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승지지[十勝之地]&십승지[十勝地]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작성자학천/우병구|작성시간20.07.01|조회수5,613 목록 댓글 0

십승지지[十勝之地]십승지[十勝地]


정의


십승지(十勝地)는 정감록에 나오는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인 흉년, 전염병, 전쟁이 들어올 수 없는 지역을 뜻한다. 십승지란 난세에 몸을 보전할 땅이자 복을 주는 길지(吉地)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조선시대에 사회의 난리를 피해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10여 곳의 장소를 말한다.  민속 재난이 일어날 때 피난을 가면 안전하다는 열 군데의 지역. 《정감록》이나 조선 중기의 도인 남사고(南師古)가 정한 곳이 유명하다.


개설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의 하나이다. 『정감록(鄭鑑錄)』에 근거한 역사적 용어이며, 십승지라고도 한다. 십승지지에 관한 기록은 『정감록』 중에 감결(鑑訣),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운기귀책(運奇龜策),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 등에 나타난다. 대체적으로 공통된 장소는 영월의 정동(正東)쪽 상류, 풍기의 금계촌(金鷄村), 합천 가야산의 만수동(萬壽洞) 동북쪽, 부안 호암(壺巖) 아래,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甑項) 근처, 남원 운봉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銅店村), 안동의 화곡(華谷), 단양의 영춘, 무주의 무풍 북동쪽 등이다.

십승지지는 조선 후기의 이상향에 관한 민간인들의 사회적 담론이었다. 십승지 관념은 조선 중․후기에 민간계층에 깊숙이 전파되어 거주지의 선택 및 인구이동, 그리고 공간인식에 큰 영향력을 주었다. 십승지지는 조선후기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민간인들의 경제적 피폐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났다. 십승지의 입지조건은 자연환경이 좋고, 외침이나 정치적인 침해가 없으며, 자족적인 경제생활이 충족되는 곳이었다.


연원


사람은 이상적인 장소를 희구하며 살고자 한다. 이상향에 대한 관념은 동서양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달랐으며 문화속성에 따라 차이가 난다. 불교의 극락과 정토, 기독교의 천국과 에덴동산, 도교의 무릉도원, 삼신산, 청학동 등은 사후 아니면 관념적인 이상 세계를 일컫는 말이고, 현실의 이상향을 표현한 말로서도 길지(吉地), 낙토(樂土), 복지(福地), 명당(明堂), 가거지(可居地) 등의 용어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승지(勝地)라는 말이다.

승지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로 자연 경관과 거주 환경이 뛰어난 장소를 말하지만, 역사적으로 조선 중․후기의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피폐로 말미암아, 개인의 안위를 보전하며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피난지를 뜻하였다. 『정감록』에서는 그 여남은 장소를 십승지지라고 표현하였다.

십승지지는『정감록』이라는 도참서의 키워드로 등장한 이래, 조선시대 민간인들의 지리인식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당시 민간인들은 정감록의 십승지지를 믿고 십승지를 찾아 나섰으며, 실제 거주지를 그곳으로 옮긴 경우가 있었고, 풍기의 경우처럼 지금까지 그 후손이 살고 있는 사례도 있다. 외침으로 인한 전란과 정치적 환란의 굴곡에서 살림살이가 피폐하였던 민간인들은 정감록을 믿고 피난, 보신(保身)의 삶을 일구어 나갔던 것이다.


위치와 입지환경


십승지의 위치에 관해 『정감록』의 「감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몸을 보전할 땅이 열 있으니, 풍기 금계촌, 안동 화곡, 개령 용궁, 가야, 단춘, 공주 정산 마곡 진천, 목천, 봉화, 운봉 두류산, 태백으로 길이 살 수 있는 땅이다.”

이어서 열 곳 승지의 구체적인 지리적 위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골 사이에 있다. 둘째는 화산 소령 고기로 청양현에 있는데, 봉화 동쪽 마을로 넘어 들어갔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증항 근처로,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넷째는 운봉 행촌이다.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로 이 땅에는 난의 해가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으로 유구 마곡의 두 물골의 둘레가 2백리나 되므로 난을 피할 수 있다.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로 난을 피해 종적을 감출만 하다. 여덟째는 무주 무봉산 동쪽 동방 상동으로 피난 못할 곳이 없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 아래가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 합천 가야산 만수봉으로 그 둘레가 2백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다. 정선현 상원산 계룡봉 역시 난을 피할 만하다.”

십승지지는 『정감록』의 문헌에 따라 위치와 장소가 조금씩 달리 나타나며 추가되기도 하였다.「남격암 산수 십승 보길지지」에는 감결에서 말한 열 곳 외에도 여러 장소가 더해졌다. 그 지역은 모두 태백산과 소백산의 남쪽으로서, 풍기와 영주, 서쪽으로 단양과 영춘, 동쪽으로 봉화와 안동이 보신처라고 하였고, 내포의 비인과 남포, 금오산, 덕유산, 두류산, 조계산, 가야산, 조령, 변산, 월출산, 내장산, 계룡산, 수산, 보미산, 오대산, 상원산, 팔령산, 유량산, 온산 등도 해당 장소로 들었다. 한편 『정감록』의 「서계이선생가장결」에는 “황간 영동 사이에는 가히 만 가호가 살아나고 청주 남쪽과 문의 북쪽 역시 모습을 숨길 수 있다.”고 다시 몇 군데가 추가되었다.

십승지는 전란이 미치지 않아서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오늘날에도 『정감록』에서 지점된 십승지가 모두 지리적으로 내륙의 산간 오지에 위치하며, 한양이나 고을로 이어지는 큰길에 인접하지 않은 것도 그러한 까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계이선생가장결」에 “황간 영동 사이에는 만 가호가 살아나고 청주 남쪽과 문의 북쪽 역시 모습을 숨길 수 있다. 이런 세상을 맞아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베를 짜되 벼슬자리에 오르지 말고 농사짓는데 부지런히 힘씀으로써 스스로 살 길을 버리지 않도록 하라.”는 말의 표현으로 보아서도, 조선시대에 십승지라는 이상향의 담론이 형성된 사회적 배경은 조선 후기에 내외의 전란 및 정치적 혼란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의 이상향은 무릉도원(중국)과 청학동(한국)이라는 아이콘이 대변하듯이 자연경관이 심미적으로 뛰어나고 주거환경이 풍요로운 곳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십승지 이상향 역시 모두 산과 하천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승지의 장소성을 이루는 기본적 요소는 취락을 이루어 농경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서, 토지의 규모, 토양의 비옥도 및 생산성, 수자원 이용의 충족성, 온화한 기후 조건이 갖춰진 곳이었다.

십승지는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수원(水源)이 충분하며, 오랫동안 농경을 통한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제적 환경조건도 요구되었다. 풍수적인 명당길지도 요청되는 조건 중의 하나였다. 풍수는 십승지 입지경관의 규정 및 공간적인 이데올로기로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사실은 십승지가 대체로 풍수가 좋은 배산임수의 자연 입지조건을 지니고 있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십승지 관념은 청학동 이상향 관념과도 결합하였다. 『정감록』에서 십승지로 지점된 위치에서 지리산 청학동은 원래 포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와 근대에 이르러 청학동과 십승지의 장소이미지가 상호 결합하여 ‘십승지 청학동’이라는 장소성을 이루게 되었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지리산 중에는 청학동이 있는데 십승지의 하나라고 한다.”(『頭流山遊錄』)거나, “청학동은 세상 사람들이 신선의 고향이니 십승지지니 하여 널리 전하던 바이라”(『개벽』 제34호, 1923년 4월 1일)는 표현이 당시의 사회적 인식을 잘 말해준다.


현황


십승지지 중에서 풍기 금계촌은 문헌에 첫 번째로 등장하여 정감록 비결을 믿는 민간인들의 거주지 정착과 인구 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풍기에서도 소백산 아래의 금계동, 욱금동, 삼가동은 풍기 승지의 대표적인 장소로 꼽혔다. 1959년 기준의 조사연구에 의하면, 풍기로 전입한 주민들의 이주동기 중에 8%가 정감록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주한 주민들은 대부분이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풍기읍 중심지에서 정착하여 인삼과 과수를 재배하거나 소백산 기슭에서 밭농사를 하며 은둔하는 부류들이 있었다. 풍기에는 근래까지만 해도 후손들이 살았는데, 그 중 풍기의 십승지를 필사한 그림지도를 소장하고 있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지리산지의 십승지는 운봉 두류산(「감결」), 혹은 운봉 행촌(「감결」 십승지지), 혹은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 100리 안(「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운봉에 있다는 지리산 십승지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유교 지식인들과 지리산 주변에 거주하는 지역민들 사이에도 관심을 끌었던 것 같다.

“운봉 두류산 아래에 동점촌이 있는데, 100리 내에 영구히 거주할 만하지만 그 곳을 모른다. 근래에 운봉 사람 곽재영이 비로소 찾았는데 말하기를 읍에서 거리는 25리이고, 지리산 반야봉 괘협처(掛峽處)이며, 석벽의 높이가 몇 길이나 되는데 동점(銅店)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놓았다고 한다. 글자의 획이 어지러이 소멸되어 분간하기 어려운데 예전에 구리를 제련하던 곳이다. 그렇기에 근방에 돌을 파내고 구리광을 캐는 흔적이 많다. 동점촌은 그 가운데에 있는데 평탄하지만 가운데에 앉아 있으면 사방이 보이지 않고 주위가 제법 넓다. 30, 40호가 거주할 만한 농경지이다.”

십승지지 중에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대덕산 지역으로 거론된 내용은 「감결」 외에도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가 있다. 여기서, “무주 무풍 북쪽 동굴 옆의 음지이니 덕유산은 난리를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고 구체적인 장소를 기록하면서도 덕유산 전체를 난리를 피하여 몸을 보전하는 승지로서 공간적 영역이 확대되어 표현되어 있다. 정감록의 「감결」이나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에서 말한 무풍은 현재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의 영역이다.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삼도봉 자락에 둘러싸인 무풍은 조선시대의 도로 교통 조건에서 큰 길과 떨어져 있어 지리적 오지에 위치하고 있으나 큰 하천을 끼고 있고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 지형을 갖추고 있다.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말하기를, “남사고(南師古)는 무풍을 복지(福地)라 하였다. 골 바깥쪽은 온 산에 밭이 기름져서 넉넉하게 사는 마을이 많으니, 이 점은 속리산 이북의 산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상적인 주거지의 위치와 모습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사회적으로 재구성된다. 십승지지는 조선 후기 민간인의 이상향 담론이었다. 그들은 십승지로 지목된 곳을 찾아 삶터를 개척하고, 미래의 희망을 꿈꾸며 생활을 일구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가치의 지배로 생태환경의 위기와 거주의 진정성이 위협받는 사회 현실에서, 승지의 문화전통과 생활사의 의미를 돌이켜볼 가치가 있다.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십승지지 [十勝之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십승지 (十勝地)는 《정감록》에 등장하는 지명을 말한다.


신명(神明)이 거처(居處) 또는 강림하는 곳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져서 단·묘·사(祠 또는 社)·전·궁(宮)·각(閣) 등으로 불린다. 이런 곳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신비성을 띤 별천지가 된다. 이러한 인위적인 처소가 아니고 자연상태의 한 지역이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는 데가 있는데 십승지(十勝地)가 그런 거룩한 곳으로 신앙되고 있다.


십승지는 풍기의 금계촌(金鷄村), 봉화의 춘양면(春陽面), 보은의 속리산, 운봉(雲峰)의 두류산(頭流山), 예천의 금당동(金堂洞),공주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 영월의 정동상류(正東上流), 무주의 무풍동(茂豊洞), 부안의 변산(邊山), 성주의 만수동(萬壽洞)이 꼽힌다. 이러한 곳들은 굶주림이나 싸움 등의 염려가 없고 세상의 여러 재앙 질병이 침범하지 못하는 피난처이며 자손이 창성하는 곳으로 생각되는 지역이다.


『조선의 유토피아 십승지를 걷다』

지은이: 남민 펴낸이: 오운영 펴낸곳: 믹스커피


<정감록>에서 말하고 있는 십승지는 그 장소가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정감록>의 정본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십승지가 어디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직접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한 후에 <정감록>에서 말하는 10곳을 찾아내는 수고를 한 지은이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1. 영주 풍기 금계촌으로 소백산 아래 두 물길 사이에 있다.

2. 봉화 화산 소령은 소라국 옛터로 내성현의 동쪽 태백산 아래 춘양면에 있다.

3. 보은 속리산 증항 근처로 난리를 당해도 몸을 숨기면 다치지 않는다. 그러나 대를 이어 몸을 보전할 곳은 못된다.

4. 남원 운봉 두류산(지리산) 아래 동점촌 100리 안은 여구 보신할 만한 땅이다.

5. 예천 금당동 북쪽은 비록 주변 산이 낮아 드러나 보이지만 전란의 화가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어가가 다다르면 그렇지 못하다.

6. 공주 유구·마곡 두 물길 사이는 100리에 걸쳐 살육을 면할 수 있다.

7. 영월 정동 쪽 상류는 난리에 몸을 숨길만 하나 수염이 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드러하지 못하다.

8. 무주 무풍 북쪽 땅 주변은 덕유산에 가려 위난을 못 피할리가 없다.

9. 부안 호암 아래 변산의 동쪽이 몸을 숨기기에 가장 좋으나 탐라가 다른 나라 땅이 되면 그렇지 못하다. 이 땅은 변산의 동쪽에 있어 난리 때 더 동쪽으로 가면 안된다.

10. 합천 가야산 아래 남쪽 만수동이 있는데, 주위 200리 안은 보신할 수 있으나 동북쪽은 그러하지 못하다.

​이런 10곳을 십승지라 한다. 지은이가 직접 찾아가 확인한 결과 거의 맞는 것으로 확신한다.


전국 십승지 위치 지도



산경표를 표시한 대동여지도


정감록의 형식과 사상


●[정감록의 형식]

정감록의 형식에 있어서는 예언설·참요(讖謠_ 정치적 징후를 암시하는 민요)·역수(易數)의 풀이나 풍수지리설에 의한 해석 등이 다양하게 서술되어 있다.

●[정감록의 사상]

사상에 있어서는 유교의 외도(外道)나 도교(道敎) 및 참위설(讖緯說), 음양오행설의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정감록 요약]

요약하면 정감록은 지리도참사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풍수지리는 지리에 길흉화복만 따지는 반면 지리도참사상은 풍수지리에 미래에 일어날 도참(圖讖)까지 결합된것이다.

지리도참사상(地理圖讖思想)은 통일 신라 후기에 도선(道詵) 국사가 제창한 사상이다. 인문 지리적인 인식과 예언적인 도참 신앙이 결합된 학설로 지리는 곳에 따라 쇠왕과 순역이 있기 때문에 왕처와 순처를 택하여 살 것을 주장한다.


●[정감록의 저술시기]


정감록의 저술연대는 지리도참사상을 제창한 신라말 고려초 도선국사의 도선비기와 연결되어 있다는 설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성립된것이라는 두가지 학설 외에도 고구려시대에 써졌다는 설 등이 공존한다.

[도선국사 시기 설]

도선국사시대로 보는 이론은 이렇다. 정감록 내용 중에 "평양은 이미 천년운수가 지나 송악으로 옮겨졌다. 송악은 오백년 도읍을 할 땅이지만 요승과 궁녀가 난을 꾸며 지기가 쇠하고 천운이 막혀 운은 다시 한양으로 옮길것이다"는 내용에서는 고려의 건국과 조선의 건국에 대한 예언을 담고있다.

또한 "삼각산을 규봉으로 백악을 주산으로 한강을 요대로 삼고 계략산을 청룡, 안현산을 백호, 관악산을 조산, 목면산을 남산으로 삼을것이다"라는 내용에서도 조선의 수도 한양의 풍수지리를 예언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싯점이 조선시대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임진, 병자호란 시기 설]

임진, 병자호란 시기에 쓰여졌다는 논리는 이렇다.

첫째, ‘도선’의 저작이기 위해서는 고려와 이조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 나타나 있어야 함에도 고려 4백년을 껑충 뛰어 넘어 이조 5백년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둘째, 지명고적관점(地名考的觀點)에서 조선시대에 바뀐 지명이 많이 나타난다.

셋째 세조·성종 때의 분서목(焚書目)에 정감록이 보이지 않는다.

넷째 인조실록에 있는 ‘초포조입계룡건도(草浦潮入鷄龍建都)’라는 문구에 정감록의 계룡산천도설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 등이다.


[드러나는 십승지(十勝地)의 비밀]


정감록에서는 십승지를 십승지지라고 표현하였다. 


십승지지의 뜻


●[십승지를 언급한 문헌들]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언급하는 옛 책은 정감록(鄭鑑錄), 택리지(擇里志),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등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민중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것은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지가 가장 유명하다.

십승지지는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10곳의 땅으로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 하여 흉년, 전염병, 전쟁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란 뜻이다.

●[십승지 출현의 배경]

십승지지는 조선중/후기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민간인들의 경제적 피폐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났다. 


불교의 극락과 정토, 기독교의 천국과 에덴동산, 도교의 무릉도원 등은 사후 아니면 관념적인 이상 세계를 일컫는 말이고, 현실의 이상향을 표현한 말로서도 길지(吉地), 낙토(樂土), 복지(福地), 명당(明堂), 가거지(可居地), 승지(勝地) 등의 용어가 있다.

승지는 사전적으로는 자연 경관과 거주 환경이 뛰어난 장소를 말하지만, 역사적으로 조선 중․후기의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피폐로 말미암아, 개인의 안위를 보전하며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피난지를 뜻하였다. 정감록에서는 십승지지라고 표현하였다.


●십승지지의 공통적인 특징


가장먼저 풍수지리를 따졌다. 풍수지리학적으로는 (간룡) 대부분 백두대간상에 위치하여 북쪽 오랑캐와 해안 왜구의 침입에서 비교적 안전하고

(장풍) 높은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 분지형(준고냉지 400-600m 이상)으나 너른 평야가 있어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득수) 물이 풍부하고 수구가 잘여며져 있어

(정혈) 밖에서 잘보이지 않는 터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산도 높고 물도 풍부하고 수구가 잘 여며졌다고 하는 것은 소위 명당의 조건을 잘 갖춘 곳이라 할만하다.


●이중환의 택리지의 가거지 4요소


이중환 택리지 가거지 4요소로 살펴보면

(지리) 지리적으로 높은 산에 둘러쌓여 있고 수구가 외부에서 보이지 않아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아 외침이 없다.

(생리)자급자족이 가능한 비옥한 토양과 너른 평야가 있고, 조선의 9로와 멀리 떨어져 있거나 가깝게 통과하더라도 비껴지난다.

(인심)정치적인 침해가 없고 재해가 없고 물산도 풍부해 인심이 박하지 않다. 간혹 암행어사 박문수의 무주구천동 이야기처럼 부조리한 면도 있으나 조선중/후기에 들어가면서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많아져 다양한 문화와 씨족이 공존한다.

(산수)대부분 물이 풍부한 깊은 산골이라 산수가 뛰어나다.


●십승지는 어디인가?


정감록의 십승지만 있는것이 아니다. 정감록 외의 문헌들을 분석해보자.


●정감록 외의 문헌에서 말한 십승지


정감록에서 다룬 십승지를 알아보기 전에 여러 감결류 책에서 다룬 십승지를 먼저 살펴본다. 비슷비슷하면서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의 십승지]

십승지의 원조라고 까지 평가받는 격암 남사고(1509∼1571)가 제시한 십승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충청도 공주의 유구와 마곡

2. 전라도 무주의 무풍

3. 충청도 보은의 속리산(경북 상주의 화북면)

4. 전라도 부안의 변산

5. 경상도 성주의 만수동(합천 가야산 만수동)

6. 경상도 봉화의 춘양

7. 경상도 예천 용문의 금당곡

8. 강원도 영월의 정동쪽 상류

9. 전라도 남원 운봉의 두류산(지리산)

10.경상도 풍기의 기천(基川) 차암(車岩) 금계촌(金鷄村)


[기타 문헌들이 이야기하는 십승지]

십승지는 언급된 자료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다음과 같은 곳들이 자주 언급되는 후보지이다. 현재는 소재가 불분명한 지명들도 많다.

-경상북도 풍기(豊基) 기천(基川) 차암(車岩) 금계촌(金鷄村)

-경상북도 안동(安東) 화곡(華谷) 봉화(奉化) 화산(花山) 소령(召嶺) 고기(古基)

-경상북도 개령(開寧) 용궁(龍宮)

-경상북도 예천(醴泉) 금당실(金塘室)

-경상남도 합천(陜川) 가야(伽倻) 만수동(萬壽洞) 

-경상북도 성주(星州)

-충청북도 진천(鎭川) 목천(木川)

-충청북도 단춘(丹春) 단양(丹陽) 가차촌(駕次村)

-충청북도 보은(報恩) 속리산 사증항(四甑項)

-충청남도 공주(公州) 정산(定山) 마곡(麻谷)

-전라북도 운봉(雲峰) 두류산(頭流山) 동점촌(銅店村), 행촌(杏村)

-전라북도 부안(扶安) 변산(邊山) 호암(壺岩)

-전라북도 무풍(茂豊) 무주(茂朱) 무봉산(舞鳳山) 동방(銅傍) 상동(相洞)

-강원도 영월(寧越) 정동쪽 상류지역

-강원도 정선(旌善) 상원산(上元山) 계룡봉(鷄龍峰)


정감록에서 말한 십승지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정감록에서 밝힌 십승지지는 어디인가? 정감록 감결에서 정감(鄭鑑)이 언급하는 십승지와 이심(李沁)이 이야기하는 십승지는 보는 시각은 비슷하나 위치는 약간 다르다.

[이심의 십승지]


이심은 십승지를 1.풍기(금계) 예천(금당) 2.안동의 화곡(화산의 북쪽, 내성현의 동쪽, 태백산의 양지바른곳) 3.개령의 용궁(개령현은 김천의 옛지명, 신라때 무풍이 개령현이었음) 4.가야 5.단춘(단양(丹陽)군의 영춘(永春) 또는 단양의 가차촌_駕次村_ 단성면 장회리 일대) 6.공주 정산 마곡(공주의 유구와 마곡 두 물줄기 사이) 7.진천의 목천 8.봉화 9.운봉 두류산(지리산) 10.태백을 언급한다. 

[정감의 십승지]

한편 정감이 이야기하는 십승지는 아래와 같다.

1. 십승지 중 1번지라 할 수 있는 경상도 풍기의 차암 금계촌 동쪽 골짜기로 소백산 두물길 사이(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금계 중학교 부근 수구 위쪽의 금계리, 욱금리, 삼가리 일대. 문경세재 통행량이 많지 않을때 이야기 인듯. 이 王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고 함.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 봉화까지 피난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함)

2. 한국의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봉화 춘양. 화산(花山)의 소라고기(召羅古基_옛 부족국가 소라국 이름)(봉화군 서벽면 서벽리, 도심리, 의양리)

3. 몸을 숨기기에 좋다는 충청도 보은의 속리산 네 시루목이 연결된 곳으로 속리산 아래 증항(蒸項) 근처(증항은 충북 보은군 마로면과 경북 상주시 화남면의 경계가 되는 시루봉(甑峯) 아래 지역으로 유추하지만, 인접한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중 청화산을 중심으로 남쪽 지역이 유력)

4. 흥부와 놀부의 실존인물이 살았다는 전라도 남원의 운봉행촌(전북 남원시 운봉읍(雲峰邑) 주변 100리, 해발 평균 450m, 진산은 지리산)

5. 인재를 많이 배출한 경상도 예천의 금당실(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이지만 용문면 동쪽 일부를 제외한 면 전체가 십승지에 해당)

6. 두 물줄기의 둘레가 2백리나 되므로 난을 피할 수 있는 ‘천하제일의 땅’이라 불리는 충청도 공주의 계룡산 유구마곡의 두물길 사이(충남 공주시 사곡면 입구의 호계리를 기점으로 위쪽 사곡면 수계와, 유구읍에서 신풍면에 이르는 벌판. 유구읍 인구의 70%가 외지인)

7. 강원도 영월의 정동쪽 상류 또는 단춘으로 태백산맥과 소백산 사이(강원도 영월군 중동면 직동리 일대 또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 주변. 수염없는 사람_승려, 환관, 아이, 여자가 먼저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고 함)

8. 명성황후의 척신도 탐냈다는 전라도 무주 무풍의 무봉산 동쪽 동방산동(라제통문 가까운 수구를 공유하는 전북 무주군 무풍면 일대)

9. 허균의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이상국가 ‘율도국’의 모델로 알려진 전라도 부안의 금바위 아래(전북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 또는 보안면 우동리_청림리는 6.25 전란 피해를 입긴 했으나 부안의 최고의 마을)

10. 그 둘레가 2백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는 경상도 합천의 가야산 만수동(경남 합천군 가야면 구인리, 매안리, 매화리 일대)


●정감록의 폐해 그리고 관련된 사건


십승지지는 조선 중/후기 정치, 사회적 혼란과 민간인들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백성들의 행복한 미래를 보장하는 삶터로 인식되었다. 십승지중 전화를 피하지 못한곳, 많은 이가 가산을 탕진한곳, 인구가 타지역과 비슷하게 줄어든곳, 더이상 십승지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개방된 곳도 많다.

정감록은 현실도피적이고 반왕조적인 내용이라 금서로 지정하였음에도 전쟁과 기근, 정치적 환멸을 느낀 백성들은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피난처를 찾아 나서는 폐해가 많이 발생했다.

정감록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은 아래와 같다. 


-1589년 선조 22년, 계룡산을 근거로 정씨가 일어난다는 정여립 역모사건

-1628년 인조 6년, 정씨 진인이 나타났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북인을 처벌한 사건

-1739년 영조 15년, 평안도, 함경도에 널리 퍼진 정감록을 수거해 불사른 사건

-1783년 정조 6년, 정감록의 유통,열람을 금지한 사건 

-1894년 정감록에 나오는 부적 궁을(弓乙)을 살라먹고 전주성을 공격한 동학군 사건

-1920년대 정감록의 계룡산 천도설을 바탕으로 6백만의 신도를 모집한 보천교 사건

산경표와 대동여지도로 십승지 분석

정감록에서 난세에 풍수도참설에 따라 정해진 피난처(십승지)에서 전쟁, 기아, 전염병으로 부터 안전하다고 언급했다.

많은 문헌에서 언급한 십승지 대상지를 대동여지도에 표시하고 분석했다. 대동여지도상으로는 십승지의 입지에 있어 별다른 공통점이 읽히지 않았다. 조선왕조에 있어 금서에 해당하므로 강조해서 공적인 지도에 표시할 수 없었다는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한양과의 거리와도 무관하고

-조선의 9로에서 멀지도 않고(공주 유구읍/사곡면, 남원 운봉읍)

-백두대간을 따라 십승지가 위치해 있지도 않고(부안 상서면/보안면, 공주 유구읍/사곡면)

-좌우가 잘 여며지게 표현되지도 않았고

-경상도 중심이라고 하지만 오랑캐, 왜놈들의 공격으로 부터 먼 지점이 우선인것은 분명하다.

대동여지도에 새롭게 수정보완해서 십승지 위치를 표시하였다. 십승지 위치를 나의 분석결과대로 변경하고 싶었지만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최대한 모두 표현할려고 노력했다. 두 지역이 함께 표기된것은 두 지역 중간에 연접해 있다는 뜻이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로 십승지 분석


●정감록과 십승지의 현대적 해석과 과제


이제 정감록과 십승지의 마지막 결론이다. 십승지에 대한 일반인들의 기대에 비해 좀 싱겁게 끝나는것 같긴하지만 이렇게 정리를 하는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인것같다.

현대는 국경을 초월하고 공간의 제약이 없어진데다 식량안정도 이루어져 전쟁, 병, 기근으로 부터 어느 정도 안전한 세상이 되었다. 십승지에 대한 현대적인 재해석이 필요한 싯점이다. 

십승지는 이래야한다.

첫째, 풍수지리적으로 높은 산으로 막혀있고 수구가 하나인 독립된 수계라 환경관리에 유리하므로 친환경농업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다.

둘째, 산림이 풍부한 지리적 장점을 살려 산림복합농업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셋째, 십승지귀농귀촌인들의 인큐베이팅 기능을 하는 공간이었으면 한다.

넷째, 십승지는 입지조건이나 환경이 휴양과 치유에 적합하므로 국민의 치유공간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 

다섯째, 한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십승지가 입지해 있으므로 통합브랜드와 협력적 광역네트워크로 현실속에서 이상향을 실현해야한다.

최근 동양대학교 산학협력 십승지 사업단을 중심으로 통합 브랜드를 만들고, 공동의 문화관광사업을 개발하고, 공동마케팅, 협력적 지역개발을 진행중인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제 십승지는 정도령이 와서 구해줄것이라는 허황된 꿈대신 본인들 스스로가 그동안 받아온 국민들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주변부터 유토피아로 만드는 노력을 해갑시다.


자료:[출처] 신경준의 산경표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분석 후 정감록의 십승지의 현대적 해석과 대안제시|작성자 농디쌤


정감록 1승지 경북 풍기 금계마을

                                                풍기 금계마을 전경 


영주시 풍기읍은 북쪽을 지나는 소백산과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하며, 소백산 죽령북쪽으로 단양군과 마구령 북쪽으로 영월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영주시와 예천군과 경계를 이루며, 풍기읍을 흐르는 남원천은 금계리에서 흘러나온 금계천이 합류되어 서천을 이루고, 봉화에서 유입된 내성천과 합류되어 예천군을 흐르다가 낙동강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1541년 주세붕이 소백산에서 자생하는 산삼종자를 채취해 풍기읍 금계동 임실마을에서 재배를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인삼의 발원지로 명성을 알리고 있으며, 금계리는 동으로 교촌리, 서로는 백동, 남으로는 서부리, 북으로는 욱금리와 인접해 있으며, 지형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이라 금계천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금계리는 소백산 자락에 위치하여 산림자원이 풍부하고, 남으로는 농경지와 과수원이 있고, 금계천 주변경관은 소나무와 함께 수려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마을연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는 다른 지역보다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수량도 풍부하고 농지가 광활하여 십승지의 미래적 개념임 안유한락(安裕閒樂)의 자기 충족적 삶을 누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충분히 구비함으로써 활승지(活勝地)로서 가장 으뜸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광여도에 나타난 풍기지역


풍기는 신라시대 기목현으로, 고려시대에는 길주에 속하였으며, 조선시대에 풍기로 명명되었고, 풍기읍은 조선시대에는 풍기군 동부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1914년 동부면에 서부면, 창락면, 와룡면이 합쳐져 풍기읍이 되었습니다.

풍기읍의 지명은 옛 풍기군을 그대로 계승하였고, 1973년 풍기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교촌리는 풍기향교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향교는 본래 금계리에 있었는데,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1453년에 이곳으로 옮기면서 신교촌으로 불리던 동네입니다.

금계리는 옛 풍기군 서부면 구교리이며, 풍기향교가 처음 이 마을에 창건되었다가 1735년 교촌리 현 위치로 이전되었기 때문에 금계리는 구교리로 불리어졌으며, 산재해있는 마을로 임실 안마, 부계발 밭마 쇠바리, 잿밭, 용천동, 공원밑이 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모두 금계1리로 되어 있어 풍기읍에서 가장 큰 마을 중에 하나입니다.

정확한 지명은 영주시 풍기읍 금계1리으로 뒷산에는 유명한 금계바위가 있고 산줄기가 동네는 포근히 감싸안아 마치 금계가 알을 품는 즉 ‘금계포란형’의 명당으로 동네이름도 만들어졌습니다.

금계란 금닭으로서 산 위의 바위들이 마치 닭벼술처럼 생겼다고 해서 만들었는데 일제 강점기 시대에 광석을 캐기 위해서 폭파한 후로 원형을 잃고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고 하며, 이 마을의 이름은 지금은 삼가동이라 하나 옛날에는 금계동이라고 부렀으며, 이곳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10승지지로 100여년 전부터 많은 피난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세계대전이 발생하면 이곳에서 인간의 씨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 곳이기도 하며, 지금도 풍기읍과 그 일대에는 이북 출신의 많은 피난민들이 살기도 한다. 마을의 뒷산에는 닭의 모양과 비슷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가리켜 ‘닭산’ 즉 금계바위라고 부르며, 옛날 이 바위의 가운데 부분에는 많은 금이 묻혀 있었다고 하며 또한 닭의 눈이 되는 부분에는 두 개의 빛나는 보석이 박혀 이 마을을 지켰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동네의 수호신으로 믿어왔고, 그러던 어느날 이곳을 지나던 어떤 나그네가 이 바위에 대해 들은 바가 있어 일확천금을 노리고 가파른 절벽을 간신히 기어 올라가 금계바위에 박힌 보석을 빼려고 했다고 하며, 그 때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덮이기 시작하며 캄캄한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져 이 벼락으로 인해 바위의 일부분이 무너져 내리고 그 나그네는 바위에 깔려 숨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나그네가 빼려고 한 보석은 묻혔는지 간 곳이 없었고, 이러한 일이 있는 후에 이 마을이 차차 가난해지기 시작해 사람이 살기 어려워졌다고 하며, 일제 강점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없어진 보석을 캐내려고 이 마을에 많이 모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바위의 형태도 닭처럼 보이지도 않으며, 다만 그 당시의 일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많은 수정 조각들이 금계 바위 부근에 흩어져 있다고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금계1리

공원산 마을

시내부근의 마을로 옛날 보평대(保平坮)와 제운루(齊雲樓)가 있어 불러진 이름이며 1980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현대화된 가옥이 많습니다.

성주마을

마을 앞 넓은들 가운데 위치한 마을이며 성주들(성뒷들)이라고도 합니다. 그 밖에 구 향교골 등이 있으며 2012년 조성된 개삼터 길이 있는 곳이기도 하며, 주요 생산 농산물은 인삼, 사과, 벼, 도라지, 황기 등을 재배합니다.

●부계밭 마을

부거밭, 부용천 연꽃이 만개한 모양을 칭하여 부르며, 1542년 주세붕 풍기군수가 이곳에 인삼을 심도록 장려하여 처음으로 인삼을 재배 풍기인삼의 시배지가 되었습니다.


부계밭 마을 전경

잿밭 마을(잣밭마을 백전(栢田)

잣밭, 백전 옛날 이곳에 잣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백전이라 부르고 또 낮은 곳에 있는 밭이라 하여 잿밭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일제시대에 금계광산이 호황을 누릴때 주막이 있어 잿밭주막이 유명하였으며 1945년 금계중학교가 설립된 곳입니다.

임실 마을

임실(任實) 또는 연실(蓮實)이라고도 부릅니다.

소발리 마을

소발리(小發里) 만개하지 않은 작은연꽃이라 하여 소발리라 부릅니다.

용천동마을용천사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되고 1943년 저수지를 조성 천동못이라고 부릅니다. 용천동 우측으로 1시간 가량 올라가면 흡사 닭의 벼슬이 두개로 보이는 금계바위가 나옵니다.

금계2리

장성 마을

금선정 마을

자료: http://www.geumgye.kr/bbs/content.php?co_id=first0101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의 재발견] 1. 십승지로의 출발

경북일보 김정모기자 2016년 6월6일


불확실성의 시대 三災 없는 '한국판 유토피아' 재조명


                        전라도 길지로 꼽히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전경


인류역사상 가장 풍요롭다는 현대사회가 결핍이 화두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해 인공지능(AI) 알파고까지 나오는 과학기술 시대이지만 확실한 게 하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다. 재난, 전염병, 경제공황이라는 현대판 삼재(三災)는 주기적으로 발생한다. 헬조선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삼재와 버금가는 현상이 일상사다. 한국인의 행복한 삶은 불가능한가. 난세(亂世)에 살아갈 대안은 무엇인가. 그 공간을 탐색하기 위해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의 재발견'을 연재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했던가. 한국판 유토피아 십승지(十勝地)를 말한 '정감록(鄭鑑錄)'만큼 오랫동안 관심 받은 것도 드물다.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73년 안춘근의 '정감록 집성'이, 80년대엔 현대어로 출간한 정감록이 나왔다. 풍수전문가 최어중(崔於中) 씨는 '정감록'에 따라 전국의 십승지를 답사해보고 99년 '십승지풍수기행'을 펴냈다. 공산체제의 대세가 무너진 91년 이후에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여전히 읽혀지는 것처럼 정감록은 현대인의 심연에 강하게 남아있다. 

정감록은 무엇일까. 정감이 이심, 이연 형제와 함께 조선의 산천을 둘러본 뒤 금강산에서 조선의 국운과 미래를 예언하고 문답을 나눈 것을 기록한 것이라는 설이다. 정감록은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베스트셀러이자 정치·종교운동의 모태다. 풍수지리설, 후천개벽(後先開闢)설, 주역을 내용으로 하는 변혁과 전환의 사상을 담았다. 말세관 전염병 전쟁 흉년 환란 이야기와 '새 하늘 새 땅'이 미륵신앙, 재림예수의 신앙과 유사하다. 조선의 통치이데올로기였던 유학이 추락하면서 성리학질서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다.


조선왕조 몰락을 예언해 금서(禁書)로 지정됐으나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는 잠재울 수 없었다. 새 왕조 개창을 바라는 민중의 염원이자 일제로부터 광복을 바라는 희망이었기 때문. 그 새 시대를 열 영웅은 '정성진인(鄭性眞人)'이다. 정씨성을 가진 진인, 이른바 정도령은 민중의 구세주이자 후천세계의 개창자다. 새로운 정치를 내걸었다가 비명에 간 사람들 중에 정몽주 정도전 정여립 정희량 등 정씨가 많다는 것이 이채롭다.


정감록은 역성혁명의 근거가 됐다. 1589년(선조) 정여립은 "木子가 망하고 奠邑(전읍)이 일어난다"는 노랫말을 퍼뜨려 역모(逆謀)사건으로 비화했다. 목자는 李고, 奠邑은 鄭이다. 혁명아 허균사건으로 몰락한 북인계 윤운구는 1628년(인조) "진인(허의의 아들)이 났으므로 새나라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을 전라도에 퍼뜨려 유배됐다. 신유박해 무렵 김조순의 일족인 김건순(金健淳)은 정감록을 끼고 다니고 주문모 신부에게 청(淸)을 쳐 병자호란의 원한을 씻어보자고 했다가 처형됐다. 조선왕조는 입에 담기조차도 싫은 정감록을 드디어 1739년 실록에 기록했다. "평안도 함경도지방에 정감의 참위(讖緯)한 글이 서로 널리 전했다"고. 

한국인은 옛 고구려의 영광에 대해 그리워한다. 이탈리아의 옛 로마 영광에 대한 부활의식을 무솔리니가 점화했듯이, 정감록은 미래의 한민족의 영광을 이야기했다. 일제도 정감록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세기부터 필사본으로 나돌든 정감록을 일본 신문기자 호소이가 1923년에 처음 활자화(정감록비결집록)해 대중화했다. 총독부 학무과에서 수집정리한 정감록을 기초로 한국연구가 아유가이가 필사본으로 펴낸 정감록(감결, 1913)을 배껴서 출간 한 것. 아유가이는 민비(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참여하고 러일전쟁 공로로 경부철도 부설 이권으로 떼돈을 번 행운아(?)다. 

정감록의 '정'은 정씨를, '감'은 천도(天道)와 풍수지리를, '록'은 계시록 같은 예언서를 뜻한다. 정확한 저자와 집필연도를 알 수 없으며 어느 게 정본(正本)인지도 희미하다. 문구도 알쏭달쏭하고 두루 뭉실하다. 전문가들은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16세기 말 ~ 17세기에 완성됐다고 본다. 저자로는 중국 촉(蜀)나라의 도인 정감(鄭鑑), 정도전 등이 꼽히지만 증거가 없다. 

정감록은 감결, 삼한산림비기, 무학비결, 도선비결, 남사고비결, 토정가장비결, 삼도봉시 등 신라 고려의 예언 전통을 담은 비기(秘記)들이 망라됐다. 민족의 오래된 지혜라고도 할 수 있다. 동학 증산도 원불교 등 신종교가 여기서 파생됐다. 1894년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새 세상을 내건 동학혁명 때다. 전봉준은 구름떼같이 몰려든 동학도들에게 정감록에 나오는 '궁을(弓乙)'을 부적으로 만들어 불살라 먹게 했다. 그만큼 정감록을 신앙했다. 우연이겠지만 다음날 농민군은 전라도 감영이 있는 전주성을 함락했다.

조선 후기는 외적의 침입, 민란과 함께 염병(장티푸스)이나 호열자(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창궐했다. 서민들은 잦은 가뭄과 흉년으로 초근목피도 어려운 데다 탐관오리들의 착취와 수탈이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다.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1894~97년 조선에 머무르면서 조선관료의 수탈을 흡혈귀로 표현할 정도다. 

정감록이 왕조 교체뿐 아니라 기독교 최후의 심판 같은 삼재(三災), 즉 전쟁이나 기근이나 전염병의 위기에 안락하고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를 거론했다. 승지(勝地)는 이상적인 명당이요 길지. 중국은 이를 동천(洞天) 또는 복지(福地)라고 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에덴동산이요 중원의 무릉도원인 셈이다. 대를 이어살만한 새 땅을 가리키자 민중은 환호했다. 이 십승지는 전국에서 뉴프론티어 정신으로 이주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영국인들이 새 땅을 찾아 신대륙에 뉴잉글랜드를 만들었듯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는 '공화국', '도농 순환', '6시간 노동' 등 법과 제도로 이상을 그렸지만 한국의 십승지는 '진인'이라는 영웅과 '승지'라는 자연에서 찾았다. 20세기말에 와서야 대두한 문명보다는 자연을 찾는 포스트모더니즘보다 수 백년 앞서 한국인들은 승지를 찾아 나섰다. 오히려 현대 한국인들이 농경시대 정착의식에 매여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산다. 해마다 (갔다가 되돌아오지만)세계 인구 10억 명이 이동하는 시대에. 

그럼 십승지는 어디인가. 서양 최대의 예언가라는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에 버금가는 격암(格巖)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가장 정확하게 정감록 십승지를 표현했다. 정감록과 남사고의 십승지는 대부분 겹친다. 

영주시 풍기 금계촌, 예천군 금당실, 봉화군 춘양, 속리산 우복동, 개령의 용궁. 합천군 가야산 만수동, 공주시의 유구-마곡, 남원군 운봉, 무주군 무풍, 부안군 호암아래 변산, 태백산, 영월군 연하리 등 태백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에 접한 곳이다. 이외에도 '택리지' '남격암' '두사충비결' '피장처' 등이 추천하는 명당은 삼척, 울진, 평해, 청송 진보의 보미산, 문경, 영양군 수비, 구미 금오산, 하동, 함양, 정선, 산청, 영종도, 영천, 승주, 구례, 양주, 강화, 포천, 곡산 등등이다. 21세기 현대인들이 봐도 귀촌 귀농지역으로 선호하는 이상향이다. 


오늘날은 어디가 좋은 땅일까. 1751년 이중환이 편찬한 '택리지' '복거총론(卜居總論)'은 백성들이 살 만한 곳을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네 가지 기준으로 골랐다. 오늘날도 유효하지만 비결서에서 가리키는 승지를 현대의 눈으로 재조명이 필요하다.

본 연재물은 정신적 물질적 결핍 때문에 이민이라도 가고 싶은 도시인들을 위해 힐링처(healing處)로 눈여겨 볼만한 땅을 찾는 작업이다. 생태와 생명의 땅을 찾아 인생 반전(反轉)을 노리는 사람들이 개척지로 삼거나 최소한 마음속에 두고 가끔은 찾을 수 있는 곳 말이다. 영국의 존 오키프 교수는 '장소세포(place cell)'를 발견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생쥐도 장소마다 다른 신경세포가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장소 기억은 지도처럼 뇌 속의 장소 세포에 저장되어 반응한다는 것이다. 사람과 장소와의 함수관계는 훨씬 심오하고 신비로울 것이다. 보배로운 땅, 희망이 될 땅, 그 승지를 한 곳씩 찾아 나선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http://www.kyongbuk.co.kr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4. 문경시

경북일보 김정모기자 2016년 6월 27일


세상이 어지러울 때 찾으면 안녕 도모할 수 있는 힐링 안식처

                        주변이 높은 간으로 둘러싸인 문경읍 고요리 마을 전경


경상북도 문경은 산세가 수려하다. 첩첩산중이다 보니 자연적인 방어요새다. 고려 공민왕이 몽진(蒙塵)할 때 문경의 조령을 넘어서야 안심 했을 것이다. 10만여 홍건적에 의해 개경이 함락된 1361년 11월, 파주 충추 문경 예천을 거쳐 안동에서 두어 달 간 임시 조정을 경영했다. 문경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 찾으면 안녕을 도모할 수 있는 곳이 아닐까? 

그렇다고 문경이 가기 험난한 두메산골이 아니다. 문경 부근은 남한 땅의 중심이다. 산림청에 의하면 황장산은 휴전선 이남 백두대간의 중심이란다. 중부내륙고속도로(문경새재IC)로 길이 훤하게 뚫려 있다. 중부내륙선철도(서울-이천-충주-문경) 문경구간이 2021년 완공 되면 승용차 없이도 서울과 한 시간 이내의 거리다.


                     가은읍 갈전리에서 본 안산격인 아름다운 산


그 중에서 문경시 문경읍 고요리, 요성리는 정감록의 십승지에는 들지 못하나 귀촌이나 힐링의 땅으로 손색이 없다. 가보면 살고 싶은 땅이다. 신(新)십승지라고 할 수 있다. 새재IC에서 8km(12분), 곧 생실 문경철도역(마원리)에서는 6km(10분)거리다. 조선시대 원(院)이 있던 마원리는 신유박해를 피해 충청도에서 모여든 기독교 신자들이 살던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 30여명이 순교한 카톨릭 성지. 


고요리는 사방이 명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백두대간의 대미산(1,115m)에서 분기(分岐)하여 운달산(1,100m)을 거쳐 뻗어 내려오는 운달지맥의 단산(959m)을 주산으로 마을 앞에는 조령천 상류가 되는 맑은 신북천이 흐른다. 단산의 용맥이 힘 있게 내려오고 하천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이다.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남향촌이 아니지만 지세가 넓어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도 집을 지을 수 있는 곳이다. 


고요리에는 현재 골프장과 리조트, 이국적인 풍광을 연출하는 펜션촌으로 머무르는 관광촌이 됐다. 문경시에서 운영하는 문경리조트가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산북면과 문경읍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단산 정상의 활공장에는 패러글라이딩 동호인들이 모여들고 있다.

앞으로 문경시에서는 고요리를 한국의 힐링처로 개발할 계획이다. 문경천문대가 설치된 단산 정상까지 쉽게 오를 수 있는 모노레일, 아리랑마을, 단산 700m 둘레길 등을 계획하고 있다. 문경시는 문경새재아리랑과 국보급 아리랑 대장경을 보유한 아리랑 중심도시다. 고윤환 문경시장은 문경을 세계적 관광도시로 키워 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구상을 하고 있다.


                                           가은읍 갈전리


‘하늘을 비추는 촛불명당’ 이란 뜻의 ‘조천납촉(照天蠟燭)’ 등 문경은 곳곳에 명당자리가 산재해 있다고 풍수지리학 석사인 이호준 문경시 문화예술회관장은 설명했다. 

임진왜란 때 명군의 책사로 온 두사충은 두보의 후손으로 명(明)나라의 풍수지리 대가다. 명군과 일본군은 조선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 이 때 귀국하지 않고 귀화한 사람이 왜장 김충선과 명군의 두사충이다. 

임진왜란 시 명나라가 일본군에게 대패한 것이 벽제관전투다. 이여송이 패전한 책임으로 자신의 지리참모 두사충을 참수 하려고 하자 당시 우의정 약포 정탁(鄭琢 1526-1605)의 구명으로 두사충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성재권 대구한의대 풍수학 외래교수의 전언이다. 두사충은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가은읍 갈전리(아호동)에 약포의 집터를 잡아준다. 정탁 같은 정승이 세사람 더 나올 땅이라는 것. 약포는 이 집터를 보려고 평복에 하인 한 명만 데리고 문경새재를 넘던 중 주막에서 “백성들은 앞으로 약포 대감집 짓는 부역에 큰 곤욕을 치를 것”이라는 민심을 귀동냥하게 됐다. 약포는 단념하고 한양으로 되돌아갔다가 은퇴후 고향 예천 고평리에 초옥을 짓고 살았다. 

두사충이 지목한 문경시 동로면(적성리 및 생달리) ‘연주패옥(蓮珠佩玉)형’의 명당. 정탁에 대한 보은으로 신후지(身後地, 살아있을 때 미리 잡아둔 묏자리)로 정탁의 종에게 알려주었다. 옥녀가 화장을 하기 위하여 거울을 보며 목걸이를 벗어놓은 형세를 말하는 연주패옥은 조선의 팔대명당 중 하나라고 전하는 음택 명당. 후일 그 종이 반송 부근에 와 정탁의 아들에게 명당을 가리키며 신후지지를 말하려는 순간 타고 온 말이 갑자기 뒷발질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천하의 명당을 잃게 된 아들은 말의 목을 베어 묻었다고 하는 곳(동로면 적성리 965번지)에 노송과 말무덤(馬塚)이 있다. 

문경에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출생한 가은읍 일대에도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힌다. 귀농 귀촌 인구가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일제 강점기 광산이 개발됐고 한 때 인구가 2만2천여명까지 이르렀으나 현재 2천176명이다. 1994년도 폐광한 은성광업소 부지에 건립된 석탄박물관은 석탄산업사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영강을 따라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고 농사를 지을 수 잇는 기름진 옥토가 널려있다. 특산물로는 벼, 사과, 표고, 감식초, 칡즙, 방짜유기가 유명하다. 운강 이강년선생 기념관, 견훤유적지, 봉암사 등 역사, 문화적 관광지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문경에는 조령과 함께 하늘재(계립령, 鷄立嶺)가 있다.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로 넘어가는 고개(높이 525m)로 명승 제49호. 포암산(베바우산,963m)과 탄향산(851m) 사이다. 156년 때 신라의 아달라 왕(이사금)이 북진을 위해 개척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두대간 고갯길이다. 2년 뒤인 158년에 뚫은 고갯길이 풍기 죽령(대재,689m). 하늘재 부근에서 신라와 고구려는 기나긴 전쟁을 벌였다. 조선 태종 때 새재길이 열리기 이전에는 하늘재와 죽령은 거점 교통로였다. 임진왜란 이후 새재에 방어를 위한 관문을 설치하면서 새재길은 동남으로 가는 제1의 도로가 됐다. 


하늘재는 신라 경순왕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패망의 한을 품고 하늘재를 넘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마의태자는 하늘재를 넘어 미륵리 분지에 미륵사를 창건했다. 신라의 차기 왕인 마의태자가 935년 부왕(경순왕)이 나라를 왕건에게 바친 것에 반대해 금강산으로 가던 중 꿈에 관세음보살로부터 석불을 세우라는 계시를 받았다. 하늘재를 넘자마자 나오는 중원미륵사지(사적 제317호)에 오층석탑(보물 제 95호), 석불입상(보물 제 96호)이 그 전설을 머금고 있다.

하늘재 길 양쪽에는 전나무, 굴참나무, 상수리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미륵리 쪽에서 하늘재로 오르는 길은 숲길이다. 숲 속의 지저귀는 새소리는 삶을 노래하는 듯이 들린다. 

아름다운 하늘재 가는 길을 걸으면 마음이 절로 붙잡힌다. 여름산은 정말 활력이 넘친다. 산에서 나오는 좋은 공기를 마시며 심연이 정화되는 힐링처다. 산록의 푸르름은 보노라면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계관시인 테니슨 의 라는 시에 나오는 여름 ‘Rich’처럼 풍부함을 실감한다. 

문경 관음에서 충주 미륵으로 가는 하늘재 길은 현생에서 내세로 가는 길이다. 관음은 관세음보살을 굳게 믿으며 현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신앙.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 본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불자들에게는 “죽어 천국, 살아 행복”이다. 나무 아미타불은 “(극락세계를 담당하는)아미타 부처님께 귀의(의지)합니다”, 즉 “미래에 극락세계로 가게 해 주세요” 라는 뜻이고, 관세음보살은 “현재 괴로움을 없애주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소서”라는 뜻이다.


하늘재는 마의태자에게 망국의 한을 씹으며 잃어버린 설움을 달래는 길이었지만 현대의 도보 여행객들은 인생을 반추해볼 수 있는 사색의 길이다. 하늘재는 스페인 산티아고 길처럼 세계의 도보여행자들이 찾아오는 명품 도보여행 콘텐츠로 만들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충주시와 문경시가 공동으로 개발하면 지역 경제에 파급은 덤으로 일어날 것이다. 정기조 여행 작가는 “계립(鷄立)이라는 글자를 뜯어보면 계림(신라)을 세웠다(立)는 의미인 같다. 하늘재는 아름다운 역사 문화자원도 있고 숲길, 풍광, 자연, 생태적인 부분들까지 한꺼번에 향유할 수 있는 한국판 산티아고 길”이라고 말했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http://www.kyongbuk.co.kr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5. 상주 우복동

경북일보 김정모기자 2016년 7월 4일



수려한 경관·농경지 갖춰 먹을거리·힐링 꿈꾸는 이상향


                            운무로 뒤덮인 상주시 화북면 전경


속리산(俗離山)은 이름 그대로 속세를 떠나는 곳이다. 속리산 아래 골골은 하나같이 힐링처다. 승지로 꼽히는 이른바 ‘우복동(牛腹洞, 경샹북도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으로 들어가는 입구 시루봉 아래 큰 바위엔 ‘洞天(동천)’이라는 새김글이 아주 힘차게 갈겨져있다. 전투에서 용맹한 장수의 칼놀림이 연상된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로 시작하는 시조를 읊은 양사언의 행서체라고도하고 도장산 심원사 수도승 개운의 글씨라고도 한다. 누가 이곳이 십승지임을 만천하에 밝히고 싶어 만든 암각서임에 틀림없다. 동천은 한국의 이상적인 명당촌인 승지(勝地)의 중국식 명칭이다. 대를 이어 살만한 새 땅을 의미함은 같다. 

명촌이 있는 곳에 명산은 필수인 법이다. 속리산은 백두대간의 허리이자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에 걸쳐있는 한국의 명산. 경북도에서 추진하는 한반도허리경제권에서 말하는 허리는 속리산 부근이라고 볼 수 있다. 경북도, 충북도, 대전시, 충남도, 강원도, 전북도를 비롯한 7개 시·도는 정책협의회를 창립하고 상생협력과 공동발전을 위해 손을 맞잡았다. 


속리산 주봉 청황봉은 Y자 형태의 2개의 정맥을 낳는 분기점이다. 청황봉에서 충청북도 청주와 충주를 가로지르며 안성의 칠장산까지 이어져 남한강과 금강의 분수산맥을 이룬다. 칠장산에서 하나는 서북쪽으로 수원을 거쳐 김포시 문수산까지의 한남정맥이고, 또 하나는 서남쪽으로 충남 태안의 안흥까지의 금북정맥이다. 


                                        속리산 문장대 정상


속리산에서 비롯한 물은 금강 남한강 낙동강 세 줄기로 나뉘어 흘러 예부터 삼파수(三波水)라고 했다. 삼파수는 오래된 명칭이다. 조선중기 김극성의 문집에 “문장대 위의 삼파수”라는 글이 나오고, 조선후기의 <충청도 괴산군읍지>에도 “속리산 삼파수”가 등장한다. 삼파수는 황해도 구월산에도 있다고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기록했다. 속리산의 이러한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신라 때부터 중사(中祀)로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지만 속리산도 수려한 봉우리가 35개(국립공원 경관자원 지정)나 된다. 설악산이 29개, 지리산은 25개다. 특히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두드러져 구봉산이라는 이름도 가졌다. 경치가 빼어나 소금강산이라고도 불렀다.


속리산에 ‘왕’자와 ‘황’자를 쓰는 봉우리가 있다는 것만해도 범상치 않은 명산임을 말해준다. 최고봉 이름이 천왕봉이었다는데 일제 강점기에 천황을 상징해 천황봉으로 개악했다고 한다. 현재 이름은 천황봉으로 되어있지만 조선시대 고지도와 문헌에는 모두 천왕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천왕봉은 지리산, 무등산, 비슬산, 장수산(황해도 재령), 천왕산(경남 고성)의 주봉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장수의 주산, 월출산의 주봉, 광양의 천황봉도 있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다.

옛날부터 명산은 사람들이 신성시해 섬겨왔다. 속리산 정상에는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산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매년 10월에 신을 맞이하여 제사 지낸 후 45일을 머물다가 돌아간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기록하고 있다. 물론 지금은 맥이 끊어진지 오래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속리산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속리산은 기이하고 험준함이 금강산에 미치지 못하고, 웅장하고 심원함은 지리산에 미치지 못하지만, 왜 특별히 명산으로 일컬어지고 중국에까지 알려졌을까?”라는 박문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랬다. “한강 남쪽의 모든 산이 다 이 속리산을 종마루(朝宗)로 한다. 신령한 기상을 품고 기르며, 높고 넓고 깊고 두터움은 여러 산이 비교할 바가 아니다.(<유속리산기>)” 

우복동으로 알려진 상주 용유리는 먹고사는데 필요한 물산을 짓는데 필요한 조건도 갖추었다. 성해응의 <동국명산기>에 “복천사 동쪽을 내산이라고 하고 법주사 위쪽을 외산이라고 하는데, 내산에는 돌이 많고 외산에는 흙이 많다”고 적었다. 흙이 많다는 외산은 농사 지을 수 있는 토양조건이 갖춰졌다는 뜻이다. 잠시 머물렀다거 떠나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살만한 가거지(加居地)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명산에 명촌이 없을리 만무하다. 십승지 중 하나가 보은 속리산 아래 증항(甑項) 근처에 있다는 것이다(<정감록>). 증항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학계에서도 합의되지 않고 있다. 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에 걸친 속리산이니 그 언저리 어디에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 이규경은 ‘우복동변증설’, ‘우복동진가변증설’ 등의 글까지 써서 검토했을 정도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대체로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화산, 광정마을), 견훤산성이 있는 장암리, 칠층석탑(보물 제683호)이 앉은 상오리 일대로 추정한다. 속리산(1058m), 청화산(984m), 도장산(828m)의 삼각형 꼭짓점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리도 그 하나로 추정된다. 이 두메산골에도 한 때 전국에서 뉴프론티어 정신으로 이주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승무산에서 바라본 용유천과 화북면 소재지 전경


우복동은 농사짓기에 알맞은 장수의 고장으로 여겼다. “속리산 동편에 항아리 같은 산이 있어 예전부터 그 속에 우복동이 있다고 한다네, 산봉우리 시냇물이 천 겹 백 겹 둘러싸서 여민 옷섶 겹친 주름 터진 곳이 없고, 기름진 땅 솟는 샘물 농사 짓기 알맞아서 백 년 가도 늙지 않는 장수의 고장이라네.” 정약용이 지은 ‘우복동가’라는 글귀다. 

속리산의 수려한 경관, 삼재가 들지 않고 비옥한 농경지를 갖춘 삶 터 등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우복동이라는 이상향으로 지목됐다. 조선시대에 우복동은 승지의 대명사다. 아울러 많은 인민들이 생활터전을 일구는 장소의 공간으로 알고 찾아왔다. 

속리산 우복동과 지리산 청학동은 모두 깊은 산중에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복동은 소의 배 속 같다. 편안하고 기근이 들지 않는 곳이다. 지형적으로도 차이가 난다. 우복동은 속리산 바깥 기슭의 분지에 있어 농경지가 있고 비옥하다. 십승지의 땅, 우복동은 조선후기의 정감록촌이라는 이상향의 전형이다. 

2010년 8월28일 한양대 동아시아건축역사연구실과 대한민국풍수지리연합회가 공동 주관한 ‘우리나라 십승지의 재조명’학술세미나에서 ‘상주 우복동’과 ‘변산 호암’의 십승지를 발표한 채영석씨는 우복동은 용유리 화산 광정마을이라고 단언한다. . 


‘용이 즐겁게 논다’는 뜻의 용유리는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병천과 함께 이상향 터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청화산 남쪽을 돌아 동쪽 용추로 들어가는 것이 병천이고, 청화산과 도장산 사이를 용유동이라 부른다. 시루 항아리 단지의 뜻이 담긴 병천(甁川)을 예찬했다. 

채영석씨는 “화산, 광정마을은 북쪽으로 청화산이 양팔을 크게 벌려 병풍을 드리우고 동쪽에는 시루봉의 자루가 봉긋하게 솟구쳐 그 자락을 길게 드리우며 생기를 불어넣는다. 남쪽의 진입로는 도로막이가 막혀있고, 수구막이도 숨겨진 터”라고 밝혔다. 

상주도 거점전을 치루는 것과 다른 전 전선 전투전인 현대전에서는 전란을 비켜나가지 못했다. 6.25전쟁 때는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상주 화령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화령은 상주-보은 사이 고개다. 조선시대에는 보은에서 화령을 거쳐 상주에 이르는 도로가 발달했다. 상주시는 화령을 기준으로 동서남북으로 4개면이 있다. 화령은 본래 신라의 답달비군(荅達匕郡)인데 경덕왕 때 화령군으로 고쳤다. 화령의 옛 이름인 답달은 큰 산이라는 뜻이다. 상주는 속리산과 뗄 수 없는 운명이다. 

최정섭 상주시 화북면장은 “최근 화북면에는 십승지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잦고, 귀농 귀촌 하려는 도시인구들의 문의가 자주 온다”며 “두메산골 화북이 새로이 관심지역으로 대두하고 있어 가슴벅차다”라고 말했다. 

시루는 먹을거리를 만드는 떡을 찌는 그릇이다. 과거 삼재불입지 우복동이 현대에는 먹을거리와 힐링을 함께 꿈꾸는 자들의 안식처로 부상하고 있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6. 충북 보은

경북일보 김정모기자 2016년 7월 11일


여행 즐기기 제격…고아한 물소리로 마음 씻어주는 힐링지


                                        충북 보은읍 전경


뜨거운 불볕 더위다. 여름휴가를 즐기고 재충전하는 힐링의 장소로 충북 보은은 제 격이다. 보은은 상주와 함게 속리산의 고을.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는 도회지와는 달리 크고 작은 산으로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에 계곡에는 맑고 고아한 물소리로 마음을 씻어준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속리산 일대도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 쓰고 있는데, 조선시대 말부터 십승지를 찾아와 이주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속리산 구병산에는 6.25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내려온 주민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 예부터 속리산 자락 보은 땅에 ‘십승지’가 있다고 알려졌다. 속리산 시루봉아래 속리산면 적암리 마을이란 설도 한때는 있었다. 

                                          보은읍 시루봉


보은은 경상·전라·충청등 삼남의 요충이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여기서 치열하게 맞섰다. 신라는 보은의 오정산 능선에다 크고 단단한 성을 지었다. 지금 군청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다. 3년에 걸쳐 지었다고 해서 ‘삼년산성’이란 이름이 붙었다. 신라 자비왕 13년(470년)에 축조한 성곽이다. 성은 납작하게 사다리꼴로 다듬은 돌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쌓아 만들었다. 당시 쌓은 그대로 남아 있는 성벽의 부분은 1500년이란 시간을 버텨왔다. 이 성에 주둔했던 신라의 부대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554년 7월 관산성(옥천)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을 사로잡은 부대가 이곳에서 출발했다. 신라가 얼마나 이 성을 자랑스러워했는지는 태종무열왕이 당나라 사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여 접견했다. 당나라와 사대(事大)를 하지만 자주(自主)의 의지를 숨기지 않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당나라 사신을 위압하려 했던 것이리라.

차를 몰고 다니며 여행을즐기는 사람들은 외속리에서 내속리로 이어진 505번 지방도로를 타볼만하다. 삼가천과 서원계곡을 끼고 달리는 이 길 위에 오르면 멀리 속리산의 암봉들이 펼쳐지고, 좌우로 따라오는 삼가천이 운치를 더해준다. 

505번 지방도로변에는 보은이 자랑하는 명소인 외속리면 하개리 ‘선병국 가옥’이 있다. 삼가천을 끼고 들어선 이 가옥은 보성 선씨의 집이다.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삼가천의 물줄기 가운데 자리한 ‘육지 속 섬’의 형상이다. 풍수지리에서 ‘연꽃이 물에 뜬 형상’으로 일컬어지는 명당이다. 


                                       보은 선병국 가옥


선병국 가옥은 집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땅의 크기로 보면 마치 하나의 작은 마을 같다. 띄엄띄엄 들어선 안채와 사랑채는 각각 독립된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사당도 별도의 담에 독립건물처럼 서 있다. 전라도 갑부였던 보성 선씨 집안이 1909년 보은의 명당에 터를 잡고 내로라하는 당대 최고의 풍수지리 대가와 대한제국의 도편수를 ‘스카우트’해서 12년에 걸쳐 지은 집이 바로 이곳 선병국 가옥이다. 속리산의 적송을 1년6개월 동안 그늘에서 건조한 뒤에야 목재로 썼다고 전해온다. 구한국 시대에 지어진 이 집은 공(工)자 모양으로 화강석 위에 올려 지어진 사랑채와 안채 건물은 크고 또 우람하다. 사랑채 31칸, 안채34칸. 사랑채는 원주(圓柱)로, 안채는 사각기둥으로 사랑채의 기단은 3단이며 안채의 기단은 2단으로 지었다.


선병국 가옥은 흔히 ‘99칸 집’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1927년 완공한 서당 관선정까지 합친다면 도합 134칸에 달했다. 한국 최대규모의 저택이다. 지금 남아 있는 것만도 110칸에 이른다. 건물이 앉아 있는 담 안쪽의 면적만도 4000여 평. 원래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뤄진 부지가 3만여 평에 달한다. 선병국가옥을 담당하는 류재관 문화해설사의 얘기다. 

조선 시대의 민간가옥은 땅과 건물 크기가 제한돼 있었다. 이른바 ‘가사(家舍)규제’다. 세종 때 허용된 대지는 대군과 공주 이상은 1170평, 7품 이하 하급직은 156평까지, 여염집은 78평이 상한선이었다. 집의 칸수는 대군 60칸, 공주 50칸, 2품 이상 40칸이었다. 서민 이하는 10칸 이상 집을 지을 수 없었다.이 집은 조선 왕조가 쇠락해 가던 1900년대 초반에 세워진 한옥이기에 조선의 건축규제와는 무관하다. 

선병국 가옥은 물론 문화재이비만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본채 맞은편 행랑채에는 고시 공부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이 고시원은 역사적인 연원이 깊다. 지금 집주인의 증조부는 전남 고흥에 대흥사라는 사립학당을 세우고 각지의 인재를 모아 무료로 교육 및 시설을 제공했다. 보은으로 집을 옮긴 그 아들은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저택 동편에 관선정을 짓고, 후학을 양성한 것이다. 

선영옥이 전남의 소작농에게 땅을 무상지급하자 그에 대한 고마움 고마움의 표시로 철비를 세웠다고 한다. 1922년 새로 길이 만들어지면서 고흥의 국도변에 있던것을 2004년 옮겨왔다. 당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던 셈이다. 

선씨 가문은 조선말 대한제국 전후 무역업을 하던 선정훈이 일제강점기 유명한 대동상사를 설립한다. 근대 자본주의 한국 기업의 시초가 아닐까 추정된다. 대동상사는 서울 종로 화신 백화점 자리다. 대동상사에 경영자로 일했던 박흥식은 이를 바탕으로 화신백화점으로 성장했다. 

2001년 10월 선씨문중에서 관선정을 창건한 남헌 선정훈씨의 송덕비를 세우면서 선병국 가옥 관선정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비롯 500여명의 동문수학한 명단이 수록된 관선기적(觀善紀蹟) 영인본을 통해 외부에 알려졌다.

이날 제막된 남헌 선정훈 선생 송덕비에는 『대동상사를 설립해 전국 각지와 중국까지 지점을 두어 사업 이득금으로 서당운영의 기금으로 삼는 한편 학교와 면사무소의 부지 수천평을 공익을 위해 희사하고 퇴락한 향교중수도 자담했으며 효자 열녀 등 선행한 이를 찾아 후하게 포상하고 춘궁기와 흉년에는 어려운 사람의 식량도 도와주고 세금을 대납하는 등 사재를 털어 자선을 베풀었다』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당시 관선정은 1944년까지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철거됐다. 그후 1945년 관선정을 다시 경북 서령으로 옮겨서 복원했고 그후 또 다시 경북 상주 동관리로 옮겨 1951년까지 수학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보은은 1893년 전국 동학교도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척왜양(斥倭洋)’을 내걸고 충청북도 보은에서 개최한 집회로 동학혁명의 원류가 됐다. 1893년 3월 11일∼4월 2일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서는 3만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집결해서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동학교도들이 조정을 상대로 강력하게 민의를 전달하는 시위 형태로 진행됐다. 

“그 때까지 조선왕조 전 기간 동안 병란이나 민란 형식이 아니면서 이처럼 대규모 민중들의 집회 형식으로 정치문제 해결을 촉구한 적은 없었다. 보은집회는 그 다음해 벌어진 동학농민혁명의 전사(前史)라는 위치 때문에 학계의 관심이 적지 않다.”고 충북대 신영우 교수는 말했다.

보은에서 대규모 집회가 벌어진 이유가 계속해서 관헌의 탄압을 받아온 최시형 등 지도부가 유사시 피신하기에 적합한 장소이고, 각처의 동학교도들이 모이기 쉬운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시형은 동학의 본부인 대도소를 설치할 장소로 장내리를 선택했고, 1893년 봄 이 곳을 시위 장소로 선정했다는 것이다. 동학 지도부도 이 집회를 경험한 뒤에 집단운동을 이끌 수 있었다. 

갑오 농민군의 혁명이념의 하나였던 소작운동은 1950년대 농지개혁으로 그 이상은 실현됐다. 프랑스혁명의 이상인 자유·평등· 박애(형제애)도 1백여년 이상 엎치락 뒤치락하며 발전해오지 않았는가.

보은에는 속리산과 법주사를 빼놓을 수 없다. 법주사를 지나 속리산 세심정 휴게소까지 이어지는 조용한 산책로다. 보은에는 세조가 벼슬을 내린 소나무로 유명한 정이품송이 600년 넘게 살고 있다. 이 외에도 임한리의 솔밭공원과 원정리의 느티나무 등 곳곳의 명소에는 찾아오는 이가 끊어지지 않는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7. 울진 행곡리 선미리

경북일보 김정모기자 2016년 7월 18일


한적한 생명의 고을…귀농·귀촌 꿈꾸는 도시인의 힐링지


                                          울진 선구1리 설미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두메 고을 경상북도 울진군. 오랜 세월 한적한 곳이던 이곳이 탈산업화시대를 맞아 생명 고을로 각광받고 있다. 동해안의 아름다운 어촌 울진군은 북의 울진읍과 남의 평해읍이 중심이다. 

동해 고을에 힐링처와 힐링촌은 어떤 곳이 있을까. 전통적인 길지로 곱히는 곳은 힐링촌으로도 손색이 없다. 격암 남사고는 “평평(平平) 울울(蔚蔚)이 가장 길하다”고 했다. 북평, 평해, 울진, 울산이다. 격암은 ‘울울’에 방사능 사고 우려성이 있는 원전(핵발전소)가 들어서리라고는 예상이나 했을까. ‘피장처’에도 강릉, 삼척, 평해, 울진이 숨기에 좋다고 했다. 보병전이 아니고 미사일과 전투기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현대전에도 사람이 덜 모여 있는 곳은 안전한 곳임에 틀림없다. 

관동팔경 중에 하나인 울진 망양정 바닷가에서 4km정도 왕피천을 따라 서쪽으로 들어가면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명당의 조건을 갖춘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杏谷里)가 나온다. 애써 숨어있지도 않지만 애써 드러내 밀지도 않는 듯 조용한 마을. 행곡리 안쪽에는 불영사 계곡이 있고 꼬불꼬불한 2차선 국도(국도36호선)를 11km 더 가면 한적하고 아늑한 고찰 불영사가 있다. 


                                     울진 행곡리 마을 전경


행곡1리는 마을을 산이 삼태기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다. 불영계곡이 시작하는 초입의 오른편이다. 불영계곡을 따라 울진 망양정과 봉화로 이어지는 이 길을 가노라면 좌우로 고개 돌리기가 바쁘다. 그만큼 절경에 눈이 가기 때문. 

왕피천(광천)을 사이에 두고 남쪽에 있는 마을이 행곡4리, 즉 구미(龜尾)마을. 거북꼬리(구미)산을 뒤로하고 형성된 마을의 앞자락에 펼쳐진 들판은 귀농 귀촌을 꿈꾸는 도시인들이 탄성을 지르게 한다. 지명에서부터 풍수(風水)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통고산이 힘차게 동해로 내지르다 마감한 구미산이다. 구미산은 그 이름 처럼 흡사 거북이가 광천(光川, 빛내)을 향해 엎드려 있는 형국이다. 거북산의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주천대(酒泉臺). 주천대는 무학암, 송풍정, 족금계, 창옥벽, 해당서, 옥녀봉, 비선탑, 앵무주 등 팔경으로 이뤄져 있다. 이 마을「고산서원(孤山書院)」은 조선 시대 울진·평해지방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서원. 1682년(인조 6년)에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와 유생들이 신축했다. 생존하고 있는 선비를 모셨기에 ‘생 사당’으로 불렸던 고산사는 1715년(숙종41년) 서원으로 승격됐다. 

구미마을의 성황당은 동제(洞祭)를 지내는 마을공동체 신앙의 중심인데, 재미있는 것은 ‘한 지붕 세 가족’이다. 구미(행곡4리), 샘실(행곡1리)‘, 내앞(행곡2리), 함질(행곡3리) 마을은 같은 성황당을 모시나 제일(祭日)이 각각 다르다. 같은 듯 다르다는 얘기다. 

고산서원의 배향인물이자 생육신이었던 동봉 김시습은 15세기에 구미마을의 ‘동봉 유허비’와 성류굴 인근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성류사’와 인연을 맺었다. 동봉은 울진장씨의 외손으로서 천하를 두루 다닐 무렵에 주천대와 성류사에서 머문 것으로 전해진다.

행곡리 672번지 처진 소나무는 천연기념물 제 409호. 다리를 건너자마자 동구 밖을 지키며 효자 비각과 나란히 있는 거목. 나무나 풀이나 식물은 하늘로 솟구치는데, 이 나무는 땅으로 낮은 곳으로 향한다. 수양버들처럼 가지가 처진다 해서 유송(柳松)이라고도 부른다. 높이가 11m쯤 되는 처진소나무는 350년 전쯤 심은 것으로 짐작된다. 모두들 앞서고 높이가려고 머리를 처드는데 홀로 낮은 곳으로 향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람같으면 벌써 부러졌을터인데, 세상 시류를 거꾸로 사는 역류의 삶이 어떻게 저리도 질기고 질긴가 하는 생각이 다다르게 한다. 

동해안을 따라 더 남쪽으로 오면 평해읍이 있다. 울진 평해읍앞에서 동해로 흘러드는 남대천의 상류에 있는 온정면 선구1리(내선미마을). 태백산맥의 산촌 중에 산촌이다. 백암온천이 있는 온정면소재지에서 영양(수비면)으로 가는 국도88호선을 따라 도현곡(더티재)을 넘어 서화산 북쪽에 펼쳐진 마을. 북쪽에 산등성이 하나를 두고 외선미2리 마을과 이웃하고 있다. 마을 이름에 나오는 ‘선’은 신선 ‘선(仙)’자. 삿갓을 뒤집어 놓은 형국으로 내외선미 마을을 하나로 보면 350도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물 좋기로 소문난 이 마을에 가면 상쾌한 물 냄새와 청아한 산내음이 환상적이다. 마을 서쪽 지천에 선시곡(신선곡)에 선녀탕소 마음소 12용소가 풍광이 수려해 여름철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내선미는 600년 고려말에 형성. 김녕김 평해황 안동권 안동김 진주강 경주이씨들이 산다. 1920년대 전성기에는 80여호가 거주했다고 한다. 논밭에 일제강점기에는 뽕나무, 70년대초에는 엽연초로 최근에는 취나물로 소득을 올린다. 

옛부터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외부 침입도 막을 수 있고, 내부로는 생업 토대가 발달되어 있다. 선구리는 사방이 구주령과 백암산 그리고 소화산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외침과 바람 등 자연재해를 막아주는 곳이다. 또 내선미마을 앞에는 신선계곡에서 흐르는 내선미천을 중심으로 생업적 토대가 잘 갖춰져 있는 곳이다.

민속학을 전공한 남효선 울진군축제발전위원장은 “행곡리는 거북이 꼬리 형국의 산으로 둘러 쌓인 구미 마을 등이 앞으로는 왕피천과 만나는 광천이 마을을 태극 문양으로 휘감고 돌아나가며 농토가 잘 발달되어 있어 명당의 요소를 잘 갖추고 있는 곳이다. 구미마을은 이런 지형적 조건 때문에 울진지방 최초로 서원이 들어서는 등 울진 정신사의 요람으로 발달되었다.”고 이곳 인문지리의 빼어남을 자랑한다.


                                울진 금강송면 금강소나무 숲


울진하면 떠오르는 것은 철갑을 두른 듯 우람한 소나무다. 금강소나무(춘양목)를 감상할 수 있는 숲길 탐방로가 명물이다. 울진군 북면 두천1리에서 금강송면 소광2리까지 13.5㎞를 약 7시간 동안 울울창창한 숲길을 걸을 수 있다. 골수와 심폐 깊숙한 곳까지 치유되는 생명의 숲 길이다. 하루 80명에게만 해설가의 안내로 개방한다. 2010년 제1구간이 개통됐다. 전체는 4개 구간으로 70㎞에 이른다. 이 숲길이 조선 시대 보부상과 뒤이은 선질꾼 등 수많은 행상이 동해와 내륙의 물산을 나르던 ‘실크로드’였음을 보여준다. 이곳은 비무장지대를 빼고는 멸종 위기종 1급인 산양 서식지이기도 하다. 

옛날 어릴 때 장 보러 이 숲길을 다닌 적이 있다는 울진 소광2리의 해설사 박영웅(74)씨는 그때 배운 선질꾼(보부상)의 노래를 들려줬다.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한 평생 넘는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울진에는 곳곳이 힐링처다. 십이령 길도 그 하나. 불영계곡 옆으로 국도 36호선이 뚫리기 전까지 내륙인 봉화군과 바닷가인 경북 울진(북면 하당리 286)을 잇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다. 옛날부터 방물고리에 댕기, 비녀, 얼레빗 등을 담은 봇짐장수와 지게에 생선, 소금, 토기, 목기 등을 진 등짐장수를 일컫는 보부상의 길.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통로인 십이령 길은 큰 고개만 노루재 등 열두 개이고, 작은 고개는 30~40개에 이른다. 울진의 미역, 각종 어물과 내륙지방에서 생산된 쌀과 보리, 대추, 담배, 옷감 등이 교환 품목. 이들은 울진에서 봉화까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130리 길을 3박4일 동안 다니며 사고 팔았다. 울진문화원이 발간한 [열두 고개 언제 가노]를 보면 옛날 선인들이 이 고개를 넘으며 겪었을 숱환 애환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다. 

한성(한양)에서 평해까지 백두대간을 넘어 걸어서 열사흘 걸리는 구백이십 리 관도(官道)인 ‘관동대로’의 종착지이자 시발지가 평해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관동대로는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서대로 북관대로 등 9대 간선도로 중의 하나다. 평해를 출발해 삼척·강릉을 지나 대관령을 넘어 횡성을 거쳐 한양의 흥인지문(동대문)에 이르는 관동대로 천릿길은 생각만 해도 환상적이다. 

봉화~울진 ‘십이령길’이나 소나무 숲길을 이용한 ‘관동대로’를 중국의 차마고도나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그리고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처럼 세계적인 관광코스로 만들면 좋을 것 같다. 곧 다가올 환태평양시대와 수년 내 개통 될 동해선 철로가 북으로 두만강까지 시원하게 뚫리면 울진(蔚珍)은 보배로울 ‘진(珍)’의 땅이 될 것이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9.강원도 철원의 토성리 오덕리

경북일보 김정모기자 2016년 8월 8일


타 농촌과 달리 젊은이들 많고 부농 꿈꾸며 살기좋은 마을


                              강원 철원군 토성리 민속마을 전경


강원도 철원군은 한반도 중부의 내륙지방에 중심지여서 찾는 이들이 꾸준한 곳이다. 통일한국의 수도로 거론되기도 하는 철원하면 떠오르는 것은 철원 평야와 한탄강일 게다. 

한탄강을 젖줄로 철원평야를 옥토로 일구고 사는 마을이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土城里)다. 민속마을로 지정된 토성리는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힌다. 철원군청으로부터 43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11Km가량 가면 토성민속마을이 나온다. 덕령산을 뒤쪽에 두고 마을 앞 들판 넘어 한탄강의 지류인 폭이 꽤 넓은 화강(남대천)이 흐르는 동향의 쾌적하고 조용한 마을이다.

토성민속마을은 농경지 한가운데 삼한시대에 성축된 토성(강원도 지방기념물 제24호)이 있고 마을 앞뜰은 준 평야지대로 형성된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특히 비옥한 농토를 중심으로 산과 하천이 어우러진 마을이다. 수려한 자연 경관과 향토음식개발 등을 통한 농외소득사업으로 새롭게 도약하는 마을이다. 

현재는 지경리, 청양5리 등 3개 마을로 분포되어 있으나 토성민속마을은 철원의 넓은 평야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집단부락이다. 철원의 더불어 명산, 대천이 있어 많은 전설과 민속예술인 농악이 발전해 온 고장이다.

토성의 자랑할 만한 문화로 빼놓을 수 없는 토성농악은 두레농악으로 명절 때는 오락농악으로, 마을 행사때는 연희농악으로 발전해온 전통이 뚜렷하다.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아래 규모는 축소되고 변형되었으나 아직도 토성민속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날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농악놀이를 하면서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유대감, 풍년농사를 기원하며 조상들의 훌륭한 정신을 계승 발전 시키고 있다. 

이 마을주민의 주 소득원은 청정오대쌀 생산과 무공해 청정고추, 황기및 오갈피, 인삼 재배 등과 한우, 양돈업다. 산과 하천이 잘 어우러진 수려한 자연경관과 향토음식(도토리묵, 감자전 등) 개발 등으로 새로운 소득원의 꿈에 부풀어 있다. 이 마을은 보통의 농촌 마을과는 달리 50대 이하의 젊은이들의 거주비율이 전체의 77%로 활기찬 마을이다. 

마을 이름 그대로 토성리에는 둘레 1km의 넓이 62.500제곱미터 (18,906평)의 작은 성이 있다. 평탄한 곳에 점토를 재료로 정방형으로 성축된 특이한 성이 있다. 성내 경지에서 주거했던 흔적과 출토된 무문토기와 석기류 등 선사시대 유물들은 귀중한 문화자산이다. 이 마을에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22호인 지석묘 2기가 보존되어 있으며 마제석기류, 무문토기류 등 석기유물 20여점이 보관되어 있다. 

토성 마을 내에 자리하고 있는 지석묘의 경우는 남대천의 강변을 따라 덕령산 협곡의 소분지 등에 같은 형, 같은 방향, 일정한 간격으로 일직선상에 구축되어 있다. 

남대천은 철원군 일대를 흐르는 하천으로 유역의 골짜기 일부는 과거 금강산지역으로 들어가는 통로였으며, 금강산전철도 이 골짜기를 따라 부설되었다. 넓은 자갈밭에 텐트를 친 가족단위의 캠핑을 하는 유원지로도 유명하며, 민물낚시도 으뜸이다. 민물낚시로는 민물붕어 및 여러 어종이 서식하고 있다.
                                       

철원군 동송읍 철원평야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오덕리(五德里)는 철원 너른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풍요의 땅이다.

오덕리 언덕에 서서 보면 우뚝 솟은 산은 학(두루미)이 막 내려앉은 형상을 하고 있는 금학산이다. 오덕리는 학과 관련한 지명이 많다. 오덕4리의 지명은 봉학동, 오덕6리 지명은 송학동이며 마을 근처 저수지의 이름도 학저수지다.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904년 철원으로 도읍을 옮길 때 도선이 이 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300년을 통치할 것이라고 예언했던 한국의 100대 명산 중 하나다.

오덕리의 가장 큰 잠재력은 젊은 농민이 많다는 것이다. 다른 지역과 달리 30~40대 신세대 영농인들이 부농의 꿈을 꾸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마을 안에 오덕초등학교가 있고 바로 옆 동송읍내에 철원중, 철원여중, 철원고, 철원여고가 있어 교육환경도 좋은 편이다.

오덕리 학마을은 이름에 걸맞게 올해 새로운 비상을 준비 중이다. 오덕 2, 4, 5, 6리 마을은 지난해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대상지로 최종 선정돼 올해부터 총 57억원을 연차별로 지원받게 됐다.

주민들은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을 계기로 수도작 외에 다양한 소득사업을 준비 중이다. 우선 주변의 자연환경과 풍부한 관광자원을 활용해 농촌체험의 거점마을을 꿈꾸고 있다.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의 내용도 다양한 소득사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주민들은 쌀와인가공공장, 학마을 농업체험교육농장, 도자기 소득사업장, 학마을 오대쌀밥집 등을 구상해냈다. 농업체험교육농장에서는 친환경 농업을 중심으로 오대쌀의 생산과정 견학은 물론 도시 소비자 초청 행사도 진행된다.

마을 인근에는 금학산과 학저수지 이외에도 국보63호 비로자나불과 보물 223호 3층석탑을 보유한 도피안사, 철새도래지 등 뛰어난 관광자원이 많다. 

이 마을에서 만난 한 주민은 “우리 마을이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곳으로 뜨고 있다.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친환경농업, 쌀가공사업 등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도피안사(到彼岸寺) 

                                 



오덕리 뒤 우거진 주변 숲이 병풍처럼 둘러진 곳에 있는 ‘도피안(到彼岸)사’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철불을 조성하고 안치하기 위하여 만든 절이라고 한다. 본전인 대적광전 안에 모셔져 있는 철불은 손가락을 감싸 쥐고 있는 지권인을 하고 있으니 비로자나불이다. 장흥 보림사 철불과 함께 9세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불상으로 불상 뒤쪽에 100여 자의 조성기가 새겨져 있는데 1,500여 명의 향도가 함께 조성했다는 기록과 함께 만들어진 연대를 신라 경문왕 5년인 865년으로 알리고 있다. 신라 말 선종이 일어나고 지방호족세력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귀한 금석문이다. 당시 철조불상이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에 이르러렀다 하여 절이름이 도피안사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철원에는 철원 8경이 있다. 삼부연은 조선 현종때의 문신 영의정 김수항의 안거지(安倨地)였고, 폭포 동쪽 용화동에는 임진왜란때 피난하여 이 마을을 개척한 동래정씨 일가가 지금도 세거(世居)하고 있다.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고석정은 한탄강 중앙에 10m 높이의 거대한 기암이 우뚝 솟아 있는 현무암 분출지이며 조선조 초기 임꺽정의 활동무대로 등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곳에서 상류로 약 2km 지점에 직탕폭포이 있어 관광객이 즐겨 찾고 있다. 

철원의 여름철 대표축제인 화강 다슬기축제. 지난 6일 개막돼 9일까지 나흘 동안 화강쉬리공원과 김화생활체육공원 일대에서 피서객들을 유혹했다. 올해로 9회째를 맞은 다슬기축제는 청정 화강변을 배경으로 철원에서만 접할 수 있는 특별한 관광 컨텐츠로 매년 10만여명의 피서객이 찾는다. 특히 올해는 화강다리 위에서 수영장으로 이어지는 워터슬라이드가 설치돼 예년보다 더욱 신나고 재미있는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체험시설이 마련됐다

철원하면 떠 오른 인물은 후고구려를 개창하고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긴 비운의 혁명아 궁예와 고려말의 충신 최영 장군이다. 철원군은 갈말읍 신철원3리 용화동에서 해발 923m 명성산에 이르는 ‘궁예길 관광자원개발사업’을 2019년 완공 목표로 추진된다. 명성산과 용화저수지, 철원8경 중 하나인 삼부연 폭포를 잇는 구간을 궁예길로 관광벨트화해 일상에서 벗어난 힐링 공간으로 철원을 대표할 수 있는 랜드마크로 개발할 계획이다.

                         대위리 방향(학마을 권역센터 옥상)

                                        직탕폭포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10. 하동 악양

경북일보 김정모기자 2016년 8월 15일


별천지에 온 듯한 마을…일상에 지친 현대인들 마음 안식처


                                          경남 하동군


지리산 아래 경상남도 하동군.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변의 고을이다. 우리 국토의 대동맥 백두대간이 남으로 내달리다 멈춘 지리산이 생명을 잉태하는 섬진강과 만나 기묘한 조화를 이룬 곳이다. 신라 경덕왕 16년(757년)부터 불려온 ‘하동(河東)’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강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하동군 화개부터 하동송림을 거쳐 남해 바다로 가는 섬진강 물길 ‘하동포구 팔십리’는 화려강산 그 자체다. 

정감록 십승지 중에 하나가 지리산 청학동이다.『정감록』에서는 “진주 서쪽 100리, (중략)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십리쯤 들어가면 그 안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고 했다. 고려시대의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으니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고 엎드려 수리를 가면 곧 넓은 곳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옥토라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라고 했으나 청학동을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김종직은 피아골을, 김일손은 불일폭포를, 유운룡은 세석평전을 청학동이라고 짐작했다. 이외에도 지리산 청학동으로 추정되는 곳은 청학이골(악양면 등촌리), 상덕평마을(선비샘 아래) 등이다. 청학동을 못 찾은게 아니라 지리산 남쪽터 곳곳이 청학동인 셈이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하동 악양(岳陽)면 매계리를 청학동이라고 지적했다. 악양의 주산 형제봉 아래 작은 주산격인 매계리 뒷산(수리봉)에 오르면 그 이름처럼 독수리(매)가 내려다 보듯이 악양이 한눈에 보인다. 매계는 산이 빼어나고 물이 좋아 예로부터 이상향이라 불리운 청학동(靑鶴洞)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 원래 이름은 ‘맷골’이었다. 부산에서 살다가 7년 전에 조상들이 살던 악양이 그리워 매계리에 안착한 강훈채 이장(59세)은 “여기서 사는 게 행복하다”는 짧은 말로 귀농생활의 여유로움을 말했다.

귀농 귀촌을 꿈꾸는 이들이 한번쯤은 와 보는 곳이 하동 악양면이다. 악양면은 지리산 자락인 형제봉(1,117m)과 구재봉 사이다. 한가운데 시냇물(악양천)이 흐른다. 지금의 눈으로 봐도 악양은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힐 만하다. 남해에서 섬진강을 따라 13km 올라가다 악양골로 들어서 악양천을 거슬러 올라가며 양편에 많은 마을이 자리 잡았다. 악양면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면 별천지에 온듯한 느낌을 갖는다. 시골처녀의 해맑은 미소처럼 정다운 예쁜 돌담길이 반긴다. 악양은 일대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여행객들의 힐링처로도 손색이 없다. 옛 고소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악양면 평사리 마을은 박경리의 대하 소설 『토지』의 무대로 유명하다. 평사리는 드라마촬영을 위해 최참판댁 등 토지 등장인물들의 집이 지어져 있어 소설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섬진강에 맞닿은 평사리부터 올라가는 봉대리, 입석리, 정서리, 매계리, 동매리는 곳곳에 동남향의 좋은 명당이 널려있다. 평사리 ‘무딤이 들판’은 넓이가 140만㎡(140㏊) 40여만 평이다. 8월의 내리쬐는 뙤약볕에 벼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무딤이들은 풍요로운 악양의 생산처이다. 들판에 외로이 서 있는 ‘부부송’, 악양루, 동정호가 섬진강과 어우러져 조화롭고 평화롭다. 악양면 정동리 부계마을과 정동(亭東)마을은 오래 전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모여 거주한 곳이라 전해지는 오랜된 마을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취간림이라는 숲도 고색 창연하다. 

군에서는 무딤이 들판을 고품질 쌀 생산과 농업 생태환경 보전, 그리고 볼거리를 제공할 계획이다. 최대성 하동군 홍보팀장은 “하동은 안전한 농산물을 원하는 소비자의 욕구에 부응하고 생산농가의 소득을 향상시키는 농업 본연의 목적 외에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는 관광명소”라며 “특히 악양은 수년 전부터 귀농 귀촌인들이 들어오면서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하동읍 광평리 강변에 너른 솔밭(송림)이 있는데 장관이다. 1만2천 평쯤의 솔밭에 200년 전후 된 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차 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 중에 하동의 최고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섬진강 맑은 물과 모래사장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쉼터로 그저 그만이다. 그 앞에 하동과 광양을 잇는 인도교인 섬진교가 놓여 있다. 지난 6월 말 송림공원과 섬진강 백사장 일원에서 ‘알프스 하동 섬진강 재첩축제’가 열렸다. 

늘 바쁘다며 갈 길에 쫒기다시피한 현대인들도 이곳에 오면 누구나 마음이 느긋해진다. 우리 산하(山河)는 어디엘 가나 해질녘 노을 물들 때가 아름답다. 뜨거운 섬진강의 저물녘은 그 풍광이 장엄하면서도 고요하다. 시인 묵객들의 감탄사가 없을 수가 없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의 <섬진강1>끝구절은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고 했고, 고은 선생의<섬진강에서>는 첫 구절이 “저문 강물을 보라, 저문 강물을 보라”로 시작한다. 전라도 구례 사람 이시영의 섬진강 노래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속까지 짙게 저며온다. 그의 시 중에서 <형님네 부부의 초상>([바람속으로], 창작과비평사 1986)은 명시다.

<형님네 부부의 초상>

고향은 형님의 늙은 얼굴
혹은 노동으로 단련된 형수의 단단한 어깨
이마가 서리처럼 하얀 지리산이 나를 낳았고
허리 푸른 섬진강이 나를 키웠다
낮이면 나를 낳은 왕시루봉 골짜기에 올라 솔나무를 하고
저녁이면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어느 먼 곳을 그리워 했지

(.....)

고향은 형님의 늙은 얼굴
혹은 노동으로 단련된 형수의 너른 어깨
우리가 떠난 들을 그들이 일구고
모두가 떠난 땅에서 그들은 다시 시작한다
아침노을의 이마에서 빛나던 지리산이
저녘 섬진강의 보랏빛 물결에
잠시 그 고단한 허리를 담글 때까지

하동엔 청학동(靑鶴洞) 마을이 하나 더 있다. 악양면에서 청암면을 넘는 회남재를 지나 4km 비포장도로를 가면 나오는 청암면 묵계리(默溪里)다. 섬진강 지류인 횡천강을 약 50리 정도 거슬러 올라간 해발 약 800m의 첩첩산중. 구한국과 일제강점기에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 이룬 마을로, 유불선갱정유도교(儒佛仙更定儒道敎)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전통 생활방식을 살려왔으나, 이제는 관광지다. 


                              구제봉에서 바라본 악양들판


악양들에서 산넘어 묵계리 가는 50리 길은 굴곡 많은 우리 인생사 같이 보일 듯 말듯한 구불구불한 고갯길. 회남재(回南,해발 740m)는 청암면 묵계리와 악양면 등촌리를 잇는 길의 고개다. 고갯마루에 정자를 세워 악양면이 한눈에 조망된다. 10월에 ‘지리산 회남재 숲길 걷기대회’가 열린다. 

회남재는 그 유명한 지리산 빨치산(파르티잔, 비정규 게릴라부대)들의 뜨거운 애환이 서려있다. 산적(山賊)이나 빨치산들에게는 식량이나 물자를 구하기 위한 길목이다. 1948년 여수순천 반란사건 이후 지리산으로 들어가 지리산유격대로 불리는 남부군은 이현상(1906∼53)이 토벌대에 의해 53년 9월 사살, 섬진강에 화장되면서 그 숨가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현상은 북한의 제1호 열사증을 추서받아 애국열사릉에도 가장 먼저 묻혔고 90년 8월에는 조국통일상도 추서됐다. 월북한 1남 3녀 중 막내딸 이상진은 북한의 외교관으로 김대중대통령의 방북 때 만수대의사당을 직접 안내히기도했다. 이현상은 중앙고보 재학중 6.10만세운동으로 시작한 항일투사로 세 번째 감옥살이를 하던 중 20여일간 단식투쟁으로 석방된 단식투쟁의 원조다. 덕유산에서 은거하다 해방 후에는 박헌영과 남로당에서 공산주의로 통일조국을 건설하려했다. 전북 금산군(현 충남)에서 태어나 지리산 화개면 빗점골에서 생을 마친 그가 지리산에서 조선인민유격대를 지휘하며 창작한 한시이다.

智異風雲當鴻動 지리산에 풍운 일어 기러기 떼 흩어지니
伏劍千里南走越 남쪽으로 천 리 길, 검을 품고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 오직 한 뜻, 한시도 조국을 잊은 적 없고
胸有萬甲心有血 가슴에는 철의 각오, 마음속엔 끓는 피 있네   

▶하동 가는 길


하동읍은 남해고속도로 하동IC에서 19번 국도로 북으로 섬진강을 따라 12km올라가면 나온다. 저속 운행을 하고 싶은 이들은 국도를 타고 다녀도 좋다. 부산-마산-진주-순천-목포로 이어지는 2번 국도가 하동읍을 지나 간다. 대중교통도 불편하지 않다. 국도 2호선과 비슷하게 부전역(부산)-마산-진주-순천-광주를 연결하는 경전선 열차도 하동역을 거친다. 서울 등 어느 대도시에서나 하동으로 고속버스가 다닌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11. 남원의 운봉

경북일보 김정모기자 2016년 8월 22일


                                          남원 운봉읍 전경


지리산 동편 기슭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雲峰)은 해발 460m내외의 고원지대로 늘 구름이 머무는 곳이다. 고을 지명이 운봉이 된 것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이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운봉군과 남원군이 강제적으로 합쳐 남원군(현 남원시)이 됐다. 

이곳은 예로부터 높은 산속이지만 사람이 살만한 풍요의 땅으로 손꼽혀왔다. 우리나라 십승지(十勝地) 중의 한 곳이 된 운봉. 비옥한 넓은 땅에 연중 메마르지 않은 지리산의 물이 내린다. 남원 정령치에서 발원되는 물은 주천면 고기 삼거리에서 갈려 낙동강 지류인 남강과 섬진강으로 흐른다. 운봉 사람들은 그 물을 받아 농사를 지었고 지리산에 올라 산나물들을 얻어냈다.“운봉에서 배고파서 죽었다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가능한 조건이다. 운봉이 이처럼 사람 살기 좋은 고장이 된 것은 인간을 보듬는 지리산의 생태환경이 그 바탕이다.

신작로가 나기 이전의 대중교통의 일상화가 불가능하던 시절의 운봉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서양의 성(城)같은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근대식 최초의 도로인 신작로가 1923년 남원시에서 운봉읍으로 뚫리기 시작해 1931년에야 개통됐다. 그 전에는 남원과 운봉 사이에는 아흔아홉 고개를 넘어야 갈수 있었을 만큼 험했다. 그 고갯길 여원치(여원재)는 남원~ 운봉 ~함양의 길목이다. 1894년 11월 민씨수구정권의 수탈에 못살겠다며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군 1만 명이 살기 위해 남원성을 점령하고 운봉성을 점령하러가기 위해 가다가 여원치에서 관군에게 섬멸된 가슴 아픈 사연이 서려있다. 

남원의 운봉읍은 십승지 이름 그대로다. 땅 힘이 좋아 곡식이 많이 나서 자족이 가능한 사람살기 좋은 곳이다. 게다가 소리(음악)으로 힐링이 되어 장수하는 고을이다. 예로부터 평균 수명이 다른 고을보다 10여년 길다고 한다. 

우리 국민들은 남원하면 무엇을 가장 먼저 생각해 낼까? 어느 조사에 의하면, 상품적 인지도가 가장 큰 것은 ‘추어탕’이고, 공간적 인지도가 가장 먼저인 것은 ‘광한루’로 조사됐다고 한다. 정말 남원하면 떠오르는 것은 춘향과 이도령 이야기다. 춘향전은 1892년 프랑스어로 번안됐다. 그 이후 독일어판 체코판이 나왔고 러시아와 미국에서 공연되는 최초의 한류 소재였다. 

남원추어탕, 판소리도 빼놓을 수 없는 남원의 대표문화다. 판소리는 소리꾼(명창)이 노래를 부르고, 고수가 북치며, 청중이 추임새를 하는 놀이판. 피렌체의 메디치가문이 숱한 예술과 문화를 꽃피웠듯이 동편제 판소리 태동 계기는 ‘운봉 박부자’의 힘이 컸다. 1780년경부터 시작되어 일제강점기 시절 박부자의 판소리에 대한 흥미로 판소리꾼들이 기대어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 박부자는 박희옥이라는 만석꾼. 1941년 태평양전쟁 당시 부호들은 보국단 발기인으로 비행기 값도 헌납하는 등 친일을 하지 않으면 부를 유지할 수 없었다.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는 명창 송흥록의 생가터가 있다. 이곳에서 송흥록에 의해 동편제가 창시되었으니 운봉은 판소리의 성지이다. 동편제 판소리는 종가의 내림으로 이어져 일제강점기 전설적인 여류명창 이화중선을 탄생 시켰고 박초월 명창으로 이어지는 소리의 역사도 이곳 운봉에 씨앗을 두고 있다. 운봉은 소리꾼의 천국이었다. 판소리 문화는 가장 한국적인 문화로 귀중한 세계 무형 문화의 자원이다. 소리꾼의 활동 이후 조선 말부터는 전국에서 남원이라는 지명 브랜드가 한양, 제주에 이어 3위로 부상 했다. 


                                      남원 운봉 송흥록생가


남원 소리꾼들의 단체인 ‘협률사’는 전설적이다. 전 세계 100여 집단 중에 가장 장수하는 집단이다. 비결은 청국장을 늘 먹어서란다. 보통 청국장이 아니다. 청국장 발효의 핵심은 벼짚이었다. 착한 사람이 농사짓게 해서 청국장용 볏짚을 만들었다는 이슬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남원은 가무를 즐기는 고구려 유목민족의 특성이 골수에 살아 있다. 남원은 통일신라시절 9주5소경 중의 하나. 중원(국원)에는 대가야, 남원에는 고구려 귀족들이 정책적으로 이주했다. 

석장승 문화를 비롯한, 고랭지 농업 문화뿐 아니라 음식, 대장간, 판소리 문화 같은 것들이 운봉이 가지는 우월한 문화였다. ‘예술문화의 수도’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손색이 없다. 다른 지역의 산물이나 문화가 쉽고 자유롭게 유입되지 못하는 산중 지역이라는 여건이 자급자족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운봉은 강원도 철원과 함께 여름철 김치 문화가 가장 발달했던 곳이다. 아울러 지리산 똥돼지로 불리는 흑 돼지는 지금도 그 맛이 유명하고, 지리산 한봉은 진상품이 됐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의 한약재는 인월 장터를 통한 전국 명산지가 됐다. 또한 지리산 실상 한지는 천년동안 버리지 않고 사용됐을 정도의 명품이었다 하니 한국에서 이만한 韓문화의 클러스터는 어디에도 없을 것 같다.

타 지역에서 무기를 만들어 수송을 해올 수 없는 지리적 여건으로, 이 지역에서 자체 생산 활용해야 했던 대장간 문화는, 운봉이 갖는 독특한 문화의 하나였다. 이 지역의 대장간 기능이 평화 시대가 도래되면서 유기를 생산하는 기능으로 바꿨다. 징, 괭가리는 타 지역에서는 흉내 낼 수 없는 최고의 품질을 가졌다. 이러한 유기 생산 기능은 일제강점기 이후 함양 안의를 거쳐, 거창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처럼 사람 살기 좋은 땅 운봉은, 외침이 많은 전략적 요충지다. 최영 이성계는 고려말 백성들의 원수 왜구들의 침입을 격퇴하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1380년 8월 왜구는 오백여척이 넘는 함선으로 진포(鎭浦)로 침입, 충청ㆍ전라ㆍ경상 3도 연안에 상륙했다. 왜구의 진포 함선은 최무선의 화약 맛을 보고 혼비백산한 채 도망치다 9월 지리산 운봉의 황산으로 몰려들어왔다.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삼도순찰사(三道巡察使)에 임명해야했다. 

당시 운봉전투가 조정에서 얼마나 다급한 사변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이장군이 개선하자 판삼사 최영이 백관을 거느리고 천수사(개성 근교의 사찰로 추정) 문전에서 맞이하며 “공이여 공이여! 삼한이 다시 창조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전투에 있었다. 공이 아니었다면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었겠는가?” 고 말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적을 소탕한 참장수여! 썩은 나무 부러뜨리듯 삼한의 기쁜 소식 공에게 있네 ...” 하며 시를 지어 축하하였고, 윤소종 역시 “후세를 위하여 공이 태평을 열어 주었소”하며 축시를 지었다. 이 싸움이 황산대첩(운봉정산전-雲峰鼎山戰)이다. 최무선의 진포대첩(1380)과 정지의 남해대첩(1383), 최영의 홍산대첩(1383) 등과 고려말 4대승첩이라 한다. 

남원 추어탕의 발원이 되었던 운봉 풀시래기 추어탕은 황산전투와 관련이 있다. 황산전투를 벌이며 논두렁에서 미꾸라지와 피라미 잡아서 풀시래기 탕을 해먹으며 군량미 부족을 보충했다. 군사들이 미꾸라지를 잡아 풀대죽을 끓인 추어탕의 보양식을 먹고 힘을 냈다. 훗날 조선의 남원 소리꾼들은 추어탕의 보양식 덕분에 오랜 시간 소리를 할 수 있다는 재담에, 추어탕은 남원의 명물이 되었다. 그 장터의 소리판에서 춘향가를 듣고 사람들은 남원의 광한루와 춘향이를 사랑한 것.

운봉이 왜군들이 선호하는 침략지가 된 것은 군량미 확보의 최적지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금과 같이 영농기술과 자재가 발달하지 못한 시절의 농사라는 것은, 하늘의 뜻이 그 생산량을 결정지었다. 농작물이 열매를 알차게 맺으려면 봄에 늦은 서리가 없어야 하고, 가을에 이른 서리가 내리지 않아야 한다. 

남원시는 요즈음 흥부전에 나오는 ‘흥부마을’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실제로 흥부전에도 함양과 운봉 사이 흥부가 산다고 되어있다. 김용근소장은 “흥부가 박 세통을 타 부자가 된 것은 조선시대 큰 장이었던 인월장에 유명한 곶감, 닥, 옻으로 각 1천냥, 도합 삼천냥으로 삼천석지기 부자가됐을것“이라고 추정했다. 지리산 운봉 함양에서 수백 년 동안 잠자던 이야기가, 예술문화의 수도 남원에서 부활하고 있다. 

*남원시청 주사로 근무하는 김용근은 남원시의 대표적인 향토사가로 국사편찬위원회 지역사료조사위원, 국가기록원 민간기록조사위원이다. 이 기사 일부는 김용근 저 <춘향고을 이야기/ 남원스타일로 말하다. 2016,1 간>에서 인용했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12. 전남 구례군

경북일보 김정모기자 2016년 8월 29일


산·강·들판 어우러진 '금환락지'…공기 맑고 물 좋은 심신산골


                                   구례군 토지면 오미


지리산 노고단 험한 줄기가 끝나는 양지 바른 땅에 근사한 마을이 있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다. 산과 강 그리고 들판이 어우러진 보기 드문 곳이다. 신십승지(新十勝地)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상 ‘금환락지’의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에는 ‘운조루’(중요민속자료 8호)와 곡전재 등 문화재가 많아 전국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금환락지(金環洛地)는 천상의 선녀가 떨어뜨린 금가락지 모양이란 뜻이다. 

이 마을에는 1776년(조선 영조) 당시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 선생이 99칸 규모로 건립(현존 73칸)한 고택 운조루가 고색창연하게 서 있다. 운조루 정문에는 류이주 선생의 이길순 9세손부가 지키고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운조루를 둘러보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가난한 이웃이 쌀을 퍼 갈 수 있는 쌀 박스인 뒤주였다. 뒤주에 “누구나 열수 있다”라는 뜻의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아직도 또렷하게 쓰여 있다. 나눔의 미덕이다. 운조루가 일제강정기와 6,25전쟁 등 험란한 시기를 다 겪으면서 가옥의 원형을 잃지 않고 230여년 동안 잘 보존되어 있는 이유가 있었다. 

오미(五美)란 마을이름이 궁금했다. 십승지의 하나인 예천 금당실의 뒷산 이름이 오미봉이어서이기도하다. “마을의 안산이 되는 오봉산의 기묘함, 마을을 둘러싼 산들의 길함, 물과 샘이 족함, 풍토가 질박함, 터와 집들이 살기에 좋다 등 5가지 아름다움이 옛 문헌에 기록돼 있다”는 문화 유산 해설사의 설명이다

오미리 마을 앞에 강변까지 광활하게 펼쳐진 들판에는 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는 곡식이 영글고 있었다. 지난 2008년 전라남도 행복마을로 지정된 후 오미마을에는 민박이 가능한 한옥 25개동이 신축됐다. 지난해 녹색농촌체험마을과 농협 팜스테이마을로 지정된 데 이어 전국 마을 가꾸기 경진대회에서 장려상을 수상할 정도로 잘 가꿔진 마을이다. 

오미리 은하수행복마을. 40가구 90명이 모여 사는 오미마을 주민의 80% 이상은 농사일을 한다. 주 작목은 벼·보리·밀이고, 특산품은 산나물·다슬기·콩·감자·녹차 등이다. 주민들은 지난해 전 가구가 참여한 영농조합법인을 결성했다. 2004년부터 시작한 1사1촌운동으로 오미마을은 방산업체 퍼스텍, 전남도 원예연구소에 이어 이명밧 정부 특임장관실과 1사1촌 결연을 맺기도 했다. 

구례군에는 비교적 마을마다 특색 있게 꾸민 마을이 있다. 인구 감소로 인해 빈집이 늘어가는 농어촌의 현실을 타개하고 지역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한 면단위 지역의 중심 마을이다. ‘농촌마을 종합개발’을 통해 조성되는 행복마을은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권역 등 8곳이다. 전남도가 농어촌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전국 최초로 추진 중인 ‘행복마을’이다. 

구례군 산동면 심원마을과 상위마을 그리고 구례읍 계산리는 귀농 귀촌을 희망하는 도회지 사람들이 찾아보는 대표적인 마을. 

구례군 산동면 심원마을은 ‘하늘아래 첫 동네’라 불린다. 반야봉과 노고단, 만복대가 삼면을 감싸안은 달궁 계곡 끝 마을. 해발 고도 750m의 심신산골에 위치하여 모기가 살지 못한다. 조선조 고종때 약초를 캐고 한봉을 키우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동네를 이루기 시작한 이후 지금은 10여 가구의 주민들이 모여 살고 있다. 반야봉에서 발원하는 계곡물이 마을을 감싸고 돌아 맑고찬 물이 마을 앞을 지나고 있어 마루에 앉아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린다. 더욱이 심원계곡 상류는 극상의 원시림이라 영구 자연 휴식년제로 지정되어 인적이 끊겼다. 오염 되지 않은 시원한 계곡물이 마을복판으로 흐른다. 물이 어찌나 차가운지 한여름에도 발담그기가 무서울 정도이다. 구례읍에서 27㎞로 한시간정도 소요되며 관광농원이 조성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면소재지에서 오른쪽으로 난 4번 국도를 따라 10여 분간 달려가면 상위마을이 나타난다. 전국에서 제일가는 산수유마을. 상위 마을에서는 봄철 산수유 꽃이 만개할 시기에 ‘산수유꽃 축제’가 열린다. 길놀이로 시작해 산수유떡 만들기, 산수유 순두부 만들기, 연나리기, 산수유 강좌, 노래자랑 등 다채로운 행사와 함께 전국 각지에서 나무마다 온통 노랗게 꽃망울을 터뜨린 아름다운 산수유 꽃이 장관이다.

상위마을 팜스테이 참여농가는 모두 14곳이며 시설은 모두 좋은 편이다. 산수유 꽃축제에 참여해 고로쇠 수액 채취, 산나물 채취를 하고 가을이면 산수유 열매따기, 산수유 차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상위마을에서 시작되는 노고단까지의 등반로는 추위가 혹독한 겨울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즐길 수 있다. 상위마을 아래 위치한 지리산 온천은 물좋기로 소문나 있다. 지하 470m에서 끌어올린 게르마늄 온천으로 피부미용, 신경통에 좋다고 한다. 자연 속에서의 농촌체험과 함께 현대적인 온천욕도 즐길 수 있다.


                                 구례읍 다무락 마을


구례읍 계산리 다무락마을은 강과 산, 맑은 계곡이 두루 어우러진 농촌 전통 테마 마을이다. 전남 구례군 구례읍 계산리에 자리를 잡고 있다. 지리산과 섬진강의 혜택을 받아 산나물과 밤, 감, 약초 등 풍부한 농산물은 물론 마을 앞에서 갓 잡아낸 다양한 섬진강 어종도 만나 볼 수 있다. 산간 마을이 어딘들 그렇지 않으리요만은 다무락마을 또한 인심 좋기로 유명하다. 

다무락마을은 현대화되어 이미 사라져버린 농촌 풍경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마을을 걷다 보면 아련한 옛 추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모습에 걸음을 멈추게 된다. 상유, 중유, 하유로 나뉘어 옹기종기 자리 잡은 마을에는 표정이 조금씩 달라 돌아보는 맛이 있다. 상유는 산간 오지 마을의 느낌이 남아 있고, 중유는 과수나무로 덮여 있으며, 하유는 섬진강을 마당처럼 거느리고 있다.


산간을 개간해 논을 만들 때 축대를 쌓게 되는데, 그 돌 축대를 다무락이라 한다. 예부터 이곳은 이와 같은 논과 밭이 많았으며, 그런 연유로 ‘다무락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섬진강을 끼고 흐르는 강변의 도로를 따라 가야만 한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매화, 배, 밤꽃의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고, 곧 다가올 가을에는 풍요로운 열매가 온 마을을 붉게 물들일 것이다. 풍광도 풍광이지만 1960, 1970년 대의 시골 촌집이 그대로 보존된 마당 있는 집에서 가마솥과 장작불에 밥을 지어 먹고 대나무 공예 체험, 닥나무를 이용한 한지 제작 체험, 섬진강 강태공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다.


다무락마을은 과수원이 특히 많은 마을이다. 여름이면 다칠세라 조심스레 열매에 종이옷을 입히는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기 그지없다. 또 가을이면 따사로운 햇볕을 받아 더욱 달콤해진 배와 감 등을 수확한다. 발길이 닿는 들마다 이름 모를 잡초이지만 한결 같이 정겨움을 더해준다. 마을에서는 몇 군데 민박을 운영하고 있어 숙박을 할 수 있다. 

지리산을 끼고 있는 구례는 공기가 맑고 물이 좋은 고장으로 유명하다. 구례군은 이런 잇점을 살려 여수·순천·광양과 경남 통영·거제·남해·하동 등 경상도와 전라도 8개 시·군이 정부 지원을 받아 ‘남해안권 관광거점’으로 개발된다. 지난 7월초 전남도와 경남도가 공동 신청한 ‘남해안권 관광거점형 지역계획 시범사업’이 국토교통부 ‘해안권 발전거점 조성 지역계획 공모사업’에 선정됐다. 특히 토지면은 남해 바다로 흘러드는 섬진강변에 위치한 산과 강 속에 보배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14. 강원도 고성

경북일보 김정모기자 2016년 9월 12일


동해품은 아늑한 시골…한반도 동부지역 '행복의 땅'


                             고성군 죽왕면 왕곡마을 전경


강원도 고성(高城)은 백두대간과 동해를 끼고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긴 해안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금강산과 설악산 등 빼어난 산세와 검푸른 동해바다를 품고 있다.

대한민국의 최북단에 위치한 고성군은 그 위치만으로도 특별한 존재다. 6.25전쟁 전에는 북한 땅이었다가 전후 수복된 지구다. 언젠가는 통일을 해야하기에 각별한 국민의 관심을 받아야할 곳이다. 물론 통일 이후에는 지금처럼 한적한 곳이 아니라 한반도 동부지역의 허리로 부상할 수 있는 기대의 땅이다. 

고성군 죽왕면 오봉1리에 자리잡은 아담한 왕곡마을. 이 마을은 바다와 시골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살기에 안성맞춤이다. 조선초 이래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6백년 세월을 살아온 마을이다. 해안에서 내륙쪽으로 약 1.5km 지점에 있으며 석호인 송지호(둘레 4km)와 해발 200m 내외의 야산 봉우리 다섯 개에 둘러 쌓여 외부와 막힌 ‘골’ 형태의 분지다. 석호(潟湖)는 해안의 만(灣)이 바다로부터 떨어져서 생긴 호수로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는 곳. 동해안에는 강릉의 경포, 속초의 영랑호·청초호 등 석호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마을의 동쪽은 골무산(骨蕪山), 남동쪽은 송지호, 남쪽은 호근산(湖近山)과 제공산(濟孔山), 서쪽은 진방산(唇防山), 북쪽은 오음산(五音山)으로 막혀 있고 마을 북쪽에 위치한 오음산에서 남서방향으로 마을을 관통하며 흐르는 개천(왕곡천)이 왕곡의 생명수다. 이 개울을 따라 이어져 있는 마을 안길을 중심으로 가옥들이 텃밭을 경계로 나란히 들어섰다.

왕곡은 길지로 알려졌다. 송지호에서 왕곡마을을 바라보면 유선형의 배가 동해바다와 송지호를 거쳐 마을로 들어오는 모습의 상서로운 길지형상이다. 이러한 방주형의 길지는 물에 떠 있는 배형국이어서 구멍을 뚫으면 배가 가라앉기 때문에 한때 마을에는 우물이 없었다고 전한다. 샘물을 이용하다 근대에 와서 우물을 사용했다는 게 고령군에서 추천한 함지수 화진포 관광안내 공무원의 설명이다. 실제로 지난 수백년간 전란과 화마의 피해가 없어 길지라는 이름값을 했고, 한국전쟁과 대형 산불 때에도 왕곡마을은 전혀 화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왕곡마을 초가 한옥


왕곡마을을 들어가는 오래된 주출입 도로는 송지호의 서쪽 길을 따라 마을의 남쪽으로 진입하는 길이다. 현재 차량으로 출입하기에 주로 일제 강점기 이후 개통된 7번국도로 넘어 마을의 북동쪽으로 진입한다. 왕곡마을의 지형적인 특징을 한 눈에 보기 위해서는 신작로 이전 옛날길로 마을에 들어오는 것이 운치가 좋다.

왕곡마을은 14세기부터 연원한다. 고려말 역성혁명에 반대한 선비들의 상징인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인 양근 함씨 함부열이 강원도 간성에 낙향 은거하면서 그의 손자 함영근이 왕곡마을을 개척했다. 특히, 19세기 전후에 건립된 북방식 와가와 초가집들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한 체 잘 보존되어 2000년 1월 중요민속자료 제235호로 지정된 마을.

인구 증가에 따라 1884년에는 왕곡마을이 금성, 왕곡, 적동(笛洞) 세 마을로 분리됐다가 일제 강점기 때 다시 합쳐 오봉(五峰)으로 불렸다. 현재의 왕곡마을은 금성(錦城)과 왕곡(旺谷) 두 마을이 합쳐진 오봉1리다.

본 지면 연재물의 현지를 자문한 정기조 국토여행 작가는 “왕곡마을은 조용하면서도 온화하고 가까이 바다를 끼고 있어 귀향을 꿈꾸는 이들이 만족할 수 있는 아름답고 아늑한 곳인 것 같다”고 말했다. 

                            왕곡마을 왕곡천변 마을안길


고성군에는 빼어난 힐링처도 여러 곳이 있다. 유명한 화진포 호수와 화진포 해수욕장이다. 야트막한 산이 있는 해안선과 호수를 따라 김일성별장으로 알려진 ‘화진포의 성’, 이승만별장, 이기붕별장이 나란히 있어 한국 현대사의 영욕을 말해준다. 북한이 한때 점령하고 있을 당시 북한군 귀빈과 김일성의 휴양시설로 사용된 기록 때문에 김일성별장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원래 ‘화진포의 성’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경치가 뛰어난 이 곳에 개화기 때 외국인 선교사가 지은 건물이다. 또한 이승만별장은 화진포호수가에 있다. 이승만대통령이 청년 기독교운동을 하던 시절 와본 이곳 화진포를 못 잊어 언덕에 별장을 짓고 약 6년간 사용했다고 한다.

세계적 순례 길인 스페인 ‘산티아고 가는 길’만 국제적 명품 길인가. 강원도에도 ‘관동별곡 800리’라 알려진 해안도로가 명품길이 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송강 정철(1536∼1593)이 지난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관동지방을 유람한 후 산수·풍경·고사·풍속·소감 등을 읊은 조선 시대 대표적 가사인 ‘관동별곡’의 배경지다. “강호(江湖)에 병이 깊어 죽림(竹林)에 누웠더니 관동 팔백 리의 방면(관찰사)을 맡기시니…”로 시작하는 천재적 문인 관료의 문학적 상상력의 현장이다. 

‘관동 팔백 리’는 관동 8경에 포함되는 현 북한 땅인 강원 통천군의 총석정과 고성군 삼일포를 거쳐 해안 길을 따라 남한의 고성∼속초∼양양∼강릉∼동해∼삼척시 성내동 죽서루에 이르기까지의 길이다. 북한을 제외한 남한 지역은 총 259㎞로 800리보다 150리 이상 짧은 6백오십리에 머물고 있다. 지금은 한적한 시골 해안 길에 머물고 있지만 옛날 신라 시대 화랑들이 금강산을 순례하던 길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청소년 국토순례 길인 셈이다. 

정철의 유람 길은 지난 2009년 ‘역사와 문화가 깃든 명품 탐방로’로 부활했다. 보행로가 없던 19곳 26.95㎞를 신설하거나 정비하고 보행 교량 5개 244m를 신축했다. 2010년과 2011년 국토해양부·문화체육관광부·행정안전부 등 3개 정부 부처가 각각 녹색 명품 길로 선정했다. 이 길은 대부분 해안선 코스로 푸른 바다와 기암괴석, 해송이 어우러진 비경 등 동해안의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문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자유롭게 걸을 수 있다. 관동 8경은 갈수 없는 북한 이외 경북(울진군 망양정, 월송정)과 강원(고성군 청간정, 양양군 낙산사, 강릉시 경포대, 삼척시 죽서루)에 자리잡은 정자·사찰 등을 볼 수 있는 최적의 관광코스다.

2016년6월 장장 770㎞에 이르는 동해안 걷기여행길로인 해파랑길도 역시 명품로다. 부산 오륙도에서 시작돼 울산과 경북 강원을 거쳐 최종 고성으로 가는 길이다.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해안도로 등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걷기여행길이다. 국내 최대의 석호로 둘레만 16㎞에 이르는 고성군 화진포 호수길과 거진항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하얗고 우뚝 솟은 거진 등대길, 송림이 우거져 울창한 송지호 호수길 등이다. 이 길을 걸으면 길과 문화공연, 다양한 먹거리를 즐기며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마음껏 힐링한다. 해파랑길이 세계적인 도보여행길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걷기를 사랑하는 국민들의 동참이 필요하다. 

고성군에는 그 외에도 토성면 성대리 등 아담한 마을들이 산재해있다. 타향이지만 누구나 고향처럼 사랑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고성은 매력이 있다.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가 에세이집 ‘기억 속의 보좌신부님’(흰물결)에서 10년 가까이 고성으로 낙향해 농사를 지으면서 사는 즐거움을 기록해 화제다. 그는 지난 2008년 부인과 둘이서 고성군 토성면으로 이주, 990㎡(약 300평)의 밭을 일구며 살고 있다. 언젠가 시골에서 살겠다는 도회지 사람들의 평소 꿈을 가장 도회적으로 살아온 그가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책에는 ‘인생 3모작’에 대한 안 전 부총리의 삶의 철학이 잘 드러나 있다. 1모작이 취업 후 퇴직까지의 기간, 2모작이 은퇴 후 15∼20년간 자신의 ‘전공’과 비슷한 일을 하는 시기라면 3모작은 ‘100세 시대’에 대비한 변화의 시간이다. 

안 전 부총리는 이 3모작 시기에 “큰 도시를 떠나라”고 조언하고 있다. 그는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즐기고 싶은 사람, 검소하면서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시골생활이 또 하나의 행복한 힐링처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15.경기도 여주

경북일보 김정모기자 2016년 9월 19일


귀농·귀촌으로 전원생활 이상세계 누릴 수 있는 낙토


                  기름진 옥토를 만드는 남한강이 있는 천혜의 여주


 ‘여강(驪江)’이 꿰뚫고 지나가는 경기도 여주시는 서울 사람들이 경기도내에서 찾는 전원 생활 1순위 지역으로 손꼽힌다. 여강은 여주(驪州)에 흐르는 남한강의 별칭이다. 여주의 옛 이름 황려에서 따왔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이 고을이 황려현이었다. 여말에 여흥군을 거쳐 1469년(조선예종1) 여주목으로 지금의 고을 이름이 됐다.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은 여주시, 동쪽은 강원도 원주시다. 

여주는 넓은 들녘과 비옥한 땅이 낙토라고 부를 만하다. 예로부터 질 좋은 쌀의 산지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궁중에서 사용되는 그릇 등을 생산했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원이 있어 도자기로도 이름난 곳이다. 오늘날 여주가 도자기 축제로 유명한 것이 다 이런 연유다. 조선 시대 한강수계의 나루터 중 큰 곳으로 알려진 이포나루와 조포나루가 있었다. 

여강이라 부르는 여주의 남한강은 주변의 풍정과 어우러지며 그 수려함이 뛰어나다. 조선시대 문인 서거정(徐居正)은 여강에 대해 “여강 물은 월악(月岳)에서 근원하여 달천(獺川)과 합하여 금탄(金灘)이 되고, 앙암(仰巖)을 거쳐 섬수(蟾水)와 만나 달려 흐르며 점점 넓어져 여강이 되었다. 물결이 맴돌아 세차며 맑고 환하여 사랑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이런 곳에 명촌(名村)이 없을리 만무하다. 여주에서 예로부터 손꼽히는 마을은 외사리, 금당리, 매룡리. 

금반형의 여주 흥천면 외사리


하늘로 치솟은 천덕봉(天德峯)은 흥천면 외사리(外絲里)의 비옥한 들녘과 구름을 감싸 원적산(圓寂山) 낙맥(落脈) 중 가장 높은 정상에 자리잡아 여주, 이천, 광주 등지의 3개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바로 그 산기슭 아래 자리한 외사리, 상대리, 현방리 언저리 40리 안을 금반형이라 부른다. 그것이 어디를 꼬집어 말하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옛 사람들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하고 마치 옥녀가 상을 들고 있는 형세여서 옥녀봉반형(玉女奉盤形)이라고도 한다. 이 금반형에 집터를 잡으면 극(極)을 이뤄 산줄기와 물줄기가 태극형으로 서로 어울리는 곳이다. 남쪽에 조산(鳥山)이 있고 장관대(壯觀臺)에 바로 산과 물이 엉키듯 사수동파(四水同派)가 백리천(百里川)하여 서로 휘감아싼 이 지역이 금반형(金盤形)이다. 금반형 소문이 방방곡곡에 퍼져 전국 각처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정착하여 동리를 이룬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때 명(明) 군 사령관로 왔던 이여송(李如松)이 금반형에 대한 비기(秘記)를 알아 두사충(杜士沖)에게 금반형에 가서 살라 했다는 전설이다. 숙종 때 정승인 김관주(金寬柱)가 청(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어느 고관이 조선에 금반형이라고 하는 곳이 있으니 한번 찾아보라고 하며 비기를 수록한 문헌을 주었다. 김관주가 귀국하여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 이곳 금반형에 와서 아흔아홉 칸의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금반형이라 부르는 외사 2리에는 쌀이 너무 많이 생산되어 흙으로 쌀두지(뒤주)를 만들어 보관했다 해서 흙두지 마을이 있으며, 해방후 지금까지 흉년을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여주 가남면 금당리

쌍마(雙馬)가 치달아오를 듯 천마산(天馬山)이 좌정한 언저리가 금당리(金塘里)이다. 경미년 난리를 당한 후 금당리로 바뀐 것. 6·25 전쟁 등의 전란을 겪어온 백천 조씨(白川趙氏)가 400여 년(14대)을 지켜 살아온 마을이다. 산세의 높고 낮은 굴곡이 절묘하며, 꽃봉오리처럼 에워싼 영마루에 눈부신 햇살을 받은 뭉게구름은 솜처럼 피어난다. 금당리는 조선중기 함경북도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겸 경성도호부사(鏡城都護府使) 조상주 장군(趙相周 將軍)이 태어나 자란 고장이란다. 멀리 오압산을 넘보면서 마치 쌍마가 적진을 향해 휘달리는 형세인데 사면에 높고 낮은 굴곡을 이루며 자리한 산명(山名)과 동명(同名)만 보아도 가히 짐작이 되는 곳이다.

『정감록』에 “양금지간(兩金之間)에 가활만인피란지지(家活萬人避亂之地)하여 십이실지중(十二室之中)”이라 했다는데 군내 십이실은 구비실, 우뢰실, 모래실, 덕실, 음실, 품실, 다리실, 새미실, 마구실, 어실, 각기실, 오금실을 뜻하고 양금지간은 금대와 금교동 사이를 말하니 바로 금당이라는 것이다

여주시 매룡동

크고 작은 산봉(山峯)을 물그림자 지며, 즐펀한 들녘을 운치 있게 여강(驪江)을 굽어보듯 좌정(坐定)한 산이 황학산(黃鶴山)이다.

아늑한 이곳에 자리잡은 천년고찰 신륵사(神勒寺)가 있다. 강변 고찰로 유일한 여주 신륵사 경내에는 조선후기 권신 판돈령 김병기(金炳冀) 송덕비가 눈에 띈다. “김병기는 신륵사에 시주하여 법당과 구룡루 등 신륵사를 크게 중수했고, 여주의 대화재로 백성들이 고통 받을 때 사재를 털어 구휼했다”고 여주시청 추성칠 홍보팀장은 말했다. 김병기는 판돈령(判敦寧) 좌찬성 등 정승과 판서 사이 종1품을 지냈으며 흥선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여주에 낙향해 살았다. 흥선대원군이 아들을 낳으려면 김병기 같은 사람을 낳으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웅특했다는 그는 조선말 양요로 한성에서 양반들이 탈출하자 머나먼 여주에서 가솔을 이끌고 입경했다는 등 족적을 남겼다. 양반이 아닌 전라도 판소리꾼 송흥록에게 벼슬을 줘 판소리가 전국에서 활개를 치게 하는 한류를 만들어냈다. 

연촌(淵村) 마을 옆 동리 양촌(陽村)이란 곳을 지나면 한 동리가 있는데 승천하는 용의 비늘이 매화꽃처럼 흩날려 떨어진 동리라 하여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으로 마을 이름조차 매룡동(梅龍洞)이다. 일대에 영월루(迎月樓)라는 누각이 있는데 서하군(西河君) 임원준(任元濬) 선생이 당(堂)을 짓고 사우(四友)라 이름하여 경·목·어·초(耕·牧·漁·樵), 즉 농부, 목동, 어부, 초부와 같이 벗하며 지내자는 뜻에서 취한 편액을 달았다. 이 황학산(黃鶴山)을 승산(勝山)이라고 부르는데, 이 승산(勝山) 언저리에서 세종대왕 어머니 원경왕후, 명성황후 여흥 민비 등이 태어난 것이다. 민비는 조선말 정국의 여장부였으나 왕조를 지키고자 청나라 일본 군대를 끌어들여와 나라를 패망시키는 장본인이 됐다. 

여주에는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스러진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한이 서려 있다. ‘驪江迷懷(여강미회)’라는 그의 절명시다. 

끝 없는 천지에 끝 있는 인생이로고(天地無涯生有涯)

호연(浩然)한 뜻 어디로 돌아가련가(浩然歸志欲何之)

여강(驪江) 한 구비 산은 그림 같은데(驪江一曲山如畵)

반은 단청 같고 반은 시 같구려(半似丹靑半似詩)


이색은 1396년 잃어버린 왕조의 마지막 충신으로서 강가에 서 죽음이 임박한 운명을 예감했다. 돌아갈 곳이 없는 막막함을 여강의 아름다움에 애써 감추려했다. 한 구비 그림 같은 여강 앞에서 토해내는 한 편의 시다. 역성혁명을 반대했던 이색은 경상도 영해 출생의 한산이씨로 여말의 거의 모든 사대부들은 그에게 배우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여강으로 유배를 가던 도중 감영 벼슬아치가 주는 술 한 잔을 받아 마시고 죽었다. 야사에 전하는 독살설의 연원이다.


역사에서 흥망성쇠를 지켜본 여주는 21세기 귀촌 귀농 낙향의 땅으로 거듭나고 있다. ‘자랑스런 여주인상’을 받은 김영래 내나라연구소 이사장은 “도시에 살아도 늘 마음은 농촌에 살았다”고 술회했다. 그는 경남대 아주대 교수, 한국정치학회장,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공동대표, 동덕여대 총장을 지냈다. 

일찍이 서거정이 자연에 귀거래(歸去來)하고 싶다는 소망을 읊은 시다. 


사람의 생애 백 년도 못되거늘(人生百年內)

아직 백 년도 차지 못했네(百年亦不滿)

세상의 티끌 속에 얽혔으니(況?塵網中)

어찌 맑고 한가로이 지내리(何能任蕭散)

저 여강(驪江) 물 바라보니(瞻彼驪江水)

물 맑아 갓끈 씻을 만 하네(水淸纓可澣)

내 세속에 적합한 취미 없어(我無適俗韻)

시세(時勢)의 차고 더움 못 따르지(不隨時冷暖)

늙어버렸구나 내 벼슬 버리고서(老矣謝簪笏) 

적송자(赤松子)와 함께 살리라(行與赤松伴)

전원생활을 이상의 세계에서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여주다. 

일몰에 장관인 여주 남한강과 황포돛배


세종대교가 보이는 여주 남한강


여주시가지 (신륵사가 보이는 여주 영월루)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17. 제주도 애월읍·효돈동

경북일보 김정모기자 2016년 10월 12일


바다·산·오름…신이 빚은 제주, 도시민 마음 힐링처


                   물색이 아름답기로 널리 알려진 제주 협제해수욕장 전경


제주도(제주특별자치도)는 한국의 부속 도서(섬) 중에 가장 크다. 아울러 한국령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다. 그런데 분위기가 한국 본토와 다르게 이국(異國)적이다. 제주도는 근래에 와서 단순히 아름다운 곳, 힐링의 곳으로 머물지 않고 살기 좋은 곳으로 떠오르고 있다. 황금만능시대에 돈도 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 서귀포시는 명품감귤로 고소득 농가가 많기로 1등이다. 통계청과 전국 시도가 공동으로 조사한 ‘2015 농림어업총조사’결과에 따르면 시군 단위로 서귀포시는 전국에서 첫 번째로 많았다.

히는 정겨운 마을이다. 수렵과 채집을 하면서 떠돌던 고대인이 가장 정착하여 살고 싶은 곳이 아니었을까. 따뜻하고 숲이 우거진 냇가 그리고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해산물들이 있어 생존의 터전으로 더없이 좋았을 것이다. 지석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 이후 사람이 살기 시작 했으리라. 하효마을은 고려시대 탐라 16개 속현 중 하나인 호아현의 관아가 있었다. 하효리에서 멀리 떨어진 돈내코 인근 지역에 힐링 휴양림으로 각광을 받는 편백나무 숲이 울창하다. 마을 사람들이 자치적으로 이루었다고 하니 한국새마을운동의 발상지가 아닌가. 마을공동체의 역량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이기도 하다. 

제주시 애월읍(涯月邑)도 살기 좋은 곳으로 소문나 이주민들이 속속 들어온다. 애월리에 있는 애월읍사무소는 시원한 해변을 풍광으로 한 건축물이 아름답다. 

애월읍 용흥리는 마을 전체를 품으면서 창구터 짐빌레 무남동산. 제안이동산 난그못 쇠죽이못으로 좌우 청룡 백호로 뻗어 있는 품안에 둥지를 틀어 놓은 지세다. 

애월읍 유수암리는 옛날, 항몽삼별초군과 함께 따라온 고승이 절산 아래 샘을 따라서 조그마한 암자를 지어 태암감당(泰岩龕堂)이라 이름 짓고 살기 시작한 설촌이 시초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 이 지역에 목장지대로 목자와 화전민들이 거문이물 주위로 모여들어 한 마을(거문덕이)됐다. 그 후에 1590년 경, 이 지방 좌수 홍덕수가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켜 유수암천을 중심으로 모여 살게 했는데 지금까지 이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애월읍 항파두리 토성은 몽고에 항거하여 싸우다 죽은 사람들의 혼이 남아 있다. 여몽연합군에 대항해봤자 패배가 확실하지만 삼별초는 살기위한 굴복보다 싸우다 죽는 길을 택했던 고려 무인들의 마지막 기개가 서려있다. 

제주는 힐링으로 한국에서 단연 최고의 땅으로 꼽힌다. 언제 가도 좋지만, 최고의 계절은 단연 초가을이다. 바람이 덜 불고 폭설이 없어서다. 바다와 산, 그리고 오름으로 이뤄진 다채로운 풍경은 그림을 스케치 감이요 문학청년들의 글감이다. 제주가 매력적인 건 이런 빼어난 천연자원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개발한 제주인들의 노력도 한몫했다. 제주의 옛길을 이어붙여 만든 올레길은 전국적인 걷기 열풍을 이끌었고, 지자체마다 도보여행길 붐으로 이어졌다. 

제주에 매혹돼 이 곳 저 곳을 다니다 날이 어두워 길을 잃고 헤메면서 또 다른 제주의 밤 풍경을 발견했다. 어둠 속에서 제주의 산복도로 숲길을 승용차로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반딧불이가 날아다니고 청아한 풀벌레 소리가 그득한 숲길에 감탄이 질러진다. 한밤중에 올려다보는 제주의 밤하늘의 별은 우주의 장엄함을 실감하게 했다. 

제주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은 오름을 꼽는다. 제주에는 용눈이오름 등 오름이 많다. 오름은 야트막한 언덕 같은 구릉이다. 제주 전역에 386개나 된다는 오름에는 억새와 각종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저마다 장기자랑을 하듯이 피어난다. 오름에 올라 능선이 그려내는 곡선은 풍만한 여성의 가슴보다 ‘관능적’이다. 능선에 기대어 있는 남성처럼 억센 억새의 물결침은 장관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시야의 장쾌함을 보지 않은 자에게 무어라 설명하겠는가. 그 중 군산오름은 1천년 전 고려 목종 때 화산폭발로 솟아난 높이 335m 오름이다. 

제주 해변의 아름다움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고, 저마다의 독특한 정취가 빼어나다. 곳곳의 해변의 늦은 시간에는 구름이 낙조에 벌겋게 물들어 있는 모습이 지천에 널려 있다. 곽지과물해변은 바다가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협재는 물색이 아름답기로 널리 알려졌다. 협재의 바다는 밀물 때보다 바다가 멀리 나간 썰물 때 몇 배나 더 아름답다. 곽지과물해변에는 용천수가 나온다. 빗물이 지하로 스며든 후에 땅 속을 흐르다가 암석이나 지층의 틈새를 통해 지표로 솟아나는 민물이다. 해변으로 이어지는 해안에는 바닷가에 지어진 낮은 집들이 늘어서 있는데, 해녀들이 하는 횟집에서 비싸지 않는 가격으로 싱싱한 횟감을 맛볼 수 있다. 

제주도 서귀포시 산록남로(호근동 산1번지) ‘서귀포 치유의 숲’ 은 힐링처로 안성맞춤. 제주의 곶자왈에 분포되어 있는 난대림, 온대림, 한대림의 다양한 색상과 평균 수령 60년 이상 된 편백 나무숲이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한다. 옛 화전민 거주지와 밭을 경계석으로 한 돌담, 표고버섯 재배했던 흔적 등 문화체험과 치유 건강이 동시에 가능한 치유의 숲이다. 일대 산림청 국유림 174㏊에 조성한 치유의 숲은 숲길을 걷고 ‘숲의 멜로디와 함께 차 마시기’ 등 치유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다. 해발 320∼760m인 이곳에는 난대림, 온대림, 한대림이 골고루 분포한다. 편백과 삼나무숲, 빽빽이 들어선 동백나무 숲이 인상적이다. 치유의 숲에 들어선 힐링센터에서는 산림치유사의 도움으로 족욕 등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고 삼나무로 지은 힐링하우스에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놀멍, 쉬멍, 엄부랑, 산도록 치유숲길, 가베또롱 돌담길 등 제주어로 이름을 붙인 9개 치유숲길도 만들었다. 길이는 0.7∼1.9㎞로 길지 않게 조성했다.

박명숙(55·대구수성구지산동)씨는 “도시에서 놀란 뇌를 원래 상태로 돌려 놓은 것 같아 말 그대로 힐링이 되는 것 같아 정말 좋다”며 “많은 분이 이곳에서 치유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씨는 이곳에 와서 늘 머릿속에 무언가를 생각하는 생각을 내려놓았다고 고백했다. 숲에서 살살 불어오는 바람맞으며 새소리 들으며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에 안성맞춤이어서 삶에 지치고 세상에 찌든 사람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기문을 느낀다.

화산섬 제주도는 돌의 고장이다. 사람들이 사는 집이나 울타리도 제주도에 풍부한 현무암을 이용해 만들었다. 제주의 사람들은 돌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슬기롭게 살아왔다. 제주시 조천읍 남조로에 있는 제주 돌문화 공원은 이러한 제주의 돌문화를 집대성한 역사와 문화의 공간이다. 제주 돌문화 공원은 제주의 형성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물이 있는 돌 박물관과 돌문화 전시관, 그리고 야외 전시관으로 나뉜다. 제주도의 지질학적 형성 과정과 제주도에 있는 암석의 기원에 대해서도 자세히 볼 수 있다. 제주돌문화공원은 한 때 문화관광부가 실시한 문화 생태 관광자원 평가에서, 전국우수사례 A등급을 받았다.

제주도에는 박물관 올레길 걷기, 맛집기행, 건축기행거리가 즐비하다. ‘아티스틱 제주’에는 조각가, 건축가, 화가의 작품이 널려 있다. 방주교회와 본태박물관은 세계적 건축가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방주교회는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이 설계한 작품으로 2010년 한국 건축가협회 대상을 수상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형상화했다. 물 위에 떠있는 배를 나타내기 위해 얕은 수조를 만들었고 그 가운데 교회 건물을 세웠다. 

파도를 헤치고 나가는 커다란 방주가 순항하는 듯 보이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떠오른다. 지붕 또한 햇빛과 날씨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이타미 준은 방주교회와 함께 핀크스 골프 클럽하우스, 비오토피아 박물관을 자연친화적으로 설계해 2003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를 수상했다. 

옛날에는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던 제주도의 자연은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장대함이 있다. 자연을 신(神)이 만들었다면 그 위대함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여기에 인간의 역작(力作)을 더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노는 제주’가 아니라 ‘보는 제주’, ‘즐기는 제주’로 더해가고 있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18. 경남 합천군 가야면

경북일보 김정모기자 2016년 10월 17일


산세 수려하고 물·산·들판 어우러져 환상적인 이상향


                합천댐문화관에서 바라본 황매산자락에 자리한 대병면 전경


 이상향으로 알려진 정감록 ‘십승지(十勝地)’ 중에 가야산 만수동(萬壽洞)이 있다. 정감록에는 가야산 남쪽 만수동은 그 둘레가 이백리나 되며 오래도록 몸을 보전할 수 있는 곳이다(伽倻山下南 有萬壽洞 周回二百里 可得保有)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예언가 남사고(南師古)의 ‘산수십승보길지지’ 등 여러풍수지리 대가들도 십승지로 가야산의 만수동을 꼽고 있다.

가야산 만수동은 어디인가. 가야산 밑 남쪽이라니 우선 경상남도 합천 일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곳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가야면은 ‘조선십승지 읍면장 협의회’ 회원이다. 지난 5월 27일 열린 제23차 ‘조선십승지 읍면장 협의회’ 회의에 합천군 가야면을 비롯해 풍기읍, 춘양면, 화북면, 운봉읍, 용문면, 유구읍, 영월읍, 무풍면, 변산면 등 10개면의 읍면장이 참석했다. 

가야면은 동으로 고령군, 서로 거창군, 남으로 야로면과 묘산면, 북으로 성주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합천읍에서 34.8km 북쪽에 있다. 가야면은 88고속도로가 이천리에서 성기리를 통과한다. 가야면은 해인사와 내암 정인홍 선생의 문화유산과 가야산, 매화산, 홍류동 계곡등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으며, 청정지역에서 생산되는 우렁이쌀, 황토사과, 고랭지 채소, 파프리카, 황토한우등 친환경 농축산물이 유명하며, 예로부터 도자기 산업이 발달했다.

가야면에서 한 일년 간 살고 있다는 박종묵 가야면장은 “가야면은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침수되거나 홍수 피해가 없다. 산세가 수려하고 지덕(知德)이 두터워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도 합천호 위에 앉아 있는 수려한 곳이다. 대병면은 군립공원 황매산 아래 자리 잡고 황매산을 모산으로하는 금성산 악견산 허굴산 등 대병 삼산이 있는 산중 호반 마을. 100대 명산중 하나인 황매산(黃梅山,1108m)은 봄철엔 연분홍색 철쭉으로 가을엔 은빛의 억새로 유명한 산이다. 합천호를 두르는 백리 벚꽃길과 주변에 나지막한 산들, 그리고 다랭이 논 들판…. 모두가 아름다움에 모자람이 없다. 요즈음은 꿀 고사리 두릅으로 꽤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회양(回陽)은 룡골, 가산, 새터, 붉은 바위, 돌댐이, 오리밭, 소정 아랫마, 밤나무정(율정), 돌담미(乭大尾 : 석장), 붉은바위(주암). 오리밭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돌담미는 경치가 좋고 물이 맑은 곳으로 현재 두산중공업 연수원이 있다. 동틀 무렵 물안개 자욱하게 피어나는 합천호는 신비로움 자체이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회양리에서는 늘 볼 수 있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석양 때 합천호 위에 길게 뻗는 산 그림자가 온화하면서도 강렬하다. 국토여행가 박경심씨(대구수성구지산동)는 “누구든지 이곳에 와 보면 한눈에 ‘와 예쁘다’라는 탄성이 나올 만 한 곳으로 물과 산 들판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곳”이라고 말했다. 

이 곳 주변에 있는 합천댐 물문화관은 K-water 경남부산본부가 지난 10월 12일 동영상 중심의 콘텐츠 확충과 방문객 편의시설를 개선 해 재개관했다. 1층 전시실은 합천댐의 어제와 오늘, 합천호 생태계 등 7개의 3차원 동영상 콘텐츠로 디지털화했고, 2층 전시실은 작품 전시와 지역관광명소 사진을 상시 전시하고 있다.

합천호는 황강 상류를 막아서 조성했다. 남명(南溟) 조식(曺植) 선생이 합천 함벽루에서 바라본 황강(黃江)의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돼 시를 읊었다고 한다.

‘남곽자(南郭子)처럼 무아지경에 이르진 못해도/강물은 아득하여 알 수 없구나/뜬구름의 일을 배우고자 하나/오히려 높다란 바람이 흩어 버리네.’ 

남명 선생은 함벽루에서 자신의 학업을 닦음이 쉽지 않음을 고백하지 않았나 싶다. 황강은 합천군 청덕면의 가현리와 미곡리에서 낙동강과 만난다.

황강의 ‘황(黃)’은 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설도 있고, 옛 삼가현 황산(黃山)과 관련돼 있다는 견해도 있다. 황강은 강바닥이 둘레보다 높은 천정천(天井川)이었다. 그래서 강변 양쪽에 기름진 논이 생겨나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는 토양이 됐다. 또 정양늪이나 박실늪·연당지 같은 습지도 많아 다양한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가야산 아래 해인사(海印寺)가 자리 잡은 터도 좋다고 소문나 있다. 팔만대장경이 오랫동안 보관 유지 해 온 것이 그냥 될리 만무하다. 유명한 해인사 대장경판(藏經板, 국보 제32호), 해인사 장경판전(藏經板殿, 국보 제52호)등이 있는 해인사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해인사에 보관 중인 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고려 초조대장경을 바탕으로 송, 거란의 대장경을 비교· 교정하며, 고려 고종 23년부터 38년까지 16년간에 걸쳐 완성됐다. 가장 완벽한 불교경전인 고려 재조대장경. 고려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은 750여년이 지난 지금도 81,258장의 경전 속에 단 한자의 빠짐도, 틀림도 없는 5천2백여만자를 기록한 목판본으로 현존하는 목판대장경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재에도 등재됐다. 경남도가 세운 대장경테마파크는 고려대장경의 역사적, 문명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인류 공동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이해와 공감의 장소다. 대장경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경전 전래와 수집과정, 천년을 보내왔던 장경판전의 숨겨진 과학성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그 본디 이름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그 외에도 합천군 초계면은 곡창지대로 물산이 풍부해 여유가 있는 곳이다. 주변에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기전 백제가 빼앗았던 대야성이 합천읍이나 초계면중 하나라는 설이 유력하다. 합천군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삼가군과 초계군을 합쳐 합천군이 됐다. 합천은 신라와 가야(500년대), 신라와 백제(600년대), 통일신라 또는 고려와 후백제(900년대) 시대에는 군사 요충지였다.

가야산은 성주와 합천의 걸쳐있어 예부터 성주를 가야산 만수동으로 꼽고 있기도 하다. 성주군 가천면 옥계(포천계곡)와 나란히 달리는 903번 도로를 따라 신계리를 지나 마수리가 그곳. 마수리 곰실(熊谷) 뒷산이 만수동이라는 설이 있다. 이곳 만수동은 아주 옛날 수동(壽洞)으로 불렸고 지금의 마수동(馬水洞)은 1895년 고종 때 만수동을 고쳐 지은 이름이다. 이 만수동에 대해 풍수지리가들의 얘기다. “뒤편으로 태조산에 해당하는 가야산과 탐라목성인 현무봉이 자리를 잘 잡았고 좌청룡과 우백호에 해당하는 산들의 형세도 빼어나다.“ 만수동 중앙으로 흐르는 계곡은 맑은 정기를 간직하고 있다. 

‘성주군지’ 가천면 마수조(條) 기록에도 ”마수리는 가야산의 아랫자락으로서 예부터 병란을 피하고, 생리의 덕이 있는 명지의 일처로 일컬어져 만수동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예부터 난세에 많은 은사들이 이곳을 수양처로 삼아 정착했“고 했다. 또 곰시조에는 ”가야산 산봉의 동북쪽의 가파른 산언덕 아래 자리한 마을로서 마수 마을과 더불어서 천혜의 피병지이며, 난세의 은거지로 알려져 있다“고 적혀 있다. 마수리는 대부분의 승지와는 달리 북향이다. 

정감록의 만수동(萬壽洞)은 그 둘레가 이백리(周回二百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느 지역이든지 승지로 알고 가꾸는 곳이면 만수동이 아닐까.


            십승지 가야산 만수동으로 추정되는 곳 중에 하나인 합천군 가야면 승상마을 전경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19.부안·고창 반암마을

경북일보 김정모기자 2016년 10월 24일


'신선이 놀러왔다' 전설처럼 아름다운 자태 천혜의 승지


                                       부안 반암마을


정감록 십승지(十勝地) 중에 하나인 전라도 호암(壺岩)이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이라는 주장과 고창군 아산(반암)이라는 주장이 서로 용호상박 중이다.
부안군은 변산면 중계리에 십승지 표석을 해놓고 있고, 십승지 지역 읍면장 단체인 ‘조선십승지 읍.면장협의회’도 변산면이 가입돼 있다.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와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 2014년 3월 ‘한국천하명당 십승지 친환경농산물 공동마케팅과 히스토리 투어(History Tour) 사업’을 공동으로 선정했다.

항구로 유명한 곰소항 격포항 등 풍성한 바다, 넓은 들판, 변산이라는 명산이 있어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는 변산반도로 널리 알려졌다. ‘생거부안(生居扶安)’이라 불릴 만큼 산과 바다 들이 잘 조합된 곳이다. 곰소의 소금과 젖갈, 그리고 격포항의 수문장 채석강의 절경으로 보면 부안(扶安)은 지명 그대로 편안함을 돕는 곳이다.


                                        부안 반암마을의 인천강


우리 나라 십승지는 거의가 백두대간 자락에 안겨 있지만, 백두대간에서 벗어난 곳이 변산 동쪽 호암(壺岩)이다. 변산은 조그만 야산과 논밭을 지나는 평지돌출형 산이다. 고창의 방장산(方丈山)과 고부의 두승산(瀛洲山)을 합쳐 전라도의 삼신산으로 여긴다. 또한 경관이 일품이어서 전북도내에서는 ‘춘변산(春邊山)추내장(秋內藏)’이라 하여 ‘봄꽃 경치는 변산이오 가을단풍은 내장산’ 을 꼽을 정도다.
21일 십승지 취재진을 맞이한 변산면 총무팀장은 중계리를 안내했다. 그러나 그곳은 승지라는 이름답게 사람 살 만한 곳으로 좋은 곳인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십승지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이희성 풍수지리가도 "부안의 내변산은 전란시 피난지이지 사람들이 살만한 곳은 아니다. 과거 전란시에도 시인묵객들이 잠시 몽을 숨기는 곳"이라고 말했다.

부안이라면 변산면 중계리보다는 보안면 우반동(우동리)이 오히려 승지로서 요건을 갖추고 있다. 우동 초입에서 북쪽을 올려다보면 옥녀봉(玉女峰)이 보이고, 멀리 산 끝자락 아래로 굴 바위가 보이는데, 굴안에서 입구를 보면 마치 병을 세워 논 모양이라 하여 호암(壺岩, 병바위)이라 한다는 것이다. 이곳은 삼면의 높은 산록과 앞쪽의 천마사가 앞을 막아주면서 천혜의 삼태기형국이다. 이곳은 허균과 유형원이 한 때 낙향했다.

허균은 해운판관이 되었을 때 처음 부안을 찾았다가 그 뒤 공주목사에서 파직된 이후 부안을 다시 찾아와 우반동에 와 정사암(靜思庵)에서 머무르다 한양으로 돌아갔다. 전라도 함열에서의 유배가 풀리자 1611년 11월 우반동으로 와서 1613년까지 이곳에 살며 <홍길동전>을 지은 곳으로 추정된다.


                                             병바위


1653년, 우반동에 32살의 젊은 중농주의자 반계 유형원(1622~1673)이 찾아온다. 중농주의를 바탕에 둔 기록이 영조 때 발간된 <반계수록>. 반계의 집은 사라졌지만 이곳에 반계서당을 다시 지어놓았다. 우동리에선 줄포만 너머 선운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유형원은 지금의 우동리 기슭에 터를 잡고 살면서 우반의 반(磻)을 따서 호가 반계(磻溪)다.

최근 부안군의 인근인 고창군 아산면(면장 박호인) 반암마을이 정감록이 말하는 십승지 호암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고창군도 십승지 지역 마케팅에 적극 나서고 있다. 고창군은 이미 2012년 8월 ‘전국 십승지 조사 연구용역’을 발표하고 정감록의 호암이 부안군 변산면이 아닌 고창군 아산면 호암(壺岩) 아래 반암마을이라고 주장했다. 고창군 아산면 호암 아래 반암마을이라는 설이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전북소설가협회장이자 전주대 평생대학 풍수지리 주임교수 김상휘 박사는 "조선 태종 때까지는 고창 아산 반암(흥덕현)이 부안현이었으나 그 후 흥덕현을 폐하는 과정에서 지명 변천사를 정확히 추적하지 못한 오류다. 행정구역 변경 이전 태종 때(1414) 보안을 부령에 합했다가 1415년에 분리 후 그해 8월 다시 합했다. 이후 태종16년 7월에 갈라놓았다가 12월에 다시 부안으로 합했다가, 그 다음해 흥덕진을 없애고 본 현에 이속시켜 부안진이라고 했다. 이후 1914년 군ㆍ면 폐합 때 다시 흥덕진(부안 일부)을 이웃 흥덕군과 무장군에 편입 고창군 아산면으로 옮겨진 과정에서 지명의 변천사를 확인하지 않은 실수다. 호암이라고 하는 지명은 일명 병바위, 즉 병호(壺) 바위암(巖)으로 불리며 반암(호암)마을을 지켜주고 있는 인천강 옆에 서있는 거대 괴암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육당 최남선의 ‘심춘순례’에 선운산과 고창 아산 반암마을의 존좌바위, 소반바위, 병바위(호암)를 소개하면서 이곳을 산여수(山與水)가 두르고 흐른다며 십승지라고 기록한 자료가 있다. 부안군 변산면에 호암이라는 지명도 없다는 것이다.

반암 마을은 멀리 소요산과 선운산이 보이고 인천강이 바깥으로 감싸고 있다. 김 박사는 전라도 8대명당중에 세 곳이 반암마을에 있다고 말했다. 인물도 숱하게 났다. 김성수 부통령, 김상협 국무총리, 진의종 국무총리가 이 마을과 내외(內外)의 연을 가지고 있다. 연희전문의 경제사학자로 좌파 경제이론가이자 해방정국의 남로당의 전신인 조선신민당을 이끈 백남운(白南雲)도 이 마을 출신. 반암마을은 신선이 놀러왔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천혜의 승지다.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차일봉 각시봉 우산봉 안장바위 마명 재갈등이 저마다 전설을 안고 있다. 김상휘 박사가 구성한 글이다.

"연잎처럼 예쁘게 처진 하얀 차일(차일봉)이 새 신부를 맞기 위해 펄럭이는 봄바람을 안아내고 있다. 예쁜신부를 태운 가마가 탑정에서 반암으로 넘어오는 큰재 정상에서 잠시 머물자 연지곤지 찍은 새색시가 조심스럽게 마을을 향해 내려다 보고 있다(각시봉). 마동은 한손에 말고삐를 매어 잡고, 다른 손엔 풀피리 불어가며 오늘만큼은 일손을 놓아버린 누렁소가 되새김질하는 우산봉(臥牛穴.호암뒷산)을 지나간다. 마동은 말안장을 훌러덩 벗겨내고(안장바위), 말고삐를 느슨하게 탑정에 매어놓고 여물이 가득한 구수통(탑정 구수댕이)까지 밀어 넣어준다. 교좌바위에서 내려앉은 새색시(각시봉)가 반암마을로 예쁘게 걸어 들어오니 분위기는 극도에 다다른다. 속세와 어우러진 신선님을 보고 애가 탄 애마가 (신선님 술을 조금만 드시지요) 밤 하늘을 보며 목 놓아 울어댑니다(마명馬鳴).옥녀 자태에 잠시 넋을 잃었던 마동은 말 울음소리가 신선님이 올려놓은 분위기를 깰까 봐 후다닥 말 주둥이에 자갈을 물려 버린다(재갈등). 질펀한 취기에 녹아난 신선님도 이제 그 자리에서 스르르 누워버렸으니 바로 그곳이 전설로 내려오는 선인취와(仙人醉臥)가 아니겠는가? 신선님 발에 차여버린 술상이 소반바위이고, 술병은 뒹굴다 거꾸로 꽂혀 버렸으니 그것이 병바위다."

고창 반암마을은 고창의 특산품으로 유명한 복분자의 또 다른 전설이 잉태한 곳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체에 근무하다 반암마을에 반해 낙향한 조차영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반암권역 전 사무장의 얘기다.

"옛날 반암에 살던 노부부가 늦게 낳은 아들이 몸이 허약해 몸에 좋다는 약을 구해 먹여보았지만 효험을 보지 못했다. 어느날 선운산 주지 승려가 알려준 선운산 검은 딸기를 먹이자아들의 혈색이 날로 좋아졌다. 열닷새가 지나던 후로 부터는 아들이 소변을 보는데 요강이 계속해서 뒤집혀 마침 선운사 주지 승려가 이 마을을 지나가면서 ‘복분자!’ ‘복분자!’라고 웃었다는 것이다. 동네 훈장은 ‘뒤집힐 복(覆), 요강 분(盆), 아들 자(子)’로 해석했다. 그 후로 반암마을 사람들은 복분자를 동네주변에 심어 건강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고창군이 우리나라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청동기시대부터 근대화 이전까지 번창했던 고을임을 웅변해주고 있다. 산업화가 기승을 부리는 4차산업혁명 시대다. 지리적으로는 십승지가 있는 곳으로 주목받고 고창이 친환경농산물과 히스토리 투어를 덧입혀 먹을거리와 역사문화가 있는 살고 싶은 고창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20. 충남 공주 유마 땅

경북일보 김정모기자 2016년 10월 31일


수려한 산세 끼고 흐르는 금강 흉년 알지 못하는 넉넉한 땅


                    십승지로 알려진 공주 유마땅에서 손꼽히는 유구읍 동해리 전경


‘정감록’의 십승지(十勝地) 중에 한 곳인 ‘유마양수지간’. 현재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과 사곡면 신풍면 일대다. 유마란 유구천과 마곡천을 말하며, 양수지간이란 두 하천 사이를 말한다. 유구·마곡은 북쪽에는 백두대간의 금북정맥이, 남쪽에는 금강이 막아주는 천혜의 요지. 

유마는 태화산을 진산으로 하는 곳으로 충남도청이 있는 내포신도시 등 12개 군(郡)이 모두 태화산을 진산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태화산에서 발원하는 유구천과 마곡천은 공주시 사곡면 화월리에서 만나 금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 사이를 1백리라고 하기도 하고, 2백리 정도라고도 하는데 그사이가 유마양수지간이라는 것. 

그 중 유구(維鳩)의 유래다. 지금의 구산초등학교 뒷산이 구산으로, 그 이름을 따서 구산초등학교라 명했으며 산 이름은 비둘기 산이요, 비둘기산 뒤편에 있는 고개는 비둘기고개(비득재), 그 앞에는 창촌(창말)이 있다. 이런 유래로 유구란 이름이 된 것이며 창말 마을에는 수많은 인물과 거부가 나왔다. 김기창 화백의 생가도 이곳이다. 창말에 살던 오지영 거부는 독립군에게 자금을 지원한 것이 왜군에게 발각돼 무참히 살해됐다. 지금도 신영철 대법관 등 숱한 인물이 난다고 한다. 

이희성 풍수지리가에 따르면 유구·마곡의 십승지마을은 유구읍 동해리, 사곡면 우남리(생골, 생양동), 신풍면 화흥리 물안마을이다. 특히 공주 십승지의 핵인 동해리는 주민들의 화합도 유별나다. 주민들이 공동 운영하는 오바마펜션은 십승지의 지기를 듬뿍 선사한다. 유구는 세종시 대전시 인근으로 자동차로 20~30분 거리다. 정감록을 수십년 간 연구해온 이희성 풍수지리가의 설명이다. 그는 십승지 명당을 찾아 동해리에 터를 잡고 대를 이어 산다. 그는 수십년 전 황해도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박제두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정감록으로 십승지를 처음 공부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전국 십승지를 답사하고 십승지마을의 핵을 찾아내고 책으로 편찬한 바 있다.

유마는 흉년과 풍년을 알지 못하는 땅. 실제 난리가 날 때마다 피난민들이 몰렸다고 한다. 후천개벽의 꿈을 꾸던 동학교도들, 의병들, 기독교 박해를 피해 온 천주교인들이 유마지간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 6·25전쟁 전후에 찾아든 비결파(예언서 ‘격암유록’을 쓴 남사고 선생의 신봉자)들이 찾았다. 1944년 유구 인구가 9300명인데 1955년 1만 5000명으로 5000여 명이 늘었다.

이중환도 <택리지(擇里志)>에서 유마(유구와 마곡) 땅을 극찬하고 있다. “골마다 물이 많으며 논이 기름지고, 목화, 기장, 조를 가꾸기 알맞아서 사대부와 평민이 여기에 한 번 살면 흉년과 풍년을 알지 못한다. 넉넉한 살림을 보전하여 떠돌거나 이사를 해야 하는 근심이 적으니 대게 낙토이다.” 

또 택리지에 따르면 “산 모양은 반드시 수려한 돌로 된 봉우리라야 산이 수려하고 물 또한 맑다. 그리고 반드시 강이나 바다가 서로 모이는 곳에 터가 되어야 큰 힘이 있다. 이와 같은 곳이 나라 안에는 네 곳이 있다. 개성의 오관산(五冠山), 한양의 삼각산(三角山), 진잠(鎭岑)의 계룡산, 문화(文化)의 구월산(九月山)이다”라 했다. 

공주 유구읍은 작은 농촌마을이지만 특별한 게 직물공장. 집집마다 직조기를 들여놓고 명주와 비단을 짰다고 한다. 현재도 30여 개의 직물공장이 자리 잡고 있다. 실크공장이 전국에서 가장 많고, 자카드 직물과 색동천은 유구에서만 생산된다. 자카드 직물은 ‘무늬를 넣어 짠 천’을 말한다. 유구 섬유산업은 90년 중반 중국의 값싼 직물류가 대량으로 수입되면서 사양길에 접어든다. 

충남 공주(公州)고을은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熊津, 공주)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 이후 538년 사비(泗?, 부여)로 천도하기까지 63년 동안 백제의 수도다. 금강 남쪽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자연 유산의 공산성이 있다. 금강이 둘러쳐진 아름답기 그지 않는 곳. 도도히 흐르는 금강이 어우러져 예부터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공주의 명승으로 현대인의 마음을 힐링하는 곳으로 안성맞춤이다

웅진(공주)을 끼고 흐르는 금강(錦江)이 자연적인 방어선 역할을 한 웅진성으로 추정되는 공산성은 산성이라서 평지성보다 견고하면서도 금강이 수상 교통로 역할을 했다. 공산성은 백제 멸망 직후에도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金憲昌)의 난(헌강왕14년 822년)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李适)의 난(1623년)으로 인조(仁祖)가 피난했던 곳. 공산성은 원래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쳐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여러 차례 고친 것으로 지금의 건물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여 원래대로 복원한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아차산(峨嵯山) 전투에서 개로왕(蓋鹵王)이 전사하자 웅진(熊津)으로 천도해 웅진백제(熊津百濟)의 시대를 열게 된다.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남중국의 양, 일본열도의 왜(倭)와 긴밀한 외교로 반(反)고구려 전선을 구축했다. 26대 성왕은 금강을 따라 하류로 이어지는 중간지점인 사비(泗?, 현재의 부여)에 신도시로 천도해 사비백제시대를 펼쳐 나갔다. 

고을연구전문가인 최 연 고을학교 교장의 공주고을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우선 주변 산과 강에 대한에 대한 설명이다. “공주고을은 중앙에는 금강(錦江)이 그 지류인 유구천, 정안천, 대교천 등의 하천들을 받아 안아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그 부근에는 작은 들판이 흩어져 있고 북서쪽에는 태화산(泰華山, 416m)의 산군이, 남동쪽에는 계룡산(鷄龍山, 845m)의 산군(山群)이 이어져 있으며 금강 남쪽에는 공산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묘향산에 상악단(上嶽壇), 계룡산에 중악단, 지리산에 하악단을 세워 국가에서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태화산(泰華山, 416m)은 북쪽으로 활인봉이, 남쪽으로 나발봉이 솟아 있어 마곡사를 중심으로 둥그런 원을 그린 모양으로 산줄기가 이어져 있으며 예산고을로 가는 길목으로 산은 그다지 높지 않으나 계곡이 깊어 예로부터 도적들의 산채로 많이 이용되었는데 산봉우리의 이름에서 활빈당의 근거지였던 자취를 일부나마 찾아볼 수 있다.”

공주의 하천에 대한 최 교장의 설명이다. “공주의 3대 하천은 유구천, 정안천, 대교천으로 모두 금강에 합수되어 서해로 흘러듭니다. 유구천(維鳩川)은 공주, 예산, 아산의 경계인 봉수산(鳳首山, 534m)에서 발원한 후 남서류(南西流)하여 금남정맥의 서쪽 사면의 물을 모아 남쪽으로 유구, 신풍, 사곡, 우성 일대를 적시고 금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사곡에서 마곡천(麻谷川)과 합류하는데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의 지역은 남사고(南師古)가 선정한 십승지(十勝地) 중의 하나로 유명한 피난처다.”

금강과 공주의 유래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금강에 대한 금강의 금(錦)은 ‘곰’의 사음(寫音)으로서 공주의 곰나루[熊津]라는 명칭에 남아 있으며 달리 호강(湖江)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당서(唐書)>에서는 웅진강(熊津江)이라고 기록했다. 곰나루의 본래 명칭은 고마나루인데 공주의 옛 지명인 ‘고마(固麻)’는 곰의 옛말로서 한자로는 ‘웅진(熊津)’이라 하며, 신라 시대 웅천주(熊川州), 웅주(熊州)라 하였으며, 고려 태조 때(940년) 공주(公州)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 고마나루는 백제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할 때 이용하였던 교통로였고 660년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 공격을 위해 금강을 거슬러 와 주둔했던 곳이며, 백제 멸망 후에는 웅진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했던 곳이다.


공주에서 빼놓을수 없는 곳이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마곡사란 유서 깊은 사찰이다. 예부터 호서(충청도)지방에서는 봄에는 마곡사의 경치가 으뜸이란 뜻으로 ‘춘마곡(春麻谷)’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신라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충남권 70여 개 사찰의 조계종 대본산이기도 하다. 마곡사로 들어가기 위해서 돌다리를 건너며 듣는 마곡천 물소리는 일품이다. 김구 선생이 황해도에서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후 이곳에 은거했다. 그 당시 청년 김구가 심어놓은 향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돼있다. 그 만큼 공주 유마의 땅은 한양과 가까운 곳 중에서 은거하면서도 대를 이어 살 만한 곳으로 충분했다. 

                              금강에서 바라본 공산성 일부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21. 십승지

경북일보 김정모기자 2016년 11월 14일


"승지답게 하는 것은 결국 그 땅에 사는 사람"

                              강원 고성군 죽암면 왕곡마을 전경


승지(勝地)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1차적으로는 어릴 때부터 ‘십승지(十勝地)’에 대해서 들었던데서 기인한다. 십승지란 난세에 몸을 보전할 땅이자 복을 주는 길지(吉地)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풍수전문가 최어중(崔於中) 씨는 ‘정감록’에 따라 전국의 십승지를 답사해보고 99년 ‘십승지풍수기행’을 펴냈다. 자기 조국의 땅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평가할지는 몰라도 유럽을 비롯해서 세계 어느 나라를 가보다도 한국 땅 만큼 살고 싶은 정겨운 땅을 드물었다. 도회지에서 경제활동을 마친 이후에는 좋은 땅을 찾아서 제2의 인생을 살아보리라는 꿈을 갖고 꾸준히 전국을 여행 삼아 다니는 사람이 늘고 있다. 


과학이 발달된 오늘날에도 건축물을 지을 때는 대부분 풍수전문가가 조언을 한다. 역사적으로 최고의 풍수적 건축물은 신라 수도 서라벌 황룡사 9층 목탑. 신라의 상징물이자 풍수적 개념이 가미된 걸작이다. 백제 장인인 아비지(阿非知)까지 데려와 심혈을 기울여 지었다. 목탑이 세워진지 10년 만에 김추추가 왕위에 올라 삼한일통의 대업이 시작된다. 

안영배 기자의 ‘풍수와 권력’ (신동아 제655호)이 기(氣)풍수 전문가로 알려진 지한 선생에게 얻은 설명이다. 

“황룡사 9층탑의 천기는 워낙 강력해 사람이 직접 이용할 수 있는 기운이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 기운의 정체를 파악해낸 뒤 무덤 쪽으로 기운을 옮기고 무덤에 서려 있는 지기와 함께 중화시킨 뒤 산 사람에게 사용하려 한 듯 보입니다.” 

십승지를 선정하는 1차적인 기준은 풍수다. 풍수라는 개념은 흔히 바람을 갈무리하고(藏風), 물을 얻는(得水) 곳, 즉 명당을 찾아내는 논리적 체계다. 겨울철 서북풍의 거센 바람 등을 피할 수 있으며, 지기(地氣)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작동하는 물을 만나는 곳이 대개 좋은 터라는 것. 


전문가들에 따르면 풍수학의 고전 ‘장서(금낭경)’라는 책이 있다. 동양의 풍수학자들이 풍수의 바이블로 인정하는 책이다. 이 책은 풍수의 핵심이 ‘기(氣)’라고 정의한다. 한마디로 풍수란 생기(生氣)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葬者 乘生氣也). 땅속에 흐르는 생기는 다른 표현으로 지기(地氣)라고도 하며, 이 지기를 ‘타기’ 위해 풍(風)과 수(水)의 역할이 강조된다. 우리 고유의 풍수는 바람을 하늘의 기운(天氣)으로 보고, 물 역시 하나의 기운 덩어리(水精)로 취급한다. 즉, 지기는 천기를 만나 갈무리되거나 수정의 기운을 얻어야 비로소 명당이 되는 것이다. 


청동기 시대에 조성된 고인돌, 평지에 세워진 신라 고분, 비탈진 돌벼락에 세워진 암자 등은 지기와 함께 천기, 혹은 수정 기운이 뭉쳐진 곳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기운이 눈에 보이거나 이론적 틀로 설명되기 힘들다는 점에서 비과학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십승지의 원조는 서양의 대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에 견주어 조선 최고의 예언자라 불리는 남사고(南師古·1509∼1571)다. 호는 격암(格菴)이다. 역학·풍수·천문·복서(卜筮)·관상 등에 도통해 대예언가 소리를 듣게 됐다. 오늘날에도 ‘남사고비결’이니 ‘격암유록’이란 비결 책을 격암이 쓴 것으로 믿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판 유토피아 십승지를 말했지만 우선 ‘정감록(鄭鑑錄)’의 십승지를 주목했다. ‘정감록’의 십승지 외에도 ‘남사고비결’ ‘격암유록’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 ‘토정가장결’ ‘택리지’ ‘두사충비결’ ‘피장처’ 등 저마다 승지를 지목한다. 특히 백두대간 가운데서도 태백산 이남에서 길지를 구하고 있다.


                                    공주 유구읍 동해리 전경


그럼 십승지는 어디인가. 격암 남사고가 가장 뚜렷하게 정감록 십승지를 표현했다. 정감록과 남사고의 십승지는 대부분 겹친다. 

정감록 전문가인 백승종 푸른역사연구소장은 풍기(豊基) 금계촌(金鷄村), 예천(醴泉) 금당실, 동(安東) 화곡(華谷), 개령(開寧)의 용궁(龍宮), 가야(伽倻) 남쪽 만수동(萬壽洞), 봉화(奉化), 태백산, 지리산, 단춘(丹春), 공주(公州) 마곡(麻谷), 진천(鎭川)의 목천(木川), 운봉(雲峰) 두류산(頭流山)을 소개한다. 

엣날 선인들이나 풍수서에서는 대부분 십승지의 으뜸으로 풍기(豊基) 금계촌(金鷄村)과 예천(醴泉) 금당실을 꼽는데 일치한다. 충남 공주에 사는 이희성 풍수지리가도 동의한다. 그는 셋번째 십승지로 공주 유구·마곡을 얘기한다. 공주시 유구읍 동해리, 사곡면 우남리(생골, 생양동), 신풍면 화흥리 물안마을이라고 한다.


                                         전북 고창 반암마을


전북 전주대 평생대학 풍수지리 김상휘 주임교수는 첫째를 예천 금당실 마을, 그 다음으로 고창의 반암마을, 세 번째로 유구읍 마곡을 꼽았다. 김 교수는 “승지는 피난처 은둔 재기의 땅으로 분류된다. 금계포란형인 금당실은 서울에서 벗어났으면서도 서울에 가까운 거리로 피난처, 은둔, 재기(再起) 세 가지를 모두 갖춘 길지중의 길지”라고 말했다. 실제로 금당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기(天氣, 일종의 에너지라 치자)가 주위를 감싸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마을을 돌면 그 청량한 기운에 정신이 맑아진다. 김 교수는 지금 풍수소설 ‘왕의 자리’를 내년 출간을 목표로 집필중이다. 

비결서에서 가리키는 승지를 현대의 눈으로 재조명이 필요하다. 오늘날은 어디가 십승지, 즉 좋은 땅일까. 1751년 이중환이 편찬한 ‘택리지’ ‘복거총론(卜居總論)’은 백성들이 살 만한 곳을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네 가지 기준으로 골랐다. 오늘날도 유효하다고 본다. 

사람에 대해서 완전히 알 수 없다.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탐구기사가 넘쳐난다. 남의 나라 사람은커녕 비선실세 논란을 빚어낸 장본인인 박근혜 대통령도 우리는 아직도 잘 모른다. 인문명이 고도로 발달해 인공지능(AI) 알파고까지 나오는 과학기술 시대이지만 확실한 게 하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다. 그러나 땅은 사람보다 정직하다고 풍수가들은 본다. 

땅과 사람이 빚어내는 재난(災難), 병(病), 경제공황이라는 현대판 삼재(三災)는 가장 경계하지만 주기적으로 발생한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시대를 일러 난세(亂世)라 한다. 그 공간을 탐색하고 발견하기 위한 ‘한국의 힐링처- 십승지’를 찾는 것은 지난한 작업이었다. 후일 보정(補正)이 필요하다. 

그동안 전통적인 십승지 외에도 여러 곳을 소개했다. 정신적 물질적 결핍 때문에 이민이라도 가고 싶은 도시인들을 위해 힐링처(healing處)로 눈여겨 볼만한 땅이다. 생태와 생명의 땅을 찾아 인생 반전(反轉)을 노리는 사람들이 개척지로 삼거나 최소한 마음속에 두고 가끔은 찾을 수 있는 곳 말이다. 영국의 존 오키프 교수는 ‘장소세포(place cell)’를 발견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생쥐도 장소마다 다른 신경세포가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장소 기억은 지도처럼 뇌 속의 장소 세포에 저장되어 반응한다는 것이다. 사람과 장소와의 함수관계는 훨씬 심오하고 신비로울 것이다.

하버드대 행복학 명강의로 유명한 <해피어>의 저자인 탈벤 샤하르는 “행복은 외부의 물질에 있지 않고 내 마음속에 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승지를 찾아 살아도 승지를 승지답게 하는 것은 그 땅에 사는 사람이고, 아무리 부족한 곳에 살아도 그 땅에 사는 사람이 좋은 땅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경북 예천 금당실마을 전경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