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김천시(金泉市) 역사문화이야기

작성자학천/우병구|작성시간20.06.01|조회수2,146 목록 댓글 0

경상북도 김천시(金泉市) 역사문화이야기


김천시 전경


김천종합스포츠센터


1. 연혁


지명유래: 김천의 옛 고을 이름이 감물(甘勿)인데 이는 달리 금물(今勿)이라고도 적었다. 글자만 달랐지 감-금이 같은 의미를 드러내는 고장의 지명 형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김천이 감천이요, 감천이 낳은 삶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는 줄거리가 된다.

또한 김천(金泉)이라는 이름은 옛날 김천지방에 금지천(金之泉)이라는 샘물이 있었다는 데서 연유한다. 이 샘에서 금이 난다고 해 금지천이라 했는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원군의 대장 이여송(李如松)이 이곳을 지날 때 이 샘의 물맛을 보고 자기 나라 금릉땅의 과하천(過夏泉) 물맛과 같이 좋다고 칭송해 이 곳 금지천을 과하천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 전국 5대 시장의 하나였으며 수많은 명현과 충신 열사를 배출한 고장입니다.


시대

연 혁

삼한시대

감로국(감문국),주조마국, (구전 : 어모국, 문무국, 배산국)

삼국시대

신라가 감문국(감로국)을 정벌 감문군 설치, 감문주로 승격

통일신라시대

감문주를 감문군으로, 감문군을 개령군으로 개칭하고, 김산현,지례현,어모현을 개령군으로 개편

고려시대

개령군을 개령현으로 변경 김산.지례현을 경산부로, 어모현을 상주목으로 직속

조선시대

김산,어모현을 통합 김산군으로, 지례현을 지례군으로 개령현을 개령군으로 승격

일제강점기

●1914년 김산,지례(증산면 길방리 제외) 개령군과 성주 신곡면을 통합하여 

   김천군으로 칭함(20면)

●1917년 김천면이 김천특별면으로 지정됨

●1931년 김천특별면이 김천읍으로 승격 (1읍,15면)

근현대시대

●1949년 김천읍이 김천부로 승격되고, 다시 김천시로, 김천군은 금릉군으로 

   개칭

●1995년 김천시와 금릉군을 통합 김천시 설치 (15면,13동)

   아포면이 아포읍으로 승격 (1읍,14면,13동)

●1998년 1읍,14면,8동으로 통폐합


삼한시대에 감문국(甘文國)이 있었으니, 그 속국으로는 지금의 조마면에 있었던 주조마국(走漕馬國), 어모면 중왕리 자리에 있는 어모국(禦侮國), 감문면 문무리에 있었던 문무국(文武國), 아포면 제석리에 있었던 아포국(牙浦國)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한마디로 이들 나라들은 감천내가 만들어 낸 마을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감천내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고장이 김천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말은 있으되 이를 적을 글자가 마땅하지 않아서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려다가 썼던 시절이 있다. 이름하여 한자 차용시기라고 한다. 때로는 향찰로, 이두로, 구결이라고 불려지기도 하였다. 감천(甘川. 甘泉)의 경우도 그 적기를 보면 감(甘)은 우리말의 '감' 이란 소리를 한자의 그것과 대응시켜 적은 것이요, 천(川. 泉)은 한자의 뜻을 빌려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감천은 우리말 '감내' 란 말이 된다.


역사

김천시 일대의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유물·유적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성면 송국리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고, 감문면 송북리, 구성면 상거리 등지에서 고인돌과 마제석촉 등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견됨으로써 늦어도 신석기시대와 청동기문화단계에서 이 지역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음을 알려 준다.

이 지역에서는 삼한시대 무렵 소국(小國) 단계로 진입했는데, 감문국(甘文國)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감문국은 231년(조분이사금 2)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557년(진흥왕 18) 감문주(甘文州)를 두어 상주(上州)의 치소가 되었다. 이 일대는 신라·백제의 접경지역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는데, 이 주치(州治)의 설치는 백제와의 전쟁에 대비한 군사적 필요성에 따른 조처였다.

614년(진평왕 36) 상주의 주치가 일선주(一善州: 善州)로 옮겨진 뒤, 군현체제가 성립되면서 금물현(今勿縣: 지금의 김천)·김산현(金山縣: 지금의 김천)·지품천현(知品川縣: 지금의 지례면)·무산현(茂山縣: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군) 등을 거느리게 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 개편시 감문군은 개령군(開寧郡), 금물현은 어모현(禦侮縣), 지품천현은 지례현(知禮縣), 무산현은 무풍현으로 각각 개명되었다. 이 지역은 선산과 더불어 신라 불교 전래의 한 통로로서, 일찍이 눌지왕대에 아도(阿道)가 직지사(直指寺)를 창건하였다.

후삼국 통일 이후 고려시대 때 이 지역은 영속관계에 변화가 일어나 개령군의 속현이던 무풍현이 진례현(進禮縣)의 속읍이 되었고, 김산(金山)·지례 두 현은 경산부(京山府 : 星州)의 속읍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현종 때의 전국적인 지방제도 개편 당시에 다시 전면 조정되어 1018년(현종 9) 개령군과 어모현이 상주목에 내속되었다.

이러한 영속관계의 변화는 이 지역의 정치적·군사적 비중이 크게 약화되었음을 의미하지만, 교통 중심지로서의 기능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김산현에 김천역(金泉驛)이 설치되었다. 1172년(명종 2) 개령군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고, 1390년(공양왕 2) 지례현과 김산현에도 감무가 파견되면서 다시 행정단위로서의 중요성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김산현 관내에 정종(定宗)의 태가 묻혔다 해 김산군으로 승격되면서 어모현을 통합하였다. 1413년(태종 13) 개령군은 개령현으로 강등되어 현감이 파견되고, 지례현에도 현감이 파견되었다.

조선 초기 농업의 발달과정에서 이 지역 역시 토지가 비옥해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증가했으며, 여러 개의 제언(堤堰)이 축조되는 등 물산이 풍부한 곳으로 지목되었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풍도 성행해 김산·개령·지례 등의 향교가 세워졌으며, 사림파 등장 이후 경렴서원(景濂書院)·경양서원(鏡陽書院) 등의 원사가 건립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정경세(鄭經世)·권경호(權景虎) 등이 의병을 모집하자 개령·김산 등지의 사족(士族)들도 대거 호응해 왜적을 무찔렀다.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가 전개되면서 봉건체제의 모순이 노출되고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자, 1862년(철종 13) 김규진(金奎鎭) 등의 주도하에 개령민란이 일어나 민중의 반봉투쟁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혁에서 김산군·개령현·지례현은 모두 군으로 되었고, 1905년 증산면이 성주군에서 지례군으로, 다음 해에 성주군 신곡면(薪谷面)과 황간군(黃澗郡) 남면이 김산군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개령군·김산군·지례군이 김천군으로 통폐합되었고, 1931년 김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07년 이후 허위(許蔿)의 의병부대는 김천·지례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1919년 3·1운동 때 김천면에서는 3월 24일과 4월 5일에, 개령면에서는 3월 24일부터 4월 6일까지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유림들의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에는 김천 출신 이석균(李鉐均)·이경균(李璟均) 등이 가담하였다. 그리고 1929년 김천소년회·청년회는 만주동포에 대한 탄압문제를 거론하면서 배일·배중국운동(排日排中國運動)을 추진하였다.

1949년 김천시의 승격으로 시군이 분리되어 김천군은 금릉군으로 개편되었다. 1950년 6·25전쟁 이후에는 지리산지역에 잔존해 있던 공비들의 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60년금릉군 부항면에 유촌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3년봉산면 복전동이 대항면에 편입되었다.

1983년에는 금릉군 농소면 덕곡동, 개령면 대광동, 어모면 응명동, 감천면 양천동이 김천시로 편입되었으며, 감문면 봉남동·소재동이 선산군 선산읍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도농통합에 따라 김천시와 금릉군이 새로운 김천시가 되었으며 3월 1일 아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98년 김천시 13개동을 9개동으로 통폐합(1읍,14면,9동)하고 이후, 9개동을 8개동으로 통폐합(1읍,14면,8동)하였다. 2000년에 성내동과 남산동을 성남동으로 통합(1읍,14면,7동)하였다.


2, 행정구역과 위치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4개 면, 7개 행정동(19개 법정동), 275개 행정리(151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상북도 김천시 신음동에 있다.


아포읍(牙浦邑) 농소면(農所面) 남 면(南面) 개령면(開寧面) 감문면(甘文面)

어모면(禦侮面) 봉산면(鳳山面) 대항면(代項面) 감천면(甘川面) 조마면(助馬面)

구성면(龜城面) 지례면(知禮面) 부항면(釜項面) 대덕면(大德面) 증산면(甑山面)



시청소재지

극단

경도와 위도의 극점

연장거리

지명

극점

김천시 시청1길 1
(신음동 1284번지)

동단

남면부상리

동경 128° 18' 40''

동서간 38.8km

 

서단

부항면 하대리

동경 127° 52' 30''

남단

증산면 황점리

북위 35° 49' 30''

북간 47.8km

북단

감문면 송북리

북위 36° 15' 10''


경상북도 서부에 위치한 시로 동쪽은 구미시와 칠곡군, 서쪽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충청북도 영동군과 전라북도 무주군, 남쪽은 성주군과 경상남도 거창군, 북쪽은 상주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52′∼128°18′, 북위 35°49′∼36°15′에 위치한다. 


3. 면적 및 인구


●면적 1,009.50㎢(경북 5.3% 전국 1.0%)


●인구 140,418명(2020년 4월말 기준)



지리적특성


경상북도 서북부지역의 관문으로 사회·문화·산업·행정·교통·관광의 중심지이다. 동경 127°52′∼128°18′, 북위 35°49′∼36°15′에 위치해 있다. 동쪽으로 칠곡군·성주군,구미시와 서쪽으로 충청북도 영동군과 전라북도 무주군, 남쪽으로 경상남도 거창군, 북쪽으로 상주시·구미시와 접한다.


소백산맥이 서남으로 뻗으면서 동쪽에는 살티재(箭嶺). 별 미령. 백마산(716m),금오산(金烏山:977m)이 솟아 있고, 서쪽에는 황악산(黃岳山:1,111m, 또는 黃鶴山), 삼도봉(1,176m). 대덕산(大德山1,291m). 우두령, 수도산(1,327m)이 추풍령(235m)과 이어져 경상남도,전라북도,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루며, 남서 방향으로 소백산맥의 일맥이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룬다. 북으로는 백운산(618m). 여남현(汝南峴). 용문산 (710m) 특히 삼도봉(三道峰:1,176m)은 충청북도·전라북도·경상북도의 3도 경계점이다.


대덕산,삼도봉에서 발원한 부항천과 우두렁에서 발원한 감천(甘川)은 지례면 도곡리에서 합류하여 북류하는 감천(甘川)이, 추풍령과 황악산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직지천과 합류하여 김천시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류하며 북동쪽으로 농소면·개령면·감문면·아포읍을 거쳐 낙동강에 합류한다. 이 하천은 감천 유역의 개령평야와 직지천 유역의 금릉평야 등 기름진 평야를 이룬다.


김천은 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 후기부터 일제시대 말기까지 우리나라 5대 시장의 하나로 발전해 오다가 광복후는 쇠퇴하고 지금은 공업의 부흥으로 농공복합의 지역으로 발 돋움하고 있다.


또한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경북선 철도가 지나며 국도 3, 4, 30호선이 동서남북으로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서울에서 250km, 부산에서 190km 떨어져 있으며, 대구와 대전의 중간 지점으로 동경 127°와 북위 35°어름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환경


시의 동북부는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에는 소백산맥의 줄기를 따라 추풍령(秋風嶺, 235m)·삼도봉(三道峰, 1,177m)·대덕산(大德山, 1,290m)·눌의산(743m)·황악산(1,111m)·천덕산(986m) 등의 높은 산이 솟아 있으며, 삼도봉은 충청북도·전라북도·경상북도의 경계가 되고 있다. 남쪽에는 대덕산에서 갈라져 나온 가야산맥이 뻗어 있고, 수도산(修道山, 1,317m)·단지봉(丹芝峰, 1,327m)·국사봉(875m) 등이 주봉을 이루며 경상남도와의 경계가 되고 있다.

동쪽에는 도립공원인 금오산(金烏山, 977m)이 솟아 있어 구미시와의 경계를 이루며, 영암산(782m)은 김천시·칠곡군·성주군의 경계가 되고 있다. 동남쪽에는 백마산(716m)·압속산(870m) 등이 솟아 성주군과의 경계가 되고 있다. 또한 추풍령·면목령(面目嶺)·주치령(走峙嶺)·우두령(牛頭嶺) 등의 고개는 높은 산지를 가로지르며 인접지역으로 통하는 주요 육로가 되고 있다. 소백산맥 동사면에 발달한 화강암지역이 풍화되어 이루어진 분지 중앙에는 도심지가 자리잡고 있으며, 도심 주변을 서쪽의 고성산(高城山, 483m), 북쪽의 묘함산(卯含山, 733m)·문암봉(門巖峰, 577m), 남쪽의 백마산(白馬山, 716m)·효자봉(孝子峰, 512m) 등의 변성암으로 구성된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도심지의 지형은 화강암질의 낮은 구릉지와 감천·직지천이 이루어 놓은 충적평야인 금릉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황악산에서 발원한 직지천(直指川)과 대덕산·우두령에서 발원한 감천(甘川)이 주요 하천이다. 감천은 남서부에서 동북부로 시의 중앙을 관류하며, 직지천·아천(牙川)·율곡천(栗谷川)·부항천(釜項川) 등과 합류, 구미시로 빠져나가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감천과 직지천이 이루어 놓은 금릉평야와 개령평야는 들이 넓고 기름져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했고, 이 지방 농업을 위주로 하는 1차 산업의 터전을 이루고 있다. 조선 말기까지는 낙동강 하구에서 소금배가 올라올 정도로 깊었던 감천하류가 무절제한 야산개발로 하상이 높아져 홍수의 주원인이 되어 왔는데, 근래에는 야산조림에 힘쓰고 있다.

●기후

내륙지방인 탓에 대체로 기온의 연교차가 크게 나타나는데 소백산맥의 영향으로 겨울에는 북서계절풍이 차고 건조한 바람으로 넘어 올라오며, 여름에는 남동풍이 복사열을 받아 더운 바람이 되어 불어오므로 몹시 덥다. 연평균기온 12.8 °C, 1월 평균기온 -2.7℃, 8월 평균기온 24.5℃로 비교적 연교차가 크다. 연강수량은 1,273.3mm(지난10년 평균)이다.


4. 문화 관광


김천시 서쪽에 소백산맥과 남쪽에 가야산맥의 수려한 산들을 끼고 있어 산악·사찰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김천시는 경부선과 경북선의 분기점이며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고 국도가 여섯 방향으로 뻗어 있는 교통의 요충지로, 서부 산악지대를 제외하면 교통이 편리해 관광객 유치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 특히 418년(눌지왕 2) 아도화상이 창건한 직지사는 도심과 가까운 대항면 운수리의 천년노송과 옥류가 흐르는 황악산 중턱에 위치한 대사찰로, 1971년에 지정관광지가 되었다. 경내의 천불전에는 고려시대 경장대사가 경주옥돌로 조각한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사명각에는 직지사에서 머리를 깎고 속세를 등진 사명대사의 영정이 있다. 대웅전 앞 삼층석탑·비로전 앞 삼층석탑·석조약사여래좌상·대웅전 삼존불탱화 등의 보물과 일주문·부도군·당간지주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직지사 산내암자로는 화장암·운수암·백련암·은선암 등이 있으며, 최근 개관한 성보박물관에는 직지사 관할 말사에서 거두어들인 불교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경치가 좋은 내원사 계곡과 운수계곡이 있다. 직지사 주위에도 비로봉, 우거진 노송, 신선대의 학떼 등 명소가 많아 연중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증산면 수도산(修道山, 1,317m)에는 도선대사가 창건한 청암사가 있는데, 경상북도에서 불교강원으로 손꼽히는 승가대학이 들어서 있다. 청암사 경내에는 인현왕후가 복위를 기원하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던 극락전, 청암사를 대표하는 42수관음상이 모셔져 있는 보광전, 인도식 불상이 모셔져 있는 대웅전이 있고, 이 외에도 석탑과 범종·큰북 등의 문화재들이 있다.

산내암자로는 백련암·수도암이 있다. 청암사로 들어가는 ‘불령동천(佛靈洞天)’이라 부르는 계곡 주위에는 유난히 바위가 많다. 또한 수도산 일대를 굽이치며 흘러내리는 수도계곡에는 누워 있는 용의 형상을 한 와룡암과,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깃들인 용소폭포가 있다. 주민들은 가뭄이 들 때마다 이 폭포 아래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이 외에도 옥구슬같이 물방울이 바위 위를 흘러내리는 옥류대, 흐르는 물살에 온갖 번뇌를 씻어 보낸다는 수선대 등이 절경을 이룬다. 수도산 산정에는 신라 말경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수도암이 있으며, 수도암 대적광전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삼층석탑·약광전석불좌상과 수도암터를 가리키는 석물인 돌실패 등의 보물이 있다.

수도산에는 거자나무가 자생하며 매년 곡우절이 되면 위장병과 신경통에 특효를 보이는 곡우물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다. 그 밖에 모암동 국도변에 있는 자산(紫山)의 사모암과 교동의 봉황대, 황금동의 개운사·관음사·신흥사, 남산동의 남산공원과 과하주천, 개령면 동부리개령향교 뒤편에 자리잡은 계림사 주변도 경치가 아름다워 소풍지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황악산 남쪽의 고성산록에 있는 벚꽃화원인 고성산송정(高城山松亭)은 오래 전부터 소나무가 우거지고 진달래가 많이 피는 명승지이다. 또한 남면 오봉리의 석가여래좌상, 구성면 송죽리 일대의 구성유원지, 조마면 신곡리의 백화동, 봉산면 북단의 추풍령 휴게소 등도 휴양관광지이다.


읍면별 주요관광지 


아포읍(牙浦邑) 


옛 기록에 의하면 삼한시대 아포가 반란을 일으켜 감문국이 군사 30명을 동원하여 토벌작전에 나섰으나 감천에 홍수가 범람하여 회군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포가 신라 이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牙浦叛大發兵三十人夜渡甘川水見水漲而退). 아포의 아(牙)가 앞에서도 일렀듯이 아- 엄의 걸림을 보인다. 마침내 어무 - 엄- 아 - 금(今) -감(甘)이라는 대응성을 떠올릴 수 있다. 이로 보면 아포는 감천내의 파생천으로 보인다.

아포읍은 경부선철도, 경부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김천·구미간 지방도가 읍의 중심을 관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능소면(農所面)


백마산((白馬山, 716m 또는 氣水山)을 중심으로 고방사(아도화상이 직지사와 함께 418년에 창건), 신흥사 등 유서 깊은 사찰과 율곡천이 돌아 흐르는 산자수명의 고장이다.

●고방사 신라시대 418년 눌지왕 2년 농소면 봉곡리 15번지

●신흥사 신라시대 834년 흥덕왕 9년 농소면 봉곡리 15번지 도의 선사에 의하여 건립


남면(南面)

김천혁신도시의 중심부에 위치


오봉저수지 남면 오봉리 1218(오봉1리)

1987년에 준공하여 최대 담수량이 400만톤, 평균수심이 15m, 저수지 둘레가 약4㎞

경북수상레포츠(남면 오봉저수지)054-437-4025


금오산성(기념물 제 67-다호)


둘레 약 3,500m. 남문 ·서문 ·중문 ·암문(暗門) 및 건물터가 남아 있다. 높이 977m의 금오산의 정상부를 테뫼형으로 두른 내성(內城)과 외성의 이중구조로 되었으며, 천연의 암벽이 태반을 차지한다. 고려 말 선산 ·안동 ·개령 ·성주 등의 많은 주민을 징발하여 산성을 수비하였으며, 조선시대에 들어 1410년(태종 10)~1413년에 성을 수축하였다. 이 무렵 성내에는 3개의 못, 4개의 샘에서 계곡물이 흘렀으며, 군창이 있던 것으로 보아 천혜의 요새로서 상당한 규모로 수축, 정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방상의 요충으로 부각되어, 1595년(선조 28) 성벽을 수축하여 승병대장 사명(四溟)도 이에 참여하였다. 1639(인조 17)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실시하여 내성과 외성을 다시 쌓았다. 1735년(영조 11)에는 선산도호부사가 산성별장(山城別將)을 겸하는 거진(巨鎭)이 되어 상주 군병 3,500여 명이 배속되었다. 1868년(고종 5) 마지막으로 수축하여 당시의 중수송공비(重修頌功碑)가 산정 부락터에 남아 있다.


●오봉리 석조 석가여래좌상(보물 제 245호 (1963.1.21)

김천시 남면 오봉리 65 갈항사터에 남아 있는 석불로 통일신라시대조성 석불 높이 1.5m 어깨폭1.1m (오른팔과 오른쪽 둔부가 파손되었다.)


개령면(開寧面)

삼국시대 이전 감문국의 도읍지인 개령면은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김천의 뿌리입니다.


동부연지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185번지

동부연지는 옛 감문국 궁궐에 속해 있던 연못으로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일부가 남아 현재까지 남아 있다. 동부 2리 마을은 삼한시대 변한(弁韓) 12국의 하나인 감문국의 도읍(都邑)으로 서기231년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斯盧國)에 의해 멸망된 후 감문군과 감문주가 설치되었다.


양천리고분 김천시 개령면 양천리 376-1번지

삼한시대 소국(小國)인 감문국(甘文國)이 멸망하여 신라에 편입된 이후 삼국시대에 이 지역을 통치하던 지배층의 무덤으로 보인다. 


내신정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387번지

내신정은 개령지방에 향약(鄕約)을 보급하고, 회합의 장소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된 향약소(鄕約所)이다. 향약은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규(禮俗常規), 환난상휼(患難相恤)을 4대 덕목으로 하는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향촌(鄕村)의 자치규약(自治規約)이다.


개령향교 김천시 개령면 동부1길 78-27

국가 교육기관으로 개령향교는 조선 성종4년(1473년)에 관학산 밑에 처음 지었는데, 광해군(재위 1608~1623년)때 동쪽으로 옮겼다가 헌종 3년(1837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다. 


계림사 김천시 개령면 동부1길 212

감문산 중턱에 위치한 계림사는 신라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감주계림사개건기」또는「계림사사적기(1954년 현판 필사)」등의 기록에 따르면 감문산 계림사 일대의 지형은 호형(虎形)으로 산세가 드세어 좋지 않은 사건이 잦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절을 짓고 닭 1천마리를 길렀으나 닭이 자꾸 폐사를 하여 아예 절 이름을 계림사로 하였다고 한다. 계림사가 위치한 감문산에는 명당이 많지만 절의 산내에서는 묘를 개설치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즉 묘를 쓰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쌍샘(동부리 입구에 있었던 샘)의 우물이 변하여 마실 수 없게 되므로 밀장을 금하였다고 한다. 1832년(순조 32년)에 성일(性日)이 중창하였고, 1922년 춘담(春潭)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며, 건물로는 대웅전과 응향각,칠성각,요사가 있다.


감문산성지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산9번지

삼한시대(三韓時代) 소국(小國)인 감문국(甘文國)을 지키기 위해 쌓은 산성으로 감문산(해발 320m)의 능선을 따라 길이 1,334m, 높이 2.5m, 내외로 축조(築造)된 토성(土城)이다. 성내(城內)에는 구릉지를 통해 올라오는 적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하여 쌓은 초소에 해당하는 초승달 형태의 치성(雉城)과 3곳의 망대(望臺), 봉수대(烽燧臺), 집수지(集水址), 군창지(軍倉址) 등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감문산성은 주변 세력과의 전쟁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배후의 피난처이자 감천(甘川)의 수로(水路)와 추풍령(秋風嶺) 등으로 연결되는 주변 교통로를 감시할 목적으로 축조(築造)된 것으로 보인다.


팔승정 김천시 개령면 동부길 59-14 면사무소 전정

개령면 서부리 남산(南山), 속칭 정자말랭이로 불리는 산에 세워졌던 팔승정(八勝亭)은 1900년대 초 동부리 개령현관아 앞으로 이전되었다. 세월이 흘러 정자가 퇴락하자 일제시대 개령면장 허혁(許赫)이 팔각정(八角亭)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팔각 형태로 신축했다가 1936년 수해 때 붕괴되고 홍종익(洪鐘翼)면장이 다시 세웠으나 또 다시 퇴락해 방치되자 1977년 1월 백형주(白亨周) 면장이 정자보수를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금릉군의 보조금과 면민의 성금으로 대대적인 보수를 하면서 다시 옛 이름인 팔승정으로 환원했다.


비석거리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261-3번지

개령면 동부리 옛 개령관아(開寧官衙) 앞 속칭 비석거리에 소재한 20개의 비석은 18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역대 개령현감, 군수(郡守)의 선정비(善政碑)와 말에서 내릴 것을 알리는 하마비(下馬碑), 농수로인 보(洑) 관리책임자 등의 공적비(功績碑)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순상국이공경재백세불망비(巡相國李公景在百世不忘碑)의 주인공인 이경재(李景在)는 고종 (高宗)때 영의정을 역임한 조선후기의 문인(文人)으로 상국(相國), 즉 정승(政丞)이 개령지방을 순시(巡視)하고 간 것을 기념해 세운 특이한 비석이다.


서부리 고탑 김천시 개령면 서부리 501-3번지

서부리 마을 뒤의 호두산 아래 골짜기에 탑의 일부분이 남아 있었는데 주변에서 통일신라시대, 고려, 조선에 이르는 기와조각과 자기조각들이 발견되어 사찰이 조선 중기까지는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등산로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산6번지 일대


개령면사무소에서 출발하여 감문산의 정상인 취적봉, 계림사를 거쳐서 동부2리 마을로 이어지는 총 거리 4.2㎞의 등산로는 호두산 등산로, 감문산성지, 108계단 등의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등산로 초입의 호두산(호랑이 머리를 닮은것에서 유래) 순환코스는 총 800m로 대나무숲길과 소나무숲길로 나누어진 것이 특징이며 평지부분에는 운동기구와 벤치 등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감문산 취적봉(해발 320m)까지 1.8㎞를 오르면 정상 부근에서 감문국 시대의 토성의 흔적인 감문산성지를 접할 수 있고 멀리 금오산과 감천까지 관망이 가능하다. 개령향교가 위치한 동부2리 마을 쪽으로 1.6㎞의 하산 구간에 설치된 108개의 계단은 '나 자신을 생각하면서', '가족을 생각하면서', '친구를 생각하면서' 걸을 수 있는 3구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빗내농악전수관

김천시 개령면 빗내길 118 (문의전화 : 420-6438)


빗내마을에서 전승되어 오는 농악으로서 빗내(廣川)마을은 삼한시대 감문국에 속했으며, 넓은 개령들을 앞에 두고 뒤에는 감문산성의 성터가 있으며 군사를 동원할 때 나팔로 신호했다는 취적봉이 있는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고장으로 개령면 광천리의 다른 이름이다. 빗내농악은 옛 감문국의 "나랏제사"와 풍년을 기원하는 "빗신제"가 혼합하여 동제(洞祭)형태로 전승되었는데 가락이 강렬하여 타 굿판과는 명확한 차이가 있으며, 모두 12마당(골매기굿, 문굿, 마당굿, 영풍굿, 판안다드레기, 기러기굿, 허허굿, 쌍둥이굿, 판굿, 영산다드레기, 진굿, 상사굿)으로 구성되어 있다.


감문면(甘文面) 


삼한시대에는 지금의 문무리에 문무국이 있었다고 전하여 지고 있으나, 고증할 길이 없으며 북쪽에 있는 백운산(일명 속문산 618.8m) 남쪽의 대양산(312.6m)은 개령면 남전과 경계를 이루며, 백운산에서 발원한 감문천은 면 서쪽으로 흘러 개령면 서부리에서 감천과 합류하고, 외현천은 면 중앙부의 북남으로 관류하여 태촌(배시내)에서 감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흐르고 있다.

영산인 백운산(해발 618.3m) 자락 곳곳에 산재한 옛 감문소국의 유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고장이다.


●광덕리 석조 보살입상  보물 제679호 1980.9.16

김천시 감문면 광덕리 산71


1959년 광덕저수지 확장공사 때 발굴되어 못아래 좌측 산밑에 세웠다. 광덕1리 문수산에 신라 고찰 문수사가 있었다고 전하고 문수사 터에서 일제 때 금동불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불상에 대한 아무런 고증이 없다.

화려한 영락으로 장식한 보관을 썼고 너그럽고 원만한 얼굴이 풍만하여 전신에 걸친 법의의 선이 뚜렸하고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조성 수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1978년에 보호철책을 설치했다가 1990년에 보호각을 건립하여 관리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높이2.07m, 석폭0.96m, 어깨폭0.6m 한덩이의 화강석으로 된 입상이다.


어모면(禦侮面) 


삼한시대 이전은 미상이나 구전으로는 어모국(禦侮國)이 있었다고 전한다. 삼국시대에는 금물현(今勿縣)이었고 통일신라시대(경덕왕 16년)에 어모현으로 개칭하여 개령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경산부(京山府. 星州)에 일시 예속되었던 적도 있었다. 조선조 태종 13년(1413)에 정종(定宗)의 태(胎)를 봉안하였다 하여, 1416년 어모 김산을 합하여 김산군이라 칭하였고, 이 지방은 천상면. 천하면. 구소요면이 되었다.


현재는 김천일반산업단지 1,2단계가 68만평 규모로 조성되어 있으며 현재는 35만평의 3단계 산업단지가 조성 중에 있습니다. 일반산업단지가 완공되면  김천경제의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어금니아(牙)는 《훈민정음》에 따르면 엄소리(牙音)의 '엄'으로 대응이 됨은 아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어모 - 엄이란 등식이 성립된다는 이야기다.


석조아미타여래입상 

김천시 어모면 어모면 옥율2길 307

옥률리 문암사 극락전에 봉안되고 있는 아미타여래 석불상이다.


마애반가보살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7호

김천시 어모면 은기리산 22번지

고려 초기 규모 암벽고 4m, 암벽폭8m, 불상고 2.9m, 동향 암면에 양각


봉산면(鳳山面) 


추풍령고개를 베갯머리한 충북과 경북의 도계지점으로, 전국포도 생산량의 13%를 차지하는 김천포도의 주산단지이며,


덕천리석조관음보살입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0호

김천시 봉산면 봉산1로 160 [용화사]


정부인 문화류씨 묘지명(贈 貞夫人 文化柳氏 墓誌銘) 지석(誌石)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2호 경북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증 정부인(贈 貞夫人) 문화류씨(文化柳氏)는 울진현령등을 지낸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 조계문(曺繼門)의 부인이자 문장공(文莊公) 매계(梅溪) 조위(曺偉)선생의 어머니이며 영남사림의 종사(宗師)이자 거봉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선생의 장모로서 1495년(연산원년)에 69세를 일기로 봉산면 봉계(현 율수재위치)에서 돌아가셨을 때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중이던 아들인 매계 조위(曺偉)선생이 서울에 호조판서 허백당 홍귀달(洪貴達)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어머님의 명(銘)을 지어달라 부탁하여 받은 묘지명(墓誌銘)을 돌에 글씨를 써서 새긴 후 대항면 복전리 말개미 마암산(馬巖山)에 묘소를 쓰면서 무덤앞 상석 밑에 묻어 두었는데 2001년 6월에 묘소 보수작업을 하던 도중 상석밑에 있는 것을 발굴하여 창녕조씨 문장공파 종중에서 보관해오다가 2005년 9월 13일부터 10월 31일까지 국립대구 박물관에 전시(김천편)후 현재 계속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태화리석조보살입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9호

김천시 봉산면 태화1리 양지마 마을


고려 전기 불상 높이는 85∼90㎝정도로 보살상의 조성 양식이 특이하고 조각 기법이 우수한 편이다. 이 불상에 불공을 들이면 득남한다는 소문이 있어 근래까지 촛불을 켜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영천이씨정려비 경북문화재자료 제387호

경북 김천시 봉산면 신리 조선시대 비석


정유재란 때 왜군의 능욕을 피해 28세의 나이로 자결한 이씨 부인(1570∼1597)에게 나라에서 내린 정려비이다. 이씨 부인은 경상북도 영천의 찰방(察訪) 이대유(李大有)의 딸로 태어나 봉계마을(현 신리)의 영일정씨 선전공파 문중으로 시집을 왔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편 정유한(鄭維翰)은 선전관으로 출정하였고, 이씨 부인은 피난을 가다가 왜군에게 붙잡혀 희롱당하던 중 몸을 더럽힐까 염려하여 은장도로 자결하였다.


대항면(代項面) 


황악산 직지사와 세계도자기박물관, 성보박물관, 3만평의 직지문화공원 등이 소재하고 있는 아름다운 관광지로서 연간 수백만 명이 찾는 명승지입니다.


황악산(黃岳山:1,111m, 또는 黃鶴山)


예로부터 학이 자주 찾아와 황학산으로 불리웠고, 지도상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으나, 직지사의 현판을 비롯, 택리지등에 황악산으로 명기되어 있다. 전체적인 산세는 특징없이 완만한 편이나 온 산에 수림이 울창하고 산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은 곳곳에 폭포와 소를 이뤄 그윽한 계곡미를 이루고 있다. 특히 직지사 서쪽200m 지점에 있는 천룡대에서부터 펼쳐지는 능여계곡은 이산의 대표적인 계곡으로 봄철에는 진달래, 벚꽃, 산목련이 볼만하고 가을철 단풍 또한 절경을 이룬다. 산행의 깃점은 최근 관광 단지로 크게 조성되어 있고 직지사를 경유 운수암을 거쳐 주능선에 도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직지사(直指寺)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길 95. 직지사


황악산 동쪽 산쪽에 자리한 이절은 신라 눌지왕2년(418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고 문화재로는 보물 제319호인 석조여래좌상과 보물 제606호인 삼층석탑등 국가지정문화재7점이 있으며 암자로는 운수암,은선암,백련암이 있다.


도리사금동육각사리함 국보 제 208호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403에 있는 도리사에서 출토되었다. 도리사는 직지사와 함께 묵호자와 동일인으로 알려진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대에 창건하므로서 신라불교의 초전지인데 이곳에 있는 세존사리탑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석조약사여래좌상 보물 제319호  사찰 입구 사적비 부근에 있었던 금당 유허지에 있었는데 1979년 약사전을 신축하여 비바람을 막았다.

대웅전앞삼층석탑 보물 제606호 원래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 있었던 도천사 자리에 파손, 산재해 있던 것을 1974년 직지사 주지 오녹원이 이곳에 옮겨 원형대로 복원하였고, 탑봉 상륜부는 1976년 전문가(한수영 박사)의 고증으로 복원되었다.

비로전앞삼층석탑 보물 제607호 대웅전앞 삼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원래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둿산에 있었던 도천사 유허지에 도괴된 채 산재한 것을 1974년 직지사 주지 오녹원화상이 이곳으로 옮겼다.

대웅전삼존불탱화 보물 제670호 1735년(영조 11년) 대웅전 중건 때 진기 지영 두 스님이 불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9년만인 1744년(영조 20년) 5월에 완성 봉안했다.

청풍료앞삼층석탑 보물 제1186호 원래 구미시 선산읍 원리 강창마을에 있었던 강락사터에 도괴된 채로 있던 것인데, 1968년에 구미시 선산출장소(전 선산군청) 마당에 옮겼다가 1980년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예념미타도량참법 권 제 6~10 보물 제1186호  1474년(성종5년) 세조빈 정희대왕대비가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새긴 목판을 16세기 초에 해인사에서 인출한 책이다.

대웅전 보물 제1576호 사찰 입구 사적비 부근에 있었던 금당 유허지에 있었는데 1979년 약사전을 신축하여 비바람을 막았다. 

한천사출토금동자물쇠 보물 제 1141호 경북 예천군 감천면 중거리 184번지에 위치한 한천사에서 출토되었다. 한천사는 신라 문무왕 18년(678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1988년 가을에 사내 조경공사를 하던 중 금동 자물쇠 등 일괄 4점이 출토되었다.


직지문화공원


경상북도 김천시에 있는 공원으로 면적은 21,400평(1지구 10,000평, 2지구 11,400평)이다. 이 지역 주변의 난개발 방지와 전통사찰 보전, 관광자원개발, 시민 휴식 공간 등을 위하여 2001년 12월 직지사 입구 토지를 매입, 공사를 시작하여 2004년 4월 21일 준공하였다. 중앙의 음악조형분수를 중심으로 광장 3개소, 폭 25m에 높이 17m의 대형 2단 폭포, 직지사 경내의 물을 그대로 유입하여 공원 내로 흐르게 하는 330m의 계류시설, 어린이 종합놀이시설, 지압보도, 3,600m의 산책로, 정자 및 파고라, 의자 등 각종 편의시설을 설치하였다. 또한 문화시설로 국내외 17개국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 50점, 20개의 시비(詩碑), 아파트7층 높이의 전국에서 가장 큰 대형장승 2기, 170m의 성곽과 전통담장, 원형음악분수, 야외공연장 등을 설치하였다. 소나무 외 23종의 교목류를 비롯하여 관목류, 초화류, 야생화 등을 식재하였다. 총사업비는 160억 원이며,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소나무 331주와 자연석 6만 톤을 헌수, 헌석함으로서 20억 원의 사업비를 절감하였다.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31-1번지 일대에 있다.


감천면(甘川面) 


김천의 젖줄인 감천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으며 비옥한 토지로 참외, 자두, 딸기 등 특용 과수작물이 성행하는 지역입니다.


조마면(助馬面)


삼한시대부터 주조마국이라는 부족국가의 형태로 형성된 유서 깊은 고장이다.


신안리석불입상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191호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588


이 불상이 방치된 골짜기를 탑골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땅에 묻혀 있던 것을 밭을 일구다가 발견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전기 부처높이 2.70m, 대좌높이 0.37m, 머리가 없다.


자동서원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 강평


자동서원은 남와 강설, 기재 강여호 두 선생이 청환 요직을 거쳐 책난을 하다가 나라에 충절을 다하고 물러나서는 스승을 쫓아 학문을 강해서 덕을 기르고 도를 닦아서 문행과 훈업이 빛나니 뒷사람이 그 풍속을 우러러 보고 그 덕을 사모해서 숭봉하고자 하는 이가 많기에 도남서원 원장 김기찬, 사양서원 원장 이동필, 병산서원 원장 도유사 이제, 매림서원 원장 박민국, 낙봉서원 원장 김태온, 동갈서원 원장 장수훈등 555명의 영남내의 서원과 유림의 제현이 1804년(순조 4) 12월 6일부터 1806년 (순조 6년) 9월 3일에 걸쳐 발의 합모하고 연자 조력하여 유전을 마련하고 공사를 시작한지 5년 뒤인 1811년(순조 11년)에 준공하여 강당을 자동서원이라하고 사우를 상의사라고 남화, 기개 두 선생을 향사하였다.


구성면(龜城面) 


특산품은 자두, 최상의 토질에서 자란 양파이다.


방초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46호

구성면 상원리 83



1625년(인조3년) 부호군 이정복이 선조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지는 방초정에는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와 묵객들이 다녀갔고, 그들의 시와 글이 많이 남아 있다. 현판 글씨는 김대만의 작품이다. 옛 조선조의 조경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가례증해판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67호

구성면 상원리 57-1


판목은 1792년에 직지사의 거목으로 공인 김 풍해의 지휘로 3년 걸려 가로 46cm, 세로 55cm의 목판 475장의 양면 54면에 한문 글씨를 새긴 것이다. 이에 보관된 판목에는 가례증해와 소학증해 두 가지가 있다. 가례증해는 이 의조가 주자 4대 예서(四大禮書)의 하나인 즉 관혼상제에 관한 예서를 해설하고 자기의 학설을 보완한 것으로 1771년에 기초하여 모두 10권으로 1792년에 완성했다. 소학증해 판목은 이 의조의 4종질되는 이 수호가 소학을 해설하고 사견을 부쳐 저술한 것으로 가례증해와 함께 각목한 것으로 241매의 판목 양면에 새겨진 것이다. 이 의조는 본관이 연안이고 1727년에 태어나 벼슬길을 멀리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전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저서로『의요보유(義要補遺)』,『경의수차(經義隨箚)』등을 남겼다.


이숭원 초상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69호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130. 경덕사


중종과 명신들의 초상화를 그려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된 이 상좌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가로 2m, 세로 1m 크기의 비단에 교위에 앉은 사모관대의 관복차림의 채색 초상화로 400년이 지나는 동안 좀먹고 퇴색이 심하여 오손되고 있다. 이 초상화는 명종 때 이 숭원에게 내린 충간(忠簡)이란 시호와 함께 내린 하사품이라고 한다. 이 숭원은 본관이 연안이고, 1428년에 나서 문관에 합격하여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고,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이 되고 연원군(延原君)에 봉록(封錄)되었다. 64세로 죽으니 청백리로 천록된 위인이다. 문장과 도덕이 뛰어나고 이도(吏道)에 어긋남이 없어 죽은 뒤에 시호와 영정이 하사된 것이다. 영정을 경덕사에 모시고 후손들이 이곳에서 제사드린다.


성산여씨하회택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88호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 727-1


일제강점기에 김천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한 여환옥(呂煥玉:1896∼1963)의 생가이다. 성산여씨 12세손인 여명주(呂命周:1681∼?)가 18세기 초에 지었다고 하며, 건립 당시에는 60여 칸 규모의 저택이었으나 일부가 1870년 농민항쟁 때 방화로 불에 타고 1936년 수해 때 붕괴되어 현재는 정침(正寢)과 사당·대문채만 남아 있다.


승유재 김천시 구성면 상거리


승유재는 구성면 상거리 김녕인, 김숙련을 위하여 1849년(헌종 15년)에 후손 치규, 치일이 집안과 더불어 몹시 슬퍼고 애닳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재실을 짓고 해마다 시월 천사때에는 이곳에서 제지내고 일문의 후손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익히니 조상을 섬기는 일과 자신의 생업을 소홀히 하지 않더라. 단옹 이공이 상량문을 짓고 연재 송병선이 현판을 지어 쓰고 심석 송병순이 기문을 지었다.


모성정(慕聖亭)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모성정 정자의 뒷쪽에 산더미 같은 큰 바위가 에돌아 이리 저리 굽은 형상이 장엄하고 뒤로는 모성산의 푸른 정기가 서려 있고, 앞으로는 푸른 시내가 끼고 흘러 맑은 호수 깊은 못을 이루고, 고기떼가 어울려 헤엄치며 좌우로 작은 바위들이 늘려 있어 크고 작은 섬들을 이루고 있으며, 물결처럼 보이는 자욱한 연기,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과 낮게 드리운 저녁놀, 나무가지 흔드는 솔바람은 이 정자와 어울리는 네 가지 풍경이다. 연안 이씨 초당 장원(1560 - 1649)이 글을 외우고, 목욕하고, 바람을 쐬면서 거닐던 곳이었다.


도동서원(道洞書院)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주향은 연안 이씨 충간공 이숭원이고 1788년에 정양공 이숙기, 문희공 이호민을 배향하고 다시 1794년에 문장공 이숙함, 문천공 이후백을 추향했다.


지례면知禮面  


충효와 예절의 고장으로 전통문화 계승발전에 앞장서고 향토전래의 고유품종인 토종돼지의 육성보급을 통하여 맛좋고 질좋은 돼지고기를 보급하여 많은 미식가들이 찾아오는 농촌마을입니다.


지례향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8호

김천시 지례면 교리 향교길 84


고려 인종때에 처음 설립되고, 조선초에 전국 군, 현에 설립되었다고 했으나 지례 문헌이 없어 정확한 연혁은 미상이나 향교는 어느때에 창설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명륜당 창설기에는 1426년 (조선 세종8년)에 지례 현감 동래인 정옹이 창건하고 성종 16년에 현감 김수문이 명륜당을 중건하고, 숙종 16년(1690)에 현감 류준광이 교궁을 중수하고, 영조 50년에 사반루를 건립한 것으로 되어있다.


부항면(釜項面) 


백두대간 줄기 삼도봉(1,177m 경상북도 김천시, 충청북도 영동군, 전라북도 무주군) 자락에서 흐르는 푸른 물과 맑은 바람은 천마, 오미자, 블루베리, 호두, 산양삼 등을 생산하기 좋은 청정지역이다.


춘천서원 부항면 부항로 1453-3

조선시대 중엽 창립자 미상


김천부항지서망루 등록문화재 405호

6·25전쟁 직후 북한 인민군의 습격을 막기위해 주민들과 경찰이 힘을 합해 콘크리트로 건축한 화기진지 용도의 자주적 방어시설입니다.


삼도봉(1,177m)

"삼도봉". 삼남지방 방언의 갈래길로 정상에 서면 삼도말씨를 모두 만난다. 산 자체는 소박한 얼굴의 "무욕의 산" 산 아래엔 사시사철 맑고 찬물이 흐르는 "물한계곡"이 있다. 민족화합을 상징하는 삼도봉(1,177m), 민주지산(1,242m)의 한 봉우리로 충청, 전라, 경상도를 아우르는 분수령. 북에서 내려온 산줄기를 받아 한줄기는 대덕산으로 가르고 다른 한줄기는 덕유산으로 갈라 지리산과 맥을 이어준다. 이곳은 조선 태종 14년(1414)에 조선을 8도로 분할하면서 삼남의 분기점이 됐다. 삼국시대엔 신라 백제가 격전을 치르며 세력균형을 유지했다



삼도봉 터널


부항면은 국토의 대동맥인 소백산맥의 줄기인 삼도봉산이 병풍처럼 서있고 산이 높아 사방으로 나가는 길이 없어 면관내에 들어오면 다시 들어왔던 길로 나가야만 다른 지역에 갈 수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1999년 12월 6일 삼도봉터널 개통으로 무주로 가는 길이 개통되어 영‧호남인이 더욱더 가까워졌으며, 삼도봉터널 앞 소공원은 영호남인의 화합과 만남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세심대(洗心臺)


파천1리 봄내마을에 위치한 세심대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넓고 깨끗한 반석위로 흐르는 맑은 물은 세속에 물든 만인의 마음을 씻어줄 만하다」하여 세심대라 명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선생의 후학들이 이곳 세심대에 와서 글도 짓고 마음을 가다듬었다는 설이 있으며, 선생의 높은 학문을 기리기 위한 춘천서원이 이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숲과 계곡이 아름다워 여름철에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고 있다.

●구남천 계곡


구남천은 옛날 아홉형제가 살던 마을이 있어 九男이라 불리우고 있으며, 계곡이 아름다워 여름철에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고 있다.


●청정부항 레인보우 짚와이어

2018년 4월 27일부터 일반에 개장된 "청정부항 레인보우 짚와이어(김천시 부항면 부항댐길 352 소재)"는 60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국내 최장길이(왕복 1.79km)를 자랑하는 시설로써 국내 최고 높이의 철탑 시설물(93m)과 스카이워크가 함께 구비되어 있어 많은 방문객 들이 색다른 체험을 즐기고 있다. 문의(054-439-5030, 5031)

●부항댐 부항댐 물문화관 부항댐 유촌교 야경

부항댐


■대덕면 大德面


대덕산(大德山, 1,290m)을 중심으로 3도의 접경지이며 낙동강 지류인 감천의 발원지가 위치한 고장입니다. (경북 김천시 대덕면, 전북 무주군 무풍면, 경남 거창군 고제면)


금릉 조룡리은행나무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 300호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산51번지


수령 500 ~ 700년 수고 28m, 흉고직경 11.6m, 동서 19m, 남북 22.5m로 섬계서원 뒤 경내에 있다. 섬계서원은 1802년(순조 2년)에 창건하고 김녕인 백촌 김문기 를 주향하고 영월군수를 지낸 그의 아들 여병제 현석을 배향하며 동쪽 별묘에 지례출신 학자 반곡 장지도,그의 제자 절효공 윤은보와 남계 서질을 배향으로 향제한다. 1868년 국령으로 헐고 그 자리에 사적비를 세웠다가 1899년에 그곳에 강당을 짓고 1961년에는 세충사를 세우고 간막이를 하여 본래대로 4위를 제향하고 있다.


금릉 추량리은행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제 91호

김천시 대덕면 추량리 1031-2


수령 약 380년 수고 37m, 흉고직경 6.6m, 동서 30.6m, 남북 24.5m

서산 정씨 소유로 서산정씨 6세손 사신이 김천시 봉산면(봉계)에서 추량으로 이거하고, 11세손 처우가 동몽교관을 지내고 만년에 이곳에 단을 쌓고 은행나무 한 그루를 심은 것이 이만큼 자란 것이다.


●섬계서원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산51번지

조선순조2년 (1802년)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선생을 배향(配享) 하기 위해 김령 김씨 문중에서 세운 것


봉곡사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조룡2리 882번지

신라 선덕여왕 13년 (644년) 신라 진덕여왕 때 자장대덕이 창건하고 고려 태조 5년 (922) 도선국사가 중창하다. 신라시대 자장대덕이 도량을 개기하고 이어서 고려 초 도선 국사가 중수했다고 하였다.


■증산면(甑山面)


무흘구곡(수도계곡)


무흘구곡은 조선 중기의 학자 한강 정구(1543~1620)가 맑은 물과 기암괴석 등의 절경을 읊은 시의 아홉 개 계곡을 말한다. 김천에서 성주까지 흐르는 하천 중 제 1곡 봉비암, 제 2곡 한강대, 제 3곡 무학정, 제 4곡 선바위는 성주에 속해 있으며 제 5곡 사인암, 제 6곡 옥류동, 제 7곡 만월담, 제 8곡 와룡암, 제 9곡 용추폭포는 김천에 속해 있다. 제 7곡 ~ 제 9곡이 수도계곡에 위치하고 있으며 용추폭포의 물줄기는 탄성을 자아낸다.


▣무흘구곡전시관 증산면 수도길 25 054-434-2565

▣증산수도계곡캠핑장 증산면 수도길 25 054-434-2565

▣장전폭포 증산면 장전리


청암사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평촌2길 335-48(증산면 평촌리 688번지) ☎054-432-2652



신라 헌안왕 3년 (서기 589년)에 신라 도선국사가 창건하였고 조선 인조 25년(1647)화재로 전소 되었는데 벽암 성총화상이 덕유산에서 이소식을 듣고 그 문도인 허정대사로 하여금 청암사를 재건 토록하니 이에 허정대사가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건하였다. 이를 제2차 중창이라 한다.

이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정조 6년(1782)에 다시 재화를 입어 전각이 소실되자 환우 대사가 다시 신궁보전과 누당을 중건하였는데 이를 제3차 중창이라 한다.
그리고 고종 9년에는 주지 대운당 스님이 극락전을 창건하였다. 1911년 9월 21일 밤 청암사는 다시 화재를 입어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대운대사가 화주가 되어 대중을 위로하고 독려하여 그 다음해 다시 청암사를 재건 하였다. 특히 대사는 중국 강소성으로부터 석가상을 조성하여 대웅전을 봉안하는 등 전각의 장엄을 완성하였다. 이를 청암사 제4차 중창이라고 한다.

청암사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120호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청암사 조선후기에 제작하였고 대웅전은 단층팔작지붕이다

청암사 대웅전의 연혁은 전통사찰편 청암사조에서 기록했듯이 신라헌안왕 3년 창건, 조선 인조 25년 (1647년)에 제2중창, 정조6년에 제3차 중창을 거쳐 일제시대인 1911년 9월 21일밤의 화재로 전소되어 대운대사가 이듬해 봄부터 3년에 걸쳐 제4차로 중창한 것이 지금의 대웅전이다. 1987년에 강주 지형 스님이 승가대학을 설치하여 비구니의 수학장이 되었다.


청암사 다층석탑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121호

청암사 주지 대운대사가 청암사 중건시(1912년) 성주땅 어느 논바닥에 있던 것을 옮겨 왔다고도 전해지는데 신라 헌안왕 3년(859년) 도선국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 봉안을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조선후기 높이 4.21m, 폭3.3m, 4층탑


청암사 보광전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88호

청암사 대웅전이 있는 큰절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암자가 있는데 동쪽 건물은

극락전(極樂殿)이고 서쪽은 보광전(普光殿)이다. 1782년(정조 6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환우대사(喚愚大篩)가 중건했다.


수도암 

김천시 증산면 수도길 1438(증산면 수도리 513) 054-437-0700


수도암은 천년고찰로 859년(신라 헌안왕 3년) 도선국사에 의해 쌍계사의 산내암자로서 청암사와 함께 창건되었다. 1951년 쌍계사가 소실되면서 백련암과 함께 청암사의 산내암자로 소속되었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에 의해 전소되었다가 1900년에 포응화상(捕應和尙)이 중건하였다.

김천지역에서 가장 고지대인 증산면 수도리 수도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가야산 정상이 연꽃위에서 합장한 부처님의 손처럼 보인다하여 유명해진 사찰이다.


수도암의 원래 지명은 보광사(普光寺)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해인사와 함께 보광사를 화엄종 10대 사찰로 꼽을 정도로 화음사찰로서의 명성을 얻기도 했다. 창건주인 도선국사는 전국을 답사하면서 신라의 국운을 융성하게 할 명당을 찾을 때 이곳에 절터를 잡고 너무 좋은 나머지 사흘 밤낮으로 춤을 췄다는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의 명당으로 전해진다. 멀리 바라보이는 가야산 정상이 실을 거는 끝게돌이라고 동, 서로 나뉘어 선탑은 베틀의 기둥이며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이 놓인 자리가 여인이 앉아 베를 짜는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도선국사는 절을 다 지은 후에“앞으로 이곳에서 무수한 인물이 배출될 것이다”라고 예언하며 7일간 또 춤을 추었다고 하는데 예언이 적중했음인지 수도암에서 많은 불교지도자가 배출되었다. 보물 제 296호로 지정된 약광전석불좌상과 보물 제297호의 3층 석탑(2기), 보물 제 307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과 함께 창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기단석관 초석이 남아 있다.


수도산자연휴양림 대덕면 증산로 326-71 054-435-5128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수도산 자연휴양림은 가족단위 관광객을 위한 숲속휴양관, 단체손님들을 위한 숲속의 집, 힐하우스 등 깨긋한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산책로, 물놀이장, 세미나실 등이 있어 단체 휴식처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국립김천치유의숲 증산면 수도길 1237-89 054-435-3412

「국립김천치유의숲」은 경북권의 울창한 자작나무 숲 속에서 아름다운 숲길을 통해 풍부한 산림치유 자원을 활용한 산림치유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수도암 약광전석불좌상 보물 제 296호

수도암 약광전 석불은 금오산 약사암에 있는 석불,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과 함께 3형제라 하고 그 중 한 석불이 하품을 하면 다른 두 석불은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으나 조각수법이나 솜씨는 서로 다른면이 있다.

고려초기 불상높이 1.54m 어깨폭90cm 대높이 1.22m

수도암 3층석탑 보물 제 296호

서기 859년(신라 57대 헌안왕 3년) 도선국사가 청암사와 수도암을 창건하면서 조성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대적광전앞에 동서로 두탑이 섰는데 모두 3층석탑이다.
동쪽의 탑은 단층위에 기단위에 섰고, 서탑은 각면에 한개씩 장대석으로 지대를 마련한 3층석탑이다.

수도암(修道庵)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 307호

통일신라시대 2.51m 대좌높이 1.19m



권역별관광: 직지사권, 부항댐권, 수도계곡권, 도심감문국권


직지사권

●황악산(1,111m 黃岳山또는 黃鶴山) 직지사(直指寺)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代項面) 직지사길 95(운수리(雲水里) 216번지)☎054-429-1700~4


황악산(1,111m 黃岳山또는 黃鶴山)


예로부터 학이 자주 찾아와 황학산으로 불리웠고, 지도상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으나, 직지사의 현판을 비롯, 택리지등에 황악산으로 명기되어 있다. 전체적인 산세는 특징없이 완만한 편이나 온 산에 수림이 울창하고 산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은 곳곳에 폭포와 소를 이뤄 그윽한 계곡미를 이루고 있다. 특히 직지사 서쪽 200m 지점에 있는 천룡대에서부터 펼쳐지는 능여계곡은 이산의 대표적인 계곡으로 봄철에는 진달래, 벚꽃, 산목련이 볼만하고 가을철 단풍 또한 절경을 이룬다. 산행의 깃점은 최근 관광 단지로 크게 조성되어 있고 직지사를 경유 운수암을 거쳐 주능선에 도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직지사(直指寺)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길 95. 직지사


▣창건 및 역사


직지사(直指寺)는 대한불교조계종의 25본산(本山) 중 하나인 제8교구의 본사로서  70여 개의 말사(末寺)가 있습니다. 관할 구역은 김천시, 구미시, 상주시, 문경시와 예천군입니다. 황악산(黃鶴山,해발 1111미터)기슭에 자리 잡은 1,600여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불보살님과 조사님들의 가르침에 따라 장명등(長命燈)을 환히 밝히면서 민초(民草)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눠왔습니다. 황악산의 '황(簧)'은 중앙을 상징하는 글자로 소백산맥의 우뚝 솟은 봉우리 하나가 경상,전라,충청3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기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 산 아래 선의 상승종위(上乘宗違)인 '직지인심 견성성불 (直指人心 見性成佛)에서 직지라는 사명을 따온 직지사가 자리를 틀고 있다.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418) 아도(阿道)화상이 창건하고 선덕여왕 14년(645) 자광 율사가 중창하였다고 하나 창건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경순왕 4년(930) 천묵스님이 중수하였으며 고려조에 들어와 능여대사가 태조의 도움으로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등곡학조(燈谷學粗) 스님이 중수했으나 선조 29년(1596) 임진왜란 때 43동의 건물 중 천불전, 천왕문, 자하문을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타는 운을 겪었다. 1602년부터 70여 년에 걸쳐 중건불사를 벌여 상당한 규모를 유지했으나 1805년부터 사세가 기울기 시작하다가 6.25동난과 정화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퇴락했다. 1958년 녹원 스님이 주지로 재직하면서 직지사는 면목을 새롭게 하기 시작했다. 스님은 1966년 이후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거행하여 사세를 크게 확장하여 오늘날 대가람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현재 직지사에는 쌍탑을 거느리고 묵중하게 들어선 대웅전과 규모가 큰 천불전을 비롯하여 극락전.응진전.명부전.사명각.범종각.일주문.금강문. 사천왕문.천불선원과 요사체.명월료.청풍료.설법전.제하당. 남월료.만덕전등 65동의 전각이 들어서 있다.


황악산 동쪽 산쪽에 자리한 이절은 신라 눌지왕2년(418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고 문화재로는 보물 제319호인 석조여래좌상과 보물 제606호인 삼층석탑등 국가지정문화재7점이 있으며 암자로는 운수암,은선암,백련암이 있다.


도리사금동육각사리함 국보 제 208호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403에 있는 도리사에서 출토되었다. 도리사는 직지사와 함께 묵호자와 동일인으로 알려진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대에 창건하므로서 신라 불교의 초전지인데 이곳에 있는 세존사리탑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석조약사여래좌상 보물 제319호  사찰 입구 사적비 부근에 있었던 금당 유허지에 있었는데 1979년 약사전을 신축하여 비바람을 막았다.


⊙대웅전앞삼층석탑 보물 제606호 원래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 있었던 도천사 자리에 파손, 산재해 있던 것을 1974년 직지사 주지 오녹원이 이곳에 옮겨 원형대로 복원하였고, 탑봉 상륜부는 1976년 전문가(한수영 박사)의 고증으로 복원되었다.

비로전앞삼층석탑 보물 제607호 대웅전앞 삼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원래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둿산에 있었던 도천사 유허지에 도괴된 채 산재한 것을 1974년 직지사 주지 오녹원화상이 이곳으로 옮겼다.

대웅전삼존불탱화 보물 제670호 1735년(영조 11년) 대웅전 중건 때 진기 지영 두 스님이 불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9년만인 1744년(영조 20년) 5월에 완성 봉안했다.

청풍료앞삼층석탑 보물 제1186호 원래 구미시 선산읍 원리 강창마을에 있었던 강락사터에 도괴된 채로 있던 것인데, 1968년에 구미시 선산출장소(전 선산군청) 마당에 옮겼다가 1980년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예념미타도량참법 권 제 6~10 보물 제1186호  1474년(성종5년) 세조빈 정희대왕대비가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새긴 목판을 16세기 초에 해인사에서 인출한 책이다.

대웅전 보물 제1576호 사찰 입구 사적비 부근에 있었던 금당 유허지에 있었는데 1979년 약사전을 신축하여 비바람을 막았다. 

한천사출토금동자물쇠 보물 제 1141호 경북 예천군 감천면 중거리 184번지에 위치한 한천사에서 출토되었다. 한천사는 신라 문무왕 18년(678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1988년 가을에 사내 조경공사를 하던 중 금동 자물쇠 등 일괄 4점이 출토되었다.


직지사 전각소개

⊙대웅전(大雄殿) 대웅대 광명전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을 동시에 봉안했는지 알 수 없다. 

비로전(毘盧殿) 고려 태조때 능여 조사에 의해 처음 세워진 비로전은 천불상을 모시고 있으므로 천불전이라고 한다

응진전(應眞殿)고려 태조 14년(931) 능여 대사가 창건 하였으나 임진왜란에 전소되었던 것을 효종 7년(1656) 관음전으로 중건 하였다가 뒤에 응진전으로 개액 하였다.

관음전(觀音殿) 관음전은 일명 원통전이라고도 하며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이다.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동방유리광정토를 표출시킨 법당으로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약사여래는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여 줄 뿐만 아니라 죽음을 물리치는 힘을 갖고 있는 부처로 대중의 신앙대상이 되었다. 왼손에는 약사여래의 특징적 모습인 약합을 들고 있다.

극락전(極樂殿) 서전(西殿)이라고도 하며,사적기에는 서전암(西殿庵)이라 하였다. 현재 천불선원으로 사용중이다.

설법전(設法殿) 1층 : 100평 규모의 식당 (후원) 2층 : 스님 방사 및 템플스테이 숙소 3개 3층 : 설법전 법당 (템플스테이 운영 공간 및 숙소) 최대 100명 수용

남월료(南月寮) 남월료는 사중의 강당이며 주지 녹원 화상에 의하여 2층으로 신축되었다. 1층은 공사의 대중이 거처토록 한 일종의 후원 형식 건물이고,2층은 강원 학인들을 위한 강당이다. 현재 직지사 승가대학(강원)으로 사용중이다.

만덕전(萬德殿) 강당 : 200평규모의 대형 강당 소강당 : 80평규모 (소강의실 및 숙소사용가능) 회의실 : 35평 규모 (회의실 및 숙소 사용가능) 세면실 : 남ㆍ녀 세면실 각 25평(만덕전 뒤쪽) 최대 200명 수용

명월당(明月堂) 주지 화상의 거처로서 모든 이에게 달과 같은 밝음을 전하는 집으로 현재 회주실로 사용되고 있다.

청풍료(淸風寮) 이건물은 현재 본사의 성보유물전시관인 박물관으로 사용중이다.


■천불선원전경


연혁

사명(寺名)인 '직지(直指)'가 선의 본래 마음 자리를 가리키는 손짓인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직지사와 선의 관계는 불이적(不二的)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지사에 선맥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신라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직지사를 거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사격이 드높았다. 조선시대에 숭유억불책의 암울한 기류속에서도 오히려 조정에서 직지사에 고선종대가람이란 첩문(帖文)을 내려 비호함으로써 많은 선지식인들이 대를이어 배출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끊일 듯하면 법맥을 이은 법계정심 스님이 이곳 황악산에 몸을 숨겼고, 세조대에 학덕겸전(學德兼全)의 고승으로 널리 알려진 동곡학조 스님이 이곳에서 선지를 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구국의 승병장이자 뛰어난 선승인 사명유정(1544-1610)스님이 이곳으로 출가해 신묵스님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한때 주지를 맡기까지 했다.


1910년 직지사 염불회를 수선사(修禪社)로 개명, 여름과 겨울 안거시에 5-6명의 운수(芸水)가 입방하면서 근대 직지사 선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선종 고찰에 선원이 없어서는 안되겠다는 역사적 요청에 천불전 옆 천불암의 천불암 염불회를 고쳐 선원을 창설한 것이다. 동년 10월 서전(西殿)으로 선회를 옮겼으며, 1913년 봄에는 중앙사우(中央社宇)를 수리하고 선회를 다시 이전했다. 당시 참선 남자는 3명이었다. 직지사에서 1913년의 봄은 선원의 기틀을 본격적으로 다지는 의미 깊은 해이기도 하다. 그 해 당대의 뛰어난 선승 제산 스님이 해인사에서 직지사로 옮겨와 17년 동안(1929년까지) 천불선원의 조실로 머물면서 선원을 부흥시켜 직지사는 선본 총찰로서 잃었던 옛 영화를 다시 찿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퇴운.탄웅 같은 훌륭한 선사의 출현도 천불선원의 풍광을 드높이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제산 스님을 종주로 삼고, 퇴운 스님을 화주로 삼아 비록 암묵열뇌(暗墨熱惱)의 일제 치하에서도 황악 일역에는 상연한 선풍이 드날렸던 것이다. 당시 선원은 비로전(천불전) 옆 명월료 자리에 위치했으며 선원의 이름은 천불선원이었다.


⊙현황


극락전, 향경다실(香經茶室), 서상당(西上堂) 등이 들어선 천불선원 영역은 황악산에서 흘러 내리는 계류와 숲으로 둘러싸여 속기가 범접할 틈을 주지 않을 만큼 청정하다. 선원으로 들어서는 단 하나의 통로는 계류 위를 밟고 올라서 있는 도피안교를 지나는 길이다. 그 길로 10여미터쯤 가서 안양루를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선면 깨끗하면서도 적정한 선원 일대가 한눈에 다가선다. 정면으로 극락전, 좌측으로 향경다실,우측으로는 동상당이 있으며 향경다실 뒤에 자그마한 서상당이 서 있다. 선원 큰방은 극락전이다.


직지성보박물관


직지사요양원


■직지사(直指寺)


황악산(黃岳山 1,111m) 직지사(直指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로 신라 눌지왕 2년(418) 아도화상(阿道和尙)께서 창건하신 후 1천 6백년의 역사로 신라시대에 2차에 걸쳐 중수되었습니다. 고려의 개국을 도운 능여조사(能如祖師)는 왕건의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이루셨습니다.


본사(本寺)의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美化)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즉 창건 설화의 직지(直指)와 선가(禪家)의 직지(直指)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 (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를 이처럼 극명(克明)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본다.

아도 화상에 의하여 개창된 직지사는 신라시대에 2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그 첫째는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 자장 법사(慈藏法師)에 의한 중수를 들 수 있고, 두번째는 경순왕(敬順王) 4년(930) 천묵 대사 (天默大師)에 의한 2차 중수가 그것이다.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준령(竣嶺)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그 서쪽 추풍령(秋風嶺)에서 잠시 머물러 관문(關門)을 이루었고,다시 서남쪽으로 웅장(雄壯)한 산세(山勢)를 유지하며 달려와 힘차게 솟아오른 황악산(黃岳山) 동남쪽 산자수명(山紫水明) 한 곳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가 자리해있다. 해발 1,111m에 달하는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청도,서쪽으로 전라도, 동남쪽으로는 경상도에 연이은 삼도(三道)의 도계(道界)에 접하였으며, 이중심에 눌러 앉은 본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慶尙北道) 김천시(金泉市) 대항면 (代項面) 운수리(雲水里) 216번지이다.

황악산(黃岳山) 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본사(本寺)로부터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선(京釜線)을 비롯하여 태백산(太白山), 삼척(三陟)등 동해방면(東海方面)으로도 연결되는 한반도(韓半島) 교통의 요충지이며, 예로부터 길상지지(吉祥之地)로 전해져 내려오는 곳에 직지사는 정좌(定座)하고 있다.

따라서 절의 위치가 산곡(山谷)이면서도 높지 아니하고,야지(野地)인듯 하면서도 산사(山寺)의 풍취(風趣) 가 항상 흘러 넘쳐서 4계절 내내 도량을 참배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잠시 황악산의 산세와 지형을 살펴보면, 최상봉인 비로봉(毘盧峰)에서는 경상, 충청, 전라의 3도를 한눈으로 굽어볼 수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선유봉(仙遊峰)을 비롯하여 천룡봉(天龍峰)과 운수봉(雲水峰)이 있고, 조금 내려와서 절경대(絶景臺)가 있으며, 그 중턱에 운수암(雲水庵)이 있어 승경(勝景)을 이룬다. 운수봉(雲水峰)에서 다시 2km쯤 올라가면 백운봉(白雲峰)이 있고, 그 아래로 만경대(萬景臺)가 펼쳐진다. 다시 남서로 난 능선을 따라가면 망월봉(望月峰)과 함께 신선봉(神仙峰)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위에 형제봉(兄弟峰)은 백운봉과 마주하여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황악산은 대체로 3대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능여계곡(能如溪谷), 내원계곡(內院溪谷), 운수계곡(雲水溪谷)이 그것이다. 능여계곡에는 그 옛날 능여 대사(能如大師)가 황악산 계곡의 원천(源泉)을 찾았다는 멱원대(覓源臺)를 비롯하여 많은 대(臺)와 소(沼)가 있고, 두 곳의 폭포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능여천(能如泉)과 법수천(法水泉) 등의 약수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직지문화공원

대항면 운수리 31-1 054-420-6613




많은 조각작품과 시비(詩碑)가 곳곳에 있어 야외 전시장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원형분수가 음악에 맞춰 화려한 분수쇼를 선보이고, 2,000명이 동시 관람할 수 있는 야외공연장에서 빗내농악공연, 전통혼례식 등 문화공연이 열린다.

●황악산하야로비공원

대항면 운수리 95-1

황악산 자락 아래 조성된 황악산하야로비공원은 아름다운 생태자원과 더불어 평화의 탑, 문화박물관, 건강문화원, 전통한옥촌 등 문화, 생태, 체험형 복합휴양단지로 조성 중이다

●친환경생태공원

대항면 운수리 95-1

황악산 자락 아래 조성된 황악산하야로비공원은 아름다운 생태자원과 더불어 평화의 탑, 문화박물관, 건강문화원, 전통한옥촌 등 문화, 생태, 체험형 복합휴양단지로 조성 중이다.

●세계도자기박물관

대항면 직지사길 118 054-420-6726


세계도자기박물관에서는 한국의 도자기뿐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도자기와 크리스탈, 유리, 그 외의 소장품들을 감상할 수 있으며, 도자기의 역사, 정의, 제작과정과 나라별 도자기의 특징을 알아 볼 수 있다.

●백수문학관

대항면 직지사길 118-18 054-436-6834


백수문학관은 196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시조의 선구자인 백수(白水) 정완영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문학관이다. 시인의 애장품과 소장품 등을 볼 수 있고, 전시실과 자료실, 세미나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흘구곡(수도계곡)


무흘구곡은 조선 중기의 학자 한강 정구(1543~1620)가 맑은 물과 기암괴석 등의 절경을 읊은 시의 아홉 개 계곡을 말한다. 김천에서 성주까지 흐르는 하천 중 제 1곡 봉비암, 제 2곡 한강대, 제 3곡 무학정, 제 4곡 선바위는 성주에 속해 있으며 제 5곡 사인암, 제 6곡 옥류동, 제 7곡 만월담, 제 8곡 와룡암, 제 9곡 용추폭포는 김천에 속해 있다. 제 7곡 ~ 제 9곡이 수도계곡에 위치하고 있으며 용추폭포의 물줄기는 탄성을 자아낸다.



유물·유적

낙동강 지류인 감천의 상류에 위치하며, 감문국(甘文國)의 고지로 비정되는 곳으로 선사시대 이후의 유적·유물이 확인된다. 특히 구성면 송죽리에서는 선사시대 생활유적지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취락지·묘지가 확인되어 발굴 조사되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감문면 송북리 성북골 마을에 선돌이 있고, 보광리·송북리 고인돌, 봉산면 예지리 고인돌, 구성면 상원리·송죽리 고인돌이 있다.

삼국시대 유적으로는 감문면 보광리고분, 개령면 동부리·서부리고분군, 농소면 입석리고분군, 아포읍 대신리·봉산리고분군, 성내동고분이 있다. 성지(城址)로는 감문면 송북리의 속문산성, 지례면 구산성·교리산성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남면 오봉리오봉동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45호), 증산면 수도리청암사수도암약광전석불좌상(靑巖寺修道庵藥光殿石佛坐像, 보물 제296호)·청암사수도암삼층석탑(보물 제297호)·청암사수도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307호)가 있다. 또한 직지사에 많은 문화재가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직지사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319호)·직지사대웅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5호)·직지사대웅전앞삼층석탑(보물 제606호)·직지사비로전앞삼층석탑(보물 제607호)·직지사대웅전삼존불탱화(보물 제670호)를 비롯해 금릉광덕동석조보살입상(보물 제679호)·금릉옥률리석조아미타여래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1호), 직지사청풍료앞삼층석탑(보물 제1186호), 직지사 문경김룡사동종(보물 제11·2호), 직지사 백지금니금강보문발원합부(보물 제1303호), 직지사 묘법연화경(보물 제1306호)이 있다.

그 외에도 금릉은기리마애반가보살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7호)·금릉덕천리석조관음보살입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0호)·청암사다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금릉서부동폐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2호)·금릉신안동석불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1호)·금릉태화리석조보살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9호)·청암사대웅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0호)·청암사보광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8호) 등이 있다.

또 대항면 운수리에 한천사(寒天寺)출토금동자물쇠일괄(보물 제1141호)과 예념미타도장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보물 제1241호)이 있으며, 사지로는 쌍계사지·갈항사지가 있다.

고건축물로는 지례면 교천리에 지례향교대성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8호), 개령면 동부리에 개령향교(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9호), 교동에 김산향교(金山鄕校,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7호)·봉황대(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호), 구성면 상원리에 방초정(芳草亭, 보물 제2047호), 하원리에 모성정이 있다.

이 밖에 남산동의 김천과하천(金泉過夏泉,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8호), 성내동의 김천과하주(金泉過夏酒,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1호), 황금동의 김천정장(金泉鉦匠,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9호), 남산동의 모필장(毛筆匠,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7호), 개령면 광천리의 금릉빗내농악(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이 전승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로는 금릉대덕면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0호)와 금릉추량리 은행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91호)가 있다.

그 외에 상원리 명성재(明誠齋)에 소장된 가례증해판목(家禮增解板木,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7호), 하원리 경덕사(景德祠)에 소장된 이숭원초상화(李崇元肖像畵,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 김천신리 영천이씨 정려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87호), 성산여씨 하회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88호), 미륵암 석조미륵불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0호)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천시 [金泉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향교와 서원이 있었으며, 향교로는 김산향교(金山鄕校)·지례향교(知禮鄕校)·개령향교(開寧鄕校)가 있다. 교동에 있는 김산향교는 1392년에 창건했으나 임진왜란 중 소실되었다가 1634년(인조 12)에 중건하고 1871년(고종 12)에 중수하였다. 1426년(세종 8)에 창건한 지례면 교촌리의 지례향교는 임진왜란 중 소실되었으나 1690년(숙종 16)에 중수하였다. 1473년(성종 4)에 창건한 개령향교는 1522년(중종 17)에 수축하고 1563년(명종 18)에 중수했으며, 1837년(헌종 3)에 현 개령면 동부리로 이건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김산향교에 폐합되었다가 1946년에 복원하였다.

서원으로는 1648년(인조 26)에 설립한 성내동의 경렴서원(景濂書院)과 도동향사우, 1669년(현종 10)에 설립한 아포읍 대신리의 덕림서원(德林書院), 1756년(영조 32)에 설립한 춘천서원, 구성면 광명리의 경양서원, 1802년(순조 2)에 설립한 대덕면 조룡리의 섬계서원(剡溪書院)이 있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두 훼철되었고, 섬계서원만 1961년에 복원되었다. 그리고 봉산면 예지리에는 봉암서당(鳳巖書堂)이 있다.

근대교육기관인 초등학교로는 1907년에 김천공립보통학교가, 1909년에는 개령공립보통학교가 개교했으며 일제강점기인 1912년 지례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진 후 20개의 학교가 개교했다. 중등학교는 1931년 김천고등보통학교가 사립학교로 개교했으나 일제에 의해 공립화되었다가 광복 후 사립으로 환원되었다. 1935년에는 김천여자고등보통학교(김천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가 설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1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0개교, 김천대학교, 경북보건대학교가 있다.

문화시설로는 도서관 2개, 박물관 1개, 공연시설 3개, 지역문화복지시설 3개, 기타시설 3개가 있다. 2000년 4월에 개관한 김천문화예술회관은 시립예술단을 창단하고, 다양한 공연 및 전시시설, 국제회의장 등을 갖추어 김천시의 문화예술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1963년 용두동에서 개관한 김천시립도서관은 최종적으로 2003년에 평화동에 신축·개관하였으며 김천시민들에게 정보와 휴식을 제공하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또한 김천시는 환경공원과 강변공원 등 심하게 오염된 도심지 하천이나 하수종말처리장 등 시민들이 혐오하는 공간을 정비하고 환경친화적인 공원으로 조성하여 아름다운 휴식공간을 마련하였고, 뿐만 아니라 조각공원이나 직지문화공원 등 지역의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을 마련하여 시민들의 문화생활을 장려하였다.

민속

김천시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농악과 줄다리기가 있다. 개령면 광천리 빗내마을에서 전래되어 온 농악은 전쟁에서 유래한 경상도 특유의 진(陣)굿농악으로 12가락의 굿판이 명확한 차이를 가지면서 마치(잔가락)의 종류도 다양하게 전개된다.

음력 1월 6일에 행해지며, 인원 제한 없이 노소를 불문하고 놀이에 가담하나 보통 한 가구당 한 명씩 참가해 놀이가 구성된다. 진행방식은 행진가락인 질굿을 치면 농악이 시작되어 상쇠의 입장을 알리는 문굿이 있은 다음, 원형을 그리며 정렬한다. 이어서 전 풍물꾼이 관중에게 인사를 하는 마당굿을 하고, 반죽굿·도드레기·영풍굿·허허굿·기러기굿·판굿·채굿·진굿을 거쳐 지신굿으로 놀이를 끝낸다.

줄다리기는 정월대보름을 전후해 행해지는데, 정초부터 집집마다 짚단을 얻어 가지고 지름 20㎝, 길이 100m 정도 되는 동아줄을 만들어 마을의 넓은 공터에서 한다. 이 때 농악이 선두에 서고 관을 쓴 사령이 대장옷을 입고 행렬을 지휘한다.

줄은 줄머리를 중심으로 양쪽 줄을 서로 연결시키는데, 앞줄(서쪽이나 북쪽 편의 줄)로 둥그런 모양의 도래를 만들고, 그 속에 숫줄을 넣어 꽂대(비녀목, 길이 2m, 지름 30㎝의 나무)에 질러 넣어 고정시킨다. 꽂대를 꽂으면 꽹과리를 울리고 줄을 당기기 시작한다. 이긴 편은 풍년이 들고 병이 나지 않으며 재앙 없이 한 해를 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밖에도 지신밟기·연날리기·호미걸이를 비롯한 많은 민속놀이가 전해 온다.

남면과 개령면에서는 3월과 9월에 마을이나 시장에서 주최하는 별신제를 지낸다. 봄에는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빌고, 가을에는 풍년에 대한 감사와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는데, 3∼5일 동안 마을의 광장이나 시장에서 열린다.

동제 기간에는 마을 입구에 금줄을 치고 집집마다 문전과 마을의 도로에 적토를 뿌린다. 제장에는 천막을 치고 제상을 설치한 뒤에 제문을 바치며, 헌작·분향·축문읽기·소지 등의 절차가 끝나면 제사에 참례한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여흥으로 3일간 무당의 춤과 농악·씨름 등이 벌어진다.

농소면 월곡리 밤실마을에서는 정월 초이튿날 동제를 지낸다. 부정 타지 않은 사람을 제관으로 해 동짓날 새벽에 마을 뒷산에 있는 ‘찬물샘’에서 목욕하고 산에 올라 마을의 수호신에게 풍년과 안녕을 비는 제를 지낸다.

산정에서 먼저 첫 번째 제를, 마을 남쪽 페구나무 밑에서 두 번째 제를, 마을 북쪽 느티나무 밑에서 세 번째 제를 지냄으로써 동제가 끝난다. 제관으로 뽑힌 사람은 그 해의 부역을 면제시켜 준다. 그 밖에도 대덕면 연화리를 비롯해 여러 마을에서 동제를 지낸다. 비가 오지 않으면 용추나 하늘이 가까운 산마루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설화·민요

효녀·열녀설화와 자연물과 관련된 전설이 이 고장에 전해 오는 주된 설화이다. 감천면에는 구걸한 쌀을 두고도 굶어죽은 효녀의 이야기인 「득옥(得玉)의 설화」가 전해온다. 조선 말기에 노비 득옥은 여든 살에 가까운 노모를 모시고 살았는데, 어느 해 큰 수해가 나 백성들이 풀뿌리로 연명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득옥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양식을 구걸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양식을 주는 것은 노모를 모시기 때문인데 어머니 몫의 양식을 축낼 수 없다.’라고 해 자신은 풀뿌리만으로 버티었다. 그러다가 기진맥진해진 득옥은 어느 날 구걸한 쌀자루를 머리에 이려고 하다가 쓰러져 죽고 말았다. 이후 사람들이 득옥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효행비를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봉산면의 정승바위에는 떨어져 있는 남편을 만나고 싶어하던 정승부인에 관한 전설이 얽혀 있다. 이극돈(李克墩)이라고도 하고, 그의 형 이극배(李克培)라고도 하는 이 정승은 서울에서 벼슬자리에 있었고, 이 곳에는 그의 부인 혼자만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남편이 보고 싶어 때마침 찾아온 노승에게 남편과 만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애원하였다.

노승은 마당 가운데 있는 연못에 소금 석 섬을 뿌리고 동네 입구의 바위를 깨뜨리라고 하였다. 부인이 그대로 하자 못 안의 수양버들에서 놀고 있던 학 세 마리가 날아가 버리고 사흘 뒤 남편은 시체로 돌아왔다. 그 뒤 이 마을에는 벼슬이 끊어지고 학이 날아간 봉계와 창촌은 번창해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고 한다. 지금도 못이 남아 있고, 깨뜨리다 남은 바위는 정승바위라 해 마을 어귀에 남아 있다.

한편, 힘센 장사 황울산도 차지하지 못한 명당에 관한 「명당설화」가 봉산면 일대에 전해 온다. 정씨네와 황씨네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함께 상을 당하였다. 두 집안은 서로 태평사(太平寺) 뒷산의 명당에 묘를 쓰려 하였다. 황울산을 두려워한 정씨네는 두 개의 상여를 준비해 빈 상여와 황씨네 상여가 마주치게 하였다. 황울산이 정씨네의 빈 상여를 붙잡아 두었으나, 황씨네 상여가 묘소에 당도했을 때 이미 정씨네는 ‘달고’소리와 함께 장례를 마치고 있었다. 화가 난 황울산은 정씨네가 새로 세운 비석을 주먹으로 쳐 두 조각 내 버렸다. 이후 황씨네는 몰락해 이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지금도 반 토막 비석이 남아 있다는 설화이다.

그리고 김천(金泉)이라는 이름은 옛날 김천지방에 금지천(金之泉)이라는 샘물이 있었다는 데서 연유한다. 이 샘에서 금이 난다고 해 금지천이라 했는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원군의 대장 이여송(李如松)이 이곳을 지날 때 이 샘의 물맛을 보고 자기 나라 금릉땅의 과하천(過夏泉) 물맛과 같이 좋다고 칭송해 이 곳 금지천을 과하천이라고도 불렀다.

그 밖에도 지명유래담인 구성면의 「장자동설화」와 수도암석불·태평재·바위백이·여우우물·봉우재전설 등이 전한다.

이 고장에 구전되는 민요는 노동요 가운데 농업노동요와 여성노동요가 중심을 이룬다. 농업노동요로 「모찌기노래」는 사설을 주고받는 교환창으로 부르면서 “들어내자, 절우자(쪄내자)” 등 작업과정을 말하는 사설로 부르기도 하고, “저승체사(차사) 이명순아/ 이모자리 훔쳐가소/ 저승체사 강남도령/ 요모자리 막아주소.”라고 해 모 쪄내는 일이 힘드니 차라리 저승차사들(다른 지방에서는 이명순을 이맹추라고 함)이 모판을 훔쳐가 버리라고 노래하기도 한다.

「모내기노래」는 “성주함창 공갈못에”나 “물꼬철철 헐어놓고” 또는 “연밥따는 저처자야” 등의 보편적인 사설이 많고, “서울이라 냉기(나무)없어/ 금봉채로 다리나아”와 같이 “서울이라”로 시작하는 사설이 꽤 있어 서울과의 왕래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논매기노래」는 「모내기노래」보다 우세한 지역이라고 조사되었으나 채록되지 않았고, 나무할 때 부르는 「어사용」도 전승된다고 하나 조사되지 않았다.

여성노동요도 많이 불리는데 “한골매고 두골매고/ 이삼세골 거듭매니/ 다른점슴 다나와도/ 이내점슴 아니나와/ 점슴바래 내가왔네/ 그것따나 일이라고/ 때를타고 시를타나/ 에라요년 물너쳐라.”는 「밭매기노래」로 시집식구들이 끼니도 제대로 주지 않고 학대해 결국은 중이 된다는 시집살이의 고난을 줄거리로 한 서사민요이다.

이 노래 외에 여성노동요에서 시집살이의 고난이나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으로 된 사설이 적은 것이 이 고장 민요의 특징이다. 「베틀노래」도 “월강에 노든손님/ 세상에 내려와서/……부헤라 두른양은/ 허리안개 두른덧다/ 말코라 감은양은/ 삼대독자 외동아들/ 멩(命)캉 복(福)캉 감은 덧고……바디집 치는 소리/ 성군이 옥패로다……”라고 해 베틀을 놓고 베 짜는 광경을 여러 가지 비유로만 노래하고 있다.

여러 사람이 모여 밤새도록 삼을 삼을 때 부르는 노래는 “활티재이 불밝혀라/ 지례짐산 진삼가래/ 아니거창 뻗쳐놓고/ 여선가래 반을주자/ 달에삼고 불에삼고/ 어심새북(새벽) 삼고나니……”라고 해 밤새 긴 삼가락을 삼는 광경을 그리기도 하고, “잠아잠아 오지마라/ 잠온말 다들으면/ 칠월질쌈 묵어난다……”라고 해 일할 시기를 놓치면 다음 일에 지장이 있으니 꼭 잠을 쫓고 고되지만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노래하기도 한다.

물레질할 때 부르는 「물레노래」로는 보통 물레가 잘 돌아가는 모양에다 자신의 신세나 어떤 바람을 싣고 있는데, “물레씨가 병이났네/ 괴무리난 요동하고……김천장 길이달아/ 참깨 한되 팔아다가/ 그 기름 짜가지고/ 참깨국을 바르니까/ 째깍하며 돌아가데.”라고 해 물레가 고장나서 고치기까지를 노래하는 특이한 사설이 불린다.

그 밖에도 「바느질노래」·「댕기노래」·「정노래」등이 있으며, 「잠자리」·「뱀노래」·「대문따기」·「윷놀이」 등이 있고, 유희요 등도 있다.


산업·교통

총경지면적은 1만 6915㏊로, 경지율은 약 17%로 낮은 비율을 보인다. 이 중 논은 7,518㏊로 약 44%를 차지하고 밭은 9,397㏊로 약 56%를 차지해 밭농사가 논농사보다 높은 비율을 보인다. 금릉평야와 개령평야를 중심으로 한 쌀·보리 등의 주곡 이외에 포도·사과·배 등의 과일과 오이·호박·배추·토마토·상추 등의 채소류, 참깨·들깨·아주까리·표고버섯·황색잎담배 등의 특용작물이 많이 생산된다. 특히 조마면의 굵고 맛 좋은 감자, 감문면의 시원하고 당도 높은 금싸라기참외, 어모면·감문면·개령면의 완초, 봉산면·대항면의 표고버섯, 지례면의 재래종 돼지가 유명하다.

광공업은 영세규모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2008년 현재 광구 수는 20개로 가행 중인 광구는 10개가 있다. 특히 지례면 상부리에는 매장량이 많은 규석의 노천광이 있다. 광산물의 생산을 살펴보면 규석은 지례면·봉산면·대덕면, 고령토는 구성면·대덕면, 장석은 조마면에서 산출된다.

공업을 보면 1990년대 들면서 구성면의 직강공사로 인한 지방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곳곳의 산업기반을 유도, 낙후되어 가는 농촌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2008년 현재, 감문·지례·아포·대광, 4개의 농공단지와 김천1·2차 산업단지 등 총 5개의 산업단지가 1988년~1999년에 걸쳐 298만 4000㎡ 면적에 조성, 총 86개 업체가 입주해 있으며, 종사자 수는 4,001명이다. 감문·아포·지례 농공단지의 경우 대부분 전자전기 부문 제조업체들이 입주해 있고, 김천 산업단지와 대광농공단지는 같은 지역에 집적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큰 규모의 공장지대를 구성하고 있다.

전통적인 제조업으로는 갈포벽지·영신당 붓·김천유기(金泉鍮器)·과하주(過夏酒)가 있다. 갈포벽지는 베처럼 짠 갈포를 염색하고 뒷면에 종이를 바른 것으로, 벽지라기보다는 가벼운 돗자리처럼 보이는 고급벽지로 방음·방습·광택이 뛰어나 수출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남산동영신당필방에서 족제비털·양털·노루털을 재료로 여러 번의 잔손질을 거쳐 생산되는 붓은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 있다. 또한 김천은 경기도 안성과 같이 예로부터 유기(鍮器)로 유명했으며 소리를 생명으로 하는 징과 꽹과리가 대표적이다. 과하주는 남산동 지게마을 서쪽에 있는 과하천의 물·누룩·찹쌀로 빚어 내는 김천지방의 전통민속주로 향긋하고 담백한 맛이 난다.

상업활동을 보면 김천은 예로부터 경상북도지역 육로의 주요 경유지로서 역이 설치되어 상업이 발달해 왔다. 조선시대에는 78개 상설점포가 개설되었고, 정기시장도 형성되어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3도 상인이 모여들었다. 따라서 김천장은 조선시대 중기부터 말기까지 대구·평양·전주·강경과 더불어 전국 5대 시장으로 꼽혔으며, 지금도 3도에서 곡식과 과일이 모여들어 삼도시장(三道市場)이라는 별명과 함께 활기를 띤다. 1830년대에는 매월 2일과 7일에 남면·개령읍·아산, 3·8일에 이수천, 4·9일에 금산읍·추풍·지례읍, 5·10일에 김천장 등의 5일장이 각각 열려 주로 농산물과 소·건어물·마포·종이 등이 거래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경에는 김천·지례·대덕 등의 정기시장만 남게 되었다. 광복과 6·25전쟁을 겪는 동안 5일장이 크게 성장해 1959년에는 10개로 늘어났으나, 1960년대 이후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교통이 발달하자 상설점포가 점점 늘어나고 정기시장은 줄어 남면장·아포장·부항장·구성장 등이 폐지되었다.

1985년에는 금라·이천·도평·지례·삼곡·대덕·증산 등 7개의 5일장만 공설로 열렸다. 이들 시장에서는 이 지역 특산물인 감자·포도·돗자리·메주·인삼을 비롯한 각종 농산물과 소가 거래된다. 2008년 현재 재래시장은 감호시장, 황금시장, 평화시장, 부곡시장, 중앙상가 등 총 5개소가 있으며, 2개의 대형 할인점이 있다.

김천시의 교통은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선이 지나고 있으며, 국도 4호선이 영동~대관, 3호선이 상주~거창 간을 지나며,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나제통문[羅濟通門]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雪川面) 소천리(所川里)383-2에 있는 석굴문(石窟門).


●위치: 나제통문은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위치한다. 무주 구천동 입구 삼공 삼거리에서 무주읍으로 난 국도 제37호선을 따라 15.8㎞ 가면 나제통문 입구 삼거리가 나온다. 나제통문 입구 삼거리에서 오른쪽 김천시로 난 국도 제30호선을 따라 약 50m 더 가 설천교를 건너면 나제통문이 나온다. 높이 3m, 길이 10m의 자연 암석을 인위적으로 관통시킨 인공 동굴로서,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의 경계 지점에 해당한다.


덕유산 국립 공원 경역(境域) 안에 속하며 무주 구천동의 입구에 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윗부분에 ‘나제통문’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 무주 구천동 33경 중 1경에 해당하며, 무주군 무주읍 무주 공용 버스 터미널에서 무주 구천동을 오가는 버스를 타면 1시간 정도 후에 나제통문 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김유신이 백제의 장군 의직(義直)과 무산성에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김유신에 관한 전설도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제통문은 삼국 시대가 아닌 후대에 역사적 의미가 전해져 내려오다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 시대에는 석견산 바위 능선을 경계로 동쪽의 무풍 지역은 신라 땅이었고, 서쪽의 설천 지역과 적상 지역, 무주 지역 등은 백제 땅이었다. 이렇듯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풍속과 문물이 판이한 지역이었던 만큼 지금도 각기 다른 언어와 풍습 등의 특색을 간직하고 있어, 설천 장날에 가 보면 사투리만으로 무주읍 사람과 무풍면 사람을 가려낼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소통의 상징적 유적으로서의 나제통문의 역할을 읽게 해 준다.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신두(新斗) 마을과 소천리 이남(伊南) 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석모산(石絹山)에 위치한 바위 굴이다.


무주군 설천면은 무주읍에서 무주 구천동(茂朱九千洞)으로 가는 길목으로, 삼국 시대에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경계였다는 말에 따라 ‘나제통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삼국은 통일 전쟁 무렵 신라 장군 김유신(金庾信)이 드나들었다 하여 ‘통일문(通一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동굴 양쪽에 위치한 자연 마을인 무주군 무풍면 방면의 이남 마을과 무주읍 방면의 새말[新村]은 1㎞ 정도 떨어져 행정 구역으로는 모두 설천면 소천리에 속하지만, 언어와 풍속이 서로 다르고 통혼(通婚)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랫동안 풍속과 전통이 각기 다르게 유지되어 왔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나제통문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일설에 의하면 삼국 시대 당시 조성된 것은 아니고, 근대 일제 강점기에 무주 지역에서 김천 지역과 거창 지역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를 내면서 우마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굴을 뚫은 것이라고 한다. 즉, 석견산 능선으로 일찍부터 설천 지역과 무풍 지역을 오가던 사람들이 다니던 고갯길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를 대신하여 굴을 뚫어 신작로를 낸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제통문 주변에 전하는 전설은 이곳이 여전히 관방 유적으로서 기능을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부근의 야산에 산재한 약 300여 기의 고분은 신라와 백제 간에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며, 파리소(沼)라는 연못은 양국의 격전 시에 시체가 산처럼 쌓여 파리가 모여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인근의 무산성(茂山城) 터 근방 사선암(四仙巖)이라는 크고 평평한 바위는 김유신 등 4명의 화랑이 바둑을 두며 놀던 장소라고 전해지며, 지금도 바위에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전설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무주군 설천면 지역이 신라·백제 양국의 전쟁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높이 5~6m, 너비 4~5m, 길이 30~40m이다. 암벽을 뚫은 통문으로, 옛 신라와 백제의 경계관문(境界關門)이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에 이 굴이 삼국시대 때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뚫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통문 동쪽은 본래 무풍현(茂豊縣), 서쪽은 주계현(朱溪縣)의 땅이었는데, 조선시대에 합쳐서 무주현(茂朱縣)이라 하였다. 무풍현은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으로 
경덕왕 때 무풍현으로 고쳐 개령군(경북 김천)에 소속시켰고, 주계현은 백제의 적천현(赤川縣)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단천현(丹川縣)이라 하다가 고려시대에 주계현으로 고쳤다.

이와 같이 통문을 경계로 한 동 ·서 두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판도와 문물이 다른 지역이었던 만큼, 600년이 지난 지금도 통문을 경계로 언어 ·풍습 등에 차이가 있으며, 사투리만으로도 두 지방 사람을 식별할 수 있다. 나제통문은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 입구의 경승지이기도 하다. 현재 덕유산(德裕山)국립공원 경역(境域)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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