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字)와 호(號)에 대하여
본명(本名)은 태어났을 때 부모에 의해 붙여지는 데 비해 자는 윗사람이 본인의 기호나 덕을 고려하여 붙이게 되며, 자가 생기면 본명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본명을 휘명(諱名: 부르기를 삼가야 하는 이름)이라고도 한다, (줄여서 "諱"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글을 아는 사람이면 성명 외에 자와 호(號)를 가졌는데, 이는 2가지 이상의 이름 가지기를 좋아하는 복명속(複名俗)이나 실제의 이름 부르기를 꺼리는 실명경피속(實名敬避俗)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윗사람에게는 자신을 실명으로 칭하지만 동년배 이하의 사람에게는 자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다른 사람을 부를 때, 같은 또래나 아랫사람에게는 자를 불렀고, 임금·스승·부모가 신하·제자·자녀를 부를 때는 실명을 사용하였다. ≪논어(論語)≫에서 공자(孔子)는 제자 안연(顔淵)을 회(回), 자공(子貢)을 사(賜)라 부르고 있다, .(顔淵의 "淵"과 "子貢"은 자임)
◉자(字)는 부모님이나 집안 어른이 짓는 것이고, 본명(本名) 외에 붙이는 성인(成人)으로서의 또 다른 이름으로 관례(冠禮=성인식) 때 지어 집니다. 성인이 되면 이름 대신 자를 부릅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관례 때 붙여 주는 성인으로서의 별명입니다, ≪예기(禮記)≫에 의하면 우리나리 경우 남자의 경우 20세가 되면 여자의 경우 15세로 결혼하게 되어 비녀를 꽂으면 자를 짓습니다. 자를 가지게 된 배경은 두 가지 이상의 이름을 갖는 풍속과 또는 실제의 이름을 피하는 풍속으로 전해지는데 그 근원은 실제의 이름을 공경하여 부르기를 꺼리는데서 나왔다고 봅니다. 자가 붙은 후로는 윗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을 본명으로 말하지만 동년배이하의 사람에게는 자가 쓰였다고 합니다. 특히 부모나 스승이 그 아들이나 제자를 부를 때에는 본명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남자는 그 실명과 의미상 관련이 있는 자를 붙여 그 위에 백·중·숙·계나 자(子:남자에 대한 미칭)를 붙이는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
여자의 자에는 자매의 순서를 나타내는 백(伯)·중(仲)·숙(叔)·계(季)를 붙이고, 그러나 한국에
서 여자는 자를 거의 가지지 않았고, 남자의 자에도 형제간의 차례를 나타내거나 같은 글자를 넣어 짓는 일이 흔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자를 쓰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일 것으
로 추정된다.
“예”成三問(성삼문)의 자 : 謹甫(근보), 李滉(이황)의 자 : 景浩(경호)
李珥(이이)의 자 : 叔獻(숙헌) 설총(薛聰)의 자가 총지(聰智), 공자는 본명을 구(丘), 자를
중니(仲尼)라고 했는데 중(仲)은 아우라는 뜻으로 공자에게는 형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지었
고, 니(尼)는 그가 이산(尼山)에 기도를 드려
낳은 아들인 것에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호(號)는 스승이나 친구 아니면 자기 스스로 지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이름이나 자 외에 누구나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칭호 입니다.
호는 본래 중국에서 주거지, 출생지등에 연유해서 누구나 보편화 하면서 호를 많이 사용하므로써 자 는 피하게 된 것입니다. 이 결과 후세인들도 선인들의 이름이나 자 보다 더 호를 더 잘 알게 되었구요.
“예”이황 보다는 李退계(이퇴계)로 이이 보다는 李栗谷(이율곡)으로 더 많이 부른다.
오늘날 이와 같은 호가 사라지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특히 몇 년전 신문이나 잡지 가운데는 정치인등을 애칭으로 부를 때 당사자에게 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DJ(후광), 김영삼 YS(거산), 김종필 JP(운정)등 영어의 머리글자로 표기하는 태도가 너무 시류에 영합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본명이나 자(字) 외에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으로 아호(雅號)·별호(別號)라고도 힌다. 이 역시 2종 이상의 이름을 가지는 풍속(복명속(複名俗))이나 본명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속(실명경피속(實名敬避俗))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한국이나 중국 등 주로 동양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호가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반·사대부·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되었다. 중국의 경우 호는 당나라 때부터 사용되었으며, 송나라에 이르러 보편화되었다.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인 이태백(李太白)이나 송나라의 문장가 소동파(蘇東坡)는 그의 본 이름인 이백(李白)이나 소식(蘇軾)보다도 호가 널리 알려진 경우이다.
우리나라에서 호의 사용이 정착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학자들 간에 학문적 교류와 편지 교환이 일반화되면서 본명보다는 호나 자를 사용하는 것이 예의를 차리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호는 대부분이 거처하는 곳〔所處以號〕이나 자신이 지향하는 뜻〔所志以號〕, 좋아하는 물건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거처하는 곳이 바뀜에 따라 호가 달리 사용되기도 했으며, 좋아하는 물건이 여럿인 경우 호는 늘어나게 마련이었다.
호의 종류에는 아호(雅號)·당호(堂號)·택호(宅號)·시호(諡號) 등이 있는데, 아호는 문인·학자·화가·서예가 등이 풍아(風雅)한 취미로 즐겨 썼고, 당호는 본래 집의 호를 말한 것으로 그 집의 주인을 일컫기도 한다. 택호는 벼슬이름이나 출신지를 붙여 그 사람의 집을 부르고, 시호는 선왕의 공덕이나 재상·학자 등의 행적을 칭송하여 임금이 추증하였고, 제자나 고향사람들이 지어 올리던 사시(私諡)가 있다.
※雅 바를 아, 떼까마귀 아, 號 부를 호, 부르짖을 호, 이름 호, 이름 호
堂 집 당 宅 집 택, 댁 댁, 터질 탁 諡 시호시
아호와 당호의 경우는 뚜렷한 구별이 없이 혼용되기 일쑤였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 이규보(李奎輔)의 경우는 초기에는 시·술·거문고 세 가지를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호하였다가 나중에는 구름에 묻혀 있는 자신의 처지를 좋아하여 백운거사(白雲居士)로 호를 바꾸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이후로 호의 사용은 더욱 확대되었으며 주로 자신이 학문을 배우고 가르친 곳을 호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황의 퇴계(退溪), 이이(李珥)의 율곡(栗谷), 서경덕(徐敬德)의 화담(花潭)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 문인들을 지칭할 때도 퇴계문인·화담문인·율곡문인 등으로 호를 사용하였다. 성리학자 조식(曺植)의 호 남명(南冥)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용어로서 노장사상에 관심을 가진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표현한 것이다.
호가 가장 많았던 사람은 조선 후기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로서, 알려진 것만 해도 약 500여 개가 된다. 김정희가 많은 호를 사용한 것은 시·서·화에 두루 능하였던 예술인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의 대표적인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선객(仙客)·불노(佛奴)·방외도인(方外道人) 등으로서 유·불·도 삼교사상을 망라하는 호를 사용한 것이 주목된다.
조선 후기 이래로 호 사전의 성격을 띤 많은 "호보(號譜)"들의 편찬은 호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던 당시 상황을 반영해주고 있다. 1945년에 편찬된 ≪대동명가호보(大東名家號譜)≫에는 호를 유형별로 분석하고 있는데, 당(堂)·암(巖)·실(室) 등으로 끝나는 호가 많았다.
내용별로는 자신이 거주했던 곳이나 인연이 있었던 곳을 따서 지은 경우와, 인생관이나 수양목표를 한 경우, 완호물(玩好物)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일제강점기에서는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주시경(周時經)의 ‘한힌샘’, 최현배(崔鉉培)의 ‘외솔’ 등의 호가 나타났으며,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김정식(金廷湜)의 소월(素月), 박영종(朴泳鍾)의 목월(木月) 등의 호도 우리에게 이름보다는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 외에 이상백(李相佰)의 호 상백(想白)과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의 호 이호우(爾豪愚)는 이름과 호의 음을 같게 한 경우이다. 오늘날에는 사회체제가 다원화되면서 2종 이상을 쓰는 호보다는 자신의 실명(實名)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문학·예술 등 일부 분야에서 호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호를 통하여 당시 인물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출처 :근곡전통예절연구원 ▶ 글쓴이 : 근곡 김홍엽
■ 조(祖)와 종(宗)에 대하여
조선시대 왕의 명칭에서 조(祖)와 종(宗)의 차이는 임금이 죽은 뒤 종묘(宗廟)에 신위를 모실 때 정하는 존호(尊號)를 묘호(廟號)라고 한다. 묘호에는 宗과 祖 두 가지가 있는데 생전의 공적을 평가하여 붙였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이 편찬한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대체로 나라를 처음 일으킨 왕이나 나라의 정통이 중단된 것을 다시 일으킨 왕에게는 祖를 썼고,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에게는 宗을 붙였다.
개국 군주 또는 국난을 치른 왕의 경우 祖,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의 경우는 宗
왕의 시호는 왕으로 재위하던 시절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칭호입니다. 그리고 묘호는 왕이 돌아가신 후 재위시절의 업적과 공적들 모두 평가해서 종으로 할 것인지 조로 할 것인지를 정했지요. 보통은 나라를 개국한 왕에게 태조라는 묘호가 붙듯이 조는 왕조를 개국하거나 외세들의 침략으로 부터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한 크나큰 업적이 있을 때 왕조를 개국한 왕에게 붙여지는 조와 같은 조를 붙여서 업적을 치하하는 묘호로 사용합니다.
조선의 왕들 중에서 태조 이성계와 세조 선조 그리고 인조와 영조와 정조 순조까지만 조라는 묘호가 붙어 있지요. 그리고 종이라 함은 백성을 편안케 하고 살기 좋게 태평성대를 이룩한 왕에게 사용됩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한 왕이어서 태조라 했지만 선조는 조선에서 가장 무책임한 왕으로 기억되면서도 조가 되었던 것은 임진왜란을 극복? 극복하지도 못했는데 어쨌든 일제에게 조선을 막아낸 인물이라 조가 된 거 같습니다. 그리고 반정으로 임금에 오른 세조와 나라의 위급한 상황을 잘 극복했다고 한 인조가 업적을 평가받는 반면에는 연산군과
광해군같이 임금이었으면서도 군으로서 역사에 기록된 것은 왕으로서의 평가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군이라는 칭호로 격하시킨 것은 왕으로 재위는 하였으나 왕으로 인정하지 못했던 겁니다. 하지만 종이었다가 조로 바뀐 왕도 있었는데요. 조선시대임금 조와 종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왜적을 물리친 공로를 허균 등에 의해 인정받은 선종은 선조로서 왕의 지위를 한 단계 격상 받게 됩니다. 하지만 세종대왕 같은 큰 업적을 남긴 선왕에게 종을 그대로 칭한 것은 업적을 바로 평가했다고 생각하기 불편한 점이 있네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를 태조로 칭한 것이 대표적이다. 반정(反正)을 통해 즉위했거나 재위 시에 큰 국난을 치른 임금들도 대체로 祖라는 묘호를 가지게 됐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와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 홍경래의 난을 치른 순조 등이 그렇고, 반정은 아니지만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도 같은 범주에 들어간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중종도 인종 초에 祖로 칭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중종이 성종의 직계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宗으로 하는 것이 옳다는 견해가 우세하여 중종으로 했다.
하지만 祖가 창업이나 중흥을 이룬 왕에게만 붙인다는 원칙 때문에, 宗보다 격이 높다는 관념이 은연중에 유행했다. 영조와 정조, 순조는 본래 영종, 정종, 순종이었으나 고종 때 영조, 정조로 불렀고, 순종은 철종 때 순조로 개정했다. 참고로 신라 왕 가운데 묘호를 쓴 이는 태종 무열왕 밖에 없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만 祖를 묘호로 썼다.
묘호는 원래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무열왕 묘호를 태종으로 정하자, 당나라 고종이 시비를 걸어왔다. "너희 신라가 해외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이란 칭호를 사용하여 천자의 칭호를 참람(僭濫)하게 썼으니, 그 뜻이 불충하므로 속히 그 칭호를 고쳐라."고 했다. 그러나 삼국유사엔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위업을 이루었기 때문에 태종이라고 썼다고 맞서서 그 뜻을 관철시켰다고 기록돼 있지만 신라의 다른 왕들은 묘호를 쓰지 못했다.
그러면 고려와 조선시대에 어떻게 이런 묘호를 쓸 수 있었을까? 고려 전기, 중국은 송, 요, 금이 서로 각축하면서 절대 패자(覇者)가 없었기에 고려가 황제를 일컬을 수 있는 국제 환경이 조성됐었다고 본다. 그러나 원나라에 항복한 이후에는 충렬왕, 충선왕 등으로 묘호를 쓰지 못했다.
하지만 조선은 중국의 충실한 제후국임을 표방했으나 때로 중국의 협박을 받아가면서도 묘호만은 그대로 유지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제후국이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자존 의식을 키우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대(事大)와 자주(自主)의 교묘한 줄타기였던 셈이다.
■ 대(代)와 세(世)에 대하여
대(代) 와 세(世)
一世代 = 보통 30년(三十年)을 기준(基準)으로 한다.
자기(自己)를 중심(中心)으로 윗 조상(祖上)을 말할 때 대(代)를 쓰고
아래로 말할 때 세(世)를 쓰면 편의상(便宜上) 혼란(混亂)을 일으키지 않는다.
대 ......代(祖上)를 논(論)할 때는 자기(自己)가 들어가지 않고
세 ......世(後孫)를 논(論)할 때는 자기(自己)가 들어간다.
세(世) → 양령대군 1세, 아드님 2세, 손자 3세
대(代) → 양령대군 아드님 1대, 손자 2대
대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파시조가 되시는 양녕대군은 대수에 들어가지 않고 아드님부터 대수를 따집니다.
족보에는 항상 시조나 파시조를 1세로 해서 2세, 3세로 따져 내려갑니다.
* 조상대칭법(祖上代稱法)
1代 = 父(아버지), 아버지와 나는 1대
2代 = 祖父(할아버지),
3代 = 曾祖父(증조),
4代 = 高祖父(고조),
5代 = 玄祖父(현조),
6代 = (6대조父),
7代 = (7대조父)
* 자손세칭법(子孫世稱法)
1世 = 己(자기),
2世 = 子(아들).
3世 = 孫(손자),
4世 = 曾孫(증손),
5世 = 玄孫(현손),(高孫)(고손)
6世 = 來孫(내손),
7世 = 昆孫(곤손),
8世 = 仍孫(잉손),
9世 = 雲孫(운손),
10世孫(10세손),
11世孫(11세손),
12世孫(12세손),
좀더 구체적(具體的)으로 논(論)할 것 같으면 대와 세는 이렇게 말 하는 거래요.
(8대조부).............8代祖
(7대조부).............7代祖
(6대조부), ...........6代祖.
玄祖(현조부),.........5代祖
高祖(고조부),.........4代祖 보통 고조부 이상 조상님께 시제를 지낸다.
曾祖(증조부), ........3代祖
祖父(할아버지), .....2代祖
父(아버지), ...........1代祖.
본인 ...................1세손
아들.....................2세손
손자 ....................3세손
2) 시제와 제사는
시제 = 고조부이상 조상님께 시제를 지내고,
제사 = 부모님이나 조부님 증조부님 고조부님까지는 제사를 모시는 것이 보통이다.
(4대 봉사奉祀)
출처: 김정웅의 아름다운 세상 글쓴이 : 이심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