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생활 용어
제주는 고려시대에 100년 이상 몽골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며, 조선시대에는 국법으로 유망을 금지하는 출국금지령이 200년간 이어지면서 폐쇄된 환경 속에서 독자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개화기 시대와 일본 식민지 시대에는 언어접촉과 혼용을 겪게 되고, 1950년대 이후 제주에 인구가 활발하게 유입되면서 표준어와 제주도 사투리라는 이중 언어 사회를 맞게 됩니다. 여기에 1970년대 표분어 사용을 지도하는 교육 표준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제주어의 자취가 더욱 희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거문머들-검은색 돌무더기
고사리마-봄철에 고사리가 돋기 시작할 때 지는 징마
곶자왈-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진 숲
굼부리-분화구
궨당-일가친척
낭-나무
돔베-도마
드르,벵듸-평평한 들판
마농-마늘이나 파를 통틀어 이르는 말
망사리-잠녀가 채취한 해물을 담는 그물
멜쿡-나물과 생멸치를 넣어 끊인 국
물질-잠녀들이 바다에서 해산물을 캐는 일
몸국-돼지고기를 삶은 국물에 모자반을 넣어 끓인 국
바당-바다
밖거리-말 외양간
밧,왈-밭
밭담,밧담-밭 주위를 에워 두른 담
비바리-전복 따는 사람, 미혼인 여자
산담-무덤 주위를 에워 두른 담
삼촌,삼춘-어른을 친밀하게 이르는 말
송이-붉은 색깔의 화산 부스러기
숨비소리-잠녀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는 소리
쉰다리-쉰밥에 누룩을 넣어 발효시킨 음식
쉼팡-지친 몸을 잠깐 쉴 수 있게 만든 대(臺)
안거리-안채
오름-작은 화산
올래-거리에서 대문까지 집으로 드나드는 아주 좁은 골목
정낭-정주목에 대문 대신 거는 너무 막대기
정주목-정낭을 걸 수 있게 구멍을 내 세워 놓은 돌 또는 나무
중산간-해안에서 한라산 쪽으로 200~600m안으로 들어간 중간지대
잠녀(潛女)-해녀
코지-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뻗어있는 육지의 한 부분
태왁-잠녀들이 바다에서 작업할 때 잠시 쉴 때 이용하거나 망사리를 매달아 두는 물건
테우리-들에 방목하는 말이나 소를 돌보는 사람
제주도 사투리
혼자옵서예-어서 오세요.
혼저 왕 먹읍서-어서 와서 먹으세요.
놀멍놀멍봅서-천천히 보세요.
호꼼만 이십서게-조금만 계서요.
어떵 갑니까?-어떻게 가나(어떤 수단으로)
감수광-가십니까
■제주어: 역사 그리고 태도Jejueo: History and Attitudes
양 창 용Changyong Yang
제주대학교Jeju National University
제주어는 표준어, 그 밖의 다른 지방에서 사용되는 지역어와 구별되는 언어적 특성을 갖고 있다(이숭녕 1978, 현평효 1985). 언어학적으로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주 어를 사용하여 타 지역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힘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이러한 제주 어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고 현재 제주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는 것은제주어 보존과 활성화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이에 본 발표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주어의 위상을 역사적 측면에서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 제주어에 대한제주어 화자들의 태도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고려시대
1.1. 제주어의 태동
제주어는 오랜 시간 동안 사용되어 왔지만 언제부터 제주어가 형성되어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학자들의 연구는 제주어의 기원이나 형성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제주어와 표준 한국어가 언제 분화되었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이는 표준어와 분화과정을 거치면서 제주어가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제주어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살펴본 한 연구에 따르면 제주어와 표준 한국어는고려시대에 분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제주가 정치적으로 한반도에 통합되는 시기에 해당되는데 강근보(1971: 27)는 제주어 분화 시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본도 방언은 지금부터 736 년 전 고려 충렬왕 4 년(1278) 경 까지는 문헌어(고려어의 이조어 형태)와 방언 분열이 생기지 않았고 그 이후에 분화과정을 겪어 방언화 하였음을 추정게 하는 것이다 1).그 밖에도 제주어가 고려시대에 분화되었을 것이라는 뒷받침해주는 고대 문헌들이 존재한다. 고재환(2011)은『계림유사』와『동한역어』등에 제주어과 관련된 어휘들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강신항(2010)의 『계림유사 「고려방언」 연구』를 인용하면서고재환 (2011: 271)은 “제주어는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쓰이던 언어가 상당수 보전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1.2 제주어와 몽골어의 접촉
한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문화 간의 접촉은 언어의 변화에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역사적으로 지배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피지배자들의 언어 사용에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고려시대 제주는 100 년 이상 몽고의 지배를 받았는데,
1) 강근보(1971)의 원문에는 논문 집필을 기준으로 694 년으로 명시되어 있다. 본고에서는2014 년 기준으로 계산하여 736 년으로 명시하였다.
두 이질적인 문화의 접촉은 언어 사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몽고는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적극적으로 제주의 정치에지배적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주로 병사)의 이주를 통해 제주의 사회, 문화에 직접적인영향을 끼치게 된다. 2).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지배적 위치에 있는 몽고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제주 사회의 언어적 환경을 주도해 나갔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특히 몽고는 목마장을 설치하여 제주의 목축업을 주도하였다. 몽고는 군수 물자로우수한 말을 공급하기 위해 제주에서 말을 육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배적인 몽골어의흔적이 제주어에 남아 있는데, 목축관련 몽골어의 흔적이 뚜렷하다. 몽골어 관련 연구서적을 잠시 살펴보면 석주명의 『제주도방언집』, 서귀포문화원이 발간한『제주도자료집』(2008)에는 몽골어에서 유래된 어휘가 200 여 개 나열되고 있다 3).하지만 강영봉(2012:23)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 결과에 의하면 방언을 포함하여 몽골어 차용 어휘는 50-60 여어휘에 불과하다. 그것도 말(馬), 군사, 매(鷹)이름 등에 집중된 상황이고...
”보는 바와 같이 몽고의 지배는 언어 접촉으로 이어져 제주어의 어휘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언어학적 관점에서 남아 있는 몽골어 어휘는 그 당시 제주사회를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어휘 유입 이외에 몽골어가언어학적으로 제주어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문헌 자료 등의 한계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종합하자면 고려시대는 제주어의 태동기라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제주가 고려에 통합되었지만, 문헌을 통해 볼 때 제주어는 지리적 여건 등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사용되는 언어와 분리되기 시작한 시기인 것 같다. 역사적으로 몽고의 지배는 언어접촉을 통해 초창기 제주어 형성에 다소 나마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조선시대
이 장에서는 문헌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제주어의 위상을 살펴보고 계속해서 제주어에영향을 주었을 만한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문헌에는 제주어가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제주어에 대한 충분한 기록들이 많은 문헌에 남아 있지 않다. 아래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 유배인들이 제주의 풍습 및 생활상을 기록한 내용에 언어관련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이 중 대표적으로 제주어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문헌이 김상헌이『남사록』이라 하겠다. 제주어와 관련해서 인용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俚語 以藪爲花 以岳爲吾老音 以爪爲蹄 以口爲勒 勒爲祿大 爲加達云
2) 이이화(1999)에 따르면 몽고의 침략은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는 식습관, 남녀의 의복, 사회의 변화, 언어의 변화 등을 그 예로 들고 있다.
3) 강영봉(2012: 22-23)은 몽고어 차용에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 목록은 앞으로 국어의 몽고어 차용어에 관한 종합적 연구를 행함에 있어 반드시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대충 보아도 의문을 던져주는 예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느껴진다. 제시된 몽고어 단어들 중에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 적지 않으며, 확인할 수 있는 경우에도 차용 관계를 설정하기 어려운 예들이 눈에 띈다.”
3사투리로 숲은 곶이라며 메뿌리를 오름이라 하며 손톱을 굽이라 하며, 입을 굴레라 하며, 굴레는 녹대라고 하며 또 가달이라고도 한다. (김희동(역) 1992:55)
若不 好字用漢音 比類甚多 謫人 申長齡 乃譯官也 嘗曰 比島語音 酷以中華如驅牛馬之聲 尤不可分辯云云 盖風氣與華不隔而然耶 曾爲元朝所據置官於此故與華相 雜而然耶 余之所聞 不至於地誌 所謂俚語者但高細不可曉則然矣 以藪 爲花 岳爲吾老音等語
귀양살이를 한 申長齡 역관 이었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이 섬의 말이 중국말과 아주 흡사하여 소 나 말을 몰 때의 소리는 더욱 분간하지 못하겠다..... 대게 기후가 중국과 차이가 없어서 그러한 것인지 일찍이 원나라가 점거 하여 관리를 여기에 둠 때문에 중국말과 서로 섞여서” 하였다. 내가 들은 바는 地誌에 이르지 못하나 소위 사투리란 다만 높고 가늘어 알아듣지 못하여 그럴 것이다. 숲을 곶이라 하고 메뿌리를 오름이라고 하는 등의 말은 앞서 얘기했다. (김희동(역) 1992: 58)
위인용에서 암시하는 바는 우선 조선시대 제주어 어휘는 표준어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과 제주어 나름의 언어적 리듬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제주어를 알아듣는데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왜 이러한 언어차이가 생겨났는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는데, 일찍이 고려시대 원의 지배를 받았고 그들 언어의 영향으로 제주어가 표준어와는 다르고 중국말과 흡사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 몽고와의 접촉이 제주어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하겠다.
다음으로 제주어에 영향을 미쳤던 역사적 사건으로 많은 유배인 들이 제주로 보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유배인들 대부분은 중앙 관료를 지낸 정치가이면서학자관료들이다. 그들이 유배기간 동안 독서를 하고 책을 집필하거나, 지역 유지의 자제를 교육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특히 교육활동은 제주 사람들에게 표준어에 대한인식을 심어줬을 것이다. 이들은 표준어를 사용하여 교육을 진행하였고, 제주 사람들은 이들의 학문과 사상을 전수 받기 위해 자녀들의 교육을 부탁하였다. 따라서 유배기간동안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여 교육과 계몽활동을 통해서 죄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교육자로 존경을 받았던 인물로 기록 되었다. 이들의 존재는 제주 사회의 일부에제주어가 타 지역 언어와 꾸준한 접촉을 유지하게 하였다 할 수 있다.
유배인 들은 제주에 머무는 동안의 경험을 저술로 남겼다. 이들이 남긴 저서는 그 당시제주의 독특한 생활 문화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김정의『제주풍토록』, 김상헌의『남사록』, 정온의『동계집』, 김춘택의『북헌집』,김정희의『완당전집』, 김윤식의『속음청사』등이 있다. 제주어와 관련해서 이들 자료집은 제주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타 지역의 언어와는 다르다는 기록을 간혹 남기고 있다.
다음으로 제주어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사건이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이라 하겠다. 출륙금지령의 배경은 성종에서 인조에 이르는 약150 년 간 기근 등으로 인해 제주 사람들이 제주도를 떠나 인구가 급격히 감소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조정에서는 국법으로 유망을 금지하는 강경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이것이출륙금지령(1629-1830)이다. 거의 200 년 간 지속된 금지령으로 인해 제주는 ‘바다에 떠있는 감옥’으로 비유되는데, 제주 사람들은 타 지방과 연결이 단절되어 폐쇄된 생활을 영위하여야만 하였다. 한반도와는 분리된 폐쇄된 제주의 지리적 환경이 제주어 형성의 근본 원인이라고 한다면, 인위적 단절은 제주어의 독자성을 촉진한 역사적 배경이라고4할 수 있다. 외부와 단절된 고립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강화해 나갔고 이러한 정체성은 사용되는 언어에 고스란히 반영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3. 개화기 시대
역사적 관점에서 강화도 조약(1976)부터 1910 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될 때까지를 개화기라고 한다. 이 시기의 조선은 서양 문물이 유입되면서 기존의 봉건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적 사회로 옮겨가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제주의 개화기는 출륙금지령이해체되면서 본토와의 교류가 재기 되는 시점으로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출륙이 허락되면서 제주 사람들이 외부와의 교역을 통해 제주에 변화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교육은 개화기의 시대적 정신을 반영하였는데,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2011:30)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내륙지방과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향리 출신들이 이를 주도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교역을 통해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자제를 급제시키기도 하고, 향임 및 관직에도 진출하여 지역의 신흥 토호 세력으로 급부상하였다. 이들 신흥 세력에 의해 신학문이 적극 수용되었고, 근대 학교가 제주에 설립될 수 있었다.
개화기 근대 교육은 중세의 봉건적 교육 형식을 거쳐 나타난 계몽주의 교육을 말하는데, 1895 년경부터 조선의 국권 회복을 위해 교육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제주에는 1897 년 ‘제주목 공립소학교’가 개교한 것으로 추측된다.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2011:35). 이를 시작으로 종교계 학교, 외국어 학교, 사립학교 등이 1910 년 이전까지 설립되게 된다. 한편, 학교 교육과 아울러 개화사상을 갖고 있던 유배인들(김윤식,이세직, 박영효 등)은 제주에서 사회 활동을 위한 단체를 조직하고 근대 교육 사상을 전파하였다.
비록 이러한 변화가 제주어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다만, 예상할 수 있는 것이 개화기에 밀려든 다양한 교육제도의 도입, 그리고 타 지역 사람들과의 빈번한 접촉 과정에서 타 지역 언어가 유입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개화기 과정을 통해 제주 사회는 언어 접촉 및 언어 혼용이라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표준어 사용자들의 수를 고려해 볼 때 그 범위는 제한적이었을 것이며, 제주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영향은 미미하였을 것이다. 교육제도의 도입과 함께 사용되기 시작한 표준어의 확대는 제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언어에 대한 태도(표준어 선호)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4. 일본식민지시대
일본식민지시대는 1910 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후 1945 년 해방에 이르기까지36 연간의 기간을 언급한다. 이전 시대의 기간과 비교할 때 시대 구분이 상대적으로 너무 짧지만 제주어 위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향후 표준어 사용을 위한 분위기 조성을 갖고 온 이 기간에 제주어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본격적인 교육제도의 도입과 인구(선생님) 유입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1910 년 한일 합병을 계기로 일본은 한국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국에 학교를 세우고 일본식 교육을 강화해 나간다. 4). 특히 일본은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면서
4) 일제는 통치 기간 동안 교육 정책을 네 번 바꾼다. 1911 년 제 1 차 조선교육령, 1922 년조선교육령 개정, 1938 년 제 3 차 조선교육령, 그리고 1943 년 제 4 차 조선교육령이 그것이다.
한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해 나가려고 했다. 식민지 교육 정책의 핵심은 교육을 통해한국을 일본에 동화시켜나가려고 하였다. 일본 식민지 정부는 일본어 확산을 교육정책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에 대해 Kim-Riveran(2002: 26)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Japan "adopted the diffusion of the Japanese language as an educational policy of primaryimportance."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서 제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들이 제주에 설립되기 시작하였고, 학교 교육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 진행되었다. 학교는 크게 정규학교와 전통적 서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규학교는 대학 및 보통학교를 포함한다. 서당은 신교육 보급을 목적으로 개량서당으로 변경되어 운영되다 1930 년 이후급격하게 감소되었다. 일본어 교육이 강화되었고 이와 함께 조선어 교육과 수학 과목이수업시간에 도입되었다. 이처럼 그 당시 제주 전역에 설립된 학교교육을 통해 조선어 및일본어 교육이 이루어졌는데 이들 언어 교육은 제주어의 언어적 위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이 시기에 조선어 교육의 확대는 제주 사회에 제주어 이외의 언어가 본격적인 도입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당시 학교를 경험했던 분들의 사례를 들어보면, 타 지역에서 온 선생님들은 조선어를 사용하였고, 제주 지역 출신 선생님들은 조선어와제주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제주어로 의사소통이 진행되었으며, 학교 밖에서는 제주어를 지배적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제주가 이중 언어사회로 전환되지는 않았지만 젊은 학생들이 조선어를 습득함으로써 이중 언어 사회의 토대를 형성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 하나의 언어 정책은 1940 년대 전후에 일제가 실시한 일본어 몰입교육이다. 일제 말황국식민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학교에서는 일본어로만 교육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일본어 몰입교육은 일본어 어휘가 제주어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지방도 그렇지만, 일본어가 마치 제주도의 희귀한 토속어인 줄 알고쓰여지는 것들이 있다. 그렇게 된 것은 36 년간의 일제치하의 조선어 말살어문정책 아래 우리의 말과 글을 없애서 일본어만을 사용하도록 강요했던 결과이다 (고재환: 2011: 352).
사례 조사 과정에서 1940 년대 제주에서 수원으로 공부하러 갔던 제주 출신 고등학생이 함경도에서 온 친구와 의사소통이 힘들어 혼났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이시기에 제주에서는 교육 환경 등을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제주어만 사용되는 환경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5. 1950 년대 (이중 언어 사회의 시작)
언어의 접촉의 주요 요인 중의 하나는 인구 유입, 혹은 전쟁의 발발이다. 6.25 전쟁은 제주에 대규모의 인구 유입을 촉진하였으면 이는 제주어와 표준어의 자연스런 접촉을야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6,25 의초기에 제주와 경상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북한군이 점령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전쟁을 피해 제주와 부산 지역으로 모여들었다. 제주의 경우전쟁이 발발한 지 1 년 만에 14 만 8794 명 피난민이 유입되었는데, 이는 제주 도민 전체6수의 절반을 넘는 것이었다. 5). 피난민은 대개가 남한 출신이었지만, 1953 년 1.4 후퇴이후에는 북한 출신자도 수만 명이 들어왔다 (한라일보 2014. 9. 16 ). 다음 표는 1950 년대 제주의 인구 동향을 보여준다.
[표 1] 제주어 통계 6)
연도별 |
계 |
||
계 |
남 |
여 |
|
1949 |
254,527 |
114,736 |
139,791 |
1955 |
288,801 |
149,993 |
138,808 |
1956 |
256,242 |
114,547 |
141,695 |
1957 |
258,961 |
116,163 |
142,798 |
1958 |
263,901 |
118,345 |
145,556 |
1959 |
268,740 |
121,740 |
147,000 |
1960 |
268,823 |
121,793 |
147,030 |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55 년에서 56 년 사이에 인구가 감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0 년에서 55 년 사이의 인구 통계가 없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쟁 발발과 함께 제주의 인구가 곱절 증가하였고 1953 년 전쟁이 종결되면서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교육청(2011: 226)의 자료에서도 50 년대중 후반 인구 감소에 대해 “전쟁이 끝난 후 제주를 떠난 것이 주된 이유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유례없는 인구의 증가는 제주 사회 다방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표준어사용자들이 제주에 유입되면서 제주 사회의 언어 사용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제주 사회에서 표준어가 빈번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식민지시대부터 이어져온 학교 교육의 영향으로 제주도민의 표준어 사용 능력의 내재되었었고, 타 지역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제주 사람들은 표준어를 사용하였다 고한다. 이 시기에 제주에 표준어가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정승철의 연구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정승철(2014: 87)은 강정희(2002)의 오사카의 제주 방언 현황연구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950 년대를 기점으로 그 전에 이주한 화자와 그 이후에 이주한 화자사이에 상당한 방언차를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제주방언‘ㅇ(아래아)’가 50 년대에 급격하게 변화를 겪었음을 ‘이주’ 문제를 통해직접적으로 입증할 수 있게 된 셈이다.”이처럼 50 년대 일본으로 이주한 화자들이 사용하는 제주어에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곧 제주에서 사용되는 제주어에 변화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표준어화자들의 급격한 이주로 제주에서 널리 사용하기 시작된 표준어가 제주어에 많은 언어적 영향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5) 거제도의 경우 1950년 인구수가 3배 증가했다고 한다. 거제도 거주 인구 7만에 피난민 10만 그리고 포로수용소 수감된 사람이 10만이 되었다고 한다. (http://artp1ay.blog.me/140188970019)6)
6)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인구정태통계로서의 최초의 인구조사는 내무부 소관 하에 1949년 5월1일 현재로 실시된 제1회 총인구조사인데, 이 조사 자료는 6·25전쟁으로 인하여 속보자료 이외에는 모두 소실되었다. 6·25전쟁 이후 1955년 9월 1일 현재로 제1회 간이총인구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당시 제주 사회의 언어 현황을 파악해 보기 위해 사례 조사로서 몇 분을 인터뷰해보았다. 현재 80 세 된 어르신으로 1957 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신 분이다. 질문은 크게 그 당시 학교에서 제주어를 사용이 어땠는지, 일상생활에 표준어가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제주어가 사용되었는지에 초점을 두었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제주어 사용이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학생들끼리도 제주어를사용하였고 선생님도 수업시간 대부분을 제주어로 진행하였다.
-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제주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표준어를 사용하여 그 사람들의 이해를 도왔다. 그리고 육지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표준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세련되고더 멋있어 보였다.
-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공공장소에서 제주어가 유일하게 통용되는 언어였다. 하지만 표준어의 등장과 함께 공공장소에서 제주어 대신 표준어가 사용되거나, 적어도 표준어와제주어가 섞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종합하자면 50 년대는 제주 사회에서 표준어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시기라 할 수 있다. 언어적으로 제주사회는 제주어와 표준어가 섞여 사용되는 이중 언어사회가 형성되기 되기 시작하였다.
6. 1960 년대 (약해지는 제주어의 위상)
1960 년대는 전쟁을 겪고 난 후 사회가 재정비 되는 기간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산업화를 위한 기초를 다지는 시기였고, 현대적 교육이 적극적으로 시도된 시기이기도하다. 교재를 포함해서 교육 체계에서 적극적으로 표준어 사용이 강조되었다. 60 년대 학교를 다녔던 분들을 중심으로 제주어 사용에 대한 사례 조사를 진행하였다.
- 가정에서는 주로 제주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가끔 표준어가 섞여 있을지는 모르지만 가정 내 의사소통은 제주어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표준어 교육이 강조되었다. 하지만 수업 진행은 표준어로 이루어졌지만제주어도 빈번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의 대화는 제주어가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비공식적으로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대화를 할 때는 친근감을 주는 제주어를 종종 사용하였다고 한다. 학교에서 제주어 사용을 억제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제주시 지역에서는 선생님들은 표준어로 수업을 진행하였고, 친구들끼리 표준어만사용하는 학생들도 꽤있었다고 한다. 제주시 지역은 교역 등을 위해 외부와의 접촉이 빈번하였기 때문에 이를 위해 표준어 사용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7. 1970 년대 (제주어 억압)
1970 년대는 중앙정부가 중심이 되어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한시기이다. 공장, 도로 건설을 통해 산업의 근대화를 촉진하여 경제적 자립을 촉진하려고 하였다. 농촌의 경우는 새마을 운동을 중심으로 도로 확장, 농지 정리 등을 통해 농촌의 발전을 위한 많은 힘을 쏟았다. 한국사회의 근대화는 단순한 외형적인 발전에만 초점을8둔 것이 아니었다. 외형적인 발전과 아울러 정신적 개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경제발전을 위한 현대화를 내세우면서 전통 풍습의 간소화를 진행하였다. 전통 풍습, 관습이 사라지는 것은 곧 제주어의 후퇴를 가져오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제주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문화 근간은 제주어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 개발과 발전과정에서 성공을 위해 표준어 사용이 강조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70 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TV 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TV 와 같은 언론 매체의 확산은 언어의 소멸을 가속화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제주의경우도 현대화 운동 함께 TV 의 보급은 제주의 사용을 크게 위축시키는 결정적인요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70 년대 제주어 현황 파악을 위한 사례 조사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이전 시대와 구분되는 한 가지 특징은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제주어 대신 표준어를 사용하도록 지도하였다는 점이다. 수업 시간 발표나 질문 혹은 이에 대답할 때 제주어를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심한 경우는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어울려 이야기할 때에도 표준어를 사용하도록 지도하였다. 필자도 유사한 경험을 갖고 있다. 교육을 통한 표준화정책이 강하게 추진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물론 제주시 등 도심지에 위치한 학교의 경우이미 표준화가 널리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골 지역 학교에 비해 표준어 정책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음을 조사 과정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 이 시기에 도농 간 언어 사용 차이가 분명하였던 것 같다. 제주시와 같은 도시는 외부 사람들이 정착을 하고 외부와 빈번한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어 표준어 사용이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골지역에서는 여전히 제주어가 주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 가정에서 제주어 사용이 주로 유지되었던 것 같다. 도시 지역의 경우 표준어 이외에제주어도 사용하였다는 반응을 보였다. 학교에서보다 훨씬 제주어를 많이 사용하였다 고한다. 시골의 경우 가정에서 제주어를 주로 사용하였다는 반응을 보였다.
8. 1990 년대 (제주어에 대한 관심)
사라져가는 제주어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시작되었다. 비록 지방정부가 자발적으로제주어 보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아니다. 한 원로 학자의 노력으로 제주어를보존하자는 제언이 이루어졌고, 이에 대해 지방정부가 지원을 결정하면서 제주어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제주대학교 총장을 엮임 한 국어 학자이신 현평효교수는 그의 연구를 바탕으로 제주도에 제주어 보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1950 년대부터 제주도를 돌아다니며 제주어 자료를 수집하고 제주어 연구의 토대를 다졌다. 특히 그가 수집한 방대한 제주어 어휘는 언어로서 제주어의 특색을 밝히는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은퇴한 후 제주어 연구에 몰두하며 보존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제주도 행정 당국에 제주어 보존에 적극적인 참여와 정책 입안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개인의 노력이『제주어 사전』(1995) 출간으로 결실을 맺었다. 1990 년대 제주어에대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 학교 교육에서는 제주어를 찾아보기 힘들게 된다. 이 시기에 학생들의 대화조차표준어로 이루어지면서 제주어는 학교 현장에서 거의 사라진다. 간혹 특유의 제주어어미가 사용되거나 재미를 위해 제주어가 사용되었고 의사소통으로서의 제주어는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 가정에서도 표준어 사용이 주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어르신들이 계신가정에서는 제주어의 맥이 이어졌지만 그 외의 젊은 부부가 중심이 된 가정에서 제주어사용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9. 2000 년 이후 (부존과 부활의 노력)
2000 년대 제주어에 대한 관심을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우선 외적 요인은 영어공용화 등과 같은 언어 요인이 영향을 미쳤다. 문순덕(2008: 291)은제주어가 관심을 갖게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제주도는 2002 년 국제자유도시로 지정되면서 제주어가 사랑 받았으며, 경제적인측면과 더불어서 언어의 문제가 급부상했다. 즉 영어공용어화 문제가 우리들에게 심각하게 다가왔다. 제주오라는 특정 지역에서 영어공용어화가 가능한지 여부가논의도면서 제주사람들의 정체성을 언어에서 찾으려고 했다.
특히 2010 년에 제주어가 유네스코 ‘소멸위기 언어’에 등록되면서 제주어 보존과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적 원인으로는 2000 년대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사라지는 제주어의 보존에 대한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단순한 학자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제주어를 사용하는 언중들이제주어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2000 년 이전에는 언어학적 가치로서제주어가 주 연구 대상이었다면, 그 이후에는 제주어의 위상이 보존과 활성화를 위한대상으로 바뀌었다. 제주어 보존과 활성화의 필요성이 제주어 화자들의 관심과 함께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제주어 사용자들이 제주어 보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제주어 활성화에 큰 의의가 있다. 이는 제주어 사용에 대한 태도의 전환을 의미한다. 제주 사투리라 불리며 표준어에 비해 다소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제주어에 대한이미지 전환을 의미한다. 2000 년 이후 제주어 보존을 위한 노력은 정책적 제언과 민간단체의 노력으로 정리 할 수 있다.
- 정책적 노력 : 2007 년 9 월 ‘제주어 보전 및 육성 조례안이 제정되었다.
: 2011 년 제주발전연구원에 제주학연구센터가 설립되었다.
- 시민 단체 : 2008 년 제주어 보전회가 창립되어 제주어 보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교육적 노력 :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학교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 제주어 보전회를 중심으로 제주어 육성 과정이 개설되어 운영되고 있다.
: 제주어 말하기 대회 등이 개최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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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http://artp1ay.blog.me/140188970019)
제주특별자치도. 1995. 『제주어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