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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元曉)와 의상(義湘)- 신라 불교의 전성기를 연 승려

작성자학천/우병구|작성시간18.03.13|조회수616 목록 댓글 0

출처: 인물한국사 고운기 외 1인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신라 불교의 전성기를 연 승려

 


한 나라의 역사에서 중요한 포인트를 만드는 이가 짝을 지어 같은 시대를 산 경우가 더러 있다. 그들은 때로 협력자이고 때로 라이벌이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같았다.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湘, 625~702)은 그 같은 예의 하나이다. 저 낮은 자리에서 바보처럼 우직하게 낮은 자와 함께 한, 두 사람. 그들은 바보 성자(聖者)의 전통을 연 이들이기도 하였다.


1. 같고도 다른 길을 걸었던 두 사람


전국의 오래된 사찰치고 원효와 의상 이름 들어가지 않은 곳이 드물다.원효와 의상이 창건했다는 절을 합쳐 셈하다 보면, 축지법을 쓰지 않고서 이렇게 먼, 이렇게 많은 곳을 다녀갔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이것은 역사상 이 두 승려의 영향력을 웅변한다.

우리 역사의 중요한 정신적 축을 지탱하는 불교이지만, 그 축은 다시 원효와 의상이라는 두 걸출한 승려에 의해 떠받들어지고 있다 해서 과언이 아니다. 역사의 인물이 수없이 많지만, 한국 불교 역사의 거의 전부라고도 할 만한 두 사람이 같은 시대를 살다 갔다는 점도, 다른 시대를 산 사람에게는 약간 섭섭한 일이다.



원효 영정, 경북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 소장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www.aks.ac.kr)>


 

원효는 617년생이다. 진평왕 39년이었으니, 신라가 바야흐로 삼국의 주도권을 잡아가기 시작한 무렵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변방의 시골 출신(경산 압량,자인)이었으며, 출산에 임박하여 이웃 마을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 어머니가 갑자기 해산 끼를 느꼈고, 아버지가 옷을 벗어 나무에 건 다음 그 안에서 출생했다.

탄생 자체가 극적인데, 평생을 기층 민중과 함께 살다간 실천적 수행자였던 그로서는 그런 운명을 닮은 탄생이었다.


의상은 625년생이니, 원효보다 여덟 살이 아래다. 귀족 집안 출신이라고는 하나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고, “의상은 실천행에 치중하여 미타신앙을 진작시키고 구도적 관음신앙을 강조하였다. 의상은 융합적 사상을 바탕으로 그가 창도한 화엄 교단에서 기층민 출신의 제자들에게 활동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이는 강한 신분질서가 유지되던 시점에서 교단 내에서의 평등 보장은 일반민에게는 희망의 대상이었다.” (역사학자 정병삼의 평가에서) 의상은 이런 평가처럼, 원효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을 걸어갔던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사상적 행태는 당시의 사회 상황과 크게 관련된다. 그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한 시기는 신라의 통일 전쟁을 전후한다. 비록 승리한 전쟁이었지만 그 소용돌이 속에서, 귀족은 귀족대로 민중은 민중대로 그들의 삶에 짊어져야 할 고통은 컸다.

이 고통의 무게를 덜어줄 종교인의 책임이 원효와 의상에게는 있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이 분명히 달라 보이는 점 또한 있다. 어떻게 다른지 우리는 두 사람이 함께 체험했던 몇 가지 일을 가지고 비교해 보자.


2. 선후배인 원효와 의상,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다.


의상이 두 번에 걸쳐 중국 유학을 시도했고, 결국에 종남산의 지상사에서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엄(智儼, 602~668)을 만나 득도한 사실은 명확히 전해온다. 이때 원효와 동행하여 중국 땅 변방에서 경험한 해골바가지 사건은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전해지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부석사의 의상 비문을 따르자면, 의상이 당나라에 들어가려 시도한 연도는 650년과 661년이다. 650년에 원효와 함께 가고자 고구려에 이르렀지만 어려움이 있어 돌아왔다는 것인데, [삼국유사]에서는 653년 두 사람이 고구려를 지나다 첩자로 오인 받아 붙잡혔다 돌아왔다고, 비문에서 말한 ‘어려움’의 구체적인 정황을 전해 준다.

3년의 차이가 나지만 같은 사실을 말한 것 같다. 지엄을 만나 화엄을 공부한 것은 두 번째 시도였던, 661년이다.


해골바가지 사건이 성립하자면 의상과 원효가 동행해야 한다. 첫 번째 입당(入唐)때, 두 사람이 동행한 것은 어느 자료나 같다. 그 자료에는 모두 그들이 붙잡힌 곳을 고구려 땅이라고 전한다.


중국에는 발도 붙여 보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무슨 해골바가지 사건이 있었겠는가. 일단 첫 번째 입당 시도는 제외해야겠다. 그런데 두 번째 입당 때는 대부분의 자료에 원효의 이름이 빠져있다. 이때 원효의 나이 벌써 마흔 넷이다.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은 ‘파계’ 이후이다.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 나이의 원효가 동행했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해골바가지 사건은 다분히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마저 짙어진다.


 

▲ 일본 교토 소재 오타니(大谷)대학박물관 소장 신라승려 원효대사의 판비량론 필사본. 현존하는 유일한 판본으로 애초에는 일본에서 썼다고 했지만, 이 필사본 자체가 신라에서 들어왔다는 주장이 최근에는 강하게 대두한다. 국립경주박물관이 마련하는 '원효대사' 특별전에 선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연합뉴스

 


 

▲ 일본 교토 소재 오타니(大谷)대학박물관 소장 신라승려 원효대사의 이장의 필사본. 23.2×16.2cm.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 국립경주박물관이 마련하는 '원효대사' 특별전에 선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사실 이 이야기는 중국의 3대 고승전의 하나인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의상 전기에 나온다. 의상의 입당을 669년이라 한 이 전기에서 의상의 결의에 찬 구도심을 보여주기 위해 나오는 이야기이다.

 

흔히 입당을 포기하고 깨끗하게 돌아선 원효에게 눈길이 가기 쉬우나, 어디까지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의상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의상의 나이 약관이었을 때 일이라고 하면서 원효와의 이 체험을 소개하지만, 고구려에서 첩자로 잡혀 돌려보내진 일은 언급하지 않아, 두 사건 사이의 전후 관계를 맞춰 보기 어렵다.

 

‘의상의 나이 약관’이라는 표현대로라면 그가 스물다섯 살인 650년의 첫 번째 입당 때여야 한다. 그러나 비문이나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때 고구려에서 원효와 함께 붙잡혀 있다 돌아오지 않았던가. 이러 저리 맞추어보아도 해골바가지 사건에는 누수(漏水)가 심하다. 치밀하지 않고 물이 줄줄 샌다. 다만 [송고승전]도 의상이 두 번 이상 입당을 시도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는 하다.


3 원효는 직관을, 의상은 통철을 중시한 길을 걸었다.


어쨌거나 [송고승전]에 따르면, 두 사람은 당주(唐州)의 경계에 이르렀다.(‘당주의 경계’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음) 배를 얻어 타고 바다를 건너려 하는데, 주변은 어두워지고 큰비를 만나 길가의 토굴에 겨우 몸을 숨겼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곳은 무덤이요, 그들이 자고 난 옆에는 해골바가지가 뒹굴고 있지 않은가? 목마른 원효가 그 해골바가지에 괸 물을 마셨다는 말은 아무래도 후대에 첨가된 것일 뿐 [송고승전]에는 그마저 나오지 않는다. 또 흔히 원효가 거기서 깨닫고 발길을 돌렸다고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고 이제 중간이다.

날이 밝았으나 비는 계속 내리고 길에는 물이 가득 고여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두워지기 전 미리 헌 집을 한 채 물색해 잠을 청했다. 그러나 밤이 깊어도 원효는 종내 잠을 이루 수 없었다.

지난밤 토굴에서 자던 일이 자꾸만 떠오르고, 눈앞에 귀신의 눈동자가 자꾸만 오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날이 샌 다음에야 원효는 탄식하며 의상에게 말한다.


국보 제18호 부석사 무량수전



당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부석사의 무량수전(국보 18호)


“지난밤 잘 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아,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오.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송고승전]에서


원효는 바랑을 메고 발길을 돌렸다. 이 순간 원효는 이미 원효였다. 저 유명한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오.’라는 구절 때문에라도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송고승전]의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의상의 전기이다.

원효의 득오(得悟) 순간을 부각시키자는 목적이 아니었다. 원효가 돌아간 길을 의상은 “한 그림자에 외로이 싸우며, 죽음을 무릅쓰고 물러나지 않았다.”라고, [송고승전]의 마지막 대목은 적고 있다. 의상은 그런 사람이었다.


원효가 감성적이라면 의상은 이성적이다. 원효와 달리 의상은 귀신 따위로 마음을 흩뜨릴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원효와 의상은 서로 가는 길이 분명히 달라졌다.

물론 의상의 굳은 마음을 칭송하고자 [송고승전]은 굳이 이 일화를 집어넣었겠지만, 그렇다고 원효를 낮춰보자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원효에게는 직관(直觀)을 중시한 원효의 길이, 의상에게는 통철(洞徹)을 중시한 의상의 길이 있었다.


4 두 사람이 걷는 길은 달랐으나, 가고자 하는 목표는 같았다.


두 사람이 다시 한 자리에 나타나는 건낙산사 관음보살 이야기에서이다. 670년경,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의상이 동해 바닷가 굴 안에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지금 의상대 옆 홍련암 아래에 있는 굴이다. 7일간의 기도 끝에 의상은 보살이 보낸 용을 만나 선물을 받는다.

 

그러나 의상은 7일을 더 기도한다. 그의 목표는 용이 아니었다. 처음 목표한 관음보살을 만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 그게 의상이다. 결국 관음보살은 의상을 굴 안으로 불러 그 모습을 보여주며, 산 위에 절을 지으라 한다. 바로 지금의 낙산사이다. 철두철미, 용맹 불퇴의 전형이다.

 

그 소문을 듣고 원효가 찾아온다. 들판에서 가을걷이 하는 여자에게 다가가 벼를 달라 하기도 하고, 빨래터에서 개짐을 빠는 여자에게 물을 달라 하기도 한다. 마치 유람 나온 사람처럼 넋 놓고 낙산사 찾아가다 만난 이 여자들이 사실은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

 

원효는 보살의 시험에 보기 좋게 걸려들고 만 것이다.치밀하게 준비하여 목적한 바를 이루고야 마는 의상에 비한다면, 원효는 설렁설렁 대다 실수만 하는 역할을 자주 맡는다. 사복이라는 아이를 만나 나누는 대화도, 해동불교의 좌장 소리를 듣는 원효로서는 자존심 상할 실수의 연발이다.

 

자원해서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는 파계까지 저지르지 않았던가. 그럴 때는 아주 바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원효이기에 역설적으로 민중의 마음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진일보(進一步)가 이 아니고 무엇일까.



의상이 14일간의 기도를 통해, 관음보살을 만났다고 하는 장소에 세워진 

사적 제495호 양양 낙산사 (의상대)


의상도 마찬가지였다. 의상이 무슨 귀족불교의 대표인 양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학문세계가 지닌 성격이 그렇고, 정치권에 가까이 설 기회가 많아서 생긴 선입견일 뿐이다.

 

앞서 의상은 “화엄 교단에서 기층민 출신의 제자들에게 활동의 기회를 열어주었다.”고 말하였는데, 그런 전형적인 예가 진정(眞定)이다. 먹을 것이라곤 쌀 한 되밖에 남지 않은 가난한 집 출신의 진정. 그의 어머니는 의상에게 가고 싶다는 아들의 뜻을 이루려 그 쌀을 탈탈 턴다.

 

주먹밥 일곱 덩이를 만들어 싸주고는, 도를 이루자면 가는 길에 밥 지어 먹는 시간도 아깝다며 밤길에 내쫓는다. 어머니의 비원을 안고 온 이 나무꾼 청년을 의상은 서슴없이 받아들인다. 사람을 아끼고 우직하기로는 의상만 한 이가 없다.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자신을 ‘바보’라고 했다. 그 말의 깊은 뜻을 평범한 우리네가 섣불리 헤아릴 수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바보라 하니 바보라고 부를 수밖에. 그런데 그렇게 불러놓고 나면 얼마나 다정하고 편안하게 성자(聖者)의 모습이 다가오는지 모른다. 그는 ‘바보’ 아닌 ‘바보 성자’이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이런 전통은 벌써 원효와 의상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의상대사와 선묘낭자 전설_영주부석사 선묘바위(부석)


세계적인 불교 사상을 펴신 한국을 대표하는 스님으로 대승기신론 원효대사와 , 일승법계도 의상대사를 꼽는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탁마하는 절친(도반?)이었다. 함께 당나라 유학을 떠나는 길에 길을 잃고 비를 피하기 위해 토굴 속에 들어가 밤을 지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무덤의 해골 가운데 누워있었다고 한다. 간 밤에 달게 마신 물이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원효대사는 몰록 마음을 깨달아 되돌아가고 의상대사만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 만법이 오직 생각 탓으로 생기는도다.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는 것을 무엇 때문에 법을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혼자 남겨진 의상대사의 맘이 어땠을까 생각이 든다. 배신감이 들고 외롭지 않았을까? 중생심에서 하는 생각이고 스님들은 다만 마음따라 각자의 갈 길을 그냥 갔을까?

 

의상대사에 대한 다른 일화는 선묘아가씨의 헌신적 사랑이야기가 있다. 영주 부석사에 그 전설이 있다.

 

의상이 동주해안에 한 신도의 집에 얼마간 머무르게 되었는데 고운 옷을 입고 아름답게 화장을 한 선묘아가씨가 사랑을 속삭여왔다. 그러나 의상의 마음은 돌과 같아서 동하게 할 수가 없었다. 신통한 대답을 얻지 못하자 선묘아가씨가 도심을 일으켜 대원을 발하여 말하였다.

 

'세세에 태어나 화상께 귀명하고 대승을 배우고 익혀 대사를 성취하리라. 제자는 반드시 신도가 되어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공급하리이다.'

 

의상은 화엄경을 배우고 귀국하게 되었는데 다시 그 신도집에 이르러 수년에 걸쳐 뒷바라지를 해준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고 상선의 편이 있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어느 날 출범을 하게 되었는데 선묘는 의상에게 드릴 법복과 여러 가지 집기 등을 마련하여 함 속에 가득 채워 해안가로 가지고 가 보았더니 의상이 탄 배가 이미 항구에서 떠나 있었다. 그녀는 기도를 올려 '내 본래의 참뜻은 법사를 공양하는 것이다. 원컨대 이 의복을 담은 합이 저 앞에 가는 배에 날아 들어가라.'이렇게 외고 함을 거센 파도 위로 던졌다. 때마침 질풍이 불어 이것을 날리는데 마치 새털과 같았다. 그리하여 멀리 이 함이 배에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다시 맹세하기를

'이 몸이 큰 용으로 바뀌어 저 배의 선체와 노를 지키는 날개가 되어 무사히 본국에 되돌아가 법을 전할 수 있게 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바다속에 뛰어 들어갔다. 원력은 굽힐 수가 없었다.. 지성이 신을 감통케 함이었을까? 과연 그 몸매는 요교하여 혹은 약동하고 혹은 굽이치면서 그 배밑을 안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본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의상은 본국에 되돌아온 후 산천을 두루 찾아 법륜을 돌릴만한 곳을 찾았다. 그때에 선묘 용은 항상 따라다니며 의상을 지켰는데 의상의 뜻을 알아 허공중에 대신변을 일으켜 커다란 바위로 변했다. 넓이와 깊이가 일리 쯤 되는 바위가 되어 가람의 정상을 덮고 막 떨어질락말락 하는 모양을 하였다.많은 승려들이 놀라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달아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의상은 절 안으로 들어가 『화엄경』을 펴기 시작하였다.

 

의상의 강설로 심어진 나무는 꽃을 피우고 그가 대화를 통해 이룬 숲은 열매를 맺었다. 법당에 올라 그 법의 안쪽 깊숙한 곳을 본 자는 지통, 표훈, 범체, 도신 등 수 명이 있는데 모두 큰 알 속에서 그 껍질을 깨고 날아간 가유라 새들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는데 같은 비유는 아니지만 여성의 사랑 또한 그 힘이 얼마나 강하다고 여겨지는지 보여주는 일화이다 싶다.

오래된 전설과 문화재가 있고 세월의 흔적으로 부석사는 품이 깊고 넓고 편안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본 법당은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무량수전이다.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특이점은 본존불은 비로자나 부처님인데 정면이 아니라 측면에 배치되어 있다. 자연히 출입은 정문으로 하게 된다.

 

사람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갔던 곳 부석사...사람은 다 가고 절과 수목만 남았다.

의상대사를 만나고 싶었는데 못 만나고 여기저기를 돌다가왔다.


 


원효대사

원효(617~686) 경산 압량(자인) 15~16세 출가

원효34살 때 (650), 의상(625~702)과 함께 삼장법사 현장(600~664)의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육로로 당나라 유학을 가다가 고구려와 당나라 국경에서 간첩으로 오인 받아 수십일간 같혔다가 간신히 신라로 돌아오다.

원효(설서당) 나이 37~43살 때

태종무열왕(재위 654~660) 때 딸 과부인 요삭공주와 원효를 맺어주기 위해 남산에 있던 원효를 요석궁으로 불러서 옷을 물에 젖게하고 옷을 말리는 핑계로 요석궁에서 3일간 원효와 지내는 동안 임신이 되어 파괘승이 된다.

요석공주가 만삭의 몸으로 원효가 있던 경산 압량 반룡사를 찾아 갔으나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절에서 멀지 않는 삼성산 자락의 경산시 유곡동 한 민가에서 설총을 출산한다.(655년)

원효가 소요산에 머물며 수행을 전념할 때 요석공주는 아들 설총을 데리고 찾아와 공주는 남편을 만나러 가는 대신 산아래에 별궁(요석궁)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원효가 수도하는 원효대를 향해서 아들과 함께 예배를 올렸다고 한다. 원효와 요석공주는 끝내 함께하지 못했다.

원효가 45세 때(661년) 의상과 함께 재차 당나라 유학길에 가다가 어두운 밤에 비를 만나 움막에서 하룻밤을 지내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바가지에 담긴물을 달개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움막은 무덤이고 물은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 급히 토 하다가 "모든것은 마음에 달렸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뜻을 깨닫고는 유학을 포기한다. 원효가 득도한 곳은 직산(稷山) 지금의 충남 천안)이다.

원효는 왕실중심의 귀족화된 불교이론을 민중불교로 바꾸었다. 그당시 불교계에서는 "만인(萬人)의 적"으로 통했다. 원효는 70살 혈사(穴寺, 지금의 경주 인근 추정)애서 입적한다. 아들 설총은 유골을 빻아 소상(燒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봉안한다. 한편 의상은 신라의 진골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시조가 된다.    

▲ 일본 교토 고산사 소장 원효대사 진영 모사본. 비단에 채색. 102.1×52.6cm. 로마치시대(1336~1573). 국립경주박물관이 마련하는 '원효대사' 특별전에 선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원효스님께서는 불교를 배우기 위해서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합니다.

구법의 길을 가시면서 하루는 인적이 없는 산 속에서 노숙을 하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비바람과 한기를 피하려 마침 찾으신 흙집으로 들어가고

어둠속에서 갈증을 느껴 손에 잡힌 바가지 속의 물을 달콤하게 마시게 됩니다.

그런데 다음 날, 날이 밝아져서 주변을 살펴보자

어제 잠든 곳이 흙집이 아니라 무덤 안이었으며

물을 마신 바가지가 해골바가지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시고는 더럽고 구역질이나는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스님께서는 이 경계에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었죠.

어제 어두운 밤 갈증이 날 때에는 그렇게 달콤하던 그 물이

밝은 대낮에 보니 해골에 담긴 물인 것을 보고는 혐오스럽고 구역질이 나니까요.

물은 같은 물인데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기십니다.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

심멸즉 감분불이(心滅則 龕墳不二)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

심외무법 호용별구(心外無法 胡用別求)


마음이 일어나니 다양한 분별 대상(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니 흙집(龕 삶을 담는 그릇?)과 무덤(墳 죽음)이 둘이 아니로구나.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가 오직 마음일 뿐이고 모든 세상 일이란 오직 분별일 뿐이네.

마음 밖에는 분별 대상(법)이 없는데 (마음을) 어찌 이용하여 따로 구하려 하는가?


龕 [감실 감] 1. 감실(龕室: 신주를 모셔두는 장(欌)) 2. 절의 탑 3. 그릇 4. 용 모양

墳 [무덤 분] 1. 무덤, 봉분(封墳) 2. 언덕 3. 둑(높은 길을 내려고 쌓은 언덕)

胡 [되 호,오랑캐 이름 호,수염 호] 1. 되(분량을 헤아리는 데 쓰는 그릇 또는 부피의 단위) 2. 오랑캐 이름 3. 수염, 구레나룻(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 4. 턱밑살 5. 풀 6. 성(姓)의 하나 7. 어찌


저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인가를 향상하려는(부족함을 채워보려는) 마음에서 길을 떠나고 (구도의 시작)

어두운 밤에 (즉 무명의 상태에서) 무덤(몸)이 무덤인 줄 모르고 들어가며 갈증이 생겨서 (즉 갈애가 생겨서) 해골바가지의 물인 줄 모르고 (해골바가지란 우리가 윤회를 계속하게 되는 것을 은유한 것) 그 물이 달콤하다면서 마셨는데 (감각적인 욕망(kāmarāga)에 빠져서) 아침에 보니(원효 元曉; 깨닫고 나서 보니, 元曉는 새벽이란 뜻)

동굴(현생의 집)은 죽음이 기다리는 무덤(몸)이요, 동굴안 달콤한 물이란 윤회를 유지시켜주는 해골바가지의 혐오러운 물이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진위를 떠나서 철저하게 부처님 가르침을 은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_()_


원효대사


의상대사

 

625년(진평왕 47년) 경주에서 태어나, 644년(선덕여왕 13년) 황복사에서 출가해

승려가 되었습니다.

 

650년 원효대사와 함께 현장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신유식을 배우기 위해 중국 당 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느나 요동에서 첩자로 몰려 실패하고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661년(문무왕 원년) 당의 사신을 따라 뱃길로 중국 유학을 떠났고,

원효대사는 신라로 돌아온데 비해 의상대사는 끝내 유학을 감행하여 중국

화엄종의 제2대조인 지엄의 문하에서 화엄사상을 공부했습니다.

 

신라로 귀국한 후 신라 화엄종을 창설했으며, 법계도 201자를 바라보면서 글자 하나하나 제멋대로 자기의 우월성만을 주장하고 자리다툼만 한다면 의미 있는

글이 될 수 없다 주장하여, 667년 7언 30구 210자로 화엄사상의 핵심을 도인으로 나타낸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하였습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 55호 범어사의상대사영정

[출처] [생확속불교] 화엄종 창시자 의상대사


[출처] [생확속불교] 화엄종 창시자 의상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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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년(문무왕 16년) 왕명에 따라 죽령 인근에 부석사를 짓고 화엄의 교리를 양성하여

"해동 화엄의 초조"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경상남도 거창 우두산의 의상봉

강원도 양양 낙산사의 의상대의 명칭은 의상대사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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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사  [출처] [생확속불교] 화엄종 창시자 의상대사|


의상대사

 

625(진평왕 47)-702(성덕왕 1). 신라시대의 승려. 화엄종의 개조이다. 당나라에 가서 지엄으로부터 화엄을 공부하였으며, 676년(문무왕 16) 부석사를 세우고 화엄사상을 펼쳤다.

 

성은 김씨. 신라의 진골로 법명은 의상(義湘).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다.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이자 화엄십찰의 건립자이다.

 

19세 때 경주 황복사(皇福寺)로 출가하였다. 중국으로 가기 위하여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으나,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정탐자로 오인 받고 돌아왔다. 10년 뒤인 661년(문무왕 1)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중국화엄종의 제2조로서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지엄으로부터 8년 동안 화엄을 공부하였는데, 그의 나이 38세로부터 44세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때,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開祖) 도선율사(道宣律師)와 교유하였으며, 중국화엄종의 제3조 현수(賢首)와의 교유는 귀국한 뒤까지 이어졌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의상의 귀국 동기는 당나라 고종(高宗)의 신라 침략소식을 본국에 알리는 데 있었다고 하며, 『송고승전』에는 화엄대교(華嚴大敎)를 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신라로 돌아온 해에 낙산사(洛山寺)의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은 그의 관음신앙을 알게 해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다.

 

그 뒤 676년(문무왕 16)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까지 화엄사상을 펼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전국을 편력하였다. 그가 건립한 사찰은 부석사를 비롯하여 중악팔공산 미리사(美里寺), 남악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강주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 가야현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삭주화산사(華山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전주모악산 국신사(國神寺) 등 화엄십찰(華嚴十刹)이다. 이밖에도 불영사(佛影寺), 삼막사(三幕寺), 초암사(草庵寺), 홍련암(紅蓮庵)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그에게는 3,000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 10명이 아성(亞聖)으로 불렸으며, 범체(梵體)나 도신(道身) 등도 뛰어난 제자들이다.

그는 황복사에서 『화엄일승법계도』를 가르쳤고, 부석사에서 40일간의 법회를 열고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문답하였으며,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화엄경』을 90일 간 강의하였다. 지통의 『추동기(錐洞記)』, 도신의 『도신장(道身章)』 등은 그의 강의를 기록한 문헌들이고, 표훈의 『오관석(五觀釋)』과 진정의 『삼문석(三門釋)』은 그로부터 『화엄일승법계도』를 배우고 지은 것이다.

 

그는 강의와 수행에 전력했으며 의정(義淨)의 세예법(洗穢法)을 실행하여 수건을 쓰지 않았고 의복·병(甁)·발우, 세 가지만 지녔다. 문무왕이 장전(莊田)과 노복(奴僕)을 베풀자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문무왕이 성곽을 쌓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왕의 정교(政敎)를 밝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글을 올려 역사(役事)를 중지시켰다.

 

저술로는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 1권, 『소아미타의기(小阿彌陀義記)』 1권, 『화엄일승법계도』 1권, 『백화도량발원문』 1권 및 최근 발견된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등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원효대사

 

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설(薛)씨. 원효는 법명,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 압량(押梁 : 지금의 慶山郡 자인) 불지촌(佛地村) 출신.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이며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다. 648년(진덕왕 2) 황룡사에서 스님이 되어, 각종 불전을 섭렵하며 수도에 정진하였다.

 

650년(진덕여왕 4)에 의상과 함께 당(唐)의 현장과 규기에게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날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돌아왔다.

 

10년 뒤, 다시 의상과 함께 해로를 통하여 입당(入唐)하기 위하여 가던 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이후, 655년에서 660년 사이에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 실계(失戒)의 사실이 오히려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실계 후,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면서 광대들이 무롱(舞弄)하는 큰 박을 본 따 무애(無碍)박을 만들어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인데, 그 노래를 <무애가(無碍歌)>라 불렀다.

 

그리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미친사람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여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있어 거사(居士)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고, 혹은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祠堂)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다.그는 또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는 등 대중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뱅이나 어린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일생은 화쟁의 방법에 의하여 자리(自利)를 구하고 대중교화를 통하여 이타(利他)를 행함으로써 석가 이후 '상구보리 하화중행'으로 대표되는 불타의 참정신을 구현한 것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서나 <대승기신론소> 등에서 볼 수 있는 일심사상(一心思想) ·무애사상(無碍思想) ·화쟁사상(和諍思想) 등은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이론을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공헌하였으며,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시키려 한 대저술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다. 일생을 참선과 저술, 대중교화에 힘쓰던 그는, 686년(신문왕 6)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나이 70세, 법랍 38세로 입적하였다. 뒤에 1101년(고려 숙종 6)에 대성화정국사 (大聖和靜國師)라 시호했다.

 

저술은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3권·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3권· <화엄경종요(華嚴經宗要)>· <유마경소(維摩經疏)>3권·<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3권· <범망경소(梵網經疏)>2권· <범망경보살계본사기 (梵網經菩薩戒本私記)>2권·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1권· <섭대승론소(攝大乘論疏)>4권· <대승기신론종요 (大乘起信論宗要)>1권· <초장관문(初章觀文)>2권· <반주삼매경소(般舟三昧經疏)>1권· <아미타경소(阿彌他經疏)>1권· <무량수경소(無量壽經疏)>1권· <삼론종요(三論宗要)>1권 등 9부 240여권에 달한다. 이는 양으로도 남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도 매우 훌륭하여 당나라의 석학들이 그의 저술을 '해동소(海東宵)'라고 칭송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효대사


세상에는 쓸모없는 것이 없습니다 _

옷을 짓는 데는 작은 바늘이 필요한 것이니

비록 기다란 창이 있다고 해도 소용이 없고

비를 피할 때에도 작은 우산 하나면 충분한 것이니

하늘이 드넓다 하더라도

따로 큰 것을 구할 수고가 필요 없다.

그러므로 작고 하찮다 하여 가볍게 여기지 말지니

그 타고난 바와 생김생김에 따라

모두가 다 값진 보배가 되는 것이다.

- 원효 대사 -


천상병의 시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하늘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노래가사)

사랑도 부질없어 미움도 부질없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버려 성냄도 벗어버려 하늘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사랑도 훨훨~ 미움도 훨훨~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탐욕도 훨훨~ 성냄도 훨훨훨~~~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강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太宗武烈王...신라 29대 왕(金春秋-江陵 金氏)

元曉大師...................무열왕 사위

瑤石公主...................무열왕의 2째딸 →瑤(옥돌요)

逍 遙 山....................경기 동두천소재→遙(멀요)

薛聰(설총).................元曉大師의 아들


☞본래 원효대사의 출가전 이름은 설 서당( 薛 誓幢)임으로 아들은 당연히 설(薛)씨임 元曉大師의 跛行


行者羅網(행자나망)은 狗被象皮(구피상피)요,

道人戀懷(도인연회)는 蝟入鼠宮(위입서궁)다.


즉,

수행 제자들 에게는 "수행자가 비단옷을 입는 것은 개가 코끼리 가죽을 덮어쓴 것과

같고, 도를 닦는 사람이 사랑을 품으면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분수에 맞는 행동을 해야 된다며 엄하게 교육을 한 큰 스님이

요석공주가 얼마나 미인이였기에 원효같이 당대의 큰스님이 승복을 벗어 던지고

공주와 사랑을 했을까?

역시 사랑에도 大師임에 틀림이 없다....부럽다.


誰許沒柯斧(수허몰가부) 我斫支天柱(아작지천주)


즉,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깍으려는데 자루없는 도끼는 누가 허락을 할까?

지금의 말로 표현을 한다면 "대사의 거시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한데 이를 받아줄

여인은 어디에 있는가"하고 무열왕의 귀에 들어가게 했던 것 입니다.

결국은 무열왕은 이뜻을 알았고 급기야는 신하를 시켜 원효를 불러 요석공주와

합방을 시키니, 설총이란 학자가 태어나고 말았던 것입니다....ㅎㅎㅎㅎ

애까지 낳았으면 요석공주와 일평생 잘 살 것이지 석가모니가 뭐그리 좋다고

소요산으로 줄행랑을 쳤단말인가...경주에서 동두천이 거리나 가깝나...

요석공주는 원효의 하늘을 받칠 정도의 기둥 생각에 잠도 않오고 일편단심 원효대사

생각에 우울증이 걸릴정도라 하는수없이 무열왕에 간청하여 동두천 소요산으로

한걸음에 와서 맞날것을 애원 하지만 원효대사는 불법에 증진해야 한다며

소요산 원효대에서 두문불출하니, 효석공주는 죽을 결심을 하고 소요산 공주봉까지

올라 죽으려 하지만 경주의 아버님 생각에 죽을 수가 없어 공주봉에서 평생을

원효대를 바라 보다가 일생을 끝냈다는 스님과 공주의 당대 최고의 슬픈

사랑 이야기입니다.


원효대와 공주봉은 위의 등산지도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라고 노래를 하였다

사람들은 원효가 거리에서 부르는

이 노래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지만

무열왕은 원효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하. 마침내 내 자식이 대사의 마음을 움직였구나

항시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공주를 애석해 하던

태종무열왕이 노래를 듣고는 “대사가 필경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대사가 내 딸과 결혼하려고 과연 승복까지 벗을까

생각하던 무열왕은 어느 날 신하를 시켜 거리를 돌아다니는

원효를 찾아 요석 궁으로 인도해 들이게 한다

신하는 어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아다니다가

문천 교라는 다리를 지나고 있는 원효와 맞닥뜨린다

그 신하가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던

원효는 신하의 모습이 먼 곳에서 보이자

짐짓 발을 헛디딘 체 문천교 아래 냇물에 풍덩 빠진다.

요석 궁으로 보내진 원효의 젖은 옷을 갈아입힌

요석공주는 단 3일간의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원효의 나이 44세 사이에 일어난 일로 추정된다.

원효와 요석은 삼일 낮밤을 함께 했다

원효는 요석에게 얘기를 하고 떠나려고 하니

요석공주. 원효대사 가슴을 만지면서

태산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깊고 넓은

이 가슴속에 티끌보다도 작은 먼지보다도 적은

나를 어느 한구석 기댈 되는 없는지요 했다

원효. 있다도 없고 없다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더불어 나도 없는데. 그대가 어디 머물 자리가 있겠느냐

요석은 원효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 후

단 3일간의 사랑으로 원효가 떠나가고.

요석공주는 배가 불러 설총을 낳은 것은 655년이다

후일 신라 십현의 한사람이며(부석)

우리 옛 문장 이두를 완성시킨 설총이라는

원효의 아들을 낳아 원효를 바라보듯.

훌륭하게 키우며 먼발치에서

소식을 듣고 보곤 했는데 죽을 때까지 정식으로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원효는 한바탕 꿈이요 허깨비 였구나 

원효의 아들 설총(薛聰) ‘화왕계’로 유학의 가르침을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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