨과 동시에 이정표만 있다면 누구나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한편으로 허탈했다. 게다가 문효세자 태실(경상북도 기념물 제173호)이나 폐비 윤씨 태실(경상북도 기념물 제174호) 모두 지정 문화재이기에 관련 안내가 전혀 없다는 점은 분명 개선이 필요한 지점이다. 혹여 예천 용문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용문사와 함께 두 태실 역시 함께 관심을 갖고 찾아보기를 권한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관광레저시대 예천&] 돌담길 걷다보면 오래된 시간속 풍경 감성 자극

경북일보  이상만 기자 2019년 07월 25일


섬마을 회룡포, 삼강주막, 금당실 마을 등 예천 볼거리 다채


금당실 전통마을


어디선가 한 번쯤 본 것 같은 장면이 실제 눈앞에서 펼쳐진다면 얼마나 신기하고 아름다울까? 경상북도 예천군이 바로 데쟈뷰 (기시감) 같은 곳이다. 아름다운 풍경의 멋, 재미와 감동이 있는 특별한 경험 그리고 건강한 맛이 있는 다채로운 매력을 발산하는 예천군으로 떠나가 볼까?

◇아름다운 풍경의 멋, 추억, 감동…예천 볼거리.

예천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용한 알짜배기 관광 코스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지역 전통문화를 계승·보존하면서 새로운 관광자원을 발굴하고 있다. 회룡포~삼강 권역, 용문사 권역 등 권역별 테마상품 개발로 체류형 관광벨트를 조성해 전통문화와 청정자연이 함께하는 관광지 개발에 힘쓰고 있다.

회룡포~삼강 권역의 대표 명소는 회룡포, 삼강주막, 낙동강 쌍절암 생태숲길, 강문화전시관을 꼽을 수 있다.


회룡포마을 표지석


△전국 최고의 물돌이 마을 ‘회룡포’.

용이 휘감아 치는 듯 빙글 돌아나가는 형상이라 해 이름 붙여진 ‘회룡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물돌이 마을로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350도 휘돌아 나가는 육지 속의 섬마을이다.

예천을 찾는 관광객 대부분은 이곳을 다녀간다. 맑은 물과 백사장, 주변을 둘러싼 가파른 산, 그리고 강 위에 뜬 섬과 같은 마을이 어우러져 비경을 이룬 자연 명승지이기 때문이다.

인근 비룡산에는 천년고찰 장안사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사찰을 지나 팔각정 전망대를 향해 행운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산속에 꼭꼭 숨어 있는 하트 산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전망대에 오르면 회룡포 비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고 비룡산 등산로를 따라 산행을 즐기다보면 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합쳐지는 삼강이 눈에 들어온다. 주변에 원산성, 용궁향교 등 볼거리와 용궁순대, 토끼간빵 등 먹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또 회룡포에서 삼강주막까지 강변길은 안전행정부가 전국의 걷기 좋은 ‘우리마을 녹색길 명품 베스트 10’에 선정된 자연친화적 녹색길로 트레킹코스로 각광 받고 있다.



삼강주막


△낙동강 700리 마지막 남은 ‘삼강주막’.

‘삼강주막’은 옛날 보부상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으며 삼강나루터의 나들이객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이용된 곳이다. 삼강(三江)은 회룡포를 휘감아서 나오는 내성천과 금천, 안동 하회를 돌아 나오는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져 있다.

주막의 주방 한 켠에는 주막의 옛 주인이 막걸리 주전자의 숫자를 벽면에 칼끝으로 금을 그어 표시한 외상장부를 보기 위해 관광객이 넘쳐나고 있고 막걸리와 함께 도토리묵과 두부, 배추전 등을 맛볼 수 있는 마지막 주막이다.

옛날 보부상과 시인묵객들이 잠시 쉬면서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켰을 이곳. 이제는 현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파전과 막걸리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묘하게 겹친다. 그야말로 옛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 더 없이 소중한 명소라 할 수 있다.

복잡한 도회의 삶을 벗어나 고즈넉한 풍경과 옛 인심이 그리워진다면 이곳에 가서 막걸리 한 주전자 나눠 마시고 수백 년 전에도 똑같이 흘렀을 그 강물 따라 천천히 걸으며 회룡포 물줄기를 눈에 담아보는 건 어떨까?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최적의 휴식공간이 되어줄 것이다. 회룡포를 빼고 삼강주막을 관광할 수 없고, 삼강주막을 건너뛰고 회룡포만 감상할 수도 없다.
 

낙동강 쌍절암 생태숲길



△낙동강 쌍절암 생태숲길.

한국관광공사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017년 봄 우리나라 걷기 축제’ 13개 중 한 곳으로 선정된 명소이다.

임진왜란 당시 두 여성이 왜병을 피해 두 손을 맞잡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정절을 지킨 곳으로 유명한 쌍절암과 그 외에 코끼리바위나 멧돼지 바위와 같은 동물모양을 닮은 바위나 돌이 많아 아이들과 함께 바위를 찾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삼강주막~비룡교~쌍절암~삼수정 구간은 4.2㎞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된다.


삼강문화단지 강문화 전시관


△삼강문화단지 강문화전시관.

삼강주막에서 낙동강 상류 비룡교 방면으로 700m에 위치한 강문화전시관은 낙동강 연안의 우수한 강 문화와 생태자원을 관광자원으로 특화한 삼강 문화단지 사업으로 2011년부터 조성해 완공을 앞두고 있다.

올해 하반기 개관을 목표로 내부공사는 거의 마무리되었고 정식개관에 앞서 관내 어린이집 및 유치원생, 일반 관람객을 대상으로 전시운영에 관한 문제점 파악 및 연출 콘텐츠 개선을 위해 9월까지 시범운영 중이다.

강문화전시관은 연 면적 4,874㎡ 규모로 1층에는 영상실, 상설전시실, 어린이놀이터, 편의시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2층은 휴게실과 관리사무실, 옥상에는 낙동강과 생태공원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전시관 연출은 크게 자연, 역사, 문화, 사람의 다큐멘터리 4개 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상관은 낙동강 발원지 태백 황지부터 부산 을숙도까지 1300리를 단독 항공 촬영해 써클 영상으로 약 7분 정도 상영해 볼만 하고 일부 VR 및 AR체험도 가능하다.

용문사~명봉사를 잇는 백두대간 권역의 대표 명소는 금당실 전통마을, 소백산하늘자락전망대, 용문사를 꼽을 수 있는데 이곳은 백두대간 파워 스팟 권역 관광지 탐방코스로 명당과 힐링의 기를 받아봄직 하다.


소백산하늘자락공원 


△소백산 하늘자락공원&전망대.

예천 양수발전소 상부댐 일원에 자리 잡고 있는 공원으로 공연 무대와 관람석이 있어 하늘과 가까운 공연장에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고, 주변에 ‘치유의 길’이 있어 산책하기 좋다. 공원에서 등산로를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어림호에 담긴 하늘전망대가 있어 탁 트인 주변 경관과 상부댐의 넓은 호수로 전망이 좋은 곳이다.


예천 금당실마을 전경


△조선 태조가 도읍을 정하려 했던 용문 ‘금당실 전통마을’.

조선시대 전통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금당실 마을은 고택과 돌담길이 어우러져 있고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할 수 있는 땅으로 조선 태조가 도읍을 정하려 했던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 중 하나이다.

이곳에는 선사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어 더욱 특별하다.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과 금곡서원, 추원재, 반송재, 사괴당 등 고택과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고택과 더불어 99칸 대저택터나 남아 있으며 금당실 마을 안길은 아름다운 돌담길로 되어 있고, 인근에 천연기념물 469호인 송림은 더위를 식혀주는 그늘 숲 역할을 하고 있다.

금당실 전통마을은 고택민박 체험을 운영하고 있어 보고 지나가는 관광지가 아닌 직접 체험하고 머무는 관광지로 뜻깊은 추억을 선사해주고 있다.


천년고찰 용문사


△소백산 기슭 천년고찰 ‘용문사’.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 10년(870년)에 예천 출신 두운 선사가 창건한 고찰로 한국관광공사에서 지정한 예천군의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명종 3년(1175년)에 처음 건축한 목조건물 ‘대장전’, 국내 유일 회전식 불경 보관대 ‘윤장대’, 대추나무에 불상을 조각한 ‘예천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등 다수의 문화재와 보물이 있어 사찰 전체가 문화유산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또한, 용문사에서는 사찰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어 가족 단위의 관광객이 발걸음을 하고 있고, 사찰음식 강좌도 진행하는 등 불교문화를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다.

성보박물관에는 탱화와 영정, 불상 등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윤장대를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전해지는 모형 윤장대를 직접 돌려 볼 수도 있다. 천년의 세월이 빚어낸 문화유적과 그보다 더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킨 자연이 어우르는 아름다움을 느껴보자.


사도세자 태실


△풍수지리의 명당임을 입증하는 ‘태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으로 인정해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했다.

예천 태실은 용문사 주변에 고려 강종대왕, 조선 문효세자 및 폐비윤씨 태실을 비롯한 명봉사 주변 조선 장조대왕(사도세자) 및 문종대왕, 오미봉 주변 총 6기가 있는데 그중에 왕세자 또는 원자로 일등지 명당에 모셔진 태실이 무려 4기나 돼 백두대간 권역이 풍수지리의 명당임을 입증하고 있다.

강종대왕은 고려 제22대 국왕으로 위치가 문헌상 용문사 주변으로 명시된 것으로 보아 터가 있었을 것으로 확인할 수 있고 조선시대 문효세자 및 폐비윤씨 태실은 경북도 문화재로 관광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현재 발굴 및 진입로 정비 중이다.

명봉사 주변 조선 장조대왕(사도세자) 및 문종대왕 태실은 2016년 발굴해 복원 및 진입로 정비가 잘 되어있어 접근이 쉽고 이곳에서 영적인 기운과 신비스러운 힘을 느낄 수 있고 오미봉 주변에는 1980년경 신원미상의 태실이 발견되어 역사적으로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백두대간 파워스팟에서 생명의 활력과 기운을 느껴보며 스트레스를 한 번에 날려버리고 힐링 타임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한국사 이야기] 유교의 나라 조선, 왕실은 불교에 심취했다.

매일경제 배한철 기자 2019.04.25.


 칼부림으로 왕위 오른 세조
속죄의 심정으로 불교 귀의

불심 깊었던 왕비들도 많아
사찰 중건하고 쌀·노비 시주

고려왕조 부정 위해 탄압했지만
왕실은 필요때마다 불교 찾아

`숭유억불`과 거꾸로 간 왕들
성리학자들과 마찰 빚기도


조선왕실은 전국 명당을 찾아 왕실 전용 기도처를 뒀다. 국보 제55호 팔상전으로 유명한 법주사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사진 제공 = 문화재청]



조카 단종 등 무수한 사람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속죄의 심정으로 말년에 불교에 심취했다. 서울 은평구 서오릉 사찰인 수국사가 1459년(세조 5년) 왕명으로 세워졌다. 세조는 큰아들 의경세자(덕종)가 죽자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 절을 짓게 한 것이다. 의경세자는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저주로 단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불심이 깊었던 의경세자의 아내 소혜왕후(인수대비)도 이 절에 미곡 100섬과 전답·노비를 시주했다. 성리학적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조선은 과연 불교를 뿌리 뽑았을까. 사실 조선은 강력한 불교 억제 정책을 폈지만 여러 사찰에서 대규모 불사가 끊이지 않았다. 불사의 주체는 아이러니하게도 국가 권력의 중심인 왕실이었던 것이다. 숭유억불을 솔선수범해야 할 왕실에서 이처럼 불교를 신봉하니 성리학자들과 마찰이 없을 리 없었다. 

불교를 장려했던 세조 때 숨죽여 지내던 성리학자들은 성종이 13세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떼로 나서 폐불을 주장한다. 성종은 유교법전인 경국대전을 반포해 유교적 통치 시스템을 완성한 왕이다. 조정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불교를 비방하는 상소는 하루에만 여섯 건이 넘게 올라왔다. 사찰은 폐쇄됐으며 승려는 군대에 들어가거나 머리를 기르고 노비가 돼야만 했다. 

성종 7년 15만명에 달하던 승려의 수는 불과 4년 만에 10만명으로 줄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성종이 승하하자 상황은 원상 복귀됐다. 대비가 된 정현왕후(성종의 계비)는 중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남편의 무덤(선릉) 옆에 그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한 견성사를 중창한다. 

대비는 틈만 나면 한강을 건너 견성사에 가서 예불을 올렸으며 연산군은 친히 저자도(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던 옛 섬)까지 마중을 나왔다. 연산군은 1499년 사찰 이름을 지금의 봉은사로 바꾸고 각도의 절에서 거둔 세금을 지급하라고 명했다. 

선조도 스스로 유학자를 자처하면서 표면적으로 불교를 배척하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그가 총애하던 인빈 김씨(인조의 할머니)에게 몰래 불상을 만들어 주려다가 신하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곤욕을 치렀다. 

조선은 비록 정치적 이념으로 유교를 표방했지만 왕실에서는 유교의 덕목인 효를 명분 삼아 선왕과 선왕비의 명복을 빌거나 대통을 이을 왕자 탄생을 기원한다는 명목으로 각종 불사를 지원했다. 임금의 개인 재산인 내탕금까지 털어 왕실 전용 사찰의 중수·중건사업에 나섰고 이들 사찰에 대한 대규모 시주는 물론 세금 감면 등 각종 혜택도 부여했다. 


세종대왕의 능침사찰인 여주 신륵사. [사진 제공 = 문화재청]


전국에 왕실 전용 사찰은 어느 정도나 있었을까. 불교 연구가 고려 이전으로 집중돼 있고 조선불교 조사가 매우 일천한 실정이지만 각종 문헌을 통해 현재까지 개략적으로 파악된 조선의 왕실 전용 사찰은 95개다. 이 가운데 능 주변에 조성돼 피장자의 명복을 기원하는 목적의 능침사찰(陵寢寺刹)이 가장 많다. 태조 5년(1396년) 신덕왕후의 위패를 봉안한 정동 일대 흥천사를 시작으로 무려 71개나 만들어졌다. 이 중 47개는 조성 연대가 명확하고 나머지 24개는 그렇지 못하다. 여주 신륵사는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의 능침사찰이다.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세종대왕의 능이 서울 대모산에서 여주로 이장돼 오면서 왕릉사찰로 정해졌고 1472년(성종 3년) 200여 칸의 건물이 보수 또는 신축됐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됐다가 수차례 중수 끝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양주 흥국사는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능침사찰로 조선후기 내내 왕실의 후원으로 유지됐다. 정조 17년(1793년) 왕명으로 크게 중수됐고 순조 18년(1818년) 대화재로 소실되자 왕은 다시 절을 지으라고 명하고 성대한 낙성식도 베풀었다. 

화성 용주사는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화성으로 이장한 뒤 1790년 세운 절이다. 정조는 이 사찰을 짓기 위해 전국에서 시주 8만7000냥을 거뒀으며 절이 완성되는 동시에 전국 사찰을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줬다. 정조는 또 중국에서 보내온 장수옥불(長壽玉佛)을 북한산 승가사에 봉안했으며 승가사 사찰 승려들의 역을 면제하고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라는 불경의 간행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정조는 불교와 인연이 깊은 편이다. 정조는 수빈 박씨가 순조를 낳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후궁을 위해 수락산에 내원암이라는 암자를 지어주기도 했다. 


조선왕실은 왕업의 무궁한 계승 발전을 기원하면서 전국 명당 자리에 왕세자 등 왕손의 태를 봉안하고 표지석을 세운 태실을 마련했다. 그러면서 인근에 이를 지키는 태실사찰을 따로 설치했다. 직지사(경북 김천)는 정종, 탄석사(성주)는 세조, 은해사(영천)는 인종, 오덕사(충남 부여)는 선조, 정토사(충북 충주)는 인조, 상환암(보은)은 순조의 태실사찰이다. 태실사찰은 이들을 포함해 11개인 것으로 집계된다. 

조선은 이와 별도로 전국 곳곳에 왕실기도처인 원찰(願刹)도 함께 뒀다. 원찰은 현등사(경기 가평), 용문사(양평), 파계사(대구 동구), 법주사(충북 보은), 송광사(전남 승주) 등 전국에 13개가 존재한다. 능침사찰과 태실사찰은 능이나 태실 옆에 조성됐지만 원찰은 전국적으로 흩어져 분포한다. 학계에서는 이들 절터가 명당이어서 선택됐을 것으로 짐작한다. 

유교는 윤리와 도덕 등 현세의 규범과 관련된 사상으로 엄밀히는 종교가 아니다. 조선왕조는 고려왕조를 부정하기 위해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를 탄압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유교를 내세웠지만 결국 그들 스스로의 종교적 필요에 의해 불교로 회귀했던 것이다.


“예천 용문사 주변 고려 강종대왕, 조선 문효세자 및 폐비윤씨 태실

 예천 명봉사 주변 조선 장조대왕(사도세자) 및 문종대왕 태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 <용어 설명> 

▷세조 : 조선 제7대 왕(재위 1455~1468년).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수양대군에 봉해졌다. 문종이 사망하자 어린 단종을 제거하고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하였다. 

▷태실 : 태(胎)는 태반이나 탯줄과 같이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조직을 이르는 말로,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이다.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해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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